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의 메모들

여행 2017. 1. 23. 13:39

(인도에서 파키스탄을 거슬러 중국까지 되돌아가는 메모)

-사방을 둘러싼 산들. 밤이면 산들이 마을에 더 가까이 다가온다. 산등성이에서 빠르게 솟아오르는 달.

-멀리서만 보던 라다크의 독특한 산을 오늘은 차를 타고 달리며 가까이서 보았다. 손을 뻗으면 곧 닿을 것 같은 거리에서. 멀리서 볼 땐 그저 아름답다고만 느꼈는데 곁에서 보고 있자니 이건 오를 수 없는 산이라는 생각부터 든다.

-동키가 풀을 뜯는 모습은 하루종일이라도 보겠다.

-이렇게 세상의 멀리까지 오니까 세상은 쉽게 멸망하지 않을 거라는 묘한 위안이 생긴다. 그 위안이 희망 때문인지 절망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뚜르뚝 마을. 벌이 많은 곳. 꽃이 많은 곳. 열매가 많이 열리는 곳. 지천에 떠있는 살구들.

-나무껍질같은 산과 산등성이를 유유히 지나가는 구름. 이 아름다운 롱테이크를 눈을 깜박이는 것도 아까워하며 지켜보았다.  

-도로 곳곳에 비석처럼 세워진 표지들: Don't worry, Be happy. Never give up. 달라이 라마의 말씀. 어딘가에선 흔해진 말이 다른 어딘가에서는 가장 절실한 말이다.

-킬롱으로 가는 로컬버스 안. 내 왼편엔 젊은 여자와 그 품에 안긴 작은 아이가 있다. 아마도 모녀. 아이는 작은 손으로 과자를 꽉 쥐고 있다. 내가 쳐다보니 행여 과자를 뺏을까 싶어 눈을 살짝 흘기고는 등을 돌린다. 아이는 먹은 과자를 금새 토한다. 작은 머리통. 여자는 가방에서 수건을 꺼내 토를 받는다. 오백 원짜리 동전 만큼의 토사물. 비포장 도로에 버스가 넘어질 듯이 비틀거린다. 어느새 여자와 아이는 잠에 들었다. 아이를 품에 앉은 채로 여자는 한 손에 토사물을 감싼 수건을, 또 한 손으로는 앞좌석을 꽉 쥐고 있다. 운전 기사가 핸들을 꺾을 때마다 내 몸은 좌석 밖으로 튕겨나가거나 모녀에게도 쏠린다. 그들의 잠을 깨우지 않으려 엉덩이에 힘을 준다. 힘이 풀렸는지 이제 여자의 검지 손가락 만이 손잡이에 걸린 채 버티고 있다. 둘은 여전히 잠에서 깨지 않는다. 아이가 자꾸 여자의 품에서 흘러내리고 있다. 여자. 까맣고 긴 머리를 땋았고 작고 마른 몸. 안경을 끼고 있다.  

-창 밖으로 개가 짖는 소리. 여행하는 동안 보았던 끔찍한 기사들. 터키, 방글라데시, 이스라엘의 테러들. 터키의 쿠데타. 이게 모두 두 달도 안 되는 기간 동안 벌어졌다. 

-윤회를 끊기 위해, 그래서 다음 생에는 태어나지 않기 위해 바라나시에 죽으러 간다는 노인들. 이 말을 듣는데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파키스탄와 인도의 국경인 와가보더. 인도로 넘어가자 입국장으로 데려가는 버스가 기다리고 있다. 짧은 거리를 굳이 버스로 이동시켜주니 편안하긴 한데 왠지 요란스럽게 느껴진다. 버스 안에서 광광 울리는 음악도 시끄럽다. 그래도 흥이 나기 시작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아 그립던 문화.

-여행 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하루하루 즐겁고 싶어서. 보람과는 상관 없는 것.

-중국에서 자꾸 중국 아닌 것을 찾고 있다. 우루무치 기차역에 내리자마자 총을 든 군인들을 보았다. 몇 년 전 위구르족의 독립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테러를 저질렀다. 테러의 끔찍함 보다는 중국의 폭력적인 중화 사상에 더 치를 떨게 된다.   

-버스 창 밖으로 보이는 위구르인들. 도심에서는 볼 수 없는 얼굴들이다. 도시의 끝에 와서야 만났다. 이들은 도시의 변두리으로, 더 서쪽 지역으로 떠밀리고 있다. 시계를 보니 밤 아홉시 반, 아직 해는 지지 않았다. 베이징에서 2,400km 떨어진 이곳은 어쨌든 중국의 땅. 그래서 베이징의 표준시각을 따르지만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체시계는 그렇지가 못하다.

-나무 그늘 아래의 벤치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어디서 만나도 좋은 풍경.

-둔황의 막고굴을 만들기 위해 당시 서민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았다고 했다. 사람들은 천년 후를 생각해 투자했다. 아 이거 정말 멋지잖아.   

-중요한 건 내가 여행지에서 무엇을 느끼느냐다. 나의 느낌. 그리고 그걸로 쉽게 판단하지 않으면 된다.

-난 당연히 괜찮을 줄 알았는데, 해발 삼천 미터의 샤허에 오고 고산병 증상에 시달렸다. 두통이 멈추질 않았고 그래서 평소 내 속도대로 걸을 수 없었다. 입맛이 없고 무기력했다. 누워서 천장만 보다가 마냥 누워 있을 수는 없겠어서 마을을 천천히 산책했다. 기운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시계를 봤을 때 두 시간이 지난 걸 보고 놀랐다. 깊은 주름이 박인 산들이 이 지역을 둘러싸고 있고, 지붕 없는 집들은 높은 데서 보면 마치 납작 엎드려 있는 것 같다. 이 집들이 받들고 있는 것은 라브랑 사원. 티벳 불교의 3대 사원 중 하나가 이 샤허에 있다. 야크 버터를 들고 사원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끊이질 않는다. 법당에선 24시간 내내 야크버터를 태운다. 처음 법당을 들어섰을 때 압도당한 것은 시각도 청각도 아닌 이 야크버터 냄새에 놀란 후각이었다. 코끝에서 야크 버터 냄새가 가실 즈음 고산병도 나았다. 

-아직은 아무 것도 아닌, 그래서 가장 평온할 땅들이 창밖으로 한참이나 펼쳐진다. 

-중국에서의 첫 기차. 인도에서의 기분 좋은 기억이 떠올랐다. 밤기차를 타고 침대에서 자다보면 새벽에 문득 깨는 일이 있다. 달리던 기차가 잠시 멈춘 탓이다. 선로가 하나로 바뀌는 곳에서 반대편의 기차가 먼저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잠시 고요한 사이 들리는 잠의 소리들. 가만히 기다리다 보면 머-언 곳에서 경적소리가 들리고 그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눈을 감고 있으면 안개를 뚫고 달려오는 피곤한 얼굴의 기차가 보인다. 이내 기차는 레일을 누르며 내 옆을 지나가고 그 진동의 여운이 내 몸까지 전해진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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