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빛같은 영혼들과의 대화, 그리고 어울림 
[미디어현장]정혜윤 CBS PD 
 
 
최근에 라디오 PD는 어떤 직업이냐는 순진한 질문을 자주 받게 되었다. “라디오 PD는 방송이 끝나면 참 한가하지요?”란 질문을 들으면 솔직히 억울하다기보다는 상큼한 바람이 머리를 날려주는 것만큼이나 시원하고 기분이 좋다.

어쨌든 그래서 라디오 PD란 어떤 직업인가 하는 질문을 내 자신에게도 던져보게 되었다. 내가 처음 라디오 PD가 되던 일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면 그건 새빨간 뻥이다. 오히려 몇 가지 에피소드를 빼면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게 솔직한 말일 것이다.

이를테면 처음 CBS에 입사하던 날 길을 건널 때, 맨홀을 통해 하수구의 바람이 올라왔고 그 순간 나의 치마가 7년 만의 외출에 나오는 마릴린 먼로의 것처럼 휘날렸던 일은 기억한다. 왜냐하면 그 치맛자락 날리는 와중에도 나는 ‘이건 마치 영화같잖아’라고 생각하다가 결국 첫날부터 지각을 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 뒤로 이어질 수많은 지각의 서곡이었기 때문에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라디오 PD가 어떤 일인지 한동안 전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입사 후 대략 다섯 달 동안 “잘 모르겠는데요!”란 말만을 입에 달고 다녔다. 어느 날 나의 선량한 선배들이 은밀히 모여서 “저 애가 인간이자 PD가 될 수 있을까?” 라며 나를 안쓰러워했단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 때 그 사실을 알았다 해도 내가 훌륭해졌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입사하고 한 달쯤 있다가 나는 추운 한강에 가서 벌렁 드러누워 본 적이 있다. 그 당시 내 주머니에는 맥스웰의 공식(전파방정식)이 적힌 메모지가 들어 있었다. 노트 한 페이지에 부호가 가득 차는 아름다운 공식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이 알 수 없는 부호는 아니었다. CD의 무지개빛, 돌아가는 엘피의 바늘, 마이크의 온에어 불빛, 다 내게는 알 수 없는 부호들이었다. 나는 음악이, 말이, 호흡이, 한숨이 어떻게 저 하늘을 날아서 타인에게 해독 가능한 신호로 다가가는지 끝없는 신비감에 사로잡혔다. 나중에 하늘에는 전파를 반사하는 층, 헤비 사이드층이 있단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내게 말할 수 없는 위로가 되었다. 저 하늘에 비밀이 있고 라디오 PD로서 나의 역할은 저 하늘의 반사층처럼 매개자, 혹은 매개체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순수 매개체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루크레티우스는 인간을 허공에서 우연히 떨어져 내리는 돌멩이로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 돌멩이인 우리 인간의 움직임은 그저 덧없기만 한 것일까? 그런데 그렇게 낙하하는 와중에 우리 입자들은 우연히 서로 만나고 그리고 그때 조약돌들은 부딪혀 불빛을 낸다. 간단히 말하면 나는 매개자이자 매개체로서 이런 불빛들에 주목하는 사람, 이런 불빛들의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사람, 이런 불빛들의 과정에 동참하는 사람, 이런 불빛들과 같이 내 영혼도 낙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라디오 PD인 내 직업은 나를 끝없이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자 끝없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왔던 것 같다. 전파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면서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을 느끼는 것이 나의 직업이다. 그렇게 날아다니면서 나는 평범한 사람과 위대한 사람의 차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전형적인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완벽한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사람들은 서로 서로 섞이며 쏟아져 내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들은 말하기 어렵다는 것, 그래서 누구든지 자기의 비밀을 갖고 있다는 것, 그래서 오로지 말의 고백에 의존하는 라디오는 비밀의 입구(늘 질문을 던지고 의문하는 자만이 통과할 수 있는)라는 것 등을 알게 되었다. 나는 라디오 PD로서 끝없이 인간의 신호를 포착하는 사람, 그 신호를 반사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마치 하늘을 올려다보듯 인간을 바라보면서).

그런데 최근에 집중적으로 받는 한 가지 질문, 즉 “당신은 라디오 PD인데 왜 책을 읽고 글을 쓰지요?”에 대한 답변까지를 이 글에서 덧붙인다면 이렇게 낙하하면서도 자신의 궤도를 유지하려 하는데서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가치가 나오는 것이고 나는 그런 사람이 어디 있는지 절대 놓치지 않기 위해 책을 읽고 글을 쓰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정말 좋다. 정혜윤의 글. 처음엔, 그냥 박학다식한 사람의 빡빡한 글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은근 매력이 있어 조금씩 읽다가 이젠 어떻게든 다 뒤져서 그녀의 글을 찾아 읽는다. 악악.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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