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가을이었다. ‘비정규직보호법’이 통과되고 100일 후, 관련 평가 토론회가 있던 날. 대학생이던 나는 그 곳에 취재를 갔었다. 한창 사회문제에 눈과 귀를 밝히던 때였다. 사회 각계 사람들이 많이 왔고, 노동자들도 왔다. 도리어 비정규직만 양산하는 이 법안을 폐기하라는 내용이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있었다. 

결국 토론회는 시작되지 못 했다. 이상수 노동부장관이 단상에 나서 ‘노사정이 비정규직보호법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있었다’는 말을 하자마자 당시 이랜드, 뉴코아, 코스콤, 기륭전자 조합원들이 앞으로 쫓아 나갔기 때문이다. 장관은 도망갔고 조합원은 전경에 연행되면서 그렇게 끝이 났다. 


관찰자에서 당사자로

노동유연화란 명목으로 양산될 비정규직들. 그 비정규직이란, 정당한 대우는 못 받고 일만 더 죽어라 해야 하는 노동자였다. 당사자들의 어려움을 들을 생각도 않고 점점 더 안 좋은 방향으로 굴리는 정부에 화가 났다. 그 이후로 참 많은 집회에서 ‘비정규직 철폐, 투쟁, 결사, 투쟁’ 이란 구호를 외쳤다. 하지만 사실, 실감하는 건 아니었던 것 같다. (물론 사회정치참여의 중요한 동력이 ‘실감’할 수 있고 아니고가 될 순 없다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내 일이 아니었고, 앞으로 내 일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그때 그 법 생기고 나서부터 방송국에 비정규직이 엄청 많이 생겼다니까.” 같은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언니와의 우연한 대화였다. “정말요?” “응. 나 처음에 일할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어.”

묘한 실감이 났다. “아, 진짜 그렇게 되긴 되는구나.” 정말 말 그대로 진짜 그렇게 되긴 되는구나, 하는 생각. 짧은 순간 뭔가 나를 훅 치고 가는 느낌이었다. 당시 현장에서 이 법이 갖고 올 나쁜 영향에 대해 걱정이 되고 화도 났지만 그래도 이걸 끝까지 막아야 한다는 확신이나 절실함이 있진 않았다. 요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대하는 내 태도도 마찬가지다. 막아야 한다는 당위는 있지만 내가 머리로 아는 것만큼의 절실함이 없다. 그래서 곧잘 잊고 만다. 어쨌든 이 대화 때문에 4년 전 그 날의 현장을 떠올렸고, 그때 내가 막연히 비판했던 것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나는, 비정규직이다. 2년 계약으로 일 하는 파견직. 

회사 엘리베이터를 타려다 주위 곳곳에 붙은 플래카드를 봤다. ‘노동에 대한 합당한 임금 보상, 정당한 대우, 복지’ 등 강한 요구가 적힌 글귀들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어디에도 비정규직, 나 같은 파견직 노동자들의 노동환경의 부당함에 관한 얘기는 없었다. 아, 이런 기분이구나. 좀 씁쓸했다. 그렇다고 못 해먹겠다 싶을 정도로 속이 상하는 건 아니었다. 어쨌거나 내가 선택한 길이고 이 일이 어느 정도의 내 장래와, 거의 전부인 먹고 살 길이라고 생각하면 불만 때문에 멈칫거려서도 또 그럴 여유도 없다는 생각이 앞선다. 

이건 결국, 젊은 사람들의 꿈을 빌미로 값싸게 노동력을 쓰고 버리는 게 습관이 된 대부분의 직장이라는 곳의 현실이기도 하다. 그 어디보다 내가 일 하는 곳, 방송국이 수많은 비정규직들을 쉽게 쓰며 굴러 간다는 사실이 실망스럽다. 


당사자로 살아간다는 것

그럼 당사자인 나는? 어차피 2년 일 하고 떠난다고 생각하면, 불평등하고 비상식적인 노동 환경을 바꾸는 데에 에너지를 쓴다는 것이 얼마나 어마한 분노가 있어야 가능할까 가늠해 보게 된다. 이걸 놓쳐서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을 벌기도 어렵다.

무엇보다 이런 기분이다. 내가 당사자가 되고 보니 자꾸 내 위치를 확인하면서 타인의 눈에, 불안정한 직장 또 별 대우가 좋지 않은 노동자, 라는 딱지를 받고 싶지 않은 마음. 그래서 역으로 계급의식을 갖기란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실감, 한다. 열심히 구호를 외치며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고 분노했던 내가, 당사자가 되면서 균열이 일어나는 지점들. 

노동자로 살면서, 이것도 감지덕지야 라고 생각하는 내가 실망스럽다. 노력으로 충분히 변화가 가능한 공간에서 노동하기에, 그래서 내가 지금 ‘열심히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는 해결이 안 되는 답답함이 있다. 그래서 새로운 위치에서 새삼 이런 고민을 한다. 변화를 이끌어 내는 것의 원동력은 뭘까. 당사자가 되고 보니 분노하며 구호를 외칠 때보다는 이 고민이 백 배 더 어렵다. 그렇다고 어쩔 수 없지 뭐, 하고 말 내 모습은 가장 상상하기 싫다. (인권오름 2012년 01월 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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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장애아동을 만나다


나는 방송다큐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연출부에서도 조연출이다. 시작부터 끝까지 온갖 업무에 시달리긴 하지만 오직 작품에만 몰입해야 하는 위치는 아닌지라 제작 과정을 객관적인 위치에서 볼 수 있기도 하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단 한 마디라도 섞게 되는 게 이 직업이다. 그 과정이 보람되기도 하지만 불편해지는 경우도 많다. 방송을 통해 맺어지는 관계의 한계, 오가는 말들 속에 마음에 걸리는 어떤 언어들, 이것 아닌 다른 방향 혹은 전혀 새로운 방향에 대한 갈망. 생각이 참 많아진다. 아직 생각이 많다는 게 다행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앞으로 내 인권이야기에서는 방송을 통해 만나는 사람과 그 과정에서의 고민을 이야기 해보고 싶다.


엄마라는 말도 하지 못하는 아이

요즘 어린이 희귀병에 관한 방송을 만들고 있다. 그런 사례를 찾아 촬영을 하고 있는데 그 중 한 명이 복지원에서 만난 지적장애아동이다. 선천적인 유전병 때문에 지능이 낮아진 건데, 조기에 발견해서 식사요법이나 약을 잘 먹었더라면 정상적으로 자랄 수 있었던 거라고 했다. 그 아이는 지금 엄마라는 말도 하지 못한다. 어떤 사정이었는지 부모들이 일찍이 아이를 그곳에 맡겼다고 했다. 그렇게 자라 16살이 되었다.

많이 움츠려 있어 어디 아픈 건가 싶긴 하지만 외모는 그냥 그 또래의 남학생이다. 남동생 생각이 나선지 마음이 많이 쓰였다. 촬영을 끝내고 돌아와서도 문득 문득 생각이 났다. 그럴 때마다 하염없이 들었던 생각은 “이 친구가 정상적으로 자랐다면 살 수 있었을 평범한 삶”이었다. 그랬다면 느낄 수 있었을 세상, 할 수 있었을 활동. 상상할수록 마음이 쿡쿡 쑤시는데, 대책 없는 연민이었다.

내가 반사적으로 생각해버리는 정상적인 삶이란 뭔가. 말을 하고 들을 수 있고, 그래서 사람들과 어울리고 일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었다. 대충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삶 말이다. 그래서 내 연민이 싫었다. 과연 내가 이 아이를 불쌍히 여길 자격이 있는 건가 싶은 의문. 아무래도 불행할 거라는 짐작 때문일 텐데, 과연 내가 그의 행불행을 어떻게 알 수 있다는 건가. 내가 알고 있는 행복과 불행의 기준은 뭔가. 이 사회에서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행복의 조건은 너무 적지 않은가. 그리하여 만들어내는 것도 너무 빤하지 않은가. 

어쨌든 이 친구는, 제 때에 치료하지 못 해서 뇌 기능이 떨어진 하나의 ‘사례’였다. 같은 유전병을 앓지만 조기에 치료를 받아서 정상적으로 자란 아이와는 비교가 될 터였다. 방송 주제에는 적합했다. 조기검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할 수 있는 중요한 이미지였다. 이 아이는 분명 편집을 통해 가엾고 안타까운 사람으로 비춰질 것이다. 무엇보다 내가 참을 수 없었던 건, 이 아이가 ‘정상적’이라고 하는 아이와 비교되어 불행하게 비춰지는 것이었다. 그 죄책감이 컸다. 나 역시 떨치려 해도 잘 되지 않는 그 생각을 계속 하고 있었으니까. 


소통하기 어렵다는 변명

다른 어떤 장애보다 지적 장애에 마음이 쓰였던 건, 너와 내가 소통할 수 없다는 안타까움이었다. 공통감을 나눌 수 없다는,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불가능하다는 생각, 아니 착각. 아무래도 변명. 우린 이 사람이 지적 장애라고 들으면 너와 나는 소통하기 어렵다고 단정 지어 버리게 된다. 아니면 긴 시간과 지난한 노력이 있어야 가능할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우린 쉽게 게을러진다. (여기서의 ‘우리’ 역시 구별 짓고 있는 내가 보인다)

그토록 우리가 하고 싶어 하는 소통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정상적이라는 말만큼이나 참 쉬운 것 같다. 언어라는 틀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의 지능을 가진 사람들이 말을 통해 하는 것, 이게 소통에 관한 우리의 습관적인 생각이다. 그게 소통의 한계일 거다. 언어로 둘러싸인 세계를 잘 인지할 수 없고 언어로 자기의 의사를 표현하지 못 하는 그 친구는, 그래서 지적 장애라 불린다. 그런데, 정말 소통이란 무엇인가. 그건 그저 ‘정상적인’ 소통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서툴렀다. 분명 그를 촬영하러 갔지만 정작 그는 존재하지 않는 느낌이었다. 교감하고 싶어도 어찌해야 할 지 아무도 몰랐다. 물건 찍듯, 짧은 시간 안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을 거란 저마다의 짐작으로 최대한 필요한 것만 찍고 마무리했다. 각자 마음에 어떤 꿈틀거림이 있었을 테지만 그저 손 한 번 만져 보고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하는 것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최선이었다.

그 날의 내 고민을 말하자 친구는 말했다. 한없이 가여워하는 내 태도부터 바꾸라고. 특히 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되지 않았으면 가능했을 무언가’를 생각하는 건 실례라고 말이다. 중요한 건 현재라고, 그 사람이 더 잘 지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관심을 기울이라고 했다. 덧붙여 해준 말이 인상적이었다. 사람들의 행복함이 나타나는 지점이 다양해야 하는데 자본주의 사회는 그걸 균질화하는 것 같다고 말이다. 정말 고개를 끄덕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되지 않았으면’ 하며 그 사람의 현재를 부정하거나 안타까워할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현재를 살필 것. 나 역시 내 장애를 헤아릴 것. 그리하여 서로가 함께 잘 살 수 있도록 고민하고 도모할 것. 무엇보다 내가 하는 판단들이 어떤 기준에 의한 것인지를, 쉽게 하는 생각 끝에 꼭 물려 생각하기. 우리가 ‘생각해버리고’ 마는 것들이 얼마나 쉬운지를 뼈저리게 느끼고 고민하지 않으면 결국 그 틀에 얽매이는 건 나일 거란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그리고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지점이 훨씬 다양해지면 좋겠다. 


아이가 씩 웃었다

내가 정상이라서 안주하고 싶지도, 비정상의 상태에 놓였을 때 안타까움의 시선을 받고 싶지도 않다. 나라는 사람 그리고 살아가는 방식이 정상이라거나 비정상이라고 규정받고 싶지 않다. 그 경계를 지워버리는 게 얼마나 힘든 것인지는 안다. 그렇게 노력해야 정상적인 소통에서 조금씩 움직거려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뭔가 말을 걸고 싶은데 도무지 대책이 없었다. 그래서 잠깐 짬이 나자 슬쩍 그 아이의 발에 내 발을 갖다 댔다. ‘와 너 발 되게 작구나.’ 잘 들리지도 않게 웅얼거렸는데 그 아이가 씩 웃었다. 그 미소 때문에 더더욱 마음이 쓰였던 것 같다. 다시 그 친구를 본다면, 나는 좀 다른 눈빛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주저하거나 거리끼지 않는 편안한, 그런 인사를 할 수 있을까.  (인권오름 2011년 11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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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에 비친 인권 풍경②] 학자로서 진압이 적법했는가를 이론적으로만 따지기엔 부족해


용산 국민법정의 준비위원인 이호중 교수님을 만나다


윤미


9개월이 지났지만 용산참사의 책임자가 없다. 여섯 사람이나 죽었는데도 말이다. 그 현장에는 철거민이 있었고 또 강제 진압한 경찰도 있었다. 단순히 철거민과 경찰만이 아니다. 이 사건이 터질 때까지 수수방관하고 이후에도 사과 한 마디 않는 공직자들과 대통령이 있다. 하지만 검찰은 철거민들만을 기소했다. 사법제도의 판단은 무조건 믿고 따라야 할 옳은 것일까?

10월 18일. 용산 국민법정이 열린다. “국민”법정이다. 국민이 기소를 해서 진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직접 묻겠다는 거다. 권력이 있다는 이유로 교묘하게 심판을 피해갔던 사람들과 인권의 기준으로 싸워보겠다는 취지다. 특히 용산참사 사건의 진짜 배후인 재개발의 문제를 법정에서 다루게 된다. 재개발과 관련한 주거권의 문제는 그 동안 법원에서는 다뤄지지 않은 영역이다. 하지만 국민의 기준으로, 인권의 기준으로 그 범죄성을 파헤쳐 보자는 게 이번 법정의 취지다. 용산 국민법정의 준비위원인 서강대 법학과 이호중 교수를 만나 용산 국민법정과 관련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용산국민법정에 어떻게 함께 하게 됐는지.
전공을 형사법 쪽으로 하면서 국가 공권력의 남용에 대해서 관심가지고 지적하는 활동들은 해 왔거든요. 또 천주교인권위원회와 같이 일하면서 여러 가지 사건도 맡았고요. 사실 학교에 있는 학자들 입장에서는 개별적인 사건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시비를 가리는 것에 관여를 하는 게 일반적인 현상은 아닙니다. 학자들 입장에서는 어떤 사건의 이론적이고 법률적인 장점이 있을 때 그것에 대해 논문을 쓰거나 발표하는 방식으로 도움을 주려고 하는데요.

그런데 용산사건의 경우는, 정말 너무 황당하고 기가 막힌 사건이었어요. 국가의 공권력이 필요하면 진압을 할 수도 있지만, 지켜야할 원칙과 적법상의 한계가 있는 건데 그런 건 완전히 무시하고 진압을 감행했고 그런 과정에서 6명이 희생당했잖아요. 이런 사건에 대해서 사실 경찰이 어떤 책임을 전혀 지지 않는다는 건, 누가 봐도 납득하기 어려운 일일 거고요. 우리 같은 사람들은 학자로서 진압이 과연 적법했는가를 이론적으로 따질 수는 있겠지만, 그런 것만 따지고서는 국민들에게 경각심을 주고 공권력의 남용 문제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문제제기 하는 건 한계가 있기 때문에 조금 더 이 사건의 실체를 정확하게 밝히고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해서 우리의 주장을 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됐죠.

더 나아가서 사실 이런 문제가 발생하게 된 근원적인 배경이 재개발 사업입니다. 재개발 사업이라고 하는 게 우리 사회에서 어떤 식으로 서민들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있는지도 조금 드러낼 필요가 있겠다. 재개발 사업과 서민의 생존권 박탈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제2,3의 용산사건을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이번 사건을 계기로 해서 참사에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경찰의 공권력 남용과 배후에 있는 재개발 정책이 가진 인권침해의 측면을 드러냄으로써 이 사건의 실체를 인권법적인 시각에서 다시 조명해보려고 합니다.


이번 국민법정이 기존의 형사소송과 어떤 차이가 있나요.
기본적으로는 형사소송의 틀을 따르려고 합니다.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서 이 사건을 어떻게 인식할 것이냐가 대립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주장을 일방적으로 이야기할 거면 굳이 국민법정을 할 필요가 없잖아요. 현재 사법당국이 면죄부를 줬던 경찰, 검찰의 행위들, 재개발에 책임을 지고 있는 정치인들을 법정에 세워놓고 어떤 잘못이 있는지를 인권법의 시각으로 평가해보자고 할 때는 충분히 다른 반발의 논리가 나올 수 있거든요. 우리의 시각과 논리도 드러내지만 그 과정에서 반대 시각이나 논리도 나올 수 있게 하자. 그래서 치열하게 한번 싸워보자. 그렇게 해서 어떤 논리가 더 국민들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갈 수 있는지 심판을 받아보려고 하기 때문에 심판대에 세워져야 하는 사람들의 법치주의적인 권리, 형사소송절차도 최대한 존중하는 방향으로 진행하려고 합니다. 물론 완벽하게 똑같이 할 수는 없겠죠. 국민법정이라는 것이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진짜 법정이 아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똑같이 못 하는 부분이 있어요. 우리가 피고인들에게 소환장을 보낼 건데 나와 주면 제일 좋지만 안 나올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하는데. 그랬을 때 그 쪽을 대변해줄 수 있는 변호인을 세울 수밖에 없잖아요.

배심원 선정 절차도 실제 법정과 똑같이는 못 합니다. 물론 우리는 배심원 선정을 공정하게 할 겁니다. 대학에서 하는 모의재판처럼 시나리오를 가지고 하는 게 아니라 우리는 우리 시각을 드러내고 반대편은 반대의 시각을 드러내서 일반 시민들이 어떻게 판단하는지를 심판해보자는 치원이니까, 배심원들이 공정하게 선정돼야겠죠. 그건 충분히 지킬 거예요.


2003년도 노무현 정부 때 전범재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맥락에서 이번 용산국민법정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기본적인 취지는 비슷한 것 같아요. 우리 사회는 사법제도를 다 갖고 있잖아요. 사법제도 틀 안에서 해결될 수 있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는데. 사실 기존의 사법제도라고 하는 것이 지배 권력을 가진 사람들한테 굉장히 유리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범죄자에게 사법제도가 면죄부를 주게 되죠. 그렇게 되면 그 차원을 넘어서 어떤 사건이 갖고 있는 사회적인 실체를 왜곡하게 된다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국민법정은 이에 대한 대항담론을 만들자는 거죠.

전쟁범죄라고 하는 건 사실 처벌이 안 됩니다. 전쟁범죄는 지지 않는 한 처벌이 안 되잖아요. 가장 반인권적이고 극악한 범죄라고 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전쟁인데도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전쟁 범죄를 제대로 처벌하는 데는 없어요. 그렇지만 우리가 헌법의 평화주의 정신에 입각해서 바라본다면 전쟁이 가진 범죄적인 성격은 길거리에서 일어나는 범죄들보다도 더 극심한 것일 수 있거든요. 그런 것들의 실체를 사법제도에서는 다룰 수 없지만 국민의 시각에서 실체를 다시 조명해보자, 이게 왜 범죄로 규정돼야 하는지. 우리 사법제도는 전쟁에 파병을 하는 걸 범죄로 규정하고 있진 않지만 인권법의 시각에서 보면 다를 수 있다는 거죠. 이번 용산 국민법정도 대항으로써 국민법정이라는 걸 만들어서 사건을 우리의 시각으로 재조명해보자는 의미가 있습니다.


사회권 영역인 재개발이나 주거권 문제는 현행 사법제도 틀 내에서 처벌하기 어렵습니다. 이 문제를 용산 국민법정에서 어떻게 풀어나가게 될 건지.
사실 범죄라고 하긴 어렵죠. 특히 재개발 문제는요. 경찰의 공권력 집행이 위법했다는 건 현행법 체계 하에서 범죄라고 다루기엔 큰 문제가 없지만, 재개발의 문제는 사실 정해진 절차에 의해서 실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범죄로써 현행법에서 처벌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그래도 처벌되지 않지만 우리는 그것을 범죄라고 생각하고 들어갑니다. 관련해서 ‘강제퇴거죄’ 라는 이름을 붙였는데요. 현재 국제인권기준, 조약, 사회권규약을 보면 재개발의 과정에서 지켜야할 절차나 보상의 원리를 다 규정해놓고 있거든요. 그런 것들을 제대로 준수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나라는 재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단 말이죠. 형식적으로는 적법성을 갖췄다할지라도 우리가 그 내용을 들여다봤을 때 그것이 결국은 헌법의 이념, 인권의 인념, 국제조약의 원칙을 위반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이것이 가진 실제적인 범죄적인 성격은 얘기안 할 수 없는 거죠. ‘강제퇴거죄’가 법에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임의적으로 만든 게 아니라 인권법이나 국제조약에 다 근거를 두고서 이것에 범죄성이 있다고 봅니다.


이처럼 사법체계의 한계가 많은데도 다시 법이라는 걸 불러 들이는 이유는 뭘까요. 법정이라는 틀을 빌어 용산참사를 다루는 이유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인권활동가들의 고민은 “법정이라는 공간에서 법 논리에 갇히지 않으면서 인권의 논리로 침해내용을 구성하고 위반사항을 정리하는 것” 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현행법 틀 속에서 범죄가 되냐 안 되냐를 다루려는 건 분명히 아닙니다. 인권법적인 원칙들이 현행법 속에 반영된 것도 있고 안 된 것도 있을 거 아니겠어요? 예를 들어 경찰이 강제진압에서 어떤 안전수칙을 지켜야 하느냐 어떤 원리들이 적용되어야 하는 건 이미 어느 정도 인권법적인 기준들이 들어가 있단 말이죠. 물론 우리 법원은 그런 기준을 제대로 적용하고 있진 않아요. 경찰 비례의 원칙도 있거든요. 경찰권이라는 것이 실제 진압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을 수도 있다면 사실 강제진압은 최후의 선택이어야 한다는 법의 원리가 이미 다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법원은 그런 원리를 제대로 적용 안 해 왔던 거죠. 경찰권 행사에 대한 규제 원리로서의 인권법의 시각이 부분적으로는 반영돼 있지만 완전하게는 반영이 안 돼 있는 상황에서 경찰권 발동의 적법성에 대해서 우리가 인권법의 시각으로 판단해보겠다는 겁니다. 위법하면 처벌할 수 있는 것이고 처벌돼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고요. 현행법에 의해 처벌이 되냐 안 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행위가 처벌할만한 반인권적인 행위냐 아니냐를 우리가 판단하자는 거죠. 부분적으로 현행법의 논리를 무시할 순 없지만 현행법을 뛰어넘는 인권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이것이 반인권적인 범죄행위라고 우리가 규정하고 나아가 법제도가 바뀌어야 한다는 걸 주장할 수 있죠.


일반인들이 배심원으로 참가하는데, 법정이 쉽게 다가가기 힘들 것 같습니다. 감안한 계획이 있나요.
사실 그 부분이 굉장히 어려운 부분이에요. 전문가 아닌 사람들 특히 일반 국민들이 기소인으로 참여하고 배심원으로 참여하는 국민법정에서 너무 법적인 논리와 법적인 언어로 접근하면 전문가들의 논쟁의 장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거든요. 그건 최대한 안 하려고 합니다. 법적인 용어가 안 나올 순 없겠지만 나오더라도 쉬운 언어로 설명도 하고 표현도 할 거고요.

아직은 우리나라에서 법정이라고 하는 것이 일반 시민 입장에서 생소한 공간이잖아요. 평생 살면서 법정에 한 번도 안 가보는 사람이 훨씬 많을 거고. 법정이 엄숙하고 약간의 두려움이 있을 수 있고.심판을 한다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내가 그래도 되냐, 과연 우리가’, 이런 고민도 있는 것 같아요.

법이라는 것이 너무나 시민들과 괴리되어왔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고도 할 수 있거든요. 그게 우리나라 사법제도가 가진 굉장히 큰 문제점 중 하나고 국민참여재판이 도입되면서 조금씩 바뀌고는 있어요. 사실 국민참여재판에 국민이 배심원으로 참여하고 있긴 하지만 어려워해요, 법에 대해서. 검사나 변호사들이 쉽게 설명하려고 노력해도 법 논리가 어려워서 잘 이해 못 합니다. 그래도 배심재판이 의미를 가지고 배심재판에서 나오는 결정이 정당성을 가지는 이유가 뭐겠어요? 결국 이 사람이 범죄자다,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을 국민들에게 설득할 수 있을 때 정당성이 있거든요. 상식적으로 보자는 거예요, 우리는. 세세한 법 원리는 모르더라도 세세한 법 원리에 대한 궁극적인 판단은 사실 ‘상식’입니다. 상식적인 판단으로 봤을 때 저 사람에게 범죄의 책임을 지우는 게 맞느냐 라고 하는 게 대중들이 판단할 수 있는 거죠. ‘사법주권’이라는 건 그런 거죠. 국민들의 판단이 반영돼야죠. 그런 면에서 국민이 참여하는 법정이라는 컨셉이 아직 우리에게 낯설긴 하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국민 누구나 이 사건을 어떤 시각을 바라보고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지에 대해서 국민들 다수를 설득할 수 있고 다수의 정당성을 얻을 수 있을 때 법적인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게 우리 사회에 정착이 돼야 해요.

사실 기소인 모집 과정에서도 많은 시민들이 “뭐하자는 겁니까, 진짜 처벌하는 겁니까, 진짜 처벌할 거 아니면 왜 하냐”는 사람도 있고. 우리가 사건의 실체를 어떻게 바라보고 그 사건의 정말 범죄자가 누군지 다시 드러내주는 식의 작업, 담론투쟁의 작업이라고 보면 될 겁니다. 담론투쟁의 작업을 법정이라는 컨셉을 통해서 한다는 건, 기존의 법 담론과 직접 맞서서 하겠다는 것. 사법제도의 틀 속에 들어가서 담론투쟁을 할 때는 사법제도 자체가 인권법의 논리가 반영돼 있지 않으면 얘기를 못 해요. 사법제도 자체가 반인권적인데 그 안에서 어떻게 담론투쟁을 할 수가 있겠어요. 그러니까 사법제도의 틀을 가지고 보되 사법제도에서 나와서 보자는 거죠. 그래야 법적인 담론으로써 이야기를 할 수 있겠죠.
인권오름 제 173 호 [입력] 2009년 10월 07일 16: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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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사람들] “아직은 좀 더 보답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용산 4구역 철거민 김순옥 씨와 정옥자 씨

윤미


  김순옥 씨와 정옥자 씨는 용산 4구역에서 이십 년 넘게 나란히 포장마차를 운영하며 살았다. 그러다 용산 참사를 겪어야 했고 1년 여의 투쟁을 함께 했다. 그리고 임시상가에 준하는 함바집 운영권을 용산과 수도권 등 재개발 지역 두 곳을 받기로 협상했다.

돌아가신 분들의 장례까지 치르고 다 끝나는가 싶던 이들에게, 그 이후는 유가족들과 마찬가지로 또 다른 시작이었다. 다른 지역의 철거민 집회와, 본인과 동료들의 재판 때문에 법원을 다니느라 정신없이 일주일을 보낸다.

이들은 공무집행방해나 폭행 등 갖가지 혐의 계속 재판을 받고 있다. 그때 함께 싸웠던 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인터뷰 한 날도 정옥자 씨의 재판이 있는 날이었다. 힘든 점이 많아도 김순옥 씨와 정옥자 씨에게 지금의 생활은 지난 투쟁의 연장선이다. 내 일처럼 함께 싸워준 사람들에게 보답하고 싶어서다.


하루 쉴 틈이 없어요
 
김순옥 : 하루요? 바쁘죠. 하루 쉴 틈이 없어. 연대 집회 가야되고 법원 재판에 참석해야지. 장례 이후로 모든 게 끝나서 각자 가정으로 가서 장사할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끝나고 보니까 그것도 아니에요. 더 많이 바빠 진짜. 계속 법원에 재판받으러 다니고. 나도 그렇고 다른 4구역 식구들이 날짜별로 다르게 재판받고 있고, 구속자들 면회 다니고, 철거민 연대집회도 나가고.

사진설명김순옥 님


난 주로 재판내용이 공무집행방해했다는 거랑 뭐 폭행 이런 거 했다고. 하지도 안 했는데 걸고넘어지니까. 지난 5월 20일에 여경을 폭행했다나 어쨌다나 난 폭행한 사실이 없는데 그랬다고 하니까. 나머지는 업무방해. 그때 당시는 또 경찰이 너무너무 탄압을 했어요. 생각만 해도 아찔해요. 지금도 그 충격에서 못 벗어나요.

그동안 타 지역에서 연대를 많이 받았잖아요. 그 빚을 갚는다고 생각하고 연대집회 다니는 거예요. 평생 이렇게 할 순 없지 내 생활이 있으니까 내 맘속으로 그동안 연대 받았던 마음이 좀 갚아질 정도 되면 그때 살 길 찾아야죠. 아닌 말로 지금 용산투쟁 다 끝났다고 우리가 연대 안 가면 그동안 우리 연대 해준 사람들이 얼마나 서운하겠어요. 그 생각에 그런 마음으로 보답한다면, 보답이 아니지 내가 받았으니까, 갚기 위해서 연대하는 거지.

아직은 좀 더 보답을 해야 돼
정옥자 : 집회 나가서 시간이 늦어지고 하다보면 새벽 한시에도 들어가고, 딴 지역 동지들과 대화도 하다보면 시간이 지연될 때가 있어요. 그럼 열두시가 넘어요. 우리보다 먼저 시작한 지역이 많아요. 근데 우리는 신생이잖아요. 선배지역 제쳐놓고 신생지역이 먼저 반쪽 승리라도 했잖아요. 동지들 보면 마음이 아파요. 여기도 빨리 좋은 결과 얻어서 각자 생활을 해야 하는데 하는 마음이 들어요.

경제적으로 어려움은 있죠. 어려움은 있는데 아직까지는 선거도 남아있고 그동안 우리가 타 지역에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조금이나마, 큰 도움은 안 되지만 그래도 머릿수라도 채워줘야 되고 동지들한테 힘을 실어줘야 되잖아요. 아들이랑 며느리한테는 설득을 시켜요. 일단은 엄마는 무사히 돌아왔지만 돌아가신 양반들이 있고 연대왔다가 죽은 사람이 있으니까 엄마는 좀 더 보답을 해야 한다고 하죠.


전세에서 사글세로
김순옥 : 육체적으로 힘든 것보다도 경제적으로 뒷받침이 안 되니까 힘이 들지요. 왜냐하면 내가 나가서 벌어야 생활을 하는데 그렇게 생활이 안 되니까 그게 힘들지. 저녁 야간 일을 했었어요. 어느 날 법원에 재판을 받고 버스를 타고 집엘 가다가 사람 구한다고 써놓은 걸 봤거든요. 낮에는 법원이나 집회 다니다보니까 일을 할 수가 없어서 저녁 6시부터 12시까지 일을 했었어요. 그런데 재판이나 집회가 늦게 끝나는 날이 있고 그래요. 한두 번도 아니고 주인한테 미안한 거예요 만날 늦으니까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구속자 재판 모든 게 끝날 때까지는 일을 해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그만뒀어요. 한 달도 못 했어.

사진설명정옥자 님


명동에서 미사를 하는데도 가슴이 아픈 게 신부님들이 저희들한테 얼마나 많은 힘을 줬어요. 그랬는데 명동성당에서 미사 하는 걸 못 가가지고. 저녁에 하니까 낮에 하면 가겠는데. 그런 것도 굉장히 가슴 아프고. 오늘 우리 재판 끝나고 저녁에 미사 가는 거예요. 오늘은 얼마나 마음이 편한지 몰라. 한번이라도 참석을 할 수 있다는 게 제일 기쁘고.

빨리 허물고 공사 들어가서 우리들도 함바집 잘 이뤄져야 하는데 잘 안 되니까. 싸울 당시는 뭐하나 부술까봐서 왜냐하면 장례도 안 치른 상태고 뭔가 잡혀야 집을 허물지 그 상태에서는 용납이 안 됐는데 지금은 함바집이 걸렸으니까 빨리 공사를 진행했으면 싶지. 이젠 또 우리 생존권이 거기에 달려 있잖아요. 잘 안 되니까 그것도 가슴 아프고.

용산에서 전세 살다가 지금은 사글세로 갔죠. 왜냐하면 집값이 그만큼 올랐어요. 용산에서는 처음 들어가서부터 오랫동안 살면서도 집세를 안 올려서 그 금액에 살았는데, 거기서 전세 빼서 다른 데 가려니까 그 돈으로 집 얻기엔 택도 없었어요. 너무나 집값이 올라버려서. 그리고 이 지역이 재개발이 되니까 다 그 주변으로 다 이사를 가잖아요. 방도 얻기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요. 그 당시 정말 이 집 아니면 갈 데가 없어서 지하실이나마 얻어서 갔어요. 2층에 살다가 지하로. 집은 더 안 좋아졌죠.

한 치 앞도 못 보고 살았어
정옥자 : 용산에 산 지가 4구역에서만 27년이 됐어요. 김순옥 씨랑 가게가 붙었어요. 그래서 격주로 놀았죠. 항상 새벽 세 네 시까지 장사를 하다보면 가사 일은 내팽개치는 거잖아요. 한 달에 두 번 놀면 집에서 밀린 일 하다보면 쉬는 날이라도 대문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어요. 집에서 가게, 가게에서 집, 그 라인을 벗어난 지역은 뭐가 생긴 지도 모르고 살았어요. 그렇게 살았어요. 한 치 앞도 못 보고.

이런 일 겪어보니까 인생을 헛살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허무하다는. 진짜 앞만 보고 살았기 때문에 옆도 안 돌아보고 살았기 때문에 지금은 딴 세상을 사는 것 같아요. 지금 인생을 다시 사는 기분이에요. 나다니면서 보고 듣고 하다보니까, 아 인생을 헛살았구나 싶어요. 그래서 우리 며느리보고 그래요. 애 갖기 전에 실컷 다녀라. 내가 못 해보고 살았으니까. 그래도 용산에서 포장마차하면서 한 달에 두 번씩이라도 놀았지 그 전에는 막 떠돌이 행상을 했기 때문에 노는 날이 없었어요. 아침에 나가서 장사하고 저녁에 들어와서 빨래하고.


그 기억의 충격에서 못 벗어나요
김순옥 : 아마 대표님들과 단식투쟁 들어갔을 때였을 거예요. 비가 와서 천막을 치려고 하고 있었어요. 완전무장한 특공대들이 싸여 있을 때 그때 생각하면 치가 막 떨려요. 난 그때 너무 충격 받았어요. 완전히, 뭐라고 그럴까 전쟁 일어나가지고 상대를 공격해야 되는 그런 분위기 였어 진짜. 완전히 우리 대한민국의 인간으로 안 보고 완전히 테러범이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경찰들이 옷을 그렇게 입고 왔었어요. 난 그런 모습을 처음 봤어요. 지금까지 살면서 경찰들이 경찰복 입은 건 흔히 봤지만 철장 모자, 완장 찬 거 처음 봤어요. 그 충격에서 못 벗어나요 지금도.

장례 끝나고도 그래도 치밀어 오르는 분노가 삭지 않아서, 집에 가서 이제 정말 끝났다고 생각하는데도 저녁에 잠자다가 벌떡벌떡 일어나요. 너무나 정말 이건 아닌데, 이래선 안 되는데, 정부가 탄압했던 거랑 모든 여건들이 치밀어 올라와서 지금도 거기서 깨어나지 못 해요. 이제는 이게 아니다 안정을 해야 한다고 마음을 가다듬으면서도 순간순간 그때 일이 잊히지 않아요. 그때 당시 정신과 치료도 받았잖아요. 저희들이 병원에 가서 치료했지요. 심리치료 같은 거.


감사하고 참 고마워요
정옥자 : 유족들이랑 자주 만나요. 주민총회를 한 달에 한 번씩 저희 집에서 하고 있어요. 마음이 아프죠. 전재숙 씨 같은 경우에는 영감님도 잃으셨고 아들이 구속된 상태고 항상 죄송한 마음은 있죠. 그런 마음은 가시질 않아요. 특히 전재숙 씨를 보면 마음이 아파요.

4구역에 있으면서 너무 많은 분들한테 평생 받지 못 할 은혜를 받았잖아요. 감사하고 참 고마워요. 딴 지역 철거민들한테 가보면 비참한 생활을 해요. 근데 우리 4구역은 호강 아닌 호강으로 투쟁을 했지요. 그동안 고생들 많이 하셨죠. 이로 인해서 좋은 경험도 했고 그동안 도와준 분들 감사드려요.

김순옥 : 나 하나만 있는 걸로 생각했는데 정말 철거민이 너무 많았고, 용산 참사를 아프게 생각해서 연대해준 고마움 그리고 또 사제단 신부님들 그 분들 참 정말 많이 고생하셨죠. 지금도 그 기억들은 안 잊혀요. 신부님들과 같이 지낸 생활들 한시도 잊어본 적 없어요. 제가 밥을 주로 했잖아요. 신부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우리들이 식사 대접할 때 그 마음 있잖아요. 신부님들과 연대하는 모든 사람들과 마음의 준비 해가지고 정성을 보여서 신부님들께 맛있게 해드려야겠다는 그런 마음으로, 그런 게 즐거웠어요. 같이 밥 먹고 똑같은 밥상에 앉아서 차별 없이 같이 식사했던 거 그게 기억에 남아요.

유가족인 전재숙 씨도, 4구역의 김순옥 씨와 정옥자 씨도, 그들이 여전히 마음 졸이며 지내는 가장 큰 이유는 내 가족, 동료가 구속돼 있어서이다. 구속된 철거민들의 선고 공판이 인터뷰를 한 며칠 뒤인 지난 31일에 있었다. 유가족들과 4구역 철거민들은 정말 설마설마 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특수공무집행방해치사상죄 등으로 4년에서 5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1심과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결과였다. 선고 공판이 있고 다시 김순옥 씨와 통화했을 때, 구치소에서 막 면회를 들어가려던 참이라고 했다.

“분통하고 어찌 할 수 있는 길이 없네요. 정말 계란으로 바위치기네요. 정말 너무해요. 우리 얘기 좀 들어보라고 올라간 건데. 정말로 이번에 나올 줄 알았어요. 너무나 가슴이 아파요. 어린 애기 아빠랑 환자도 있는데, 어떡하면 좋아요. 정말 철거민들은 설 데가 없어요.”

용산 참사의 모든 책임은 철거민에게만 돌려지고 있다. 이 상황이 잘못됐다 하더라도 정말 ‘어찌 할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김순옥 씨의 말이, 대한민국 법과 공권력 안에서의 현실이다.


인권오름 제 205 호 [입력] 2010년 06월 02일 19:27:10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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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일 용산의 기억] “이 마음은 언제 가라앉으려는지...”
 
[인권오름] 용산참사 유가족 전재숙 씨 인터뷰
 

윤미(인권운동 사랑방) 2010.05.26 13:08

 
 
 
 
오는 6월 3일이면 용산참사가 벌어진지 500일이 된다. 잊지 않으려고, 짧은 순간이나마 그것을 생각하기 위해 우리는 몇 백일 혹은 몇 년을 서둘러 챙긴다. 하지만 유가족들에겐 500일이라는 수치로 계산된 시간이 아직 낯설기만 하다. “이제 오백 일이 다 돼가요”라는 말에 전재숙 씨(故 이상림씨 부인)는 “그런가요”라며 되려 나지막이 묻는다. 얼마나 지났는지 아직 날짜 개념이 없다고, 아직은 따져볼 생각도 세어볼 생각도 없단다. 그리고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일들이 너무 많다. 철거민들은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고, 아직 제대로 된 진상 규명도 없다. 무리한 재개발도 계속 되고 있다. 
 

 
 
 
 전재숙 씨 댁을 찾아갔다. 곧 명동성당에 미사를 드리러 갈 거라며 외출준비를 다 한 모습이셨다. 찾아간 우리에게 반갑다며, 그때 같이 있었던 사람들이 많이 보고 싶다 하셨다. 
 
 
수면제를 먹어야 잠이 와요
 
집에 하루 종일 있는 날은 별로 없어요. 왜 이렇게 바빴는지 나도 모르겠네. 집에 있어도 마음이 편안하지 않거든요. 일이 손에 안 잡히니까 방에 앉아 있으면 우리 손자가 방에 가서 텔레비전 보라고 해도 눈에 안 들어와. 그래서 바깥에도 나가 봤다 다시 들어왔다가, 그러다보면 하루가 가더라고요. 어느 유가족도 똑같을 거예요. 마음이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게 아니고 항상 마음이 불안해가지고. 작년엔 정신이 없어가지고 어디가 아팠는지 몰랐는데, 지금은 가만히 있으면 몸이 너무너무 아픈 거 있지. 잠을 못 자서 병원에서 수면제를 타다 먹거든요. 그걸 안 먹으면 잠이 안 와요. 그래야 한 시간이라도 자요. 다 그래. 다른 유가족 분도 몸이 뚱뚱 붓는다고 그래요. 붓기 빠진다고 약도 갖다 먹고. 이 마음은 언제 가라앉으려는지 모르겠네요. 
 
 
 
이렇게 앉아 있다가도 오래 못 앉아 있어요. 삼십 분 앉아 있으면 오래 앉아 있는 것 같네. 그냥 또 들어가요. 방에 앉았다가 아이고 아니다 싶으면 또 나오고. 그런데 나뿐 아니고 우리 유가족들 다 그렇답니다. 우리 식구들 많이 있을 적엔 힘이 됐는데 이렇게 혼자 각자 와 있다 보니까 힘이 없어요. 마음 붙일 데가 없고. 투쟁하면서 같이 지내던 사람들 정말 보고 싶고요, 잘못 했다고 야단치던 사람도 너무 보고 싶고요. 그 사람들 잘못이 아니거든요. 어디다 화풀이를 할 수가 없고 성질만 나서 그렇지. 정말 힘들었거든요 그 사람들. 지금은 다 보고 싶어요.
 
 
 
아는 체 하는 게 부담스러워
신용산 교회에 한 십오 년 이상 다닌 것 같아요. 교회식구 얼굴은 다 알아요. 서로 얼굴을 다 아는 작은 교회거든요. 지금 내가 가본 교회는요, 어마어마하게 큰 교회예요. 그게 참 부담이 안 되고 나한테는 좋아요. 얼굴을 모르니까 말씀만 듣고 올 수 있잖아요. 얼굴 아는 교회는 서로가 인사도 하고 같이 앉아서 얘기도 하고 밥도 먹어야 해서 불편하거든요. 그런데 큰 교회를 가니까, 예배만 딱 보고 오니까 너무 편하고 좋아요. 
 

 
 
 
누가 아는 체 하는 게 참 부담스러워요. 용산참사 유가족이라고 소개하는 것도 참 불편하고요 굉장히 불편해요 그게. 그 분들은 우리를 위로해주려고 그러는 건데 우린 그게 참 불편하거든요. 어려워요. 그래서 큰 데 가게 돼요. 그냥 서로 얼굴 쳐다보고 고개 끄떡끄떡하면 오는 거니까, 누굴 내세우려 가는 게 아니고 말씀 들으러 가는 거니까 마음 편하고 좋더라고요.
 
그래서 밖에 나가면 사람을 절대 안 쳐다봅니다. 아는 체 할까봐 눈 마주칠까봐. 동네 마트 갔는데 누가 물어요, “같이 다니던 분 있죠? 왜 혼자 다녀요? 왜 같이 다니던 사람들 있잖아요.” 그러는 사람들 있어요. 우리 검은 옷 입고 다닐 적에 본 사람을 얘기하는 거였어요. 나를 그때의 모습으로 기억하니까. 하여튼 마트고 시장이고 가면 사람을 잘 안 쳐다봐요. 그게 참 힘들더라고요.
 
 
 
나도 많이 변했어요
요즘엔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에도 가고, 거기는 우리 아들이 구속돼 있으니까 가게 됐고, 또 나 같은 경우는 남편이 죽었으니까 유가협(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에도 가요. 유가협에서는 우리 같은 사람을 받아들인 지 굉장히 오래됐다고 하더라고. 이런 일을 겪고 보니 그런 게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우리는 아직 그냥 열사분들만 모셨지 밝혀진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서 진상규명팀이 꾸려졌잖아요. 할 일이 깜깜한 것 같애. 또 우리보다 어려운 일을 닥친 데가 있으면 가야하고, 이걸 다 이겨야지 된다고요. 나 같은 경우는 아들이 구속돼 있으니까 해야죠. 월요일은 전철연 의장님 재판 아니면 철거민들 재판이라, 월요일은 법원 가는 날. 오로지 토요일은 가정의 날이라고 해서 우리 아들 보러 면회 가는 날. 아직은 집에 있어도 마음은 바깥에 가 있어서 무슨 일 있으면 바깥으로 먼저 나가야 돼.  
 

 
 
 
난 처음에 유가협, 민가협이 무슨 말인가 했거든요. 그냥 아무것도 몰라요. 몰라도 열심히 가려고 노력은 하는데, 잘 못 따라가요. 유가협도 매일 가서 거기 식구들하고 얘기도 해야지 그분들이 어느 분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전혀 모르잖아요. 그전엔 들으면 머릿속에 입력됐는데 요즘은 하나 들으면 하나 잊어버리거든요. 앞으로 할 일이 깜깜한데 아무것도 몰라서 걱정이에요. 열심히 쫓아다니려고 노력은 하고 있죠. 
 
 
 
이 일이 벌어지기 전에는 우리한테 이런 일이 생길까 하면서 산 사람들이거든요. 그래서 유가족들이 같이 뭉친다는 건 참 힘들어요. 장례 치르기 전에는 어쩔 수없이 같이 있었는데, 지금은 각자 집으로 가서 살다보니까. 서울 사람들은 전화를 하면 만나기가 쉬운데 수원사람들은 만나기가 좀 힘들어요. 어저께도 다 왔는데 한 분은 안 왔어요. 전화가 돼서 온다고 했는데 안 왔더라고요. 전화를 거니까 꺼놨어요. 그런데 그 사람도 오죽 힘들었으면 그러겠어요.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 사람 심정은 모르는 게 아니지. 그 사람도 원래 잘 안 나다니던 사람이라. 누구하고 얘기도 잘 안 해보고 살던 사람이라서 그게 참 힘들더라고. 작년에 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지금은 상대하기 싫어서 그러는 거 같애.
 
 
이 일 겪고 나도 많이 변했어요. 우리는 삼남매를 키웠거든요. 정말 이놈의 새끼 한마디 않고, 때려보지 않고 키웠거든요. 그래서 우리 딸이 그랬잖아요. 엄마 입을 쳐다보면 어떻게 저렇게 욕을 하는지. 욕이 어디서 그렇게 나오는지 모른다잖아요. 근데 그건 어쩔 수가 없어요. 보기만 하면 다 욕이에요. 경찰관 보기만 해도, 지금도 지나가면, 저 사람 같지 않은 새끼들이라고 하죠. 그냥 안 지나가요. 뭐 지금은 그때보다야 욕을 많이 안 하죠.
 
 
 
함께 해준 많은 사람들
 
장례 전보다 사람들 관심이야 많이 줄었죠. 그래도 장례 전처럼 우리와 같이 하자고 하면 안 되죠. 사람 사람마다 다 생활이 있잖아요. 많은 분들이 정말, 정부는 인정을 안 했어도 정말 우리 곁에 많은 분들이 있었잖아요. 다 팽개치고 우리한테 와 있었는데 지금도 바란다면 그건 제 욕심이에요. 그건 절대 아니죠. 정말 어디서든 힘들지 않게 잘 했으면 좋겠고 일자리 찾아서 좋은 일 많이 했으면 좋겠고 만나봤으면 좋겠고. 그때 투쟁하면서 같이 있던 사람들 중엔 유가족들 안 만나려고 한 사람도 있다잖아요. 무섭다고, 하도 쪼아대니까(웃음) 근데 지금은 아니죠. 지금은 쪼아댈 일도 없고, 의지해서도 안 되고 지금은 의지할 수 있는 단계도 아니고 의지해서도 안 되고요 의지하려고 하지 않으려고 노력을 해야지. 자기 삶이 있는데, 관심이 줄어든 건 사실이죠. 그럼 그 사람들 지금까지 같이 있으면 안 되는 거죠. 삶이 다 따로 있어요.
 
 
 
우리 아들이 나와야 생활을 할 수 있고. 우리 아들이 안 나오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그게 걱정이지 다른 건 걱정 없어요. 죽지 않고 살지 뭐 사는 건 살아요. 사람들이 풀려야 유족이나 주민들이 모여도 마음이 편하지. 24일이던 선고 공판이 늦춰졌다고 문자가 왔어요. 이게 잘 된 일인지 잘못된 일인지. 정말 밝혀져야 되는 거죠. 그 사람들 동지나 아버지들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 아니거든요. 목소리를 내고 싶고 대화가 하고 싶었던 사람들이라서, 정말 이게 뒤집어져야지 되겠는데 하는 마음뿐이죠. 나는 기독교고 미사고 상관없어요. 미사를 가도 내가 기도하는 건 마찬가지고요. 믿는 건 딱 한분이거든요. 늘 기도해요. 없는 사람 편에 좀 서 달라고.
 
 
 
다들 고생 많이 했는데 정말 우리 식구들, 다. 편안한 마음으로 다들 좋은 일자리 좋은 생활 했으면 좋겠고. 우리나라 정부를 좀 바꾸어야 되는데 안 바꿔줘서 걱정이고요. 언제가 될 진 모르겠지만 우리 앞에도 좋은 날 올 거라 생각해요. 고마워요.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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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06 [인권오름]

생각 2012. 1. 11. 22:54

[삶_세상] “의료수급권자로 살아보니 이 나라가 싫어진다”

의료수급권자 남우섭 씨를 둘러싼 차가운 현실

장윤미
 

돈으로도 못사는 것이 건강이라고 했다. 하지만 첨단의료기술의 발전에 축포를 울리고 앞다투어 ‘좋은’ 약들을 광고하는 요즘, 건강을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듯하다. 우리 모두에게 장밋빛 건강을 보장해줄 것 같은 것들은 돈으로 살 수 있는 비싼 상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최근 의료수급권자 남우섭 씨는 건강센터에 불만을 토로하는 상담을 했다. 다니고 있는 병원의 약값이 비싸니 싼 약을 먹으라는, 구청 복지과의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더 깊게 살 속으로 파고드는 저녁, 직접 남 씨를 만나 의료수급권자들의 현실을 들어 보았다.

“벌써 대하는 태도가 달라져요”

사진설명남우섭 씨는 8년 전 갑작스런 사고로 목을 다쳐 지체장애 1급을 받고 2종 의료수급권자가 됐다.
남 씨는 8년 전 일을 하다 높은 곳에서 떨어져 목을 다쳤다. 가슴 밑으로 전신마비가 된 그는 지체장애 1급 판정을 받고 몇 달 뒤 2종 의료수급권자가 됐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생계능력을 잃게된 데다가 마비로 인해 온갖 합병증을 앓게 된 남 씨는 하루에도 네 번 약을 복용해야 한다. 2~3개월에 한 번씩 재활과 방광검사를 위해 병원을 찾아가는 것도 고역이다. 뿐만 아니라 제 시간에 약을 복용하지 않으면 금세 몸에 고통이 덮쳐든다. 호흡을 담당하는 경추 4번을 다친 그는 이렇게 추운 겨울날씨에 감기라도 잘못 걸리면 호흡이상 증상이 찾아오기 마련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에게 몸이 아픈 것보다 더 서러운 것은 의료수급권자란 이유로 받는 차별이다.

“약국에 가면 의료보험약하고 수급자들에게 주는 약 자체가 달라요. 가격도 그렇고. 쉽게 말해서 의료보험환자한테 100원짜리 약을 줄 것 같으면 우리 수급자들한테는 50원짜리 약 밖에 안줘요. 병원에 가도, 수급자라고 얘기를 하면은 대하는 태도가 벌써 달라져요. 그런 게 몸에 와서 닿아요.”

병원과 약국의 선택에도 제한을 둬

그에게 올해 들어 구청 복지과에서 두 건의 전화가 걸려왔다. ‘왜 굳이 비싼 병원에 가서 비싼 약을 타먹느냐, 약값이 싼 동네의원에서 약을 타먹으라’는 것이다. 의료수급권자들의 도덕적 해이가 비난의 대상이 되면서 의료수급권자들의 의료이용이 감시를 받게 됐다.

“왜 지금 다니는 그 병원까지 가냐고 그러더라고요, 가까운 동네 의원에서 약을 타먹으라고. 병원도 치료비 비싸다고 제한을 둬요. 병원도 가지 말고 보건소에서 진료하고 감기약도 보건소에서 되도록 타먹으라고 한 적도 있어요.”

남 씨는 좋은 치료 받고 좋은 약 먹으면서 빨리 낫고 싶은 것이 모든 환자의 심정이 아니겠냐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의료급여를 제공하는 것은 좋지만, 치료에 차별을 두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건 아닌지 불만을 터뜨렸다. 질 좋은 의료서비스란 환자의 몸에 맞고 적절한 것일텐데 단지 비싸다는 이유로 선택을 제한하는 것을 보면 의료급여가 수급권자들의 권리로 여겨지는지 의문이 들게 한다.

“지금 다니는 병원에서 재활치료를 6개월 받았는데, 의사가 친절하고 거기서 내가 몸이 확 좋아졌거든. 다른 데서는 꼼짝도 못했어요. 그래서 나는 무시하고 내가 가고 싶은 병원 가고 싶어요. 하루 이틀 다닌 것도 아니고 6년이나 다닌 병원인데 비싸다고 가지 말고 동네의원 가라는 게 말이 되냐고.”

휠체어를 타고 등산을 하듯

“나 같은 환자는, 대부분 2층, 3층에 위치한 동네의원은 다닐 생각조차 못해. 몇 달 전엔 이 치료 받으려고 몇 시간 걸려 다른 동네 치과엘 갔어요. 엘리베이터가 있는 치과가 아니면 휠체어가 움직이질 못하니까.”

남 씨처럼 지체장애1급인 환자가 동네의원을 찾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휠체어를 타고 등산을 하는 것과 같다. 그가 굳이 큰 병원을 찾는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병원의 선택에 제한을 받지 않더라도 이미 충분히 장애인으로서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 장애인에게는 병원의 진입부터가 고난이다.

입원 보증금 없어 치료 못 받아

최근 남 씨는 손가락을 다쳐 한 대학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하지만 응급실에서는 응급처치도 전혀 해주지 않고 입원을 해야 하는데 보증금을 내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했다.

“입원을 하려면 나한테 백만 원 보증금을 걸고 입원하라더라고. 수급자니까 돈 안내는 게 문제 생길까봐. 엄청 힘들어요. 수급자는 어딜 가든 대우 못 받고. ”

모아둔 돈이 있을 리 없는 수급권자에게 입원보증금을 내라는 요구는 당장 치료해야 할 병을 돈 때문에 미루게 되는 부당한 일이 발생하게 한다. 진료거부와 다름없었던 입원보증금 때문에 이날 남 씨 가족은 곪아 썩은 냄새가 나는 손가락을 들고 입원할 병원을 찾아 헤매야 했다.
지난 달 30일 ‘병원의 보증금 요구가 의료급여환자들의 건강권을 침해하는 행위’라며 보증금 청구가 불법임을 명시하는 내용의 의료급여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병원에서는 이를 어길 시 1년 이하의 영업정지 처분을 받게 된다. 병원마다 관행적으로 요구했던 보증금 때문에 당장 필요한 치료를 받지 못하고 건강을 잃게 되는 일이 사라질 지 지켜볼 일이다.

주는 대로 먹은 것도 죄

몇 달 전 남 씨는 이비인후과를 찾은 적이 있다. 코가 휘어서 옆으로 누우면 숨을 못 쉬었던 것이다. 당시 의사가 약물치료를 하자고 해서, 그는 두세 달 동안 주는 약을 계속 먹었다.

“어느 날 복지과에서 전화가 왔어요. 무슨 약을 이렇게 먹느냐고, 먹긴 다 먹었냐고 버리지 않았냐고 따지더라고.”

남 씨가 먹고 있던 약은 비염약이었는데, 비염약은 일주일 정도만 복용하면 된다는 것이다. 무슨 약을 먹고 있는 지도 모른 채 약을 많이 먹는다고 항의를 받자, 그 일로 속이 상한 남 씨의 부인 양행덕 씨가 말문을 열었다. 그녀는 직접 동사무소 복지과를 찾아가 항의했다고 한다.

“비염약 2개월 치 먹은 걸 환자한테 따지지 말라고 했어요. 우리는 무슨 약인지 모르고 의사가 약물치료하자고 해서 먹은 것이지, 비염약을 일주일 먹는 건지 한 달 먹는 건지 우리는 모른다고. 복지과에서는 비염약은 일주일만 먹는 거라 길래 그건 의사한테 가서 따지라고 했어요. 약 많이 먹는다고 다짜고짜 따지는 것도 서러운데 그때까지 비염약을 그렇게 오래 먹고 있는지도 몰랐으니…….”

이 나라가 싫어질 정도

2007년이 지나면 남 씨는 딸의 부양능력이 인정되어 더 이상 의료수급을 받을 수 없게 된다. 의료수급자라고 차별 받는 게 서러워도 그나마 돈에 대한 부담은 적었는데 그마저 사라진다고 생각하면 그들의 미래가 막막하다.

“딸이 직장에 다닌다고 해도 자기 부모님 부양만 계속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 아저씨는 계속 아플 텐데 시간이 흐를수록 사정은 더 나빠질 것 같다”는 남 씨의 부인 말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빈곤과 건강 문제의 악순환을 절감할 수 있었다.

세계보건기구(*)는 ‘성취 가능한 최고 수준의 건강을 향유하는 것이 인종, 종교, 정치관, 경제사회적 조건의 구별 없이 전 인류의 기본적인 권리 중 하나’라고 선포했다. 즉 건강을 더 이상 개인의 짐으로 돌릴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보장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건강을 잃으면 온 세상을 잃는 것’이라고 말하는 보건복지부 장관은 ‘의료급여 제도혁신에 대한 국민보고서’를 통해 “의료급여 수급자에 대해서 주치의나 병원을 지정”하고 “본인부담금을 내게 하”는 “근본적 제도혁신 방안”을 내놓았다. 가난해서 건강을 잃고, 건강을 잃어 가난해진 사람들에게 필요한 의료서비스의 하한선을 받쳐주어야 할 의료급여제도가 오히려 수급권자들이 누릴 수 있는 권리의 상한선을 못 박고 있는 것이다. 의료수급권자들은 가난하다는 이유로, 건강하지 않다는 이유로 계속 그 상황 속에 고립되고 만다. 이들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의료수급권자라고 낙인찍는 차별적인 시선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혜적 차원이 아닌 건강권 실현을 위한 적극적인 변화가 없다면 건강을 잃고 세상마저 잃는 사람들이 넘쳐나지 않을까? 인터뷰가 마무리 되어 가는 지점에서 남 씨는 조용히 마지막 말을 꺼냈다. “장애인으로, 의료수급권자로 살아 보니까 이 나라가 싫어질 정도입니다”

(*) 세계보건기구 ; 보건·위생 분야의 국제적인 협력을 위하여 설립한 UN 전문기구
인권오름 제 32 호 [입력] 2006년 12월 06일 1:36:17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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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_세상] 2007.09.18

생각 2012. 1. 11. 22:54

[삶_세상] 꿈을 펼치기 시작하는 곳

자립을 꿈꾸는 명훈, 희진 씨를 만나다

장윤미
 

“왜 횡단보도로 가세요, 위험해요.”
“인도로 갈 낮은 문턱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어요, 괜찮아요.”

인천의 민들레 장애인야학을 찾아가는 길, 마중 나온 장애인 분을 뒤따라가던 나는 불안한 마음에 말을 건넸다. 사람이 다니는 ‘인도’로 올라가지 못하고 도로변을 휠체어로 가는 그 분의 모습을 보면서, 장애인이 다니기 불편한 인도가 과연 사람을 위한 길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누군가는 아무렇지 않게 이동하지만 누군가는 한발자국 떼기도 힘들다. 이처럼 장애인들 중에는 아직까지 세상에 발조차 떼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하지만 여기 스스로 자신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중증장애인 두 명이 있다. 바로 안명훈 씨와 길희진 씨. 인천 민들레 장애인야학에서 그들을 만났다.

"장애인 시설은 창살 없는 감옥"

희진 씨와 명훈 씨는 현재 살고 있는 집으로 나오기 전에 장애인 시설에서 생활했다. 현재 희진 씨는 장애인 시설에서 나온 지 6개월, 명훈 씨는 1년이 지났다.

“시설은 창살 없는 감옥과 같았어요. 시내와도 멀리 떨어져 있어 사람들도 잘 오가지 않는데다, 밖으로 나가면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준다고 몇 미터 내보내주지도 않았습니다. 세상에 대한, 사람에 대한 목마름이 항상 있었습니다.”

시설에 있을 때 명훈 씨와 희진 씨는 보치아 장애인 국가대표 선수였다. 하지만 시설에 있을 때는 그러한 사실이 오히려 그들을 괴롭게 했다.

“저희가 메달 따고 주목을 받게 되니까 저희들을 사업화시켰어요. 후원받으려는 목적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스트레스 너무 많이 받았어요.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반강제적으로 시키는 일들이 너무 많아서 저희들이 마치 동물원 원숭이가 된 기분이었어요.”

그들에게 시설이란 곳은 자기 의지대로 할 수 없는 곳이었다. 장애인 시설은 ‘사회복귀를 준비하거나 장기간 요양한다’는 명분으로 지어졌지만 오히려 장애인들을 사회에서 배제된 사람들로 규정하고 억압했다. 그래서 이들에겐 주체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환경이 더욱 절실했다. 그런 회의 속에서 명훈 씨와 희진 씨는 좀 더 자유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고자 마음먹었다.

"아직 두렵지만 자립에 대한 후회는 없어요"

보치아 종목에서 올림픽 메달을 따게 된 명훈 씨는 한달에 80만원이라는 연금을 받게 되었다. 그 앞으로 꼬박꼬박 돈이 들어오자, 그는 기회다 싶어 자립을 결심하게 했다.

사진설명뇌병변 1급 장애인인 안명훈 씨는 메달을 딴 연금을 모아 지금의 집을 마련했다. 하지만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혼자 집안일을 하기 힘들다.


시설에서 나오고 처음엔 가족과 함께 지내면서 가끔 외출을 했고 지금의 민들레 야학 대표님을 만나 투쟁에도 나갔다. 그러면서 세상이 장애인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를 깨달아갔다. 하지만 집에 있는 시간은 편하지 못했다. 가족들은 여전히 집에 박혀 있기를 강요하고 그가 하는 일을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그는 혼자 독립했다.

“혼자 힘으로 자립한 걸 정말 잘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아직 여전히 두렵긴 합니다.”

희진 씨는 명훈 씨 소개로 자립을 하게 됐다.

“처음에 명훈이한테 혼자 독립했다는 얘기를 듣고 어리둥절했습니다. 대체 혼자 나와서 어떻게 살아가는 건지. 하지만 지금은 내가 왜 이렇게 늦게야 자립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자립하게 돼서 뭐가 가장 좋으냐는 질문에 그녀는 “넓은 세상 돌아다니고, 사람도 많이 만나고, 내가 세상을 바꾸고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것”을 꼽았다.

사진설명포즈를 취해달라는 말에 부끄러워 하던 희진 씨


“장애인 시설에 있으면 모든 걸 알아서 해주니까 불편하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혹여 자립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람들도 이러한 이유로 포기하죠. 또 용기가 부족해서. 하지만 더 큰 건 정보 부족입니다. 그 곳에서 나올 수가 없는 게 아니라 아는 게 없어서 못나오는 거죠.”

휘청거린 자립과정

사회에 혼자 부딪쳐본 경험이 없던 장애인들에게 세상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맨 처음에는 대체 뭐부터 해야 할지를 몰랐어요. 그래서 쓸데없는 데에 가지고 있는 얼마 안되는 돈을 많이 낭비하기도 했습니다.”

현재 명훈 씨는 차상위 계층에다 매달 연금 80만원을 받고 있어 정부로부터 장애인 수당은 받고 있지 않다. 연금 외에는 특별한 지원도 없던 그에게 지금 얻게 된 집은 행운이었다. 그의 집은 민들레 장애인야간학교가 있는 곳의 한켠에 위치한 한 칸짜리 방이다.

“사회에 나오고 운 좋게 만난 야학 대표님 덕에 지금 이 집을 얻게 됐습니다. 하지만 보증금은 없다 해도 월세가 40만원 이예요. 제 돈의 반이 집세로 들어가요. 돈을 아껴 쓰지 않으면 안돼요.”

하지만 최근에 그는 이 집에서도 쫓겨나게 되었다. 처음에 장애인이라고 집세도 깎아주고 이것저것 배려도 해주던 주인이 갑자기 이달 말까지 집에서 나가주기를 요청한 것이다. 처음엔 혼자 살던 명훈 씨가 희진 씨와 함께 살게 되고, 점점 장애인 친구들이 하나씩 몰려들자 건물 이미지에 손상이 간다는 이유였다. 주위 시민들이 싫어하고 장사도 잘 안될 거라는 건물 주인의 염려(?) 때문이다.

“집만 있다고 끝은 아니다”

자립 6개월차인 희진 씨는 수급권자라 이제 곧 영구임대아파트에 신청할 수 있는 자격이 된다. 하지만 신청했다고 해서 바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평균 10년을 대기하는 기약 없는 기다림인 것이다.

또 대기하고 있다 영구임대아파트에 들어가게 됐다 해도 문제다. 13평형에 머물려면 보증금 약200만원에 월세 4만원 정도를 내야하는데, 수급비를 쪼갠다 해도 월세를 꼬박꼬박 낼 수 있을 지가 걱정이란다. 중증장애인이라 몸을 가누기조차 힘든 그가 매달 정기적인 소득을 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문득 그들이 살고 있는 공간을 둘러보았다. 활동보조인 없이는 전혀 생활이 불가능한데다 방 안에 화장실도 갖춰져 있지 않아 불편하진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저희들에게 집은 분명 소중한 공간이에요. 제 꿈을 펼치기 시작하는 곳이죠. 하지만 집만 있다고 끝은 아닙니다. 지금 활동보조인이 저희들과 생활하는 시간은 한달에 180시간입니다. 그러면 하루에 6시간이인데, 턱없이 부족하죠. 그 외의 시간에 저희는 내팽개쳐 있는 거나 다름없어요. 청소도 밥도 전혀 할 수 없습니다.”

“보시다시피 화장실이 외부에 있고 싱크대도 너무 높아서 저희들은 집 내부 시설을 이용할 수 없어요. 집을 개조하고 싶지만 집세보다 몇 배로 드는 개조공사에 돈을 쓸 형편도 못되고요.”

곳곳의 어떤 시설을 이용할 때, 문을 통과하는 턱 하나조차 장애인들에겐 산이나 마찬가지다. 장애인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만들어지는 집은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 되지 못한다. 이럴 때 그들에겐 집이란 것이 ‘집’이 아닌 것이나 마찬가지다.

영구임대주택을 조금 늘린다고 장애인 주거권이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가진 장애로도 불편함이 없는 주거편의시설을 갖춘 주택을 쿼터제 등을 통해 사회가 확보해야 한다.

“공무원들이 탁상공론할 것이 아니라 직접 저희 같은 장애인 만나서 물어보고 당사자에 맞는 집을 마련했으면 좋겠습니다. 장애인 주거문제도 그냥 일정한 혜택을 준다고 끝나는 게 아니잖아요. 그 과정에서 장애인의 주거권이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부분은 없는지까지 섬세하게 고려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위해서 먼저 바뀌어라“

"뉴스를 보면 정부는 항상 예산이 없다고 해요. 하지만 저희들이 예산이 없으면 그냥 이렇게 살아야 하는 존재인가요? 우리가 나가서 외치기 전에 세상이 우리를 위해서 먼저 바뀌어 주어야 하는 건 아닌가요?"

장애인들이 현재 외치는 불만의 목소리는 너무 절실한 생존의 문제이다.

꿈이 뭐냐는 질문에 수줍게 웃으며 대답하던 명훈 씨.

"시를 쓰고 싶어요. 그래서 여행하며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듣고 체험하고 싶습니다."

인터뷰를 끝내고 돌아가는 길 명훈 씨에게서 한 통의 문자가 왔다. 직접 쓴 시라며,

“사진 속에 미소 짓는 철부지 어린아이를 본다 지금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그때 꿈꾸었던 꿈들은 나를 버리고...난 지금 술을 마시며..한숨..”

절망이 담긴 듯한 시, 이제 그들의 꿈이 꿈으로만 멈춰있지 않길, 적어도 사회는 그들이 세상에 발 디딜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인권오름 제 72 호 [입력] 2007년 09월 18일 21:2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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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정말 당사자와 함께 하고 있나?”

[기획] 인권운동, 임파워먼트를 만나다 (1) ‘임파워먼트’라는 열쇠말


윤미


<편집자 주>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는 인권운동. 그러나 현안 대응이나 정책 생산에 매몰되다 보면 정작 인권의 주체인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는 자괴감에 빠질 때가 있다. 그렇다고 무작정 많이, 자주 만나서 허허로움이 달래지지도 않는다. 인권운동사랑방 건강권 팀은 ‘임파워먼트(empowerment)’ 워크숍을 열어 어떻게 ‘사람’을 만나면 좋을 지에 대해 하나의 실마리를 내어놓았다. <인권오름>은 ‘임파워먼트 워크숍’과 그 준비 과정에서의 인터뷰를 소개해, 정답이 아닌 ‘질문’을 독자들과 나누려고 한다.


인권운동을 하다보면 당사자와의 만남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정작 권리주체인 당사자가 보이지 않는 운동을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인권이 몇몇 사람들의 의지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럴 때는 허허로움을 느끼게 된다.
당사자들이 권리를 인식하고 그 인식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모이고 또 힘을 합쳐 자신을 둘러싼 환경까지 변화시키는 힘을 만들어가는 과정. 이런 모든 과정을 임파워먼트라고 한다. 그래서 임파워먼트는 활동가로서 한번쯤은 고민해봤을 만한 화두일 듯하다.

인권운동사랑방 건강권 팀은 지난해 ‘동자동 의료수급권자 모임’을 함께 했다. 열심히 준비해서 ‘동자동 건강권 배움터‘를 진행하고 실태조사도 하러 뛰어다녔지만 ’우리가 정말 당사자와 함께 하고 있나‘라는 고민이 들었다. 건강권의 침해를 경험한 당사자 스스로 ’권리로서의 건강‘을 존중받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 ’인권으로서의 건강권‘의 의미라면, 당사자 없는 인권운동의 의미는 퇴색될 수밖에 없다. 몇 달 동안의 활동을 평가하면서 고민들이 터져 나왔다. 단순한 조직화를 넘어 당사자들을 권리주체로 세우기 위해 어떤 방법들이 있을 지 고민하던 중, ’임파워먼트‘가 흘러 들어왔다. 그걸 놓치지 않고 조금 더 쫓아가보려고 머리를 맞댄 자리가 지난 3월 7일 인권운동사랑방에서 열린 ‘임파워먼트 워크숍’이었다.

사진설명당일 워크숍 자료집에는 ‘임파워먼트의 개념/ 임파워먼트의 운동적 의미/ 다양한 단체의 임파워먼트를 조사한 사례/ 당사자운동과의 관계’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임파워먼트’는 여러 분야에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한 가지 단어로 번역되지 않는다. 사회복지 분야에서는 개인의 능력을 높이고 세력화하는 것에 중점을 두며 인권교육에서는 ‘권한 강화’로 번역한다. ‘인권의 문법’ 저자 조효제 교수는 ‘자력화’라는 말로 번역하기도 한다. 공통점은 ‘강점관점’을 중시하는 건데, 활동가와 당사자가 ‘제공자-수혜자’의 관계를 극복하고 동반자로서 함께 운동해 나간다는 의미다.

한편, 최근 임파워먼트 개념은 경영학에서 가장 활발하게 쓰인다. 하지만 경영학이 쓰는 임파워먼트는 당사자의 입장이 아니라 기업의 이윤을 목적으로 한다. 이처럼 임파워먼트라는 말 자체가 인권 운동과 상호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당사자들이 무조건 힘을 갖는 것이 아니라 ‘어떤 맥락에서 어떤 가치와 결합해’ 힘을 갖느냐가 중요하다. 워크숍의 고민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했다. 인권운동에서 임파워먼트는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임파워먼트, 당사자의 힘을 믿는 것

임파워먼트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에 대한 믿음이다. 흔히 그러하듯 당사자들을 ‘피해자’로서만 인식하다보면 당사자가 스스로 권리를 재구성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놓칠 수 있다. 인권운동은 당사자들을 활동가와 보조를 같이 하는 주체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당사자와 활동가가 함께 인권을 만들어나가는 데 의미가 있다는 것.

“운동에서 임파워먼트를 쓰는 사상적 기초가 있는 것 같다. 이런 세상이 아니면 저 사람이 가진 힘을 키워내고 삶을 꽃피울 수 있었는데, 지금의 구조 속에서 그런 기회와 힘들을 빼앗겼다는 것을 인식하게 한다. 그리고 이런 사회에서 성장하면서 무력해지기도 한다는 것. 임파워먼트는 이 구조에 맞서는 사람들을 변화의 씨앗으로 불러낼 수 있다.”

“사랑방에서 직접행동으로 평택이나 이랜드 활동을 했었다. 하지만 활동가만의 제스처를 취했던 건 아닐까 하는 반성이 든다. 활동가들도 당사자로서 당사자운동을 해야 한다”

“임파워먼트가 역능강화라는 말로도 번역이 되는데, 나는 이게 역동성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역동적인 것은, 인권활동가와 당사자, 당사자와 비당사자로 구분하는 것을 벗어나 둘 다 임파워먼트되는 과정이다.”

너와 나의 권리가 연결되어 있어

또 임파워먼트는 ‘인권감수성을 키워’ 문제해결 능력을 키울 수 있게 한다. 단지 나의 권리를 인식하고 마는 것을 넘어서는 힘을 키우는 것이다. 내 권리 뿐 아니라 타인의 권리를 이해하고 둘이 서로 연결돼 있다는 걸 깨닫는 게 바로 임파워먼트의 과정이다.

“임파워먼트는 가려진 서사를 드러내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사회에서는 이명박의 서사는 넘치고 있고 상대적으로 억압받는 자의 서사는 적다. 자기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서로 간의 접점이 생길 수 있다. 그걸 단편적인 걸로만 인식하는 게 아니라 자기 이해를 넘어 보편적 언어로 만들어내는 것이 임파워먼트가 아닐까?”

주체가 어떤 점을 권리침해로 느꼈고, 어떠한 변화를 원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임파워먼트 과정은 새로운 인권목록과 인권실현의 장을 만들어내는 바탕이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실천이다. 그렇다면 임파워먼트를 실천하면서 겪는 어려움은 무엇이고 그런 어려움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사진설명임파워먼트 실천의 어려움들을 풀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임파워먼트의 단계마다 부딪치는 어려움

건강권 팀이 ‘동자동 의료수급권 당사자 모임’을 할 때는 조직화 되어 있지 않은 한 명 한 명의 개인들을 불러 모으는 일에 어려움을 느꼈다. 무력감에 빠진 개인들에게서 공동의 문제의식을 이끌어 내고 활동의 장으로 모이게 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런 어려움은 임파워먼트를 하면서 처음 부딪치는 개인 수준의 단계에서 겪게 된다.

임파워먼트를 이해하기 쉽도록 ‘개인 수준, 조직 수준, 그리고 사회 수준’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개인 수준의 임파워먼트는 개인 스스로의 힘이나 변화 능력을 믿는 단계이고 조직 수준은 당사자들이 서로의 문제의식을 주고받으며 모이는 단계다. 그리고 사회수준의 임파워먼트는 정치적, 사회적 상황과 같은 사회구조를 바꿈으로써 보다 큰 힘을 얻게 되는 단계다.

사회 수준의 임파워먼트가 어렵다는 의견도 있었다. 개인이 자신의 권리를 인식하고 비슷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만난다 해도, 정작 사회적으로 발언하고 제도나 정책을 변화시키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임파워먼트 이론이 실제로 어떻게 적용되는지 보려고 여러 단체들을 인터뷰 했을 때 공통적으로 말하던 게 개인, 조직 수준까지는 잘되는데 사회 수준으로 발언하고 행동하도록 하는 게 어렵다는 거였다. 파산상담을 받는 금융피해자들이 모임도 꾸렸는데 면책을 받고 나면 더 이상 같이 하지 않거나, 주거 문제로 모인 사람들이 돈 문제로 분열하면서 멈춰버리거나 하는 경우가 있었다. 한 동성애자 모임은 문제를 인식해도 정작 사회적으로 해결할 통로가 없고 사회의 차별적 시선을 극복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얘기했다.”

새로운 질문들을 던지는 임파워먼트 방법 만들기

임파워먼트를 개인적, 조직적, 사회적 수준으로 나눌 수는 있지만 정확히 구분되는 것도 아니며 이런 단계를 차근차근 밟아가며 실현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임파워먼트의 틀을 새로 짜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개인적, 조직적, 사회적으로 구분하는 임파워먼트 개념에 함정이 있는 게 아닐까. 개인들이 모이게 되는 계기는 동일한 문제의식이 있다는 거지만 한 개인의 안에는 무수한 관계가 들어가 있다. 그래서 한 가지 방식으로 잘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있다. 이걸 전제하지 않는다면 조직이 하나의 방식과 목적으로 돌아가면서 지금의 한계를 되풀이 하게 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질문을 달리하는 임파워먼트를 해야한다”

임파워먼트는 “나의 권리만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내 문제가 다른 사람의 문제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고민하는 질문”들을 하면서 개인 안의 수많은 사회적 관계들을 불러낼 때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 운동을 짤 때부터 다른 방식의 질문을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지난 인권활동가대회 때 화장실 모둠에서의 첫 질문은, ‘트랜스젠더에게 화장실이 얼마나 폭력적인 공간일까요’가 아니라, '화장실은 각자에게 어떤 공간입니까'였다. 이런 질문으로 출발하면 성별로 이분화 하는 사회가 나에게는 어떤 억압으로 연결되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어떤 문제가 특정한 사람, 집단의 문제이기보다, 우리 모두와 연결되는 정치적인 구조의 문제임을 고민할 수 있는 ‘열려있는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임파워먼트를 해야 한다.”

임파워먼트는 여러 운동 조직이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조직이 하나의 방식으로 하나의 문제만을 해결하려고 할 때 생기는 결과 중심주의, 성과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 또한 ‘노동운동이 이렇게 후퇴하고 있는데 어떻게 동성애, 여성 문제까지 고민하느냐’며 ‘노동자’ 안에 있는 다양한 정체성을 보지 못하고 운동 간 연대가 잘 되지 않는 문제점에도 해답의 실마리가 될 수 있다.

계속 만들어지는 과정에 있다는 것

“임파워먼트, 처음에 들었을 때 분명한 무엇이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어렵다.” 워크샵 마지막에 터져 나오는 한 마디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인다. 임파워먼트는 자신이 발 딛고 서 있는 인권운동의 영토를 반성하고 더불어 운동의 상상력을 키울 수 있는 훌륭한 열쇠말이다. 각자 활동하는 구체적인 운동의 영역에서 임파워먼트의 가치를 활성화 시키고 그 방법은 어떠해야 할지 풀어나가는 것은 활동가들의 과제일 것이다.

무엇보다 임파워먼트는 완성된 무언가가 아니라 계속 만들어지는 과정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권리 침해 당사자 임파워먼트를 고민하는 활동가 역시 임파워먼트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인권오름 제 96 호 [입력] 2008년 03월 25일 17:5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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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찍히는 것도 부끄러워했는데"

[기획] 인권운동, 임파워먼트를 만나다 (2) 대구 인권운동연대를 만나다

윤미


<편집자 주>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는 인권운동. 그러나 현안 대응이나 정책 생산에 매몰되다 보면 정작 인권의 주체인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는 자괴감에 빠질 때가 있다. 그렇다고 무작정 많이, 자주 만나서 허허로움이 달래지지도 않는다. 인권운동사랑방 건강권 팀은 ‘임파워먼트(empowerment)’ 워크숍을 열어 어떻게 ‘사람’을 만나면 좋을 지에 대해 하나의 실마리를 내어놓았다. <인권오름>은 ‘임파워먼트 워크숍’과 그 준비 과정에서의 인터뷰를 소개해, 정답이 아닌 ‘질문’을 독자들과 나누려고 한다.


‘빈곤과 차별에 저항하는 인권운동연대(아래부터 인권운동연대)‘는 2005년 4월 대구에 둥지를 틀었다. 인권운동연대는 당사자가 권리의 주체로 설 수 있도록 임파워먼트를 중심에 두고 활동을 만들어가는 단체다. 인권운동연대 서창호 상임활동가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인권운동연대는 한국사회에서 금융피해자 인권운동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단체로 보입니다. 금융피해자 인권문제에 어떻게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얘기해 주세요.

사회운동이 필요하다는 걸 느끼면서 특히 사회권에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 처음엔 인권운동이 어떻게 당사자의 삶에 다가갈 수 있고 당사자가 권리 주체로 설 수 있을 지를 논의했어요. 그때 ‘공감 대구 인권 모임’을 결성한 게 인권운동연대의 시작이지요. 거기서 세미나와 토론을 하며 활동을 준비하다가 구체적인 사안과 관련된 활동을 찾았어요.

2002, 2003년 신용대란 후, ‘신용불량자’가 300만 명을 넘어섰잖아요. 이런 상황은 개개인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IMF 이후 노동의 불안정화, 실업, 금융자본의 고금리 등과 같은 사회적인 문제 때문에 발생했다고 생각했어요. 채권자들이 불법추심 때문에 개인의 존엄성마저 박탈당하는 상황에서 심각성을 느꼈고요. 사회권뿐 아니라 자유권도 침해당하는 금융피해자 문제를 보면서 ‘신용불량자가 아닌 금융피해자’의 인권 문제를 고민하게 됐어요.

사진설명금융피해자는 수많은 인권침해에 노출되어 있지만 '개인의 잘못'이라는 낙인 때문에 권리를 주장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어왔다. 거리로 나오기 시작한 금융피해자들의 한걸음은 그만큼 소중하다. (사진제공 : 인권운동연대)

금융피해자 인권운동을 고민하면서 금융피해자를 적극적으로 만나는 활동들을 벌여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책생산이나 이슈파이팅과 같은 일반적인 인권운동의 방식과 달리 직접 당사자들을 만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이유가 있나요?

기본권운동이 인권운동의 또 다른 이름이라 했을 때 금융피해자운동에 있어 주체들의 운동은 한국사회에 아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IMF 이후 전면화된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 속에서 예전부터 존재했던 ‘빈곤의 주체(노점상, 철거민 등)’들을 새롭게 규정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측면에서 빈곤의 결과로 드러나는 금융피해자들의 위치를 어떻게 재정립하고 운동의 주체로 설 수 있게 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하지요.

가까운 일본의 예를 보더라도 금융피해자운동이 일반화되어, 2006년 일본의 대부업 금리를 29.2%에서 20%로 제한하는 데 당사자의 요구와 투쟁이 결정적이었습니다.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도덕적 해이’라는 논리가 당사자의 주체적 노력과 집단화를 더 막고 있어요. 단 한 번도 금융피해자가 사회적으로 요구한 적이 없었는데도 금융자본과 정권이 먼저 금융피해자를 도덕적으로 해이한 사람들이라고 몰아붙이며 금융채무의 책임을 철저히 개인의 잘못으로 돌리고 있어요.

금융피해는 사회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인식을 넓히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금융피해자의 기본권’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사회권이 보편적인 권리로 자리매김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해요. 금융피해자 인권운동은 단순히 정책생산이나 이슈파이팅으로 환원시킬 수 없는 매우 구조적이고 중층적인 문제라 당사자의 직접적 요구와 행동이 굉장히 필요하고요.

금융피해자들을 만나기 위해 어떤 활동들을 하고 있나요.

2005년 8월부터 매주 ‘파산학교’를 시작해서 현재 110차까지 진행됐습니다. 또 파산학교를 하는 과정에서 금융피해당사자 조직인 ‘좋은모임회’를 2006년 3월 결성할 수 있었고요. 현재 40~50명 되는 회원이 한 달에 한 번 모여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당사자들의 모임인 ‘좋은모임회’까지 만들어지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이네요. 당사자들을 만날 때 중요하게 생각했던 점은 무엇인가요.

첫째로 금융피해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정부는 도덕적 해이를 들먹이면서 금융피해자들의 개인적 책임을 말하고 있어요. 이명박 대통령이 500만 원 이하 생계형 채무자 감면을 말하다가 도덕적 해이를 들먹이며 취소한 것처럼 말이죠.

또 무엇보다 당사자들이 스스로 권리 의식을 가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당사자들은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여기고 무기력해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금융채무는 사회적으로 책임지는 것이지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계속 이야기해줍니다. 신체포기각서를 쓰라는 불법추심에 직접 저항하고 법적 대응도 할 수 있도록 돕고 있어요.

사진설명인권운동연대가 파산학교를 통해 만난 사람들이 '좋은모임회'를 만들어 금융피해자 인권운동을 이어가고 있다. (사진제공 : 인권운동연대)

당사자들이 권리 주체로 설 수 있도록 개인적 수준에서 임파워먼트하기 위해서 사회적 인식과 제도가 변해야 하는데, 또 사회적 인식이 바뀌기 위해서는 개인의 권리 인식이 중요하네요. 개인적, 조직적, 사회적 수준의 임파워먼트는 분명하게 구분되기보다는 서로 맞물려있는 듯합니다. 이런 임파워먼트 과정에서 파산학교가 큰 역할을 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진행하는지, 어려움은 없는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소개해 주세요.

파산학교는 네 시간 동안 진행됩니다. 그 중 두 시간을 투자해 ‘왜 금융피해자인가’라는 인권교육을 중점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채무의 성격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당사자들에게 권리가 있다는 걸 말하고, 면책 뒤에서 사회적 차별이 있다는 것을 말하면서 스스로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는 걸 강조하고요. 또 두세 달에 한 번씩 ‘좋은모임회’가 모임을 시작하기 전 30분 정도를 내어 사전 강연을 합니다. 이때는 기초생활보장, 건강보험 같은 권리와 사회 문제들에 대해 학습하고 있어요.

하지만 7~8개월 걸려 파산 면책을 받고 나면 당사자가 자기 앞가림하기 바빠져서 활동에 소홀해지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다보면 권리에 대한 인식도 줄어들기 마련이고요. 하지만 면책 이후에도 신용등급이 10등급이고 취업보증도 못 받는 등 사회적 차별이 계속 있습니다. 그래서 활동하다보면 그 점이 제일 안타까워요. 정작 사회 인식이나 제도가 바뀌는 데로 나아가지 못하니 또 개인의 임파워먼트에도 한계가 생기기 마련이고요.

파산학교나 ‘좋은모임회’만으로 당사자들과 밀접한 관계가 만들어지거나 모두 권리 주체로 임파워먼트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입니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고민하고 있는 다른 활동은 어떤 것이 있는지요.

실제로 당사자 모임을 당위적으로 강요하는 건 한계가 있어요. 그래서 구체적 사업을 벌이면서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합니다.

현재 당사자들 15명 정도로 구성된 운영위원회가 있어요. 거기서 정기모임에서 다룰 안건들에 대한 고민을 하고 회원들을 챙기려 하고 있습니다. 운영위원들을 구 별로 나눠서 각 구에 있는 회원을 각자 책임지게 한다든지, 돌아가면서 회원들을 만나는 자리를 가지기도 하고요. 그렇게 해서 당사자들이 임원을 맡아 책임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또 ‘좋은모임회’ 산하에 ‘주말농장’ 모임을 꾸려서 회원들 간의 일상적 친목과 소통을 담보하는 공간이 되도록 하고 있습니다. ‘좋은모임회’에 참여하는 사람들 대부분의 마음과 조건이 매우 불안정한 조건에 있어 주말 농장 모임이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다른 구체적 사업으론 생활안정자금의 현실화를 요구하기 위한 ‘생활안정자금대책위원회’를 준비 중입니다. 생활안정자금은 지자체별로 책정되어 있는데 대구에서는 예산 110억 원 중에 1억 8천만 원을 썼어요. 금리는 2~3%지만, 보증인이 필요하고 ‘2년 거치 2년 상환’이라 빌리기 까다로운 조건이에요. 제주도는 보증인이 없어도 되고 ‘5년 거치 5년 상환’인데요. 대구에서도 지자체 별로 생활안정자금을 현실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요구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많이 바쁘시겠네요. 그래도 활동을 하면서 흐뭇한 기억들이 있을 듯한데, 금융피해자들을 만나면서 서로 임파워먼트되는 경험으로 고무됐던 경험이 있다면 얘기해주세요.

지난 해 11월 21일에 16명이 금융감독원에 가서 집회를 했어요. ‘차압증’ 딱지를 붙이는 퍼포먼스를 할 때 많이들 좋아하셨습니다. 무기력해 하는 당사자분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집회였어요. 그 전까진 사진 찍히는 것도 겁내고 부끄러워했는데 오히려 직접행동을 하는 과정에서 당사자들이 권리의식을 가지게 되는 걸 느꼈습니다.

흔히들 투쟁이나 직접행동에 당사자가 나서는 것은 임파워먼트의 최종 결과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권운동연대의 경험을 보면 직접행동이 임파워먼트의 과정이 되기도 하는 등 임파워먼트를 단계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짧은 생각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인권운동연대와 좋은모임회의 관계는 어떻게 이어나가려고 하는가요.

금융피해자운동이 기본적인 사회적 권리운동에 이르기까지는 매우 어려운 과정입니다. ‘좋은모임회’는 당사자의 자치모임으로, 의사결정과 집행을 함께 하는 역할로 자리매김해야 할 거예요. 그러한 과정에서 인권운동연대는 파산학교를 집행하며 ‘좋은모임회’의 인적·물적 토대를 엮어내는 단위로서 역할 해야 하고요. 이런 기대도 쉽진 않죠. 지난한 경험이 충분히 이루어져야 가능할 거라고 봅니다.


인권오름 제 97 호 [입력] 2008년 04월 01일 16:39:08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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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에 비친 인권풍경] 시장화에 빛 바랜 ‘장애인 활동보조’ 2돌 예산 확보· 보조인 노동권 보장 시급


이진주․장윤미
 

<편집자 주>
세상이 많이 나아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비위생적 환경으로 죽는 5세 이하 세계 어린이가 1천만 명이 넘는 세상입니다. ‘한국여성 자살률 1위, 높은 근로시간’의 현실은 부끄러운 줄 모르고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표를 보며 저임금과 노동 불안정에 휘둘리고, 가사노동과 편견에 휩싸인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삶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통계는 그네들의 박탈달한 인간다운 삶의 현실을 보여주기에 많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삶의 현장에 가서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이번 호부터 [발에 비친 인권풍경]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인권오름 활동가가 직접 인권침해의 현장이나 인권침해에 대해 고발하는 논쟁의 현장에 찾아가서 취재한 내용을 담을 계획입니다. 취재기사가 한국 인권현실을 보여주고 우리가 만들어갈 인간다운 세상을 그리는데 작은 힘이 되길 바랍니다.

‘장애인 활동보조 지원사업’이 시행된 지 2년 남짓이다. 보건복지가족부(당시 보건복지부)는 지난 2007년, 만 6세부터 65세 1급 중증장애인을 대상으로 장애인 활동보조 서비스를 도입했다. 시작 당시만 해도 기대는 컸다. 활동보조가 기존의 부분적 보조와는 달리 '생활전반'을 아우르는 보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장애인들의 불만과 우려는 커지고 있다. 예산부족과 민간에 사업전반을 맡기는 구조 때문에 본래의 의미가 퇴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화가 불러온 비효율

2009년 현재, 활동보조 사업에 정부가 참여하는 일은 실질적으로 예산확보와 지침마련 뿐이다. 민간기관이 바우처를 받아 서비스 전반을 운영하는 체계 때문이다. 정부가 2007년 당시 내놓은 계획안에는 모니터링과 평가 항목이 있지만, 관계자들은 사실상 관리감독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 조직2국 남병준 국장은 "활동보조 관련 예산에는 관리감독 항목이 없다. 관리감독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소리다"라며 "보조과정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도 법적배상 등이 고작이다"라고 정부의 관리체계를 꼬집었다.

민간에 사업을 맡기는 부작용은 이뿐이 아니다. 산간지역 등 사업량이 적은 곳은 운영이 어려운 실정이다. 실제로 일부 산간지역 기관은 바우처를 받아서 상근자 1명 두기도 빠듯하다. 경영상 어려움은 활동보조인의 노동권과도 직결된다. 정부에서 예산이 나오지만, 4대 보험, 퇴직금, 고용보장 등 문제는 기관이 주관한다. 보조인의 노동권은 정부의 관리감독 부실, 각 민간기업의 경영악화로 '노동권 사각지대'에 놓인 셈이다. 물론 정부의 지침에는 4대 보험 등 조건이 포함되어있다. 하지만 작년 6월 통계를 보면, 4대 보험 가입비율은 절반에도 못 미친다. 4대 보험 가입에는 기관도 얼마간 비용을 부담해야하고, 가뜩이나 얼마 안 되는 임금에 보험료마저 나가는 것은 보조인에게도 기피대상이다. 활동보조인 임금의 일부를 적립했다가 퇴직하면 찾아가는 무의미한 '퇴직금' 제도도 일부 사업장에서는 이뤄지고 있다.

부실한 고용조건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활동보조의 질까지 좌우한다. 고용조건이 나빠 직업으로서의 '활동보조인'에 부정적 인식이 커지면, 인력 수급도 어렵다. 실제로 보조인은 90%이상이 여자고, 이들 가운데 다시 90% 이상이 40대 이상이다. 또한 시급 6000원에 월 최대 60만원 보장이 어려워 적지 않은 보조인이 아르바이트, 부업 개념으로 활동한다. 현재 활동보조를 이용하는 약 2만 명의 장애인은 60% 이상이 남자인데다가, 연령대도 다양하다. 목욕이나 대소변 등 생활보조에 어려움이 클 수밖에 없다.

특히 월 40~100시간, 독거 등 특이경우에 몇 십 시간 추가되는 정도로는 '자립생활'이라는 본 취지를 살리기 어렵다는 주장이 거세다. 한 달에 80시간씩 업무보조를 받는 문애린 씨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한다. 퇴근시간을 넘겨 일하기도 한다. 하루 3시간 이외의 시간은 어려움이 있다"라며 "한 달에 4만원씩 하는 자부담비도 부담이고, 활동보조인이 바뀔 때마다 적응하는 것도 힘들다. 아이들은 성인보다 예민하거나, 낯을 가리는 경우도 있어 보조인이 바뀔 때마다 고생이다"고 말했다.
사진설명보건복지가족부 앞에서 장애인복지예산 확충을 요구하며 장애인권활동가들이 농성을 하고 있는 모습


이름뿐인 예산

2005년 복지부가 실시한 통계에 따르면 전국 75만 명의 장애인이 시설이나 활동보조 등 지원이 필요하다. 그 가운데 35만 명가량은 일상생활 가운데 타인의 도움이 필요한 상태라고 조사된 바 있다. 1급 장애인만 해도 20만 명인 현 시점에서 활동보조를 이용할 수 있는 인원 2만 명 남짓이다. 문제는 예산이다.

우리나라 통합재정지출 중 복지지출 비중은 2005년 기준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55.4%)의 절반(26.7%) 수준이다. 장애인 복지예산은 더 심각하다. 남병준 국장은 "우리나라는 GDP 기준 세계 12위 대국이지만 GDP 대비 장애인 복지예산은 OECD 국가의 8분의 1 정도로 알려져 있다"며 "비교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다른 나라의 경우는 활동보조의 시작도 비교적 이른 시기에 이뤄졌다. 사회복지 수준이 비교적 높은 서유럽의 덴마크와 스웨덴은 각각 50, 60년대에, 미국과 일본은 각각 70, 80년대에 활동보조서비스가 도입됐다. 생활시설 위주의 체계에서 자립과 사회참여를 돕는 활동보조로 나아가는 것은 장애인 복지의 제대로 된 수순이다. 아직까지 우리나라는 장애인 복지의 절반가량이 생활시설 위주로 이뤄지고 있다.

남병준 국장은 우리나라 장애인 복지의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생활시설에 대해 "외출도 자유롭지 못하고, 면회도 어렵다. 장애인의 사생활을 무시한 비인권적 제도다"라며 "시설중심의 장애인 복지책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것은 시설이 활동보조보다 예산이 적게 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사진설명장애인의 인권현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문애린씨

함께 저항하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오는 4월 20일 장애인의 날을 맞아 '차별에 저항하라!'라는 타이틀과 함께 탈시설, 자립생활전면 보장 등에 대한 <2009년 420투쟁 장애인생존권 9대 요구안>을 내놓았다.

요구안 가운데 '활동보조 권리를 보장하라!' 항목을 보면 △활동보조인 서비스 예산 대폭확대 △시간제한 폐지, 생활시간 보장 △대상제한 폐지, 2·3급 장애인에게 서비스 제공 △자부담 폐지 △활동보조인 노동기본권 보장, 공공성 강화 △활동보조서비스 개선을 위한 협의기구 구성 등이 포함되어있다.

이례적인 것은 활동보조인의 권리에 대한 요구다. 아직까지 활동보조인이 목소리를 내는 특정한 조직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활동보조인의 권리를 보장해야 장애인 권리도 보장된다는 차원에서 요구안에 포함됐다. 전장연 측은 "보조인 측에서도 노동권을 주장해 함께할 수 있다면 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독거 등의 경우를 제외하면 완전사지마비 장애인도 100시간밖에 인정되지 않는다. 자다가 비닐을 덮어줘도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완전사지마비 장애인은 혼자 치우지 못 한다"며 "생활시간 보장은 생존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장애등급에 국한할 것이 아니라, 보조가 필요한 경우라면 누구나 활동보조를 지원받을 수 있어야한다는 주장과 함께 "한국 장애인복지의 터닝 포인트를 마련해야한다. 예산확보 등이 그 시작"이라고 강조했다.
사진설명활동보조인의 현실을 말하는 김한솔씨

[인터뷰] 활동보조인에게 듣는 활동보조의 현실
“자립하다” 스스로 선다는 뜻의 이 말을 아무 도움 없이 혼자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에 의존하지 않고 자립할 수는 없다.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는 모순적이면서도 당연한 의미가 담긴 말이 자립이다. 어떻게든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의존 관계에 있고 그 의존 안에서 자립한다.

장애인들의 자립은 더 많은 의존을 필요로 한다. 그만큼 사회의 뒷받침과 활동보조인의 도움이 필요하다. 비장애인들이 혼자 하는 밥 먹기, 이동하기, 공부하기도 대부분의 장애인들은 누군가의 보조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그렇지 않다면 장애인들은 감옥 같은 시설에서 고립돼 생활이 없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장애인들이 목숨을 걸고 활동보조서비스 투쟁을 한 이유이기도 하다.

올해 장애인의 날을 맞아 내건 9개 요구안 중 하나가 활동보조 문제다. 주목할 점은 활동보조인의 권리를 주장한 것이다. 장애인과 활동보조인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관계다. 장애인이 일상에서 불편한 것을 활동보조인도 느끼고, 활동보조인이 노동자로서 권리가 없으면 장애인들도 온전한 생활보조를 받을 수가 없다. 그래서 활동보조인의 기본권과 서비스의 질을 향상시키려는 노력은 없는 채 양만 늘리는 식의 정부의 바우처 사업은 공공성을 해친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전국장애인차별연대의 남병준 국장은 “활동보조인이라고 할 만한 직업이 없기 때문에 보조인으로서는 안정적이지 못하다. 그것은 또 장애인 서비스 질 저하 훼손으로 온다. 둘은 결과적으로 정비례하는 관계다.”고 말한다. 올해 9개 요구안에는 활동보조인의 권리와 관련해 ▲ 활동보조인 4대 보험 가입과 근로기준법 준수 의무화 ▲활동보조인 노동조건 개선 ▲활동보조인 교육비 지원 ▲바우처 수수료제도 폐지 ▲서비스 질 관리를 위한 비용 지원이 포함돼 있다.

활동보조를 한 지 6개월이 되었다는 김한솔 씨를 만나 활동보조인으로서 경험과 문제의식을 들어 보았다. 연극을 하던 그는 활동보조인을 하면서 복지 분야를 공부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복지를 공부하면서 장애인들의 문화를 활성화시키고 싶은 게 그의 바람이라고 한다.

활동보조를 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처음엔 시각장애인 꼬맹이의 수영장 활동 보조를 했어요. 저는 처음에 돈을 보고서 자투리 시간에 하기 괜찮다고 생각해서 계속 했죠. 그러다가 뇌병변 장애인 한 분을 하게 됐어요. 그 분은 집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됐어요. 사회생활이나 사람 만나는 걸 잘 못하시더라고요. 지금은 그 분 수업보조를 하고 있어요. 그 분이 손을 못 쓰세요. 필기나 책을 들어주거나 읽어달라는 거 있으면 읽어주고 말씀하시는 거 있으면 잘 듣고 얘기해줘요. 활동보조인 하면서, 활동보조가 뭔지에 대해서 알아가고 있는 중이에요.

활동보조를 위해 어떤 교육을 받았나요

원래는 교육을 받고 투입이 됐어야 해요. 그런데 그게 여의치 않으니까 선투입 후교육 받는다고 하더라고요. 얼마 전에 교육을 받았어요. 장애 종류, 활동보조의 마음가짐이라든가 바우처 서비스 등 활동보조사업 자체에 대한 전반적인 것 많이 했거든요. 교육이 60시간인데 6일 만에 끝났어요. 하루에 거의 10시간씩. 시간이 촉박하다보니까 좀 더 중요한 부분이 있지 않을까 하는 부분도 빨리빨리 넘어가서 아쉬웠어요.

활동하시면서 활동보조인의 권리가 열악하다고 느낀 부분이 있나요

활동보조인의 권리가 뭔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딱히 정해져서 활동보조를 위한 게 없는 것 같아요. 그 자체가 없어요. 예를 들어 장애인분들은 시간을 더 줘서 이용할 수 있는 시간만이라도 활동보조를 마음대로 썼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그건 활동보조인도 마찬가지거든요. 문제가 되는 게, 180시간 이상 넘어가면 추가 수당을 줘야한다 말아야 한다는 말 때문에 웬만해서는 180시간을 안 넘겨서 일을 시키려고 해요. 그러다보니 생계가 걸리신 분들은 난감하죠.

활동보조인에 대한 체계가 없다는 게 제일 큰 문제인 것 같아요. 그래서 직업으로 생각할 수도 없고. 그 사람들에 대해서 복지 후생관리도 전혀 돼 있는 게 없고. 알아보려면 활동보조인 하는 사람이 직접 여기저기 뛰어다며 자기가 직접 알아봐야 하니까.

활동보조인들은 사이에서는 연대의 움직임이 있나요

활동보조인끼리는 안돼요. 대신에 장애인분들하고 같이는 하죠. 그게 아이러니하더라고요. 당사자일인데. 그렇다고 활동보조인들이 모일 기회도 없고.
다른 나라를 보면 되게 잘 돼있어서 직업으로서 자부심도 갖더라고요. 우리는 정해진 게 거의 없잖아요. 활동보조서비스가 시작되긴 했지만 번갯불이 콩 구워 먹듯이 하다보니까 체계화된 게 거의 없더라고요.

활동보조를 하면서 이것만은 당장 바뀌었으면 좋겠다 싶은 게 있다면

일단 바우처 사업이라고 해서 실시간 결재를 하거든요. 8시간단위로만 끊어야 해요. 10시간을 한다면, 시작할 때 찍고 끝날 때 8시간을 체크해서 찍고, 다시 시작을 해서 2시간 체크해서 끝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어요. 실시간 체크를 못하면 사유를 적어야 해요.

무엇보다 장애인이 불편해 하는 건 활동보조들도 불편해하다는 것. 함께 움직이니까요. 예를 들어 휠체어분이나 거동하기 힘든 분이면 이동할 때 전철을 타도 엘리베이터가 매 구간 설치된 게 아니라서 이동하기 힘들잖아요. 폭력이라고 생각되더라고요. 설치한다고 해놓고서 설치를 안 하니까 그걸 타기 위해서 되게 가까운 거리인데도 빙 돌아서 가는 경우가 꽤 있거든요. 그건 함께 다니는 활동보조인도 되게 싫죠. 지하에서 움직이다가 힘이 다 빠져요. 그렇다고 저상버스가 많은 것도 아니고.

활동보조인과 장애인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는 점이 있다면

활동보조인이 해야 할 일을 생각했을 때, 장애인 분이 불편하신 것에 대해서만 도와드리고 부탁하는 거나 들어주면 편하긴 하죠. 그런데 장애인 분들도 정말 그걸 원할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공통분모를 두고 생활을 같이 하는 거잖아요. 일과 사생활에 선을 긋고 할 수 있는 부분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혼란스러운 사람이 많을 것 같아요. 저도 아직 거기에 대해선 답을 못 내렸는데, 선을 긋고 제 할일을 하냐, 아니면 그 분에게 도움이 되겠다 싶은 이야기를 조언 해드리냐. 저는 그 분한테 도움이 되는 걸 남한테 욕을 먹어도 해드리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거든요.

교육할 때도 활동보조서비스의 내용이나 거기서 사업 자체를 어떻게 운용하는지는 얘기해줘요. 그런데 (인권)감수성이 필요한 부분들은 얘길 안 해주시더라고요. 아무래도 그쪽 부분이 저는 더 크다고 봐요. 생활을 같이 하는 관계잖아요.

인권오름 제 149 호
[입력] 2009년 04월 22일 7:45:38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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