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피셔: (중략) 직접 행동은 양가적입니다. 여전히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힘에 대한 증거처럼 보이는 직접 행동 형태들이 존재합니다. 사람들이 직접 행동을 취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는 것은 비-직접 행동에 대한 신뢰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치란 비-직접 행동과, 마우리치오 라자라토가 "원거리 행동"action at a distance이라 부른 것과 관련되는 것이 아닐까요? 많은 경우 우리는 더 이상 체계적인 변화가 가능하다고 믿지 않기 때문에 직접 행동을 취하는 듯합니다. 그럼에도 역설은 직접 행동이 취해질 때만 체계적인 변화가 이루어질 것 같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전제되어 있는 것은-제가 주장하고 싶은 것이기도 한데-직접 행동이 지닌 중요성의 상당 부분이 그것의 직접적인 효과 너머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직접 행동에 있어 결정적인 것은 그것이 청원이라는 양식에서 탈피할 수 있는가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그것이 대타자로서의 자본에 호소하는지 아니면 그러한 대타자의 부적절함을 증명해 주는지가 문제겠죠. 우리는 저항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대항 세력을 구축해야 합니다.

조디 딘: 당신은 왜 공산주의가 아니라 포스트자본주의라고 말합니까? 왜 당신은 적이 우리를 비난하는 방식에 신경쓰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까? 그들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 계속 비난할 겁니다. 왜 공산주의가 진보와 계몽의 편에 있다고, 공동의 자원과 책임을 향한 집합적인 접근만이 자본주의적 야만을 종식시킬 유일한 대안이라고 단언하지 않습니까?

마크 피셔: 우리를 비난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사태를 손쉽게 만들어 주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거둔 성공 중 하나는 비자본주의적인 것을 전체주의적인 것과 결합시켰다는 점입니다. 놀랍게도 여전히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싫으면 북한에나 가서 살아라" 같은 논점의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공산주의'보다 '포스트자본주의'라는 용어를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특수한 용어들의 자기 복제적인 잠재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한 용어가 지닌 철학적 의미가 아니라 전파할 수 있는 그것의 힘입니다. 우리는 브랜드 컨설턴트나 광고업자와 경쟁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공산주의' 같은 단어를 거부할 텐데, 이 단어가 뒤집어쓴 오명을 벗겨 내는 개념적 세탁 작업에 너무 많은 노력이 들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할 조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우리는 이 용어를 위한 새로운 맥락을, 그것이 나타날 수 있는 새로운 개념적 성좌를 창출한 필요가 있습니다. 포스트자본주의라는 개념은 무거운 유산이 되어 버린 나쁜 연상들을 대동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공산주의와는 반대로 '포스트자본주의'라는 용어는 비어 있으며, 나아가 그 내용을 채우라고 우리에게 요청합니다. 이 용어는 또한 원시주의의 유혹을 피해갑니다. 우리는 전자본주의적 농경 사회로의 회귀가 아니라 새로운 어떤 것, 아직 형태를 갖추지 않은 어떤 것, 자본주의가 구축하고 동시에 좌절시킨 모더니티 위에서 건설할 수 있는 어떤 것의 출현을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내가 이 용어를 선호하는 또 다른 까닭은 그 용어가 우리의 승리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포스트자본주의가 무엇일지 묻는 일은 우리가 승리했을 때 그것이 어떤 모습일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듭니다.


『자본주의 리얼리즘』 마크 피셔 저, 박진철 역, 리시올 출판사
p157-159, 부록. 우리는 현실주의자가 될 여유가 없다: 마크 피셔와 조디 딘의 대담에서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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