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룬이

카테고리 없음 2018. 6. 24. 21:41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한 곳에 치워둔 눈처럼 전봇대 곁에 동그랗게 앉아 있는 고양이 한 마리. 혀에 닿으면 금세 녹을 듯 가느다랗고 긴, 곧 탈색 직전의 빛바랜 노란빛의 털을 가진, 그래서 붙여 본 이름 노룬이. 아니 사실 노룬산 시장에 살아서 노룬이. 노룬이는 장사하는 점포가 몇 남지 않은 이 낡은 시장에 딸린 방으로 내가 어제 이사 왔을 때 가장 먼저 만난 생명체다. 가까이 다가갔을 때 올려다보는 얼굴은 앳되지만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추었을 때 보이는 이 작은 생명체의 얼굴은 영락없이 노인의 얼굴이다. 팔자주름이 깊게 패었고 생기 없이 처진 수염의 기울기를 따라 눈매도 조금씩 내려앉고 있다.
길 맞은편 가게에서 개가 짖는 소리가 들리자 노룬이가 시선을 돌린다. 랩에 감긴 고기 몇 덩어리가 진열장에 성의 없이 놓여 있고 그 앞으로 난 길에 ‘개고기 팝니다’라 쓰인 작은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 밖을 내다보려 목을 길게 빼고 있는 큰 개 한 마리가 보인다. 목에 매인 줄이 팽팽해졌다 풀어졌다 한다. 그 모습을 본 노룬이는 다리로 몸을 쭉 들어 올리더니 가게 쪽으로 걸어간다. 사람 발로 네댓 걸음도 안 되는 거리를 느리게 걸어 문 안으로 진입하려는 찰나 어디서 나타난 가게 주인에게 덥석 들어 올려진다. 힘없는 수염이 살짝 날아올랐다가 아까보다 더 아래로 내려앉는다. 우리 나비 밥 먹어야지! 가게 주인의 큰 목소리가 적막한 시장 안을 울린다. 그는 빈 그릇 앞에 노룬이를 내려놓고는 사료를 수북이 부어준다. 아니 고양이가 살이 더 쪘네! 높게 쌓인 사료를 파먹고 있는 노룬이를 보고 지나가는 노인이 한 마디를 했다. 살찐 게 아니라 털이라니까요! 아니 고양이 좀 그만 먹여! 어르신은 누구랑 먹으려고 찐빵을 이렇게 많이 사셨어요! 근황을 나누는 두 사람을 뒤로하고 노룬이는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개의 마른 앞다리에 머리를 문지르고 다리 사이를 가로질러 뒷다리에 옆구리를 비비더니 주위를 한 바퀴를 돌아 다시 한 번 앞다리에 머리를 부비고는 밖으로 나온다. 그리고 걷는다. 오후 세 시 방향으로 팽팽하게 부푼 통통한 꼬리를 흔들림 없이 유지하며 느리게 걷는다. 문득 뒤돌아 앳된 얼굴로 나를 한 번 올려다보더니 와웅 하는 소리를 뱉는다. 고개를 돌려 노룬이가 다시 걷기 시작하고 나는 뒤따르던 걸음을 조금 늦춘다. 문 닫힌 점포들을 스쳐 미미수선이라 적힌 간판 아래 팥죽과 호박죽이 끓는 노점을 지난다. 비닐로 좌판을 덮어둔 두 점포를 지나자 소매를 팔꿈치 위까지 말아올린 빵집 주인이 솥에서 노룬이 꼬리처럼 봉긋한 찐빵을 꺼내고 있다. 노룬이는 바닥 곳곳에 고인 물웅덩이를 피해, 바닥을 뒹구는 봉지를 지긋이 밟아가며, 이파리가 온통 노랗게 말라버린 화분에 다다른 순간 왼쪽 샛길로 꺾어 들어간다. 화분 위로 장수약국이라는 간판이 보이고 오래 그렇게 닫혀 있었을 셔터문에는 주변 약국의 쉬는 날이 큼지막하게 적혀 있다.
샛길은 사람 몸뚱이 하나 겨우 지나갈 만큼 좁다. 울퉁불퉁한 아스팔트 바닥을 노룬이가 밟을 때마다 타박- 타박 하는 소리가 바닥으로 퍼져 건물을 타고 울린다. 건물의 벽이 끊어졌다 다시 이어질 때마다 노룬이의 몸이 그늘에 잠겼다 햇빛에 밝아진다. 뭉치다! 길의 끝에 막 다다랐을 때 적막을 깨는 한 마디가 들리고, 순식간에 많은 소리들이 몰려온다. 낮은 주택들이 닥닥 붙은 골목길에 아이들이 펄쩍펄쩍 뛰어다니고 축구공을 뻥뻥 찬다. 어른들이 문 밖으로 나오고 들어가고 계단을 내려가고 올라가고 문이 닫히고 창문이 열린다. 큰 아이가 작은 아이를 이리저리 끌고 다닐 때마다 축구공이 내 쪽으로 날아왔다 다시 돌아간다. 뒷걸음질 쳐보지만 길이 좁아 조금 물러설 수 있을 뿐이다. 몇 아이들이 달려와 노룬이를 쓰다듬고 만지고, 끼익거리는 철제문을 열고 뛰쳐나온 아이는 노룬이에게 먹을 것을 건넨다. 익숙한 듯 노룬이는 아이들을 맞으며 볕이 많은 곳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저 길을 따라 이곳으로 온 건데, 어쩐지 저쪽과 이쪽은 이어진 세상 같지 않다. 붙잡고 있던 손을 놓쳐 강 아래로 떠내려가듯 좀 전까지의 고요한 시간이 아득히 멀어진다. 갑작스러운 활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내 몸을 끌고 빛이 많은 곳으로 걸어갔을 때 나무 아래에서 막 다리를 일으킨 노룬이가 나를 향해 다가온다. 내 주위를 한 바퀴, 두 바퀴 돌더니 눈뭉치처럼 몸을 말고 내 앞에 앉는다. 그러더니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는, 마치 나 보란 듯이, 바닥에 댄 엉덩이를 미끌리듯 앞으로 쭉 끈다. 그 뒤로 빨간 선이 묻어있다. 피다. 놀란 나는 황급히 노룬이를 덥석 안아 올린다. 내 몸이 긁히는 것 같은 느낌에 절로 인상이 찌푸러지는데, 노룬이는 아이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볼 뿐이다. 그런데 가볍다. 솜사탕처럼 가볍다. 너는 정말 가볍구나! 햇빛에 환하게 열린 노룬이의 동공이 서서히 닫히고 빛이 사라진 어둠 속에 내 늙은 얼굴이 있다. 노룬이처럼 깊은 아래로 한없이 떨어지는 팔자주름을 가진, 하얗게 탈색된 눈썹을 가진 얼굴. 어떤 앳됨도 남아 있지 않은 늙은 인상. 이내 노룬이는 몸부림치며 내 품에서 떠난다.
투명한 이파리들이 빼곡하게 매달린 크고 푸른 나무가 있다. 그 나무 아래 건포도처럼 검붉은 피가 섞인 누렇고 멀건 똥이 넓게 퍼져나간다. 아마 노룬이는 스스로 제 항문을 닦지 못할 것이다. 그게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품에 여전한 무게와 온기를 느끼며 노룬이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노룬이는 환호하는 아이들을 지나쳐 다시 샛길 쪽으로 유유히 걸어가고 있다. 그새 꼬리는 오후 다섯 시 방향으로 조금 가라앉았다. 노룬이가 막 샛길로 꺾으면서 눈에서 사라지자 나는 나무 아래에 좀 쉬어가고 싶은 마음을 떨치고 걷기 시작한다. 뒤따르기 위해 걸음을 재촉한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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