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만의 행복을 찾아." 카우리스마키의 <레닌 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
 

“카우리스마키 영화는 인간들이 서로 위로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황혼의 빛>의 마지막 장면처럼 사람들은 그저 누군가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살포시 포개는 정도의 위로만 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하죠.”

한 영화 이론 수업에서였다. 선생님은 카우리스마키를 소개하며 그리 말했다. 그 한마디에 나는 그의 영화들을 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그건 모두가 소통을 당위처럼 말하는데 왠지 그의 영화는 또 다른 삶의 진실을 보여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였다.

영화감독 각자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공부를 카우리스마키로 시작하고자 한다. 누군가와 친구가 되고 싶을 때 난 늘 그 사람의 이름을 몇 번씩이나 곱씹는다. 익숙해 질 때까지 말이다. 처음에 카리우스마키인지 카우리스마키인지 아주 헷갈렸는데, 이젠 아주 익숙해진 이름 ‘아키 카우리스마키’ 이 글을 쓰며 나는 앞으로 한 편 한 편씩 그의 영화를 볼 것이고 글 한 편 한 편 쓸 때마다 카우리스마키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그의 영화일생을 관통하는 메시지가 뭔지 파악해보고 또 수정하며 차근차근 공부하고 싶다. 


한국에선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카우리스마키는 핀란드의 대표 영화감독이다. 2002년도에 만든 <과거가 없는 남자>는 깐느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고 세계 유명 감독들이 참여한 옴니버스 영화 <그들 각자의 영화관>에도 참여했다. 우리에겐 너무 낯선 핀란드 영화. 영화로 핀란드와 만난다고 하면, 일본 영화 <카모메 식당>의 배경이 핀란드였다는 게 먼저 떠오른다. 그 영화를 보며 ‘그 살기 좋다는 사회복지국가 핀란드에서도 사람 사는 풍경은 다 똑같구나’ 싶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무 말도 없이 떠나버린 남편 때문에 괴로워하는 한 여인이 술을 마시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물론 이러한 나의 생각은 핀란드에 대한 무지 때문이다. 그저 사람들 살기에 좋고 평화로운 눈동자를 가진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고 생각되는) 핀란드.

카우리스마키는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의 뒤틀리고 이상한 풍경을 잡아내려고 하는 감독이다. 그의 시선이 내부인들에게는 그다지 특별할 것이 없다할지라도 외부인이 보기엔 주는 의미가 깊을 것 같다. 현실 가능한 이상향처럼 보이는 핀란드에 사는 영화감독이 그리는 세상의 어두운 풍경은 어떠할까? 그의 영화 주인공은 늘 소외된 주변인들이다. 무엇보다 자신의 시선을 표현하는 방식이 독특하다. 인과관계가 분명한 서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인물의 심리를 파악할 만한 대사가 많은 것도 아니다. 인물들의 행동은 우스꽝스러운 슬랩스틱 코미디이고 그렇다고 장면 마다 인물들의 동선이 화려하지도 않다. 그의 영화를 보는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뉜다고 한다. 아주 좋아해서 매니아가 되거나 아니면 재미없어, 이게 뭐야. 딱히 이야기에 집중도를, 그렇다고 캐릭터에 집중도를 부여하지도 않으니 말이다. 나는 어떠했냐고? 작위적인 캐릭터와 탄탄한 구성도 없이 전개되는 이야기가 오히려 더 영화적이라 느꼈으니. 왜 일까, 왜 좋았을까? 아마 나의 공부는 그의 작품이 왜 영화적이라 느꼈는지 자꾸 찾아보고 생각하는 것이 될 것 같다.


두 개의 이야기 세계 충돌

처음 고른 그의 영화는 바로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1989) 카우리스마키 영화 중 대중적으로 가장 큰 사랑을 받은 영화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툰드라의 어느 곳,  레닌그라드 카우보이라는 밴드의 연습실이 있다. 첫 장면은 밖에서 연습을 하다 얼어 죽은 베이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렇다고 그가 죽은 것이 큰 의미가 있진 않다. 심지어 나중에 이 시체가 다시 부활한다. 드라이로 녹여서 말이다. 밴드는 여기서는 인기 끌기가 어렵다는 말과 함께 온갖 쓰레기들이 다 모여든다는 미국에나 가보라는 제안을 받는다. 매니저는 우리 모두 미국인이라는 거짓말을 하고는 밴드에게 영어를 시켜가며 미국행을 한다. 하지만 거기서도 형편없다는 평가와 함께 멕시코에 사는 사촌의 결혼식에나 가보라는 얘기를 듣는다. 밴드는 졸지에 미국 유랑민이 되고 여자저차 일을 겪으며 결국 멕시코로 가서 결혼식 공연을 한다. 그리고 멕시코에서 이들은 자신들의 노래로 당당히 성공한다. 영화 이야기의 큰 줄기는 이러하고 딱히 인과관계 없는 다양한 에피소드로 묶여 있다.


뒷머리카락까지 있는 대로 그러모아 앞을 향해 뾰족하게 세운 머리, 우리에겐 김무스로 통하는 머리를 하고선 까만 양복에 까만 선글라스에 뾰족 구두를 신고 있다. 그냥 봐줄만한 김무스나 뾰족 구두가 아니다. 아무래도 현실에서는 없을 만한 외양을 한 인물들이다. 개의 머리마저 김무스로 만들어놓았다. 이런 그의 표현 방식은 어찌보면 꽤나 ‘유치’하고 노골적으로 보인다. 가령, 밴드와 광팬의 관계가 그렇다. 밴드들의 김무스는 멋들어지게 앞으로 뻗어있고 숱도 많다. 하지만 광팬의 김무스는 삼각김밥 하나 크기도 안 될 정도로 조그맣다. 김무스가 조그마해서 밴드에게서 무시를 당하지만 그는 그들을 쫓아 미국까지 따라간다.




                   저도 미국 갈래요.                           그 정도 김무스로 어딜 따라와.            


내가 처음에 표현 방식이 되게 유치하다고 생각했던 건 아마 감독이 이야기 세계에 충실하기 때문일 것이다. 개의 머리마저 김무스로 만든 것은 얼마나 이야기 세계에 충실한 것인가! 보통 영화의 디제시스 즉 이야기 세계는 허구가 전제라고 인정하고 보게 만든다. 하지만 이 영화는 자꾸 의심하게 만든다.

영화에는 두 개의 이야기 세계가 있다. 하나는 레닌그라드 카우보이들이 있는 세계이고 또 하나는 미국 즉 우리가 현실적이라고 느끼는 세계다. 예컨대 현실적이라고 하면 죽은 시체가 다시 살아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미국에서 밴드가 차 위에 시체를 싣고 악기를 연주하면서 걸어가자 경찰이 다가와서 죽은 시체를 왜 들고 다니나며 미친놈이라고 감옥에 가둔다. 하지만 이 시체는 밴드가 미국을 거쳐 멕시코에 도착했을 때 아무렇지 않게 다시 살아나 함께 노래를 부른다. 애초부터 이들은 동료가 죽었다고 슬퍼하지도 않았다. 영화를 보면서 현실성이 떨어지고 작위적이라고 느끼는 부분은 이런 지점들이다. 밴드가 미국행을 할 때, 어떻게 시체를 들고 비행기를 타는가? 왜 멕시코에서 시체가 다시 되살아나지? 두 개의 이야기 세계가 부딪힐 때, 당연히 우리가 믿는 현실성이 있으니까, 밴드의 행동이 이상하거나 우스꽝스러워 보일 수밖에 없다.


"뉴욕은 정말 무서운 곳이야. 매일 사람이 죽어나가는 곳이지, 티비에서 봤어."
(이 영화는 대사가 거의 없는 음악 영화인데, 몇 안 되는 대사 중 한 장면)


밴드는 미국에서 시체를 싣고 다니다 감옥에 갇힌다


이러한 사실이 영화를 보는 걸 방해하진 않지만 중요한 건 이런 다른 두 세계의 부딪침이 어떤 효과를 내는가일 것이다. 왜 두 개의 이야기 세계를 만들어서 한 쪽을 현실성이 없다고 느끼게 만들었을까?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밴드가 사는 세계가 우스꽝스러워보이고 말도 안 되게 느껴지는 건 이들이 미국 생활을 좇는 것이 얼마나 맹목적이고 이들에게 맞지 않는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감독은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밴드의 세계를 자꾸 미끄러지고 우스워지게 만들면서, 이들의 아메리칸드림을 비꼬는 게 아닐까?
이름에도 느껴지지 않는가.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 레닌을 기념하여 만든 도시 이름 '레닌그라드' 와, 미국을 상징하는 '카우보이' 가 결합됐다는 것 하며, 이들이 드림을 안고 아메리카로 떠나는 이야기. 91년도에 레닌그라드가 옛 이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이름을 되찾는데, 80년대는 이미 이 도시에 개방화가 진전되고 있던 상태라고 하니 감독은 사회주의 국가가 자본주의화되는 과정을 예민하게 포착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단순할 것 같지만 절대 단순하지 않은 인물들의 관계

이름도 모른다, 성도 모른다, 가족은 있는지, 집은 어딘지. 아무런 정보가 없다. 그의 영화 제목처럼 ‘과거가 없는’ 인물들이다. 그저 그들은 지금 여기서 함께 밴드를 하고 있을 뿐이다. 인물의 심리묘사도 없다. 개인은 없고 레닌그라드 카우보이라는 무리만 있다. 그 중에서 특색 있는 인물은 있다. 바로 밴드와 구별되는 매니저 블라디미르다. 어떻게든 밴드를 성공시켜 자기 배불리려는 인물이다. 그렇다면 이건 단순 착취관계인가? 이 영화에 대한 대부분의 평은 매니저와 밴드의 관계를 자본가와 노동자의 착취관계를 잘 드러냈다고 말한다. 이 감독이 맑스주의자라는 걸 생각해도 충분히 그러하다. 그래서 그의 영화 장면 하나하나를 분석하기 시작하면 온갖 상징으로 가득차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이건 뭘 말할거야, 라고 작정하고 들어가면 모든 게 다 어떤 대의를 말할 것 같은 상징처럼 보이기도 하다는 거다.

하지만 내가 인물의 구도가 그다지 간단하지만은 않다고 느낀 건, 선의 있는 인물도 악의 있는 인물도 없기 때문이다. 밴드에게 밥도 안 주고 양파만 먹이는 매니저가 악의 있는 인물일까? 영화에선 전혀 그렇게 보여주지 않는다. 밴드에게는 양파를 던져주고 자기는 혼자 숨어서 음식을 먹는 모습은 처량하기까지 하다. 매니저는 늘 소외되어 있다. 프레임 안에서 밴드는 '무리'로 매니저는 '혼자'로 배치된다. 어떻게든 밴드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위치이긴 해도 늘 혼자 놀고 혼자 맥주 마시고 밴드 사이에 끼어 게임도 못 하고 뒤에 서서 슬쩍슬쩍 쳐다본다. 더 재밌는 건 '문득' 화가 난 밴드가 매니저를 밧줄로 묶지만 매니저 없이 밴드는 늘 과소비에 사실 노래를 부를 클럽조차 얻지 못 하는 무능력자로 보인다는 점이다.
다시 매니저가 광팬에 의해 구출되어 밴드를 장악했을 때, 다음 에피소드의 제목이 ‘민주주의의 회복’이라는 점은 아이러니하면서도 웃음이 팍 터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또한 매니저와 밴드의 관계에 미국이 들어오면 매니저와 밴드는 마치 한 편처럼 보이기도 하다. 미국 앞에선 이들이 약자기 때문이다. 심리묘사를 잘 하지 않으면서도 복잡다단한 인물, 사회의 모습이 드러나는 점이 재밌다.



          나 혼자 맛있는 거 먹어야지                                  우리는 양파만 주고


우리가 인기 없는 이유는 창백해보여서라며 비치 보이스처럼 건강미 있게 보이려고 선탠을 시키는 장면.


결국 밴드는 미국을 거쳐 멕시코로 간다. 그 곳에서 그들의 노래는 인정을 받고 당당히 탑텐에 오른다는 자막과 함께 이 영화는 끝난다. 시체는 살아나고 이들은 흥겹게 노래를 부르며 매니저는 알 수 없는 희미는 웃음을 날리고는 사라진다.







내가 가장 좋았던 장면. 밴드의 광팬이 몰래 미국까지 따라와선 어느 이발소엘 들어간다. 이발사에게 자신의 짧은 머리를 한탄하며 길게 뻗은 김무스를 요구하지만 이발사는 당신 머리가 짧아서 그렇게 못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다음 장면. 광팬은 이발사가 준 음식을 묵묵히 먹고 있고 이발사는 기타를 퉁기며 노래를 불러준다.


그의 영화를 처음 본 소감은, 느릿느릿하면서도 따박따박 할 말을 내뱉는 이미지라는 것. 그의 영화는 내내 독립된 시퀀스만 존재하고 시퀀스마다의 인과관계는 없이 툭.툭 내뱉어버리는 듯하다. 카우리스마키 영화가 꽉 짜인 구성없이 툭툭 내뱉으면서도 독특한 울림을 주는 비결은 뭔가?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이 질문을 계속 떠올렸다. 뭘까, 뭘까, 뭘까? 그가 원하는 영화의 분위기가 잘 연출됐기도 할 것이고, 개인의 심리가 전혀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한 무리의 사람들이 주는 분위기가 캐릭터에서 잘 전달됐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희미하다. 앞으로 그의 영화를 보면서 적어도 이것 때문일 거라는 나만의 정답은 밝힐 수 있으면 좋겠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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