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일상

일상 2008. 5. 6. 15:53



처음 만났다. 전주 영화제와. 아니 영화제와의 만남이 내겐 처음.
짐을 줄이고 줄였는데도 뚱뚱한 배낭에 옆구리 가방까지 메고선 전주행 버스를 탔다.
객석에 엉덩이 질펀하게 붙이고 하루죙일 영화만 보고 싶었지만 취재도 해야 하는 탓에 나름 비장한 마음이었다. 전주는 어떤 곳일까, 고심해서 선택한 영화들은 어떨까, 어떤 만남이 기다리고 있을까, 마음이 살짝 뜬 채로 버스 창문에 얼굴을 잔뜩 붙이고선 싱그러운 초록 나무들이 산에 알알이 박혀 있는 풍경을 구경했다. 푸르르다. 아 여름이구나.

역시나 여름이었다. 특히나 전주는.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오분 정도 헤맸는데 그새 등에 땀이 촉촉이 배었다. 자그마치 30도였다 한다. 그런데 이런, 전주영화제 안내 표지판이 없어. 고속버스터미널에 내리자마자 영화제가 열리는 곳으로 안내하는 반가운 표지판이 있었다면. 일요일엔 관광안내소마저 문을 닫았다고 하니 행사에 대해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어쨌든 영화의 거리까지 여차 도착했다. 막 개막식을 끝낸 다음날이라 그런지 거리 여기저기에서 행사와 전시 준비가 한창이었다. 난 낙타처럼 검은 배낭을 지고 후끈한 거리를 느릿느릿 걸었다. 와아아아. 반갑다아. 전주국제영화제여어.

3박 4일간 영화제에 체류하는 동안 나름 영화도 많이 봤고 행사도 즐겼고 사람도 만났다. 모든 것은 '우연'이었다. 아이디카드로 티켓을 발급받을 때 이미 많은 표들이 매진 상태였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화들이 급 선택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급 선택'이 예기치 못한 '발견'의 기쁨을 주었으니. 다음날부턴 맘 놓아 두고 마음가는대로 영화를 예매했다.
또 학교에선 한 학기에 한 두번 마주치기도 힘들었던 친구를 전주 영화의 거리 한복판도 아닌 구석에서 떡 하니 만났다. 들리지 않는 전화기 귀에 바람을 훅훅 불어대며 서 있는데 누군가 다가와서 짱윤! 어머낫 꺅. 너무 반가와서 우리들의 만남은 전주 밤거리의 술 약속으로 이어지고 그 참에 난 인터뷰도 뚝딱 하고. 그렇게 저렇게 즐거운 '우연'의 만남으로 기억되는 전주국제영화제.

헝가리의 벨라타르 감독의 영화로 시작되어 벨라타르 감독의 영화로 끝낸 영화 관람.
생소한 헝가리 영화는 아주 진한 초콜렛처럼 쌉싸래하면서도 아릿하게 달콤했으며 아직까지도 난 헝가리 전통 음악의 리듬에 젖어 있는 기분이다. 또 베트남 영화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자신들의 영화로 이야기한다는 것의 소중함을 알게 했다. 국제경쟁작들 영화는 역시나 국제경쟁작다웠다. 미국 영화 발라스트와 캐나다 영화 켄티넨탈은 아주 미약한 감정의 파동을 만들며 묵직한 감동을 주었다. 아직 개봉하지 않은 따끈한 한국영화들에선 사채나 가난과 같은 동시대의 비극적인 소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다양성만큼 일상에서도 다양한 영화들을 자주 만나고 더불어 다양한 사회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심야 관람까지 챙기느라 내 눈은 오 년은 더 늙어버리고 무릎 관절은 자꾸만 저리지만 난 이제서야 어두운 영화관 안에서 스크린과 마주한다는 것,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사람들과 함께 영화를 본다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사유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영화관의 불이 켜지고 시린 눈으로 거리엘 나서면 어두워진 거리에 루미나리에가 환히 켜져 있었다. 분위기를 즐기는 사람들로 북적였고 곳곳에서 벌어지는 부대행사는 다시 영화를 볼 수 있게 하는 또 하나의 휴식이었다.
이왕이면 한국의 멋을 느낄 수 있거나 휴식할 수 있는 분위기의 야외도 있으면 좋으련만 너무 빡빡한 거리에 상점과 옷가게만 즐비한 건물로 둘러싸여 있었다는 것도 아쉬움. 또 하나 장애인석이 없다는 것. 다양한 영화만큼이나 다양한 관람객들을 미리 생각하는 흔적을 더욱 세심하게 보여주면 좋겠다.

3박 4일간의 일정을 끝내고 다시 돌아온 서울. 버스가 마포대교를 달릴 때 저 너머 한강엔 형형색색의 불빛들이 떠 있었다. 울컥 감정들이 밀려 오는데 슬프다, 기쁘다 라는 언어를 사용할 수 없다는 걸 느꼈다. 며칠 전보다 모세혈관이 두 세가닥 늘어난 기분이다.

전주에 머무는 동안 긁어 모은 영화소식지와 각종 팜플렛들이 가방에서 구겨져 나온다. 단어로만 적힌 수첩, 부지런히 GV기록한 종이들도. 아직 정리되지 않은 것들을 그냥 널브러져 놓고선 정리되지 말아야 할 날 것의 감정들을 끌어 안은 채 난 잠들었다.

잠들면서 생각한다. 이런. 결국 전라도 백반은 먹지 못했구나. 내년엔 먹거리에 대한 기대를 보태 더욱 수줍게 다시 전주국제영화제로 가야겠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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