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버스

일상 2008. 12. 29. 01:16


한때 꿈이 있었다. 아침마다 가방에 서너권의 책과 노트를 담는다. 한솥 도시락 하나와 커피우유랑 팥빵을 산다. 버스를 탄다. 뒷바퀴가 있는 좌석 창가에 앉아선 책을 읽는다. 
그게 생활이다. 
버스에서 책을 읽는 시간이 너무 좋았다. 그런 때가 있었다. 그렇게 살 수 있다면 참 좋을 거라 생각했다. 앞으로 당분간의 매일매일이 혼자 있기 좋은 날이 될 거라 생각했고, 그렇다면 달리는 버스 안에서 책을 읽을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싶었다.
내가 아는 한 서울 구석구석을 가장 많이 돌아 다니는 버스 143번 . 그 버스를 타고 나는
카프카를 읽어야지. 정오쯤엔 종점에 도착하겠지. 그 곳에서 한솥 도시락을 뜯어 식사를 한다.
먹고는 기사 아저씨들 틈에 끼어 자판기 커피를 마시고 다시 버스를 탈거야.

얼마나 졸릴까. 버스 창문에 기대어 결코 닿진 않는 창문 밖 햇살을 희미하게 느끼며
낮꿈을 꾸어야지. 잠에서 깨면 버스는 반쯤 거리를 달렸을까. 집으로 되돌아 가지 않기 위해
나는 다른 버스로 환승을 한다. 그리고 다시 오른 버스 안에서 나는 수잔 손택의 책을 꺼내 읽는다. 매일 아침 그 날 읽을 책을 고르는 일은 얼마나 설렐까. 한솥에서 도시락을 고르는 일 그 날 먹을 빵을 고르는 일도. 중요한 건 낮이 밤으로 바뀌는 그 경계의 순간을 놓치지 않는거다. 나는 그 순간의 감정이 매일 매일 달라질거라 믿었고 그 느낌을 기록하고 싶었다. 그 즈음이면 빵과 우유를 꺼내 저녁을 먹을 시간이겠다. 퇴근시간이겠다. 이내 버스 가득 지친 얼굴들이 둥둥 떠오르겠지. 그들을 올려다보며 한사람 한사람의 삶을 나름대로 상상해 볼 것이다. 그러다 이내 나는 또 한번 잠에 들겠지. 아무 일도 없이 죽 그 자리에 앉아 있었겠지만 그들만큼 나도 피로하다. 또 한권의 책을 꺼낸다.

그렇다고 책을 많이 읽는 것은 아니다. 책은 내가 사치부리는 물질, 중요한 건 버스라는 공간
어릴 적 나는 멀미가 너무 심해 차를 탈 때마다 얼굴이 노래져 엄마를 놀라케했고 시골가는 버스를 탈 때마다 바닥에 토악질을 해서 아빠를 곤란케했다. 그런 아이가 이제 하루 종일 버스를 타고 다녀도 멀미가 나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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