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불안하려구.

일상 2008. 9. 19. 00:43

요즘 자꾸만 '불안'해서 나한테 실망이 늘었다. 그럼 언제는 불안하지 않았느냐 하겠지만, 이제 대학 4학년이 되니 정말 불안하다. 그것 때문에 나에게 실망하다니! 또 취업준비라는 게 따로 있나, 뭐. 라고 자기 위안도 했지만 내 이전의 '불안'과 지금 느끼는 '불안'이 같지 않다는 것과, 내 '욕망'이 자꾸 가벼워지고 있다는 것 때문일게다.

산다는 건 불안한 일이다. 적어도 난 그 불안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삶에서 오는 모험에 가까운 감정이길 바랐다. 하지만 요즘 생긴 불안함은 사회 기준에 맞춰지지 못할까 하는 걱정,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까 하는 인정욕망, 나 자신을 기준으로 삼지 않은 타인을 거울삼는 비교 욕망. 그런 것들이 아닌가 싶다. 나 하고 싶은 것들에 한해서는 열심히 했고(하기 싫은 것들이 너무 많이 배제됐지만) 좋아한 공부들은 늘 '문제와 질문 자체'를 질문하는 것이었기에 적어도 사회의 가치척도에 쉽게 휩쓸리지 않을 거라 믿었었는데, 자꾸만 휘청거리니 이내 못마땅한 거다.

아아, 난 뭔가 생각을 해야만 한다. 기껏과 용껏을 가로지르며 휩쓸리듯 그러나 만족하며 내린 결론은, 내 불안함을 끝까지 밀고 나가겠다는 것. 그리고 그 불안을 안정에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하는 불안으로 바꾸련다. 그러니까 '이질적인 욕망들이 언제 튀어나올지 몰라 불안한 존재' 가 되잖거다. 그래서 선언해보건대,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은 잉여로서의 욕망에 대한 추구다. 본원적 욕망이라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배치가 욕망을 낳고 욕망이 배치를 만든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이란 주체가 마음대로 무언가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체까지 생산해내는 사회구조의 효과이며 생산'이라 했다. 하지만 수렴되지 못하는 욕망 역시 반드시 생기게 마련이다. 즉 (아마 이미 코드화된) 욕망들이 만들어내는 의지로 난 살아가지만 쉽사리 의지화되지 못하는(못하게 하는 현실때문에) 잉여로서의 욕망말이다. 가령 여행에 대한 욕망. 여기보다 어딘가를 꿈꾸는 그 욕망은 일상으로 수렴되지 못하는, 제 아무리 락앤락 용기라도 감추지 못하고 삐져 흘러나오는 욕망.

어차피 욕망이라는 것이 어떤 배치에 있고 어떤 관계 속에 있느냐에 따라 변하는 것이라면, 난 이 잉여로서의 욕망을 일상의 중심으로 끌어오는 인생을 살겠다. 그것은 하나의 비-계급 되기.
한 개의 계급론이 있다. 그것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이분법을 넘어서고 '욕망'의 문제로 계급을 나누는 것이다. 지금 사회는 욕망의 중심에 자본이 있다는 점에서, 오로지 단일한 계급인 부르주아만이 있다. 그것은 자본의 담지자? 아니 자본의 노예.
그리고 계급이 아닌, 가치법칙 외부의 삶을 꿈꾸는 자인 비-계급이 있다. 그러므로 프롤레타리아는 계급이 아닌 비-계급으로서의 전망이 필요할지도!

중요한 건 내게 배치화되지 못하는 잉여로서의 욕망이 있다는 것. 그건 이렇게는 살고 싶지 않다는 것. 어쩔 수 없다라는 말로도 달래어지지 않는 욕망같은 것. 여가생활에 쉽게 포섭되지 않도록 잉여 욕망들을 자꾸 중심부로 끌어 와서 내 욕망의 배치를 재구성할 수 있을까. (가령 여행생활자 같은 것이 그 실현이 아닐까. 하지만 나는 잉여욕망마저 불분명하다는 것..)

어차피 진짜 욕망이란 건 없다. 그렇다면 난 차라리 곪다가 고름으로 흘러내리는 상처가 된 욕망들을 끊임없이 치료하며 살고 싶다. 일상이 혁명이 되는 그런 삶이 내겐 더 매력이므로. '현실은 어쩔 수 없고 그 현실 속에서 잉여 욕망을 위로할 수 있는 조건들을 만들어내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하기 싫은 거다. 좋아하는 것이 일이 되면 그게 싫어져요 이런 것도 싫은 거다. 그럼 좋아하는 것을 싫게 만드는 '노동'에 대해서는 왜 재사유하지 않는가. 이렇게 반문하고 싶다.
불안하길 바란다. 그 불안이 안정되게 살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제각각의 이질적인 욕망들을 어쩌지 못해 자꾸만 다른 존재가 되는 불안정성 말이다.



나는 과연 뭐가 될까. 여기에 대한 답은 아직까진 '뭐든 되겠지' 다. 뭐든 돼도 상관없는 게 아니니까 이건 좀 더 고민해 봐야 겠다. 그리고 난 아직 절체절명의 위기 순간들을 겪어 보지 못했다는 단점이 있다. 어쨌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 정도. 그러고 보니 난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것만 같다.

또 하나 바라는 것이, 신념을 갖되, 신념 위에 변화하는 정체성으로서의 나를 둘 것. '난 이렇게 배웠는데 난 이게 맞다고 믿었는데 이 기준에 맞는 생활을 하지 않으면 난 일종의 배신행위를 하는 것이 아닌가? ' 하는 생각에 얽매이진 않았으면 좋겠다. 나를 믿는다는 것과 신념을 믿는다는 것은 좀 다른 문제같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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