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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아내의 33주기 기일 날 의식을 치르기 위해 숲을 찾는 노인 시게키, 그리고 그를 말 없이 뒤따르는 여인 마치코. 그녀는 사고로 아이를 잃었다.
일본불교에서는 33주기 기일이 되면 죽은 이가 이승을 완전히 떠나 부처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고 믿는다. 시게키는 이제 소중한 이를 보낼 시간이다. 시게키와 마치코는 아내의 무덤을 찾아 숲으로 떠난다.

마치코는 정신없이 숲을 헤매는 시게키를 묵묵히 뒤따른다. 시게키가 마음 가는 대로 할 수 있게. 그저 뒤에서 지켜볼 뿐이다. 하지만 시게키가 죽을 것만 같을 땐 온 몸을 다해 그에게 관여한다. 위험한 계곡을 건너려 할 때 가지 말라고 위험하다고 미안하다며 울부짖기 시작하는 마치코는 소중한 누군가와 더 이상 몸으로 부대낄 수 없게 될 죽음이 너무나 사무친다. 그건 죽은 제 아이에게 소리치는 말이기도 하다.

차분하고 맑게 연주되는 영화의 공기는 한번씩 크고 낮게 울리는 장면으로 마음을 진동시킨다.  

시게키는 '나는 살아 있습니까' 라고 물었다. 위는 채워져도 마음은 늘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소중한 사람에 대한 그리움은 마음을 더욱 허전하게 했다. 그는 오랫동안 '존재하지도 그렇다고 부재하지도 않은 소중한 사람' 때문에 고통을 겪었다. 그리고 드디어 아내와 진짜 이별을 하게 되는 순간, 죽을 고비를 넘겨 다다른 아내의 무덤 바로 그 앞에서, 그는 '33년 동안 함께 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한다. 오랫 동안 이 고통이 끝나기만을 기다린 그가 고맙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곁에 없는 죽은 자를 웅켜 잡고 있으면서 생기는 상실감은 이제 떨치고, 아내가 완전히 죽음으로써 영원히 함께 살게 되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죽은 자와 영원히 함께 하게 되면서 시게키도 살아 있게 된다. 시게키는 이제 더 이상 나는 살아 있으냐고 묻지 않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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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건강하다. 자연에 흠뻑 젖고 깊게 묻히는 그들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육체성 때문이다. 온 몸이 너덜너덜해지도록 폭력을 휘두르는데서 느끼는 육체성이 아니라 녹차밭에 푹 묻혀 뛰어다니는 모습에서, 숲 속에서 엎어지고 뒹굴며 흙으로 얼룩지는 모습에서, 쓰러진 시케키를 마치코가 알몸으로 감싸 안고 따듯한 온기를 전해주는 모습에서, 그리고 아내의 무덤 앞의 젖은 흙을 두 손 힘주어 파는 모습에서 말이다. 그렇게 자연에 사람에 부대끼는 육체는 살아있음으로 서로를 치유한다. 시게키와 마치코가 그랬듯이.


영화의 한 시퀀스는 길다. 차분하게 관찰한다. 실재감을 느낀다. 난 카메라의 눈이 마치 엄마가 울면 왜 우나 싶어 몸을 재바르게 움직이며 이쪽 저쪽 쳐다보는 아이 같았다.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기도 하고 멀찍이서 멀뚱 쳐다보기도 하면서. 문득 마치코의 죽은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죽은 자는 자신을 어떻게 치유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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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장한 나무를 흔드는 바람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나무는 자신의 육체로 바람의 존재를 보여준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서로가 서로를 증명해주는 존재들이다. 나무가 바람을, 바람이 나를, 나는 너를.    '나는 살아 있습니까?' 마주 보거나 나란히 앉아 나지막히. ‘우리는 살아 있습니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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