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강차의 맛

일상 2009. 5. 22. 03:25


"감기엔 무슨 차가 좋을까요?" 

오후 카페지기 하는 날, 책을 읽느라 고개를 떨구고 있던 나는 고요를 깨는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번쩍 든다. 얼굴을 보니 연구실에 오며가며 그저 한두 번 마주친 적이 있는 것 같다. 봄 더위에 얼굴이 땀에 젖었다. 목소리가 가쁜 걸 보아 연구실에 오자마자 카페로 곧장 왔나보다. 거기다 감기 때문인지 목소리가 잔뜩 쉬었다. 이 봄에 감기라니. 그녀가 피곤한 기색으로 웃는다. 웃으며 보이는 치아 교정기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생강차를 권한다, 얼마 전에 들어온 유기농 생강차라고 덧붙인다. 그녀는 좋다 한다. 냉장고에서 생강차를 꺼냈는데 병마개에 꿀이 쫀쫀하게 묻어 잘 열리지 않는다. 바 앞에 자리를 잡고 앉은 그녀는 낑낑대는 내 행동이 재밌는지 계속 쳐다본다. 천성이 살가운 듯한 그녀의 행동에 쑥쓰러우면서도 기분이 좋아 진다. 봄 햇살 때문인지 고개 돌리는 곳마다 봄 더위에 반질해진 그녀의 얼굴이 눈앞을 따라다닌다. 잘 익은 바나나색 머그컵을 가져 와 생강차를 듬뿍 듬뿍 담았다. 많이 줄게요, 라는 말을 덧붙이는 걸 잊지 않는다. 와 고마워요, 하며 고마워한다.
 
너무 진해서 생강맛에 맵지 않게 그렇다고 싱겁진 않도록 뜨거운 물의 양을 맞추는데 신중을 가한다. 그리곤 왠지 아쉬워 생강이 배인 꿀을 한 숟갈 더 탄다. 먹어 봐요. 맛있어요? 그녀가 마시기도 전에 물어 본다. 그녀는 서둘러 한 모금 마신다. 미안해요, 코가 막혀서 맛이 안 느껴져요, 라며 미안해한다. 그래도 단맛이 남는 것 같아요, 라며 웃는다. 나도 살갑게, 이거보세요 되게 좋은 꿀 같아요. 생강차가 담긴 유리병을 들어 보여준다. 곁에 바짝 붙어 쳐다보던 그녀가 말한다. 천연 꿀인가 봐요.
 
몇 모금 길게 생강차를 마신 그녀는 무슨 얘기를 꺼낼 입모양을 한다. 막지 않는 한 늘 열려있는 귀. 평소엔 느끼지 못했던 귀의 존재를 새삼 느낀다. 저항 없이 듣도록 만들어진 귀의 존재가, 오만하지 않은 귀가 좋다.
 
"다음 주까지 교생실습을 해요." 중학교 1학년 교생을 나간 그녀는 학생들 상담하는 일을 맡게 됐단다. 오늘 상담한 친구는 별 존재감이 없던 반장 아이였다. 얌전하던 그 아이가 상담 도중 복수를 하고 싶다 했단다. 자기를 이렇게 만든 사람을 죽이고 싶다 했다고. 담임에게도 친구들에게도 꺼내지 못 했던 속마음을 교생인 그녀에게 꺼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상담이 끝났는데 그렇구나 하고 그냥 인사하고 돌아설 수가 없어 그 아일 데리고 남산으로 홍대로 놀러 다녔다고 한다. "이거 예쁘죠?" 그녀가 가슴에 꽂힌 뱃지를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동그란 뱃지에는 불꽃이 그려져 있다. "홍대에서 행사하더라고요. 종이에다 자기 소원을 적으면 이걸 선물로 주더라고요." 무슨 소원을 적었을까.
 
훕 훕 생강차 마시는 소리가 달아 생강차 한 잔을 더 탔다. 한 번 씩 생강 건더기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 호기심에 생강을 먹어 본다. 뜨거운 물 때문에 순해진 탓인지 덜 맵다. 아니, 그러고 보니 내가 이런 생 생강을 먹어본 적이 있었던가. 이건 매운 맛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두 개, 세 개, 일부러 생강을 띄워 올려 입 안에 넣고 계속해서 씹어 본다. 어떤 맛인지 정확하게 알게 될 때까지. 그렇다고 믿었던 매운 맛에서 벗어날 때까지 말이다.
 
"저도 변할지도 모르죠"
난 변할지도 모른다고 미리 걱정할 수 있는 마음이 있다면 덜 변할 거라고 답해 본다. 좋은 선생님이 되세요, 라고 말하고는 그 좋은, 이란 말이 너무 뻔해 다른 말을 찾아보려는데 그녀는 그러고 싶다며 곧바로 대답한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통하나 보다, 좋은.
 
꽤 오래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얘기했다. 눈을 마주치고 있다고 의식하게 된 순간, 나는 그만 어색해져 슬쩍 고개를 피해가며 대화했다. 아랑곳 않고 씩씩하게 눈을 마주보며 얘기하는 그녀가 부럽다. 그녀의 나이에, 나의 나이에, 우리 세대가, 다시 세대를 넘어 그녀가그냥 어른 말고 좋은 어른이 될 거라는 믿음이 생긴다. 나에 대한 믿음이기도 하다. 모두 다 이미 알고 있는 좋은, 말이지.
 
시간 가는 줄도 몰랐는데, 어느덧 저녁식사시간이다. 세미나를 끝낸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온다. 오늘은 연구실에 사람이 많은지 식당에서 카페까지 밀려 왔다. "밥 먹어요" 감기 때문에 밥맛이 안 인다던 그녀는 약을 먹어야 하는지 이내 밥을 먹으러 가겠다고 한다. 맛있게 먹어요, 네 안녕히 계세요. 다시 봐도 치아 교정기가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한다.
 
글자를 새하얗게 지울 정도로 강한 봄볕이 어느새 책읽기 좋은 조명으로 바뀌었다. 어둑해진 카페에 조명을 켜려다 만다. 나는 읽던 책을 마저 펼쳐 읽는다.
 
삶은 경험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경험을 나누고 싶어 하는 마음이 삶에 더 가까운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눈을 마주치기에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이라면 서로 귀를 마주하고 대화해도 좋을 일이다.
이 모든 생강차가 만들어낸 시간.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