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자식

일상 2011. 10. 28. 23:30

  샐쭉하니 또래보다 키가 크고 마른 여자 아이가 교탁 앞에 서 있다. 머리는 한갈래로 단정하게 묶었다. 수업이 모두 끝났고 아이들은 교실 여기저기를 분주하게 돌아 다닌다. 책상 위에 뒤집힌 걸상들이 위태롭게 바들거리고, 오후 햇살에 비치는 먼지들은 분주하게 빛을 피해 달아난다. 
여자 아이가 왼손 바닥으로 칠판을 탁탁 두드린다. 얘들아, 불러 본다. 일순간의 정적, 하나둘씩 돌아 가는 아이들의 얼굴. 보이는 곳에 여자 아이가 오른손에 든 칠판 지우개를 들어 보인다. '칠판 청소 하고 싶은 사람 손 들어 볼래' 하고 물어 본다.  
감쪽같은 정적 뒤 금세 고개를 돌리는 아이들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고 몇몇이 여자 아이 주위로 모여든다. 다시 분주해 지는 교실. 여자 아이의 살짝 웃는 얼굴을 보고서야 그녀가 긴장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교실 뒷문에는 자신의 딸을 바라 보는 한 여자가 있다. 그녀는 말한다. 
내 딸이지만 반장이었던 그 아이가 그렇게 다정하게 말하는 모습이 참 기특하더라고. 친구들에게 뭐하라 명령하지 않고, 하고 싶은 사람 손 들어 보라 말하는 그 마음이 그리 좋더라고. 
 

이미 늙어 버린 여자는 끝도 없이 운다. 이십대에 죽어 버린 제 딸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딸의 죽음을 보지 못한 엄마는 남은 시체만을 붙잡고 억울한 죽음을 풀겠다며 몇 년 간을 미친듯 살았다. 살고 싶어 미친 게 아닌 자신을 완전히 놓아 버렸을 때의 그 온전한 미침. 그럴수록 정신은 더 또렷해졌을까 한 가지에 오롯히 집중할 수 있었던 걸까. 

6년 전 이 이야기를 처음 듣고 떠올렸던, 나는 겪지 못 한 어떤 순간의 이미지. 이 이미지가 불현듯 떠오를 때마다 그녀의 외로운 싸움에 함께 하고 있지 않다는 대책없는 죄책감이 든다. 며칠 전, 무거운 짐을 들고 육교를 오르며 힘들단 생각을 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이 장면이 보였고 특히나 이번에는 몹시 오래 머릿속을 맴돈다. 이런 마주침에는 내성도 안 생긴다. 행동과 실천이 줄어들수록 대책없는 감정들은 더욱 오래 붙어 있다. 무심해지지 않고 함께 무거워진다. 함께 가라 앉는다.

다정한 이 여자 아이가 보일 때마다 나는 그녀의 불행한 미래를 예견하며 시간을 멈추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여자 아이의 모습에 늘 뒤이어 보이는 건 제 딸을 바라보는 엄마의 얼굴이다.
 부모 자식 간에 인간적으로 매력을 느끼는 아름다운 순간. 하지만. 
어린 여자, 젊은 엄마, 젊은 여자, 늙은 엄마, 늙은 여자. 빠른 죽음, 긴 삶, 그 틈에서의 그리움, 남은 삶, 끝없는 죽음.
누군가의 삶을 예전 같지 않게 만드는 죽음들은, 그 종류가 어떤 것이든 늘 마음에 메인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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