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노테

영화가아니었다면 2021. 8. 12. 12:21

  오다 카오리 감독의 영화 <세노테>에는 몇 가지 죽음이 나온다. 마야 문명이 생성된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천연샘 ‘세노테’. 이 샘들은 한때 이 일대의 유일한 수원이자, 이 세상과 내세를 연결하는 종교적인 장소로 여겨지는 곳이다. 16세기까지는 세노테에 사는 신을 위해 살아 있는 사람을 바치기도 했단다. 신을 위해 제물로 희생된 사람들, 어느 밤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재운 뒤 세노테에 뛰어들었다는 여자, 헤엄치기 위해 들어갔다가 다시는 나오지 못했다는 아이들... 영화는 죽은 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목소리로 들려준다.

그리고 영화에는 보이는 죽음도 있다. 축제 현장에서 발이 묶인 채 거꾸로 매달려 뱅글뱅글 돌아가는 닭, 막 죽어 배가 갈린 돼지, 투우장을 배회하는 소, 여러 투우사들이 소를 결박하기 시작하고, 그 소가 죽어가며 흘렸을 바닥의 흥건한 피. 세노테의 주변에서 인간의 얼굴과 삶과 문화를, 세노테의 안에서 산란하는 빛과 솟아오르는 물과 유영하는 물살이들을, 그리고 이 둘을 가로지르는 소리와 목소리를 들려주던 영화는 마지막에 이르러 어떤 의식을 보여준다. 아마도 죽은 자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듯한, 누군가 해골을 정성스럽게 닦고, 인간들의 죽음이다. 나는 이 영화의 흐름에서 자연스럽게 내 평소의 고민이 겹쳐지며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왜 동물들의 죽음은 위로받지 못할까.
동물의 죽음을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영화가 있다. 신경은 쓰이지만 연출자가 고려하지 않았기에 외면해도 괜찮겠다 싶은 영화도 있다. 하지만 영화 <세노테>에는 죽은 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죽은 자들을 위하는 의식을 보여줄 때에도 인간들의 모습과 행위에만 붙들리지 않으려는 시선과 마음이 분명 있다. 나는 알듯 말듯한 채로, 죽은 동물들과 인간과 동물의 삶과 자연 만물과 이 모두를 바라보는 연출자의 태도를 오래 곱씹어 본다. 어떤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기대에. 그것은 삶과 죽음을 잇는다는 장소, 이미지를 담는 카메라의 움직임, 모호한 시제 등이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비현실적이고 비인간적인 듯한 영화의 형식이 그저 스타일에만 머물지 않고 자연 만물을 대하는 하나의 태도로 전해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인간이기에 인간중심적일 수밖에 없는 구심력과 그럼에도 인간중심적인 것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원심력이 공존하는 영화, 정확히는 그런 논픽션 영화는 어떻게 가능할까.     

카메라가 세노테에서 잠수하고 있는 관광객들을 멀찍이서 오래 바라보는 장면이 있다.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닌, 죽은 존재들로 만들어진 무엇이 바라보고 있는 듯한 그 시선이 잊혀지지 않는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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