파키스탄에서의 짧은 일기들-1


-중국에서 파키스탄으로 왔다. 시계를 세 시간 뒤로 돌렸다. 숙소에 따뜻한 물 한동이를 부탁했는데, 받는데 자그마치 한 시간이 걸렸다. 다른 나라로 왔음을 실감한다. 한동이로 몸은 충분히 헹구었으나 머리를 감느라 찬물을 두동이 썼다. 머리를 헹구는데 물을 많이 쓴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국경을 넘어 처음 도착한 소스트(Sost)는 도로 하나를 두고 형성된 작은 마을이다. 이 도로가 카라코람 하이웨이(K.K.H). 이 도로를 꼭 달리고 싶었다. 이제 원없이 달릴 것이다. 도로에 서면 보이는 웅장한 설산은 아무리 보아도 영원히 질릴 것 같지 않다. 그 설산을 향해 걸으면, 이 정도는 견디며 다가오는 사람만을 맞이하겠다는 듯 피부를 때리는 세찬 바람이 분다. 걸어도 걸어도 그 설산에 닿지는 못하겠지만. 

-혼자보다는 둘의 힘이 강하다는 것을 느끼는 여행이다. 왜 둘이 만나 (꼭 제도로서가 아닌)결혼을 하라고 하는 지도 조금은 알 것 같다. 하지만 둘이 되면 ‘상실감’이라는 게 생기겠지. 나는 상실감이 두렵다. 

-미도리는 늦게까지 책을 읽는다. 먼저 자는 나를 위해 불을 끄고는 휴대폰 전등앱을 희미하게 켜둔다. 자다가 문득 깨어 돌아보면 저만치에서 그녀가 등을 돌린 채 책을 읽고 있다. 일본의 작은 책이 유난히 귀여워 보인다. 

-흔히 사람들에게 훈자 마을이라고 알려진 카리마바드(Karimabad)에 도착했다. 이번 여행의 주요 목적지 중 하나였다. 숙소의 책꽂이에 『여행생활자』가 있었다. ‘
덕분에 십년 후의 제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새로운 곳에 도착하고 숙소에 짐을 풀고 난 뒤의 막막함. 여행을 시작한 지 꽤 되었음에도  새로운 장소로 옮길 때마다 매번 이런다. 특히 숙소가 나쁘면 빨리 적응하기가 어렵다. 당연하게도, 시간이 해결해준다. 

-파수(Passu)의 서스펜션 다리를 건널 때의 두려움과 집중력의 여파가 아직 남아 있다. 세상에서 건너기 가장 무섭다는 다리였다. 

-아마 평생 고통에 관한 질문들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오늘은 포플라 나무를 쳐다보다가 문득 긍정적인 질문들도 해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나를 통해서 말이다. 꽤 불행한 일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떻게 건강한 사람이 되었을까. (그래 나는 내가 건강한 사람이라고 믿는다) 나를 ‘생존자’의 관점에서 관찰해보면 해보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을 것 같다. 

-내가 다시 이 숙소를 찾는다면 지금 눈앞의 포플라 나무 때문일 것이다. 이 나무가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구나. 모네가 왜 하루종일 포플라 나무를 그렸는지 알 것만 같다. 굵지 않은 줄기로 여느 나무보다 높게 자랐고, 줄기의 대부분이 가지와 잎들에 뒤덮혀 있다. 바람이 불면 줄기까지 함께 흔들린다. 처음에는 보기에 위태로웠는데 익숙해지니 춤을 추는 것처럼 느껴진다. 특히 바람에 흔들리는 잎들 사이로 빛이 고일 때, 이 나무는 무척이나 아름답다. 반짝거리는 잎들. 잎이 반짝거린다는 것은 별 거 아닌 말이지만, 이렇게 그 말이 이미지로 드러나는 것을 직접 바라보고 감동하고 있으니까 아직 내가 겪지 못한 흔한 말들이 아쉽다. 

-넉넉한 마음, 바라지 않는 마음

-『오래된 미래』를 계속 읽는다. “그것은 깊은 생각과 직접적인 경험의 결합에 의해서만 완전히 파악할 수 있는 것입니다.”(p.97)

-어제 꿈. 백 루피, 한국 돈으로 천 원 가량의 돈이 없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돈을 빌리는 여자가 있었다. (깨기 전까지는 무척 선명했던 그 얼굴) 나는 가진 돈이 별로 없어 빌려주지 않았다. 그녀가 떠나고도 자꾸 마음에 걸려서 나는 결국 돈을 빌려주기로 결심하고는 그녀를 찾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정까지 백루피를 갚아야만 한다고 했었다. 갚지 못하면 위험할 지도 몰랐다. 나는 조급하게 그녀를 찾아 헤맸다. 사람들로 북적대는 어느 건물 안에서 마침내 그녀를 발견했고, 그 순간 내 왼손에 백 루피가 쥐어져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웬일인지 그녀의 모습은 전과 달리 무척 깨끗했다. 심지어 화려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왼손에 쥔 돈을 내밀었을 때, 그녀는 지갑에서 무언가를 꺼내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녀가 지갑에서 꺼낸 것은 한뭉치의 돈이었다. 그러고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아니 내게 관심이 전혀 없다는 것을 명백히 느끼게 하는 동선으로 이동해서 창구 너머로 돈을 깊숙이 밀어넣었다. 그 순간 내 마음을 아프게 하던 동정과 연민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사라지는 느낌이 주던 기쁨. 기뻤다. 해방감에서 느낀 기쁨. 왜 사라졌는지는 모르겠고 알 수 없다. 그저 이 기쁨을 알려주기 위해 앞선 드라마(그것도 내가 만든)가 필요했을 것이다. 

-중국의 동티벳을 다녀온 한 여행자의 말: “티벳 사람들은 부처를 정말 사랑하나봐요.” 사랑이라. 믿음과 사랑은 다른데. 

-어제 한 시간쯤 자면서 짧은 꿈을 꾸고, 잠시 깼다가 다시 잠들어 긴 꿈을 꾸었다. 
보라색 옷을 입은, 드라큘라처럼 날카로운 이를 가진 소녀를 보았다. 나는 그 이가 무서웠다. 그래서 있던 곳에서 도망쳤는데 도망친 곳에서 소녀를 또 보았다. 떠나기 위해 돌아섰을 때 그녀가 바로 앞에 서있었다. 나는 소녀에게 물었다. 나는 너의 이가 무섭다고, 날 해치지 않을 거냐고 하니 소녀는 미소를 지으며 끄덕였다. 그 미소와 한번의 끄덕임이 나를 편안하게 했고 순식간에 그녀가 좋아졌다. 그녀가 좋아 그녀의 얼굴 가까이로 내 얼굴을 가져갔다. 

-꿈은 현실에서 받은 자극들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하지만, 오히려 꿈을 통해 전혀 새로운 감각을 얻기도 한다. 놓치고 싶지 않아서, 손가락에 힘을 주어 이 감각의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올려 덮는다. 

-아주 가끔 하늘을 나는 꿈을 꾼다. 늘 바라는 꿈. 하지만 매번 충분히 날지 못한다. 날개짓에 힘이 너무 많이 들고 곳곳에 장애물도 많다. 하지만 어제는 처음으로 ‘마음껏’ 날았다. 도시의 밤하늘이었다. 너무 벅찼고 온몸이 환호성을 지르는 것을 느꼈다. 공기를 가르며 날개짓을 할 때마다 손가락들은 차갑고 시원한 바람을 느꼈다. 내 마음은 깊은 곳까지 시원했다. 그래서 너무 좋은데, 그런데 너무 쓸쓸했다. 나를 끌어내리는 중력도 없고 피해야 하는 높은 건물도 없다는 것이 너무 행복한데,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 너무 마음이 아팠다. ‘왜 이럴까.’ 마음이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 꿈에서 깼는데도 이 느낌이 남아서 오래 누워있었다. 

-저녁 여덟 시부터 숙소의 평상에 앉아 별이 뜨는 걸 본다. 설산이 지워지고 별들이 반짝인다. 

-잠이 솔 들 때 바로 진입하지 않으면 반의식 상태에서 괴로움을 겪는다. 어제는 모기가 계속 내 얼굴과 팔에 붙어있다는 착각(?) 때문에 얼굴과 팔 여기저기를 긁었다. 누가 보면 그런 내 모습이 어떨까. 

-한 달 후 한국으로 돌아간 이후에 하고 싶은 것들을 이것저것 떠올리는데,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는 일이다. 

-세상 돌아가는 걸 알고 싶고 느끼고 싶어서 여행을 한다. 터키의 테러 소식에 모험과 호기심은 바보 같은 걸로  돼버리는 것 같다. 마음이 무겁다. 

-유년 시절 내게 특별했던 
주문이 생각났다. 
어떤 상황에서 문득 두려움이 일기 시작하면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상상했다. 그 상상을 끝까지 한다. 엄마랑 동생과 함께 밤중에 택시를 탄 적이 있는데 느닷없이 겁이 났다. 나도 모르게 지금부터 일어날 수 있는 끔찍한 일들을 상상하고 있었다. 멈추지 않는 상상을 끊은 건 내리자는 엄마의 목소리. 동생의 손을 잡고 걷는데 안도와 동시에 허무함이 찾아왔고, 아마 내가 상상하는 일은 절대 벌어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나름대로 터득한 방법이었기에 종종 사용했다. (원하지 않게 좋은 일들에도 적용됐다.) 하지만 나는 철이 들면서
 나도 모르게 상상했던 나쁜 상황들이 실제로 발생한다는 것을 알았고, 상상도 못하는 더 끔찍한 일들도 발생한다는 걸 알았다. (좋은 일도? 좋은 일에 관해선 이 주문이 아직도 풀리지 않는데, 모를 일이다. 좋은 일은 이뤄지지 않더라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만족감을 준다.) 

-어제는 자신의 몸을 칼로 난도질해 자살한 파키스탄 사람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곳의 우울이 더 심각하기도 하다고. 세상의 고통을 피하고 싶어 여행을 다니는 것은 아닌데, 어딜가도 피할 수 없다는 건 사실이다.

-비가 온다. 짜이를 마시며 안개 낀 산들을 
보았다. 

-내가 살던 곳에 대한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내가 지금 있는 곳에 대한 낯설음과 거리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가령, 이곳은 파키스탄이라는 것.

-정신없이 책을 읽고 있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는데 해가 지면서 살구빛으로 물든 구름이 설산을 감싸고 있다. 그런 구름에 설산은 자신을 온순하게 내맡기고 있는 듯하다. 아이의 목에 수건을 두르고 얼굴을 씻어주는 부모 같다. 오늘의 설산과 구름. 

-꿈에서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나는 쇼트트랙을 배웠고 재능이 있었다. 내가 잘하는 게 있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것을 잘하게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좋았다. 다가 올 경기에서 중국인들을 이겨야 했는데, 그들을 이기고 싶다는 경쟁심도 나를 기분 좋게 했다. 

-알아줌. 완전히 알아줌. 

-내가 느끼기. 무언가를 통하지 않고 내 힘으로 내 감각으로 느껴보기. 

-숙소 
건물의 난간에 앉아 해가 지는 것을 보며 현지인과 나눈 이야기.
파키스탄은 핵을 갖고 있지만 전기는 부족하다. 사람들에게는 전기가 더 중요하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사람들끼리는 서로 싫어하지 않는다. 긴장을 만드는 것은 정부고 군사다. 사람들은 군대를 원하지 않는다. 아무도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빠른 성장은 위험하다. 한국은 너무 빨리 성장했다. 파키스탄은 한국에 비해 천천히 성장하고 있는 중이다.
주위는 어두워지고 아랫마을에는 하나둘씩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여기까지 들려오는 모스크의 기도문 소리.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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