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여행 2013. 5. 19. 02:30

 

여행 후 석 달이 되어가는데도 제대로 펼쳐본 적 없는 그때의 일기장. 손때에 닳는 것보다 오래

들춰지지 않은 종이가 더 빨리 늙는 것 같다. 책상 위에 꺼내두고 그냥 가만히 오래 쳐다보았다. 

 


내가 여행에서 깨달아야 할 것 :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쩔 수 없는 일들에 무한한 애도를, 그리고 반드시 나아질 것.

#비행기 

높은 고도 위에서의 이 안정감. 나는 지금의 이 안정감에 행복하지만, 이것이 도피이고 회피라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무엇으로부터 도피한 나의 용기와 견딜 수 없는 걸 견디지 않은 나의 약함을 존중한다. 그리하여 영원히 착륙하지 않는 비행기를 상상한다. 계속해서 도착을 미루며 그곳으로부터는 한없이 멀어지고 목적지와는 조금씩 가까워지지만 영원히 닿지는 않는, 무한대 같은 것. 출발지에서 움직였다는 안도감과 도착하길 원하면서도 원하지 않는 이 상태를 영원히 유지하고 싶은,

긴장이자 태만. 그러는 사이 찾아오는 피로라는 솔직함, 나는 이내 잠이 든다. 그동안 나타나지 못했던 오래된 꿈들의 축제. 높은 고도 위에서의 이 안정감에 나는 지금 행복하다. 맨몸으로 문 밖을 

나서지 않아도 되는 가장 높은 곳, 이 안락한 세상. (2013.12.28)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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