꾀병

일상 2013. 4. 21. 03:30

   

주먹을 쥐고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야무지게 펼친 시집이, 책상 위에 있다. 혼자 술을 마시고 취할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찬 속을 좀 덥혀보려 마시기 시작한 것이 꽤나 취해버렸다. 멍하게 음악을 듣다가 앞에 보이는 시집을 꺼내 읽기 시작했는데, 그러니까 큰소리로 또박또박 읽었는데 읽다가 슬퍼서 눈물이 나니까 눈앞이 흐려지고 목소리도 뭉개지는데 그런데도 끝까지 읽었다. 어떤 문장은 너무나 슬퍼서 정신이 더더욱 아득해지는데 어느새 주위 아무것도 보이질 않고 종이 위에 툭툭 떨어지는 눈물만 보였다. 젖었다 마른 종이가 못나게 솟았고 지저분하게 접어둔 귀퉁이들이 있다.

 

잠에 들면서, 술을 마시고 취해서는 큰소리로 시를 읽고 엉엉 울 수 있는 나만의 방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청승 떨 수 있어서 좋은 밤이었다.

 

   

   

꾀병/박준

 

나는 유서도 못 쓰고 아팠다 미인은 손으로 내 이마와 자신의 이마를 번갈아 짚었다 "뭐야 내가 더 뜨거운 것 같아" 미인은 웃으면서 목련꽃같이 커다란 귀걸이를 걸고 문을 나섰다 

 

한 며칠 괜찮다가 꼭 삼 일씩 앓는 것은 내가 이번 생의 장례를 미리 지내는 일이라 생각했다 어렵게 잠이 들면 꿈의 길섶마다 열꽃이 피었다 나는 자면서도 누가 보고 싶은 듯이 눈가를 자주 비볐다

 

힘껏 땀을 흘리고 깨어나면 외출에서 돌아온 미인이 옆에 잠들어 있었다 새벽 즈음 나의 유언을 받아 적기라도 한듯 피곤에 반쯤 묻힌 미인의 얼굴에는, 언제나 햇빛이 먼저 와 들고 나는 그 볕을 만지는 게 그렇게 좋았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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