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한밤중 느닷없이 일어나더니 냉장고로 간다. 냉장고 안은 고깃덩어리들도 그득하다. 여자는 고기뭉텅이들을 정신없이 끄집어내고는 모두 버려 버린다. 그리고 다시는 고기를 먹지 않는다. 꿈이었다고 했다. 꿈 때문이라고, 밤마다 꿈에 어떤 얼굴들이 나타난다고. 그녀는 그렇게, 살다가, 더 이상 살던대로 살 수 없게 되어버린다. 처음엔 단순히 고기를 먹을 수 없어졌던 그녀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둘 수 없던 주위 사람들에 치이며, 정말 미친 인간이 되어버리고, 나무가 되고 싶다는 그녀는 더 이상 아무것도 먹지 않고 햇빛만을 쬐이며 나무껍질처럼 바싹 말라간다. 영화 <채식주의자>는 돌연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여자와, 그런 그녀로 인해 뒤틀리는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다.  

영화의 원작을 읽었다. 개봉 전부터 이 영화를 기대했던 건, 원작 소설 때문이었다. 이미 내용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지만서도, 단숨에 그 소설을 읽어 내려가면서 느꼈던 그 빙글거림을 이미지로 보고 싶었다. 인간 육체에 발린 이상한 끈적거림을 만진 듯한 기분, 나무껍질에 맨살이 슬리는 야릇함.  

영화를 보는 내내, 고통스러웠고 불편했고 안타까웠고 조금 슬프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이 좋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영혜라는 인물 그 존재를 통해 나는 빙글거리거나 울렁거리거나 휘청거리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영화 속 영혜는 이해하고말고의 대상, 어떤 욕망의 대상이었다. 나는 영혜라는 캐릭터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 했다. 물론 그게 연출의도였을지도 모르겠지만. (보통 인물을 잡을 때, 인물이 바라보는 시선 쪽에 여백을 남겨둔다. 하지만 이 영화에선 영혜를 제외한 인물들을 잡을 때 보는 시선 쪽을 닫아버렸더라 영화의 구성으로 보면 영혜, 영혜의 언니(지혜), 영혜의 형부(민호) 세 명의 시점에서 각각 진행되는데, 실제 영혜의 부분에선 그리 힘이 없다.





  그녀가 꾸었다는 꿈, 그녀가 보았다던 그 얼굴들


  나는 영혜의 세계를 좀 더 접하고 싶었다. 그녀가 보는 세상은 어떤 모습인지, 하루아침에 세상과 단절해버리게 만든 그녀의 꿈은 무엇이었는지, 그 꿈에 나타난 얼굴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베이컨의 그림 같은 그런 혐오스런, 고깃덩어리에 불과한 얼굴들이었을까, 일그러지고 뒤틀린 그런 얼굴들 말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영혜가 좀 더 입을 열기 바랐던 그 꿈 이야기. 왜 고기를 먹지 않느냐는 질문에, 꿈에 얼굴들이 나온다고 하고 그냥 넘어간 그 말, 대충 영혜를 이해시키기 위한 수단으로만 쓰인 것 같아 아쉽다. 그녀가 어릴 적 겪은 그런 폭력적인 것들조차 말이다.   

같이 안타까워하고, 불쌍해하고, 좀 이해해보려고 애도 쓰다가, 툭 튕겨져 나와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고, 나는 딱 그 정도에 머물렀다. 세 사람이 꽉 쪼이듯 엮여서 사건을 만들어내고 그게 파국으로까지 이어지는 과정은 흥미롭지만, 결국 그 중심에 있었던 영혜라는 인물. 여전히 프레임 안에 갇혀 있는 듯하다. 온 몸에 꽃을 그리고 부시는 햇살 앞에 서서 온 몸을 늘이지만, 그 장면 자체로는 아름답다할지라도, 그녀의 몸짓을 풍성하게 해줄만큼 어떤 새로운 감정을 불러일으키진 않는다. 영화가 그 영혜라는 인물을 표현하기엔 버거웠던 것은 아닐까 싶다.




원작 소설이 있는 영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나의 과제로 남았다. 원작을 넘어선다는 영화란 어떤 것인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던 소설 속 인물들이 어떤 구체적인 형상으로 빚어져 쨍한 화면에 드러났을 때, 그 긍정적이기도하고 부정적이기도한 ‘깸’의 느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좀 더 영화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뭐 이러한 고민 말이다. 



덧) 최근 체홉의 단편소설들을 읽었다. 그러다 만난 글귀다. 영혜가 생각났다. 사는 건 이토록 불가해하고 환상적이라 생각해보면, 영혜라는 존재가 그리 버겁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인생이나 저승 세계나 매한가지로 불가해하고 무섭습니다. 유령을 두려워하는 자라면 나도, 저 불빛들도, 그리고 저 하늘도 두려워해야 마땅하지. 왜냐하면 이 모두가 잘 생각해 보면 저승의 망령들만큼이나 불가해하고 환상적이니까.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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