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연구실을 알게 되고 강의를 듣고 세미나를 하면서, 내가 가지고 있던 기질에 개념을 얻게 됐다.(나는 나의 감수성을 존경한다. 그걸 갖게 해준 알 수 없는 무엇에 감사한다. '끌림'이라는 것을 통해 수많은 기회의 장으로 이끌어주기 때문에)
그리고. 이제는 개념화하려는 내 사유에 저항해야 할 때이다.
2. 맞다. 결국 공부해서 내가 바뀌어야 하는 건 신체다. 내가 어떤 영화를 보고 나서, 비질과 걸레질을 하고 싶어지는 것처럼. 연구실에 있으면 내 손매무새는 야무지다. 나태하지 않고 뒷정리도 열심히 한다. (집으로 돌아오면 그렇지 않다는 것은 정말 '문제적!'이다)
누군가는 "그렇게 많이 공부해서 내가 배운 건, 이 공간을 사용한 후 다음 사람이 이용할 때 불편하지 않을까 깔끔히 정리하는 일." 같은 것이라 했다. '공부해서 겨우' 가 아니다. 그것이 공부의 결과다. 과연 그런 것들이 몸에 익은 일일까? 강요받는 기본이 아니라 함께 사는 삶에 녹아든 것으로서의 기본.
3. 나는 자꾸 자유로워진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타협할 수 없게 되는 과정과 같다.
그래서 난 오히려 시각이 좁아지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4. 공부할수록 내게 중요한 건 가족과의 관계 맺기다. 공부할수록 엄마가, 아빠가, 동생이 생각난다. 엄마가 내 생각을 이해해주기를 바라진 않지만 구박당하더라도 고집스럽게 나의 이야기를 한다. 내가 어떻게 살고 싶은지, 엄마가 염려하는 것들을 나는 어떻게 물리치며 살아갈 건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엄마 이야기가 듣고 싶은 마음과 함께 간다. 알고 싶다. 당신의 궤적, 당신의 생각.
그리고 아버지와의 사이도 좀 더 좋아지면 한다.
5. 스무 살 초반에 쓴 다이어리의 속 나는 정말 치열했다. 단순히 방황인줄 알았는데 그건 문제의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문제의식에서 나는 어느 정도 답을 얻었고 그만큼 많이 변했다. 변했고 평온해졌다. 그렇다면, 이제 내 앞에 던져진 문제의식은 무엇인가.
6. 글 하나에서도 문제의식을 갖지 못하는 내가 너무 답답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게 부족한 것은 '표현'이었다. 떠오르는 질문을 '표현'하지 못한다.
7. 어떤 질문에 대해서는, 과감히 '그게 뭐 어쨌다고.' 라고 답할 수 있어야 한다.
8. 세상에 나쁜 사람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럴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들이 많아진다. 그래서 요즘 나는 악몽을 꾼다. 어젯밤엔 두 아이를 양팔에 안고 밤새 도망다녔다.
9. 앎과 삶의 괴리에서 영화가 나온다. 미묘하게 간극을 유지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10. 감성을 넓히는 것이 아닌 새로운 감성이 필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