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자신을 아나키스트로 규정하는 예술가 희완 트호뫼흐를 만나 오래도록 눈을 맞추는 사이가 되었다. 그와의 만남으로 나는 특정한 인생의 목적지를 향해 일사불란하게 자신을 다그치는 삶에 미련을 깨끗이 접고, 자유롭게 풀어놓은 영혼의 열망을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열망의 진화 자체가 중심이 되는 삶의 방식에 확신을 얻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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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완에게는 자신만의 성이 있다. 내가 늘 가지고 싶어 했던 그것. 세상의 논리를 시선 하나로 간단히 유린하고, 경쟁의 뜀박질에서 슬쩍 비껴나 울울창창한 숲 속에서 자신의 열매를 가꾸는 사람들에겐 언제나 그런 성이 있다. 누군가는 그것을 지하실이라고 표현하고, 자크 뒤아멜은 '자신만의 소우주'라고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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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큼 살았는데 나에게 미래는 여전히 부정형의 그 무엇이고, 새롭게 밑바닥부터 선택해 만들어가야 할 그 무엇이다. 어찌보면 도대체 해 놓은게 뭐냐고 스스로를 다그쳐 볼 수도 있는 상황이다. 결국 통과시킨 법 하나 없고, 사회주의적 이상을 문화정책에서 실현하고자 했던 그 어떤 의도도 문서 밖을 벗어나 실현시키지 못했다. 벌어놓은 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 좋게 말하면 자유인지만 지금 당장 또렷한 직업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사방으로 열려있는 부정형의 미래야말로 내가 강렬히 열망하는 것이기에 나는 완벽히 내가 원하는 지점에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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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로 백날 먼 나라를 가봐야 여행자의 시선으로만 볼 수 있을 뿐이라고, 직접 다른 나라에 발을 딛고, 거기 사람들과 소통하고 생활하며 지내야 비로소 네가 원하는 것들을 얻을 수 있을거라고 충동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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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우리가 나눈 대화는 대체로 의미심장하고 진지한 것들이었으나, 가장 강한 잔상은 대화 내내 그가 자주보여주었던 '냉소로 쪼개지지 않는 1백%의 웃음' 이었다.


사진/언니네




아나키스트적 자발성과 자율성을 가지면서 때로는 촘촘히 모여 하나의 단단한 힘을 조직할 수 있는 연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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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자와 듣는 자를 가르지 않는 '우리'는 운동을 더욱 설득력 있게 만든다. 예를 들어, 혁명적 공산주의 연맹의 유명한 구호 '우리들의 삶은 당신들의 이익보다 소중하다'





내가 투자할 시간, 투자할 돈, 그렇게 해서 딴 학위가 나에게 확실한 미래를 보장할 것인가를 염두에 두고 더 분명하고 안전한 선택을 매순간 계산해야 한다면, 한 순간도 인생은 나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 불만은 터뜨리고 욕망은 충족시키면서 사는 것이 건강한 삶이다. 그러나 내가 충족시키고자 하는 욕망이 진정한 나의 욕망인지 아니면 모두가 욕망해야 하는 것이라고 정해진 일반적 욕망의 리스트일 뿐인지를 가늠해 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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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마술이 시작된 건 더 큰 용기와 에너지를 모아 파리에 갔을때였다. 창조와 파괴는 결국 동전의 양면임을 깨닫고, 새로운 인생을 창조하기 위해 내가 갖고 있는 기존의 틀을 철저히 부수고 벌거벗은 채로 다른 세상을 향해 나아갔다. 돌아와서 무엇이 되겠다는 구체적인 포부도 갖고 있지 않았으며, 오로지 내가 가진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찾겠다는 맹렬한 의지가 있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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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 미와 추에 대한 사회적 기호를 아직 익히기 전의 인간들은 얼마나 신선한 눈으로 세상을 창조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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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은 왜 어느 한순간도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살지 못하고, 왜 늘 다른 곳에서 보상받기를 원하는지 가슴치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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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진정한 욕망을 파악하는 것은 아주 사소한 데서부터 시작된다. 내가 좋아하는 색깔, 옷반찬,영화,작가,길,동네,나무에 이르기까지.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일일이 묻고 그 목록을 다 모아보면, 자기만의 색깔이 무엇인지 조금씩 드러나게 된다. 나의 색깔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가장 유의해야 할 것은 '한 우물'이데올로기의 강박으로부터 탈출이다. '한우물을 파야한다'는 시대를 초월하는 금과옥조이다. 살면서 이 주장에 대해 감히 시비거는 사람 몇 못봤다. 그러나 한우물 파기 싫으면 어떡해야 하는지, 그 우물에서 아무것도 안 나오면 어떡할 건지에 대해서는 답해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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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남성의 가슴 콩닥거리는 연애는 차단되어 있지만, 매춘은 무한이 허락되어 있을 뿐 아니라 끊임없이 부추기는 사회.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이고 흥미로운 관계 맺기인 연애를 특정 시기, 특정 연령층의 전유물로 규정하고 비좁은 김밥의 틀 속에 밀어 넣어버린 사회, 어쩔수 없이 옆구리 삐져나오는 비명과 분출되어 욕구들은 모두 어두운 음지속에 처넣어 버리는 사회. 이 숨 막히는 사회적 모순을 비집고 우리가 건강하고 싱그러운 연애를 계속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거칠게 말하자면 이 책은 하나의 처세술이다.
저자 자신의 삶에 대한 철학이 드러나는 문장은 너무나 유혹적인 그 자체로 프로파간다.
하지만 흔하게 깔린 처세술 책과는 전연 다르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곱씹지만 누구 하나 생각하는 대로 살긴 쉽지 않다. 얼마나 수많은 사람들이 이 말에 유혹당해 이 말을 소비하고 있는가. 그러나 실천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일단 그녀는 생각하는 대로 산다. 
더 나아가! 그 '생각' 에 마저 얽매이지 않는 뼛속깊이 자유로운 여자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생각 중 이 점이 훨씬 더 중요하다. 그건 욕망의 배치를 바꾸는 문제이기 때문에.
자. 한 발더 나아가야 한다는 것. 생각하는 대로 살아. 하지만 그 생각이 어떻게 만들어진 건지 들여다 보아야 해. 욕망은 충족시키며 살아. 대신 그 욕망이 어떤 욕망인지 볼 수 있어야 해. 이렇게.
그녀 삶에 공감하는 사람들에게는 무한한 부러움을, 미적지근하게 실천하지만 여전히 용기가 부족한 사람들에게는 더욱 더 원하는 대로 살라는 충동질을 주는 책이다.

그래. 비현실적이고 아직 철 덜들었다고 말하기도 하겠다. 하지만 괜찮다. 그녀는 철들지 않기로 마음먹은 사람이니까.


책을 읽다가 가장 인상에 남았던 부분은.
+ 내가 들은 첫 전공 강의는 무용과 관련된 과목이었다. 현대무용 비디오를 함께 보고 그 무용에 대해서 평하는 수업이었다. 한 10분 동안 연극성이 짙은 무용공연을 보고 난 뒤 선생이 학생들의 의견을 물었다. 한 학생이 손을 들어 무엇이 어떻게 흥미로웠는지 말했다. 두 번째 학생 역시 마찬가지. 세 번째, 네 번째 모두 마음에 들지 않은 점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무엇이 재미있었는지만 이야기했다. 무척이나 비판적인 표정을 지닌 마른 얼굴의 선생마저도 다르지 않았다.
나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저 무용에서 무엇이 나를 불편하게 했는지, 무엇이 부족해 보였는지를 헤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공연이 좋으면 통째로 좋았고, 싫으면 조목조목 싫었다.
무엇을 보건 그것이 통째로 좋지 않다면 내 눈에 거슬리는 것들을 헤아리고, 왜 거슬렸는지를 이론화하는 데 익숙한 나는 정작 그 무용에서 무엇이 나를 흥미롭게 했는지는 전혀 보지도 못했던 것이다. 이 첫 번째 무용수업은 내게 잔잔하게 다가와 혁명적인 메시지를 전했다. 그리고 앞으로 내 앞에 펼쳐질 세계에 열쇠를 제공하였다.


그녀가 파리 8대학 공연예술학과에 입학하고서 겪은 일이다.
'당신의 태도는 하나의 멋진 풍경입니다' 가  내가 아끼는 highfinish 를 풀어내는 문장이라면, 
좋으면 통째로 좋고 싫으면 조목조목 싫은 것이 사물을 바라보는 태도였던 내게도 (그래야만 한다고 난 왜 압박을 느꼈을까. 왜 그게 논리적사고라고 생각했을까) 혁명적인 메시지처럼 다가왔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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