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마케팅 탓이라고 하겠다. 파란의 러브스토리라 했으니, 그게 형부와 처제의 사랑이라고 했으니, 그런 줄만 알았다. 영화 장르가 단순히 멜로라고 믿고 극장엘 갔으니까. 형부와 처제의 사랑이라니, 키스 장면 하나 제대로 안 보여줄 줄 어찌 알았겠는가.(사실 그렇잖은가. 잘 안 보였다 -_-) 그렇다고 멜로가 아닌 것도 아니다. (감독도 멜로라고 했으니)  어쨌든 나는 관객으로서 미리 영화에 대한 지식이 있었고 영화를 본 후 그게 상당한 오해라는 걸 알았다. 결코 사랑이야기라고만은 할 수 없는 이야기. 형부와 처제의 러브스토리라고 알고 간 게 이 영화를 온전히 이해하는데 지장이 있는 건 아니었을까,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어쨌든 나는 이런 위치에서 영화를 보았고 '어떤 지점'이 계속 불편하게 다가왔다. 
미리 말하자면 이때의 내 불편함은 내가 익숙해하던 어떤 틀이 있었기 때문에 느꼈던 것이지 결코 부정적인 의미는 아니다. 이전까지 내가 보지 못 했던 영화이기 때문이다.  


배경


일단 내가 불편했던 점은 인물의 배경 설정이었다. 사건이 철거현장에서 벌어지고 중식(이선균)이 철거대책위 위원장이라는 점. 왜 배경이 재개발과 철거가 이뤄지는 장소였고 주인공이 운동권이고 투쟁을 하는 사람이어야 했을까.
여지껏 멜로물을 보면서 그 인물의 배경이 불편했던 적은 없었다. 두 인물의 사랑에 몰입할 수 있는 적절한 배경이 설정됐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형부와 처제의 사랑, 불륜 등 금기시되는 사랑은 흔히 중산층의 욕망으로 다뤄지지 않는가.  그러니까 나는 여지껏 철거민과 같은 사회적으로 크고도 예민한 소재와 사랑에 대한 얘기가 결합한 영화는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친구는 물었다. “철거라는 소재를 수단으로 사용해서?”  아니다. 난 오히려 인물의 배경이 너무나 중요하게 부각돼서 불편을 느꼈던 것이다. 감독이 너무나 적극적으로 이용해서. 나름 상업영화라고 내놓고 만들었으면 이런 소재를 안 쓸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으니까. 사회이슈를 다루는 영화도 아닌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사회적인 얘기를 깔아두었을까

더 솔직해져보자. 철거 얘기 등은 마치 인권영화제에서만 나올 법한 영화라고만 여겼다. 파주에서 집요하게 철거민와 용역깡패들의 싸움을 집요하게 보여주는 장면은 내가 지금 다큐를 보고 있나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중식과 은모가 철거현장에서 물대포를 맞다가 대화를 나눈 다음 장면에서 은모와 중식이 사랑을 고백하는 행동은 느닷없었다. 물대포가 쏟아지는 현장에서 허름하고 낡은 방 안으로 옮겨지고 갑자기 '나를 사랑하긴 했었나요?' 라는 대화를 나누는 게, 맞지 않는 두 개가 결합한 느낌. 이 경계에서 느낀 내 불편함. 그래서 더 기막힌 장면!

거칠게 나누어보자면, 개인의 문제와 사회의 문제를 같이 붙여놓았을 때의 어색함이라고 생각한다. 80년대 학생운동이 한창이던 때, 연애 이야기는 마치 하찮은 것으로 취급되었던 그때의 그 사고방식과 지금의 내 경직된 사고의 틀이 내용은 다르더라도 틀에서는 비슷한 것 같다. 결국 이 영화가 좋았던 것은, 흔히 사회의 영역이라고 하는 것과 인간 개인의 영역이라고 하는 것을(내가 이런 틀을 갖고 있구나를 이번에 깨달은!) 갖다 붙이고 뒤섞으면서 경직된 두 이분법을 무너뜨리면서 나아갔기 때문이다.

이 글을 한참 쓰던 중 문득 김연수 작가가 떠올랐다. 그의 소설을 읽은 것은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과 단편 하나 뿐이지만 그 책들에서 풀어나가던 이야기나 고민들이 비슷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나는 이 영화를 두 번 보았다. 처음 보았을 땐 인물의 배경과 개인의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이해는 잘 되지 않고 중식은 너무나 가여워서 마음만 아팠다. 두 번째 볼 때는 주인공들의 상황에 휘둘리기보다 인물들이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대처하는 각자의 방식, 결정하기까지의 복잡한 심정들을 조금은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됐다.
 

  영화의 후반부, 화염병을 던지고 사람들이 용역에게 맞고 물대포가 쏘는 철거현장을 부유하듯 걸어가며 중식에게 향하는 은모를 스테디캠으로 유유히 따라갔을 때, 그리고 중식 앞에 섰을 때, 그리고 질문했을 때.

  “이런 일 왜 하세요. 이 일이 형부한테 무슨 보람이 되죠?”
   “처음엔 멋져 보여서 그 다음엔 내가 갚을 게 많은 사람인 것 같아서. 지금은 잘 모르겠다. 그냥 늘 할 일이 생기는 것 같애.”

 아마 모두가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믿으며 곱씹었을 대사.
할 수만 있다면 좀 더 깊이 인간을 이해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인물을 이런 상황에 던져둔 것은 감독의 당연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인간은 사회에 영향을 받는 존재이고 사회와 개인이 부딪쳤을 떄 인간 존재라는 게 더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인물

이 영화에는 인물들의 감정을 쫓아가기 힘든 부분이 많다. 저 인물 갑자기 왜 저런 말을 하지? 쟤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건가 싶다.  중식을 괴롭힌 은모가 언니 은수에게 강제로 끌려가 사과를 해야했을 때, 왜 그랬냐는 중식의 물음에 은모는 느닷없이 '우리언니괴롭히지 말라'고 한다. 지금까지 은모의 감정이 촘촘히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런 내 감정을 '중식도 느꼈을 거라고' 생각하면, 갑자기 인물들이 진짜 살아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인물이 '이해되지 않는 게' 아니라 내가 종잡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나에게 이해받기 위해 만들어진 캐릭터가 아니라 자신의 호흡대로 영화 안에서 시간을 살고 있다.

 감정이란 걸 카메라로 담기란 참 어려운 것이어서, 어떻게든 표정으로 연기로 드러내고 그 맥락이 이해되게끔 서사를 진행시킨다. 그럴 때 인물에게 이입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독은 이걸 비틀면서 인물과 배경 모두를 관객에게 익숙치 않은 방식으로 만들었다. 이걸 어색해하고 편안해하지 않으면서도 내가 끝내 박수를 칠 수밖에 없던 것은 무엇보다 삶에 더 가까워지고자 한 영화였기 때문이다. 더 영화다워지려고 하는 영화 속에서 이 영화는 삶에 더 가까우려 한다. 삶이란 게 워낙 모호하고 복잡해서 그에 지쳐 영화에서는 잘 만들어진 '이야기'를 보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영화에 '또 하나의 삶'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면서도 '삶과는 다르길' 기대하는 것 같다. 지금 내가 <파주>에 대해서 희미하게나마 말할 수 있는 것 이런 말 같다. 너무 삶 같아서 불편해.

거친 사고를 자꾸 다지고, 묻지 않고 넘어가는 것들을 어린 애처럼 자꾸 물어본다. 은모처럼. 알고 그러는지 모르고 그러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은모처럼.


  그래서 내가 좋았던 장면은 오히려 쳐내지 않은 곁가지 같은 것들이었다. 감독은 인물 하나 하나에 꼭 서사를 만들어준다. 친구의 아버지가 혼자만 장사나가서 미안하다고 전해주라고 딸한테 돈봉투 주고 가는 장면에 시간을 할애할 때, 사건이 종료됐는데도 카메라는 떠나지 않고 이제 투쟁하는 일 그만두겠다는 사람의 모습까지 응시할 때. 박찬옥 감독의 전작 <질투의 나의 힘>과 아주 많이 다르면서도 이 점은 굉장히 비슷했다.

귀찮아서, 어차피 이해받지 못 할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냥 뭉뚱그려 '말해버리고' 마는 실은 복잡한 인간의 심정을, 카메라로 본다고 보이는 것도 아니란 걸 알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쉽게 적을 만들어버리고, 불안한 게 싫어 남들도 나조차도 명확한 언어에 희생시키고, 복잡한 사연에 다 귀기울일 수 없어서 무심한 나를 탓하며 후다닥 도망가고. 그래도 어쨌든 살아가야 하니까, 다 따지다가 한 마디도 못 하고 아무 행동도 못 하고 아무 글도 못 쓸 것 같으니까. 왜 사냐. '아-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자꾸 할 일이 생기는 것 같다.'

글 쓰는 나 역시 점점 더 모호해지는 게 사실이다. 쓸 수록 인물들은 더 알 수 없고 이 영화가 뭔지 모르겠다. 그래도 어떻게든 이 영화 어땠다고 이야기하고 싶은 이 마음은 뭔지. 그냥 영화의 마지막에 어딜 보는지도 모르겠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는 은모의 얼굴을 딱하니 갖다 박으면 가장 좋은 건데, 싶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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