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가 가지고 있는 열정의 근원을 정신분석학자들이 하듯이 오래된 과거나 최근의 경험을 더듬어 찾아낼 생각은 없다. 그리고 어린 시절부터 나에게 영향을 주었던 심리적인 모델을 근거로 해석하고 싶지도 않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나 페드라, 혹은 에디트 피아프의 샹송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만큼이나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나는 남의 눈에 이상하게 비칠 수도 있는 나의 열정을 변명하듯 일일이 설명하려는 게 아니라 다만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설명하려 든다는 건 결국 나의 열정을 애써 정당화시켜야만 하는 방탕함이나 큰 잘못으로 생각한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글을 쓰는 데 있어서 내게 미리 주어진 것이 있다면 그건 내가 열정적으로 살수 있게 해주는 자유와 시간일 것이다

 

2.

이런 이야기들을 숨김없이 털어놓는 것을 나는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이야기들을 기록하는 때와 그것을 나 혼자서 읽는 때, 그리고 사람들이 그것을 읽는 때는 이미 시간상으로 상당한 차이가 있을 터이고, 어쩌면 남들에게 이 글이 읽혀질 기회가 절대로 오지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남들이 읽게 되기 전에 내가 사고로 죽을 수도 있는 일이고, 전쟁이나 혁명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 시간상의 차이 때문에 나는 마음놓고 이 글을 쓸 수가 있다. 열여섯 살 때 일광욕을 한답시고 하루종일 몸을 태우고, 스무 살 때는 피임도 하지 않은 채 겁없이 섹스를 즐겼던 것처럼 나중 일을 미리 두려워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겪은 것을 글로 쓰는 사람을 노출증 환자쯤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노출증이란 은연중에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 싶어하는 병적인 욕망일 뿐이니까.)

   

3.

그런데도 그 사람을 향한 끊임없는 기다림과 갈망으로 가슴태웠던 지난 해 봄, 내가 그 사람을 떠날 수 없었던 것처럼 지금도 여전히 그 사람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글을 쓰면서 내가 바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글에는 사람들이 삶 속에 새겨놓고자 하는 것만이 남는 법이다. 또 글을 계속해서 쓴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읽혀질지도 모른다는 고통을 하루하루 연장시키고 있는 것과 같다. 하지만 글을 써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는 한, 그런 가능성은 개의치 않는다. 그러나 그 필요성의 극에 다다른 지금, 써놓은 글을 찬찬히 읽어보니, 놀랍기도 하고 부끄러운 생각도 든다. 이런 감정은 그 사람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살아갈 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들이다. 이것은 출판물이라는 관점에서 비평하는 세인들의 '정상적인'가치기준과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글은 자선전입니까?" 하는 장르의 문제에 대답해야 하고, 이것은 어떻고 저것은 어떻다는 식으로 억지로 정당화시켜야 하는 곤혹스런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런 종류의 질문은 전형적인 소설의 형식을 갖추지 않은 모든 글의 출간을 방해나는 게 아닐까?)  

지금, 내가 아니면 도저히 읽을 수도 없을 만큼 삭제와 교정으로 뒤덮인 원고를 앞에 놓고 있다. 나는 이것이 어떤 결론도 내리지 않는, 철저하게 개인적이고 유치하기 이를 데 없는 글이라는 생각이 든다. 노트 한 쪽에 낙서해놓은 외설스런 말이나 사랑의 고백처럼, 혹은 아무도 보지 않으리라 확신하면서 조용히 아무 탈 없이 쓸 수 있는 일기처럼, 그러나 이 원고를 타자치기 시작하고, 마침내 책으로 출간되고 나면 나의 순진한 생각도 끝장나고 말 것이다.

   

4.

정작 그 사람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그 모든 일들이 다른 여자가 겪은 일인 것처럼 생소하게 느껴지기 시작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사람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한계에까지, 어쩌면 그 선을 뛰어넘은 곳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나는 온몸으로 남들과는 다르게 시간을 헤아리며 살았다 

나는 한 사람의 열정이 어디까지 가능한지를 알게 되었다. 욕망은 극에 달하고, 자존심 따위는 없어지고, 다른 사람들이 그랬을 때는 무분별하다고 생각했던 행동을 신념에 차서 스스럼없이 했다.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세상과 더욱 굳게 맺어 주었다.

   

단순한 열정.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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