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부렁

일상 2008. 3. 30. 20:46


 이십년 이상 연배의 선배들도 모인 자리에서 오래도록 잊혀 지지 않았던 일이 있었다. 그날의 모임에서도 선배들은 가족, 직장이야기들을 나누었고 그 중 한 선배 네의 가족이야기를 들으면서 참 행복한 가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선배는 휴가를 내서 일 년에 한번은 꼭 가족들과 여행을 가고, 한 달에 한번은 꼭 가족회의를 가진다고 하였다. 자신에 대한 반성, 관계에 대한 반성, 목표 같은 것들을 토의한단다. 우아~ 아직도 가족회의를 한다니, 좋구나. 그렇게 선배의 말을 모두 고요히 듣고 있던 중, 마음에 턱 걸리는 말을 듣게 되었다. 중국에서 큰 공장을 운영하시는 그 선배는 “이제 중국 공장도 일단 다 정리해야겠다. 중국 인건비가 비싸져서 더는 중국사람 못 부리겠어”

 갑자기 예전에 본 영화가 오버랩 된다. 중국이 자본주의에 가속도를 내면서 무수한 공장들이 생기고 어린 소녀들이 생계를 위해 그곳에 취직을 한단다. 그런데 마치 6,70년대 우리나라의 열악한 노동현실과 꼭 닮아있었다. 기본권이 전혀 지켜지지 않는 상태에서 소녀들은 새우잠을 자며 야근을 하고 월급도 제대로 못 받고 있다. 그런데도 그 돈을 겨우 쪼개 고향에 내려 보내야 한단다. 명절 때 고향 갈 차비가 없는 친구들도 많다.

 선배님의 그 한마디에 중국 노동자들의 열악한 상황을 떠올린 건, 가족과 일터를 대하는 이중 잣대가 불편했기 때문이다. 가족의 행복을 생각하는 마음과 달리 싼 월급에 착취당하고 있는 노동자들은 보이지 않으니까. 기업이 이윤 추구하는 거야 당연한 거지라는 말이 들리는 듯하다. 그래 기업이 이윤 추구하는 거 당연한 거겠지, 비정규직 많아지는 거 당연한 거겠지, 회사가 힘들면 내가 잘리는 거 당연한 거겠지.


 해를 거듭할수록 세상 돌아가는 작동법이 끔찍해진다. 극단적으로 비유하자면 다른 사람에게 총부리를 겨눠야만 내가 혹 우리가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 인정하기 싫지만 모두에게 배인 삶의 방식이다. 어쨌든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살아가는 거라지만, 함께 행복해지고 싶은 사람들의 범위를 자꾸 줄여 나가는 방식으로 역사는 흐르는 것 같다. 그래 내가 누군가를 배제해나가는 것엔 무신경하다 치더라도, 내가 배제되어 간다는 기분을 느낄 때는 어찌할 것인가.

 ‘우리’ 라는 테두리를 치고 그 밖의 사람들을 억압하고 배제하게 되는 세상 작동법. 인종주의, 식민주의, 민족주의 숱하게 배제되어 죽어간 사람들이 썩지 않고 있는 역사. 지금 여기 일상생활의 모습은 어떤가. 아침마다 늘 전쟁터에 나가는 기분으로 출근한다며 따스하게 아이들을 안아주고는 일터로 나가는 가장들. 나를 지키고 내 가족을 지키는 것이 행복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테두리의 바깥은 전장이다. 하지만 가정 밖에서 치열하게 싸움을 해야만 내 가족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해도 정작 그 위험한 사회에 나와 내 가족이 언제나 위험의 대상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

 신영복 교수가 말한 관계론이 떠오른다.

“깜깜한 형장에서 교수형을 받건 찬란한 햇볕 아래서 땅위에 피를 뿌리는 총살형이건 한 개체가 죽는다는 것의 의미가 결코 그 한 개체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의 느낌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제가 맺어 온 수많은 인간관계가 한꺼번에 떠올랐습니다. 무기징역이라는 긴 터널을 마주하면서 느끼기 되는 심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 개인의 아픔이나 비극이기보다는 나로 인한 여러 사람들의 아픔이 다시 나의 아픔이 되어 되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나 자신이라는 존재는 수많은 관계 속에 있는 것이구나, ‘관계는 존재’라는 실존철학이 맞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스스로도 지루해할 만큼 여전히 고민하는 질문이고 답은 없고 그래도 내겐 가장 중요한 고민. 어떻게 하면 한 사람에게서 숨 쉬는 수많은 관계들을 불러 낼 수 있을까. 그리고 나부터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이 나의 가장 큰 과제다.

 제 3세계 어린이의 노동력을 착취해서 만들어진 믹스커피라 해도 내일 나는 여전히 150원을 자판기에 집어넣고 있을 것이고, 버마 군정에 무기를 팔고 티베트를 억압하고 힘없는 자들을 추방하고 있는 중국이 개최하는 베이징 올림픽이라도 우리나라 선수가 나오면 열심히 환호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해도 자기 극복이 언제나 가장 힘들다.

 시인은 종이 한 장에서 흘러가는 구름을 본다는데, 구름 없이 비가 없고 비 없이 나무가 자랄 수 없으며 나무 없이 종이를 만들 수 없는 것처럼. 더욱 더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들이 그 안에 있는 걸 볼 수 있다는데. 그러게. 우리 사실 믿지도 않잖아. 생존경쟁, 승자독식사회, 무한경쟁사회, 국가와 기업의 경쟁력. 실용주의 같은 거 말이야. 우리가 믿는 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이면서.

 아아. 권력이 말하는 것과 예수님이 말하는 것을 자기 삶의 구역마다 다르게 적용하는 우리들의 모습은 얼마나 실용적인가.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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