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아(존 버거)

인용 2016. 9. 6. 21:19

영국인이 말주변이 없다는 것은 많은 농담의 소재가 되기도 하는데, 사람들은 청교도주의나 소극적인 국민성 등으로 이를 설명하곤 한다. 그런 설명은 더 심각한 사태를 가려 버리는 경향이 있다. 영국의 노동계급이나 중산계급에 속한 사람들 중에는 전반적인 문화적 황폐화의 결과로 말주변이 없게 되어 버린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을 자신들의 사고(思考)로 전환시킬 수 있는 능력을 박탈당해 버렸다. 
그들은 경험을 보다 분명히 밝혀 줄 말을 찾을 때 참고할 수 있는 그런 예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 속담의 형태로 구전되던 전통들은 오래 전에 파괴되어 버렸고, 또한 엄격히 기술적인 의미에서는 문맹이 아니라고 해도, 글로 남겨진 문화적 유산들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 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글을 읽을 줄 아느냐 모르느냐 하는 것 이상의 문제다. 일반적 문화라 함은 거기에 비춰 개인이 스스로를 알아볼 수 있는, 적어도 자신의 모습 중에서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부분을 알아볼 수 있는 거울의 역할을 해야 한다. 문화적으로 박탈당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을 훨씬 적게 가지게 되는 셈이다. 그들의 경험 중 많은 부분 ㅡ 특히 감정적이거나 내재적인 경험ㅡ은 그들 자신에게 '이름 지을 수 없는 것'으로 남게 된다. 결국 그들의 주된 자기표현 방식은 행위를 통한 것이다. 이것이 영국 사람들이 '직접 해보기(DIY)' 취미에 그렇게 많이 매달리는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때 정원이나 작업대는 만족스러운 자기반성에 그나마 가장 가까운 무엇이 된다.
가장 쉬운ㅡ그리고 가끔은 유일하게 가능한ㅡ 대화의 형식은 행위와 관련된 혹은 행위를 묘사하는 대화이다. 말하자면 행위가 하나의 기술이나 과정으로 여겨지는 상황이다. 그때 이야기되는 것은 말하는 이의 경험이 아니라 완전히 외적인 메커니즘 혹은 사태ㅡ자동차의 엔진이라든지, 축구 경기, 배수로 혹은 위원회의 운영 등ㅡ다. 이런 주제들, 개인적인 부분을 직접 건드리지는 않는 이런 주제들이 오늘날 영국에서 스물다섯 살 이상 된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대화의 내용을 이루고 있다. (더 어린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들 자신의 욕망이 가지는 힘 덕택에 이러한 탈인격화를 피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대화에는 따뜻함이 있고, 거기서 우정이 생겨나 계속 유지될 수도 있다. 대화의 주제 자체가 가지는 복잡함 덕택에 대화자들이 가까워질 수 있다. 마치 대화자들이 주제 자체의 아주 작은 세부까지 철저히 살피기 위해 서로 몸을 앞으로 숙이고, 그 과정에서 손을 마주잡는 것만 같다. 그들이 교환하는 전문가적인 의견이 곧 공통의 경험을 상징하게 된다. 이미 죽어 버렸거나 지금 함께 하지 않는 친구를 생각할 때, 남은 친구들은 항상 전륜구동이 더 안전하다고 주장하던 그 친구의 설명을 생각한다. 친구들의 기억 속에서 그 설명은 이제 그들 사이의 친밀함을 나타내는 것이 된다. p.107-108 

-『행운아』,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눈빛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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