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희망을 말하겠어요, <황혼의 빛> 2006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 
                                                                얀 히티 아이넨, 마리아 헤이스카넨, 마리아 예르벤헬미 출연





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어렴풋이 사회 돌아가는 일이 이상한 것 같다고, 그래도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아마 그때 이후 사회운동에도 관심을 갖게 됐겠지. 그러면서 화 나고 눈물 나는 일을 많이 봤고 그건 내 삶, 내 가족의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부터 그리고 여전히 지금도 내가 가장 많이 생각한 문제의식은 국가가 나쁘니, 자본가가 나쁘니 같은 게 아니다. 바로 약자가 약자를 억압하는 일들이다.

왜  철거촌 사람들을 쫓아내는 용역들은 하루 일거리 찾는 가난한 사람들일까, 집회 나가서 싸우면 왜 맨날 경찰들이랑 부딪쳐야 할까. 쌍용차 사태에서 보여지듯이 왜 함께 일했던 직원들이 해고당한 자들에게 그리 매정하게 구는가. 진짜 적들은 언제나 뒤로 물러서서 또 다른 약자들을 방패막이 삼는다. 물론 이 모든 일들이 어쩔 수 없다 할 것이다. 알지만서도 늘 내 가슴을 치는 것, 바로 약자가 또 다른 약자에게 가하는 폭력이다.  

카우리스마키의 첫 번째,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 영화를 봤다. 나는 감독이 맑스주의자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영화 세계 안에서 인물관계를 단순하게 그리는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지금까지 여러 번 그의 영화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그의 영화세계는 꽤 단순하고 명료하다는 것이다. 

처음 난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에서 단순히 착취, 피착취의 관계를 그리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착취자로 보이는 매니저가 또 한편으로 가엾게 보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이제와보니 그 매니저는 결코 착취하는 자본가가 아니었다. 매니저든 밴드 멤버든 모두 사회의 약자로 그려진 인물이었다. 그저 미국을 동경하고 돈 벌고 뜨고 싶어하는 소시민들. 아니다 어쩌면 이 사람들은 시민이 아닐지도 모른다. 정착하지 않고 부유하는 사람들이었기에. 이 세계에서 시민으로 호명되지 못 한 사람들은 더한 약자일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본 그의 영화에서 경찰이 꼭 등장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그것도 어리석고 서민들에게 폭력적인 인물로 그려지는 건. <과거가 없는 남자>에서도 경찰은 '남자'를 괴롭히는 악당이었고 <황혼의 빛>에서도 죄없는 코이스티엔을 감옥에 집어넣는 어리석은 인물로 나온다.

더 정확히 말해, 그의 영화 세계가 단순한 것이 아니라 그가 보고자 하는 현실의 어떤 단면을 선명하게 그린다고 하는 게 맞겠다. 예컨대 자본가가 단순히 나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일상에서 그 사람은 얼마든지 좋은 인간일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노동자를 비인간적으로 부리는 자본가는 나쁜 사람이다. 카우리스마키는 그런 부분을 보고자하고 그걸 포착해서 인물 관계를 설명하고 이야기를 짠다.  




늦었지만 잠시 <황혼의 빛>을 소개해야겠다. 이 영화는 코이스티엔이라는 인물을 절망의 끝간까지 몰아간다. 핀란드 헬싱키에서 보안요원을 하는 코이스티엔은 돈 없고 별 볼일 없는 인물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루저'다. 그는 불만 많고 무뚝뚝하지만 사랑을 갈구한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를 싫어한다. 이유는, 모르겠다. 코이스티엔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조롱하는 표정은 하나의 유머장치이기도 하다. 그러다 그의 앞에 그를 유혹하는 여인이 나타난다. 하지만 그녀는 어떤 사업가가 사주해서 보낸 사람이다. 코이스티엔을 이용해 보석파는 건물의 보안을 뚫고 도둑질을 하려던 심산이었다. 코이스티엔은 경찰에 붙잡히지만, 그러나 코이스티엔, 그는 그 여자에 대해 단 한 마디 진술하지 않는다. 아, 바보 같은 코이스티엔. 그러니까 그는 그녀를 정말 사랑하고 싶었던 거다. 결국 그는 징역을 살고 그는 출감한다. 소개받아 접시닦는 일을 시작한다. 그러다 그 식당에서 여자와 사업가를 만난다. 사업가는 매니저에게 코이스티엔이 절도범으로 수감했다는 사실을 꼬지른다. 결국 직장에서 잘린다. 무표정한 그의 얼굴에 서서히 절망이 드리우기 시작한다. 분노한 그는 컵으로 칼을 갈아 사업에게 달려들지만, 너무 어설프게도 실패하고 죽도록 맞고는 공사장에 버려진다.



주목할 만한 관계는 코이스티엔과 그에게 접근해서 절망에 빠뜨리는 여자 '미리야'다. 미리야는 사업가와 연인관계다. 미리야는 코이스티엔에게 전략적으로 접근하면서도 계속 주저한다. 하지만 사업가는 그녀에게 계속 지시를 내린다. 일이 끝나면 행복하게 해줄 거라느니 돈을 주겠다느니 하며.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 있다. 코이스티엔과 미리야가 단순히 적의 관계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부분이다. 코이스티엔이 감옥에 갇히고 난 다음 장면. 사업가가 동료들과 카드게임을 한다. 그리고 그 뒤로 미리야가 주위를 청소하고 있다. 이 장면은 꽤 롱테이크다. 코이스티엔을 절망에 빠뜨린 그녀? 결국 또 다른 희생자였다.



카메라가 미리야의 무표정한 얼굴에 오래 멈추어 있고, 또 그 얼굴을 보고 있자면 뭔가 망설이고 고민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영화가 더 길었다면 그녀의 사연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영화에서 미리야와 코이스티엔은 끝내 화해하지 못 한다. 하지만 또 다른 관계. 소세지를 파는 '아이라'. 그녀는 코이스티엔의 얘기도 잘 들어주고 감옥에 갇혔을 때 편지도 자주 보낸다. 하지만 코이스티엔? 묵묵부답. 하지만 코이스티엔이 사업가의 조폭들에게 죽도록 맞고 포크레인 옆에 쓰러져 있을 때 그를 구해주는 건, 평소 술집앞에 앉아 있던 흑인 꼬마와 버려진 개, 그리고 소세지 팔던 '아이라'다. "여기서 죽지는 않겠다"는, 코이스티엔에게 그녀는 살며시 그의 손을 잡아 준다. 


 

<황혼의 빛> 을 보고 나서 난 선명하게 구호 하나가 떠올랐다.
"약자여 연대하라" 
그리고. 손을 잡아주는 마지막 장면에서 문득, 며칠 전 안녕하며 인사하고 돌아서던 친구가 되돌아 뛰어와선 그 야무진 손매무새로 내 손 꼭 쥐어주었던 기억이 났다. 그때 그 야무진 손의 느낌.
험난하고 더러운 사회라는 게 당연시된 이 세상에서, 눈을 마주하고 귀를 마주해야 할 사람들이 함께 하기, 그래서 진짜 못된 강자들과 싸우기. 그게 감독이 보는 황혼의 <빛>이 아닐까.

영화로 이 모든 사건을 지켜본다고 생각해보라.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얼마나 억울하고 속상할까. 하지만 이 영화는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다. 주인공의 절제된 감정과 건조하게 이어붙인 숏들은 그저 담담하게 지켜보게 만들 뿐이다. 그게 다른 계몽영화와 카우리스마키의 영화가 다른 부분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메시지를 담고 있으면서도 선동이나 계몽 영화처럼 보이지 않는 이유다. 서서히 아주 서서히 자기도 모르게 상황과 인물에 젖어들도록 한다. 그 지점을 느꼈을 때 카우리스마키에게 열광하게 되는 것 같다. 나는 이번 <황혼의 빛>을 두세번 돌려 보면서 아, 이 감독 이런 감정을 주고 싶었던 거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선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으면서도 선동영화가 되지 않고, 결국 희망을 말하지만 그게 희망 고문이 되지 않고, 고난-희망으로 이어지는 뻔히 짜인 시나리오 안에서 인물이 도구로 전락하지 않고 관객에게 생동감있는 캐릭터로 다가가는 게, 그의 영화다.  카우리스마키 영화를 지루해하는 사람들은 전자의 혹평을 하겠지만 나는 그게 너무 섣부른 판단이라는 생각을 한다. 영화 흥행요소를 하나도 갖추지 않았지만 그의 영화는 충분히 재미있다. 무엇보다 난, 그가 영화를 통해 하고 싶어하는 말이 좋다.
 


이 영화를 보다 내가 으아아, 했던 부분이 있다. 바로 코이스티넨이 슬쩍 미소짓는 장면.
시종일관 무표정의 코이스티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던 코이스티엔.
억울하게 감옥까지 간 그가, 그것도 감옥에서 아주 슬쩍 웃는다.

아, 감독은 어찌 이런 장면을 삽입한 걸까.
죽어도 감동따윈 없을 것 같은, 아예 주고자 의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 같은 영화였는데, 이 장면에서 으아아. 하고 만다.  

 
노골적이지 않게 이런 식으로 코이스티엔의 심적 변화를 드러낸다. 감옥에 누워서 주구장창 줄담배를 피는 코이스티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분명 많이 힘들 것이다. 많은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어지는 교도소 담벼락 장면. 줄줄이 죄수들이 벽에 붙어 서 있다. 코이스티엔이 딱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다른 장면에선 늘 외톨이처럼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서 있는지라 딱 눈에 띄었는데 이 장면에선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리고 코이스티엔 클로즈업.

그가 웃고 있다. 아주 엷게. 혼자 세상의 짐을 다 진 듯 어두운 무표정을 하고 있던 그가 보인 미소. 이거 너무 뻔한 장치인데 말이다. 아 이거 별 거 아닌데 진짜 울린다. 건조하고 절제하는 카우리스마키의 스타일은 이런 하나의 장면으로 "아, 이 감정 뭐지?" 하게 만든다.



또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명장면은,


바로 이런 거!

정체 불명의 흑인 아이와 주인이 밥도 안 주고 며칠 째 술집 앞에 묶여 있는 개. 둘이 동시에 코이스티엔을 바라보는 장면.



 

 



 내 집은 천지사방 영원한 곳
 posted by 눙미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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