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으로 가는 KTX를 타러 승강장을 걷고 있었는데, 저만치 앞에서 죽어라 지르는 고함 소리가 들렸다. 싸움이 난 걸까 해서 살짝 긴장하며 걸어 가는데 점점 가까워지는 소리와 함께 한 할아버지가 보였다. 이 여편네 대체 어디 가 있었냐고 무식하게 길도 모른다고 삿대질을 해가며 바락바락 악을 쓰는데 그 앞엔 주눅 든 자세로 왜 그렇게 화내냐며 마른 목소리를 내는 할머니가 있었다. 두리번 대는 자세가 주눅 들었다기보단 이 상황이 너무 부끄러운 듯 했다. 아마 할머니는 잠시 화장실을 다녀왔다본데 표에 적힌 차량번호를 제대로 찾지 못 했나 보다. 그 할머니를 할아버지는 찾아 다녔을테고. 저러다가 오히려 기차를 떠나보내겠다 싶은데도 할아버지는 고함 지르길 멈추지 않았다. 그것도 못 찾냐고 기차 놓치면 니가 다 책임질거냐, 나는 정말 듣기 싫어 참을 수가 없었다. 아내를 막 대하는 그 태도가 혐오스러웠다. 나는 바짝붙어 몇 번이나 할아버지를 부라려 보았지만 그는 주위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저 할머니는 몇 십 년간 저렇게 권위적인 남편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을까. 짧은 순간 본 그 풍경만으로도 고생스러웠을 그녀의 지난 인생이 상상됐다. 기차에 자리 잡고 앉았는데도 한참이나 속이 상해 있었다. 함께 가던 다른 이들에게도 그건 잊혀지지 않는 풍경이었나 보다. 그게 무슨 민폐냐 할머니가 참 안됐다는 등의 오고 가는 말들. 그때 누군가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의외였다. "난 그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얼마나 사랑하면 그럴까 싶더라고."
그런가요 그건 사랑일까요. 그래도 그런 태도는 용납할 수 없는 거다 싶었지만, 순간적으로 그 노인네가 할머니 잃어버릴까봐 쩔쩔매며 겁이 났을 장면이 상상되는데 이미 상상해 버린 이상 나는 그 노인네가 가여워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근데 그거 사랑이라고 불러도 되는 건가요.
미진한 분노는 연민 때문인 경우가 많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 그러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