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과의 저녁식사_파키스탄국토순례(사비하 수마르)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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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파키스탄의 무샤라프 대통령. 감독은 '군인에게 민주주의가 가능할까'라는 의문으로 영화를 시작한다. 그리고 직접 대통령과 만나 그에게 파키스탄의 민주주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 질문한다. 대통령과의 만남과 국민들의 만남을 두 축으로 하는 영화 구성은 대통령이 생각하고 있는 파키스탄의 민주주주의가 실제로 얼마나 가능성이 있고 국민들이 움직여줄지를 비교해 볼 수 있게 한다.

파키스탄이 민주주의로 가는 여정은 험난해 보인다.
종교 근본주의자들과의 갈등으로 늘 자살폭탄테러의 위험에 노출된 파키스탄. 그들은 코란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면서 여성의 인권을 억압할 수 있다는 걸 고려하지 않는다. 또 마을 내에 지배체제를 고수하면서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 실현을 막고 있다. 감독은 직접 마을을 찾아가 그들의 여성인권침해가능성과 지배적인 마을 운영방식에 의문을 제기한다.
나는 무샤라프 대통령에게도 묻고 싶었다. 종교근본주의자들의 독단이 민주주의 실현에 어려움을 주는 만큼 대통령도 미국을 등에 업고선 서구식 민주주의만을 쉽게 들이려고 하는 건 아닌가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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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작 국민들은 '민주주의 자체'를 원하는 것 같진 않다. 아니 원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민주주의에 대해 토론하는 건 상위층 사람들의 식탁에서 뿐이다. 거리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은 민주주의가 사치라고 생각하고 더 많이 가난한 사람들은 대통령이 누군지조차 관심이 없다.  
경제만 살리면 독재든 상관없다는 한 파키스탄인의 말은 그들보다 훨씬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우리나라에서도 여전히 공감이 가능할 수 있는 말이었다. 이처럼 민주주의란 건 그 시대 사람들이 지향하는 가치에 따라 우선순위가 한 없이 밑으로 떨어질 수 있는 것인가 보다.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부토 전 총리의 귀국 날에 종교근본주의자들이 폭탄 테러를 일으키면서 대통령이 긴급조치를 내리는 장면이 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듯한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그래도 감독은 중얼거린다. '이것도 다 민주주의로 가는 길일거라고.'
현재 파키스탄의 정치상황은 더욱 급변했다. 부토 총리가 살해당하고, 무샤라프는 총선에서 대패하고 군부와 미국에도 지지를 잃어 간단다. 파키스탄 정치권에 새로운 움직이 있을 것인가. 그나저나 정치의 움직임이 국민들에게 변화가 오긴 할까?
이런 파키스탄의 복잡한 상황이 영화 안에 성실하게 담겨 있다. 그리고 난 사비하 수마르 감독의 노력이 우리 사회에도 고스란히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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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과연 민주주의 국가인가? 민주주의는 끊임없는 과정에 있는, 완성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계속 반성이 필요한 작업이다. 그럼 한국이란 특수한 맥락에서 작동하는 민주주의는 어떤가? 난 국민들에게 목소리만 주었을 뿐 정작 그 목소리를 듣는 귀를 가진 지배자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정작 목소리에 힘은 없는 거다.

87년 우리에게 갑자기 찾아온 민주화는 급한만큼 문제도 많았다. 87년체제는 모든 결정이 '법으로 수렴'되는 현상을 만들었다. 법 조항에 포함된 민주주의의 실현은 온데간데 없고 '법의 권력'만 남은 것이다. 많은 사안들에서 대법원의 판결 하나로 민주적인 토론이나 사람들의 참여는 봉쇄된다. 새만금이 그랬고 대운하도 그렇지 않을까. 또 빈익빈 부익부의 실현을 위해 법은 봉사하고 있는 게 아닐까. 요즘 뉴스를 보면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법대로 하자' 라는 말 쓸쓸함. 우리에게 진짜 민주주의는 있는가 라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나저나 우리, 민주주의를 원하기는 한걸까.

영화를 보면서 내가 갸우뚱 한 건 무샤라프 대통령이 감독의 저녁식사 요청을 흔쾌히 받아 들이고 촬영도 기꺼이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름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다는 내가 '한국에선 저렇게 청와대로 들어가 대통령과의 만담을 카메라에 담는 게 가능할까? 라고 생각한 건 아이러니다. 여하튼 우리나라에서도 저런 형식으로 민주주의에 대해 고민하는 영화가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민주주의의 당위를 설득하기보다 나라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서 민주주의 자체에 대해 고찰할 수 있는 영화를.우리에게 더 필요한 건 그런 작업이 아닌가 싶다. 아. 대통령과의 저녁식사 약속도 잡아야겠지. '국민을 섬기겠읍니다'는 말 한마디로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다고 착각하게 하는 대답 말고 무샤라프 대통령보다는 나은 대답을 들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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