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일지

작업 2023. 1. 24. 11:26

<깃발, 창공, 파티> 제작일지
 
1. 시작은 이전 작업인 <공사의 희로애락>에서였다. 주인공인 아버지와 함께 차로 구미공단을 지나고 있었다. 아버지는 길게 늘어선 공장들을 지나가며 “KEC… 코오롱… 내가 이 건물 안에서도 일 많이 했다.” 라는 말을 했고, 나는 그걸 카메라로 찍고 있었다. KEC와 코오롱은 구미의 랜드마크인 수출기념탑을 지나자마자 볼 수 있는 공단의 가장 오래된 공장들이다. 의류회사 코오롱은 익숙했지만 KEC는 낯설었다. KEC? 나는 촬영분의 녹취를 풀다 말고 인터넷 검색을 했다. 홈페이지에는 “세계 최우량 반도체 전문회사”라고 쓰여 있었다. KEC는 1969년 구미공단에 제1호로 입주한 공장이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KEC 회장에게 10만 평의 공장 부지를 거의 무상으로 주다시피 했다고 한다. 2010년 노조가 공장을 점거하는 큰 파업을 해서 구미 전체가 떠들썩했다는 기사도 있었다. 가장 최근의 기사는 남녀 임금차별에 관한 거였다. 노조가 이 문제를 고쳐달라고 인권위에 진정을 넣었다고 했다. 검색하기 불과 며칠 전의 일이었다. KEC 검색에서 시작한 나는 어느새 KEC노조로 관심을 옮겨가며 정신없이 기사를 읽고 있었다. 일단 자료들을 컴퓨터 하드 한 켠에 정리해두었다.
 
2. <공사의 희로애락>은 산업화 시대를 치열하게 지나온 한 남성 노동자이자, 가장이자, 내 아버지에 관한 다큐멘터리다. 산업화 세대 하면 흔히 남성 노동자부터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그 아래에 저임금 여성 노동자들이 있다는 걸, 나는 모르지 않는다. “남자는 가장이니까”, “여자의 바깥일은 용돈벌이, 반찬값.”과 같은 가부장적인 인식이 결국 남녀 임금차별로 이어진다. 이전 작업에서는 다루지 못했던 이 문제에 관해 공부로든 작업으로든 관심을 이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우연히 알게 된 KEC노조에 관심이 갔던 이유이기도 하다. KEC노조는 내부의 성차별에 대해 막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조직이었다.
 
3. 그즈음 나는 『기나긴 승리』라는 책을 읽었다. 이야기는 미국의 대기업 굿이어에서 여성 관리자인 릴리 레드베터가 누군가로부터 받은 쪽지로부터 시작된다. 쪽지에는 남성 관리자와 여성 관리자의 임금 격차가 적혀 있었는데 릴리에겐 실로 놀라운 ‘정보’였다. 충격을 받은 그는 고민 끝에 회사와의 싸움을 시작한다. 그리고 성차별 문제를 대법원까지 가져가면서 미국에서 크게 화제가 됐고, 이후 그의 이름을 딴 법이 제정되기도 했다. 한 여성의 어린 시절부터 그가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어려움에 직면하고 어떻게 싸워 변화를 이끌어냈는가에 관한 이 책은 내게 무척 감동이었다. ‘한 여성이 싸우는 이야기가 이토록 재밌을 수 있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KEC의 여성 노동자, 정확히는 노조의 여성 조합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막연히 차별받는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실제 데이터를 알기 전까지는 그 심각성을 실감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 이후 그들의 싸움도 시작됐다.
 
4. 작업의 동력이 된 또 다른 경험이 있다. 2017년 초겨울, 나는 물류센터에서 두 달간 일했다. 몸이 몹시 고됐다. 나는 소비자가 주문한 물건을 찾아오는 피킹(picking), 그리고 문제가 없는지 검수하고 포장(packing)하는 업무를 했다. 이 업무에는 대부분 여성 노동자들이 배치됐다. 사람이 자주 바뀌었다. 영하 10도까지 내려가는 추운 겨울에 나는 동창에 걸리며 일을 했고, 손가락에 염증이 걸릴 정도로 일이 많았다. 구직 공고를 봤을 당시에는 단기간 꽤 돈을 많이 벌 수 있겠다 싶었는데, 일을 하면 할수록 ‘이렇게 일하고 이것밖에 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그보다 화나는 건 말 그대로 사람이 ‘소모품’ 취급을 받아서였다. 노동환경이 열악했다. 하루 종일 서서 반복 업무를 하던 어느 날 나도 모르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노동조합이 있으면 좋겠다.’고. 그럼 저 언니는 내가 화장실 가는 걸로도 눈치 주지 않을 텐데, 서로를 감시 대상으로 여기지도 않을 텐데, 서로 좀 더 따뜻하게 대할 수 있을 텐데, 무엇보다 다치지 않고 안전하게 일할 수 있을 텐데, 하는 바람들. 나는 평소 노조를 지지하는 정도였는데 이번에는 좀 절실했다. 그런데도 난 행동은커녕 불만 하나 말하지 못하고 그곳을 떠났다. 공간과 일에 익숙해지니 분노도 조금 누그러졌다. 나를 탓하게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개인이 혼자 문제제기를 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깨달았다. 나는 릴리 레드베터 같은 사람이 될 수 없었으니까. 그 이후로 집단의 힘인 노동조합을 자주 생각했다.
 
5. 이전 작업에서 해소되지 않은 질문과 구체적인 내 경험이 만나면서 나는 KEC노조를 직접 만나고 싶어졌다.(정확한 명칭은 ‘KEC노조’가 아닌 ‘KEC지회’다. 정식 명칭은 ‘민주노총 금속노조 구미지부 KEC지회’) 나는 인터넷에서 노조의 리더인 지회장님의 연락처를 찾아 전화했다. 그는 지회 설립 이후 30년 만에 처음으로 선출된 여성 지회장이었다. KEC지회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와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은 내 의사를 간략히 설명을 드렸다. 일단 만나기로 했다. 다행히도 “관심 줘서 감사하다.”는 말을 들었다.
 
6.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은 광화문의 집회 현장이었다. 수많은 깃발 사이에서 ‘KEC지회’라 쓰인 깃발을 찾는 게 쉽지 않았다. 헤매고 있는데 노조에서 먼저 나를 알아보고 다가왔다. 그러고 보면 그날 이후 KEC지회와 가까워지기까지의 시간은 곧 내가 ‘KEC지회’라 쓰인 깃발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때까지 걸린 시간이기도 했다.
 
7. 첫 만남의 자리에 다큐의 주요 인물이 될 교육국장님과 수석부지회장님이 함께했다. 배 국장님은 상급단체인 민주노총 소속이었고, 이 수석부지회장님은 지회의 여성 간부였다. 그들은 지인을 통해 접근한 것도, 집회에서 자주 보던 얼굴도 아닌 나를 조금 경계하는 것 같았다. 그날은 일종의 면접 같은 자리였다. 나보다 그들이 궁금한 게 더 많았다. 내 어떤 관심사들이 모여 KEC지회를 촬영하고 싶게 됐는지를 잘 설명해야 했다. 돌이켜보면 나는 그동안 이미 라포(rapport)가 형성된 주변 사람을 주로 촬영했다. 이제 막 알기 시작한 이 낯선 사람들과 차근차근 라포를 형성해나갈 시간이 두렵고 설렜다.
 
8. 감사하게도 우리는 함께하게 됐다. 다시 ‘현장’이 생겼다. 내가 카메라를 들고 찾아갈, 늘 관찰하고 탐구해야 할 나의 현장. 작업을 시작한 2018년 3월, 나는 “KEC지회의 여성 간부와 남녀 임금차별을 다루겠다.” 정도의 계획만 갖고 있었다. 또 하나, 이전 작업이 촬영 대상과의 교감이 중요했다면 이번에는 카메라가 우리 ‘사이’에 있다는 사실이 눈에 띄지 않도록 해보자는 목표를 세웠다. 물론 방법은 ‘바뀔 수 있다.’ 그래도 이렇게 스스로 작은 목표 하나를 세워보는 게 작업의 중요한 동력이 된다.
 
9. KEC지회를 만나고서야 알게 된 중요한 사실은 KEC 안에 세 개의 노동조합이(나!) 있다는 거다. 기사로만 접했을 때는 전혀 알 수 없던 정보였다. 1987년에 설립된 KEC지회는 오래 단일노조였다가 2010년 파업 이후 소수노조가 된다. 사측이 개입해서 만든 한국노총 산하인 KEC노동조합으로 많은 조합원들이 이탈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기업노조인(상급단체가 없다) KEC기업노동조합도 생겼다. 복수노조의 원래 취지는 다양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라지만 노조가 세 개인 회사는 과연 노동자들에게 유리할까? 노동자들을 분열시키는 게 아닌가? 실제로 사측이 특정 노조를 무력화하는 데 복수노조를 악용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소수노조의 조합원들은 ‘임금 및 단체협상 과정(임단협)’에서 교섭권과 투표권이 없다.
 
10. KEC지회는 2010년 파업 이후 처음으로 임단협에 참가한다. 소수노조가 임단협에서 투표권을 가지려면 ‘교섭창구단일화’를 거쳐야 한다. KEC지회의 경우 그건 복수노조 체제를 인정하는 게 돼서 그동안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소수노조로서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다. 고민 끝에 8년 만에 처음으로 교섭창구단일화를 거쳐 임단협에 참가하기로 한다. KEC지회가 가장 주요하게 내세운 2018년의 요구는 ‘단일호봉제 쟁취’였다. J와 S로 나뉜 KEC의 등급제를 없애자는 거다. 회사는 이 등급제를 이용해 남녀를, KEC지회를 차별했다.
 
11. 외부에서 보면 KEC라는 회사가 유독 차별이 심하고 가부장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더디더라도 내부의 변화는 중요하다. 나는 이런 문제제기를 시작한 KEC지회라는 조직 자체와 여성 간부들을 집중해서 지켜보기로 했다.
 
12. 촬영하는 동안 조직생활과 개인의 자유에 대해 자주 떠올렸다. 둘 사이에서 균형을 잘 유지해 조직도 개인도 건강하게 오래가는 게 중요하다. 그동안 내가 겪은 공동체와 조직생활이 종종 떠올랐다. 이건 사회 속에서 살아가며 많은 사람들이 겪는 경험이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보편성을 드러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구체적인 한 조직을 통해서 말이다.
 
13. 많은 KEC지회 조합원들이 KEC노동조합으로 떠난 주요 이유에 노조 간 차별이 있다. KEC지회 소속의 조합원들은 거의 진급이 안 된다. 그리고 또 하나 이유가 더 있다. KEC지회에 있으면 투쟁과 연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 좋은 게 좋은 거다, 적당히 타협하자와 같은 태도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의 입장을 대변하기 어렵다. 그래서 계속 싸워야 하고, 잘 싸우려면 뭉쳐야 한다. 그게 민주노조가 추구하는 바이고, 간부는 조합원들을 그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 하지만 3교대 노동을 하는 노동자들은 노조활동까지 열심히 하기가 버겁다. 누구나 주말에는 쉬고 싶을 것이다. 내 입장에서 생각해봐도 그렇다. 그래서 민주노조를 이끌어가는 간부나 조합원들은 좀 더 노력할 수밖에 없다.
 
14. 촬영하면서 알게 된 이런 이야기를 통해 나는 자연스레 ‘민주노조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갖게 됐다. 내가 KEC지회를 1년 반여의 시간 동안 지켜보며 느낀 건 이 조직은 단지 내 조합원이나 회사의 노동자들만의 이익을 위해 활동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항상 전체 노동자와 함께 잘 살 수 있는 방향을 고민하고 조합원들을 교육시키고 고민을 나누었다. 이게 ‘민주노조 사수’를 외치는, 민주노조이고자 늘 노력하는 KEC지회의 모습이었다. 이런 지점들이 자꾸 내 눈에 들어왔다. 그냥 노조 말고 민주노조.
 
15. 미디어로 주로 접하게 되는 파업과 거리 투쟁은 노조 활동 중에서 굉장히 예외적인 상황이다. 협의하고 합의하는 교섭의 과정이 결렬됐을 때, 상대적으로 약자인 노동자들이 쓰지 않을 수밖에 없는 수단인 것이다. 나는 KEC지회의 파업이나 거리에서의 투쟁을 담을 수는 없었다. 그런 사건이 벌어지길 기다릴 수도 없었다. 기다리게 되지도 않았다. 나는 노조의 일상적인 활동에 좀 더 집중해보고 싶었다. 노동조합의 노동이라고 할 수 있을 장면들을 담아보고 싶었다.
 
16. 제작일지를 정리하는 지금에 와서야 나름 정리가 되지만 촬영을 시작할 당시에는 많은 용어들이 낯설었다. ‘미옥 수석~’이라고 할 때 수석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그래서 이 작업은 내게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과정이기도 했지만 처음 노조에 가입한 입문자로서의 경험이기도 했다. 나 역시 노조에 대해서는 늘 파업과 거리 투쟁과 같은 이미지로만 각인돼 있었다. 그것 외의 이미지를 담는 것으로도 새로운 노조 다큐가 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17. 당시 클라우디아 바레장 감독의 <아마-산>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무척 재밌게 보았다. 일본의 해녀를 다룬 일종의 관찰 다큐멘터리였다. 인류학적인 접근의 다큐멘터리 대부분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지켜보며 그 시선이 건조한 편이다. 이 영화는 카메라와 대상 간에 거리가 있으면서도 따뜻한 시선을 갖고 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관찰 형식을 띤 다큐멘터리를 찾아보고 있었다. 프레더릭 와이즈먼이나 왕빙 감독의 다큐에서도 느껴왔던 거지만 ‘그냥 계속 보여주는데, 나는 계속 보는데 그냥 보는 걸로도 왜 계속 보게 되지? 계속 보고 싶지? 하염없이 보면 볼 것 같은 이 상태는 뭐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스타일에 대한 고민, 지금 내가 흥미로워하는 형식, 그리고 촬영 현장을 오가며 내가 느끼는 것들을 서서히 조율해가며 이번 작업의 형식을 만들어갈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18. 구미와 서울을 오가며 촬영했다. 한 회차에 3일 정도 머물며 한 달에 평균 2~3번 정도 오갔다. 구미에 갈 때마다 ‘신사무실’이라는 곳에서 숙식했다. KEC지회의 배려 덕분이다. 촬영을 진행하면서 나는 자연스레 공간을 중요시하게 됐는데 그건 신사무실의 영향이 크다. ‘신사무실’은 ‘지회사무실’과 더불어 지회가 주로 사용하는 공간이다. 지회사무실은 공장 안에 있고, 신사무실은 공장 밖에 있다. 지회는 상급단체나 외부인의 출입에 제약이 있는 지회사무실과 별개로 좀 더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무엇보다 나는 이 신사무실을 아사히비정규직지회와 함께 사용한다는 게 좋았다.(KEC지회 노동자들은 정규직이다) 구미에는 ‘아사히 비정규직지회’라고 구미공단 최초의 비정규직 노조가 있다. 아사히 비정규직지회가 만들어질 때 가장 큰 도움을 준 노조가 KEC지회였다. 이들은 주로 함께 움직인다. 나는 한 화면에 두 노조가 자연스레 섞여 있는 모습을 드러내고자 했다.
 
19. 신사무실에서 내가 사계절을 보내며 느낀 감각, 이 공간이 내게 줬던 느낌, 그런 것들.
 
20. 공간은 <깃발, 창공, 파티>에서 인물만큼 중요한 요소, 아니 주인공이었다. 나는 시간적으로는 ‘2018년 KEC의 임단협 과정’, 공간적으로는 KEC지회의 주요 동선인 ‘지회사무실-신사무실-광장’을 작품의 주요한 축으로 삼았다. 이 공간을 반복해서 보여줌으로써 조직의 ‘운동성’을 드러내고 싶었다. 또 반복은 일상성을 드러내기에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21. 내가 볼 수 있는 노조 활동은 주로 회의와 교육이었다. 노조의 가장 기본적인 활동이기도 하다. 그 외에 ‘그림이 된다고 할 수 있을’ 공장 내 선전전과 같은, 움직임이 많은 활동은 촬영할 수 없었다. 외부인인 나는 지회사무실 밖으로 나가는 게 금지됐다. 촬영에 있어서는 다소 불리한 조건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제약 상황이 오히려 하나의 스타일이 될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나는 구미에 갈 때마다 정규 업무시간에는 지회사무실, 저녁 6시 이후에는 주로 신사무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딱히 사건이란 건 없었다.(물론 무엇을 사건으로 볼지가 더 중요한 문제이지만, 충돌이나 갈등과 같은 상황이 없었다는 의미다) 나는 공간에 조합원들이 드나드는 걸 지켜보거나 뒷짐 지고 창문이나 문 밖을 하염없이 쳐다보곤 했다.
 
22. 사무실에서는 달마다 생일파티가 열렸다. 작은 케이크라도 사서 꼭 초를 켜고 소원을 빌고 불을 껐다. 생일파티를 할 때만은 유독 생일을 맞은 그 개인이 도드라져 보였다.
 
23. 촬영하는 동안 자주 보고 들은 것들이 지금의 제목을 만들었다. 노조 하면 쉽게 떠올리는 그 깃발, 그리고 KEC지회의 몸짓패 이름인 창공, 마지막으로 매달 조합원들의 생일에 열리는 파티. 그래서 <깃발, 창공, 파티>. 내용만으로 충분히 무거워서 제목에 특별한 의미를 담고 싶지 않았다. 머릿속에 이미지를 그릴 수 있는 제목이길 바랐다. KEC지회는 기획적인 노조파괴를 당하고 손배가압류까지 받은 조직이다. 나는 보지 못했지만 사람들은 울기도 많이 울었다고 한다. 그런데 우는 만큼 잘 웃는다. 이 노조에 맴도는 생기, 밝은 기운을 잘 드러내고 싶었다.
 
24. 언젠가 노트에 오려붙인 기사가 있다. 가끔 들여다보고 힘이 되던 글.
“(중략) 그것이 바로 명랑함이다. 싸우면서 명랑할 수 있어야 한다. 아픈 사람을 보면 눈물이 나는 건강함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조성택, 󰡔경향신문)
 
25. 지회의 총무부장님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회사와 노조 중 어디에 더 소속감을 느끼세요?” 이분법적으로 답하기 어려울 걸 알면서도 한 번쯤 물어보고 싶었다. 그는 “글쎄… 답하기 쉬운 질문은 아닌데, 2010년도 이전 같으면 회사라고 할 텐데 이제는 노조인 것 같네. 그전에는 회사를 위해 충성하며 살았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거든.” 하고 답했다. 나는 ‘노동자’로서가 아닌 ‘조합원’으로서의 사람들을 담고 싶었다. ‘회사가 있으니 노조도 있다. 조합원이기 이전에 노동자다.’라는 전제가 깔린 다큐가 아니길 바랐다. 노동보다 노조활동이 더 중요할 수 있다, 노조 그 자체로 존중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 어쨌거나 이건 노동에 관한 다큐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노동조합의 노동에 관한 이야기일 수는 있겠다.
 
26. <깃발, 창공, 파티>에는 노동에 관한 인물들의 철학은 있지만 정작 노동하는 이미지는 없다. 내가 찍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는 노동하는 장면이 중요하진 않다. 물론 필요하다면 푸티지를 사용하거나 다른 방식의 재현을 할 수는 있었다. 왠지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나는 ‘왠지’ 하는 내 감각을 그냥 믿어버리는 편이다) 물론 연출자의 게으름일 수 있다. 어쨌거나 나는 한계상황에서 쉽게 포기하며, 혹은 그걸 기회로 스타일을 만드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
 
27. 나는 저널리즘적인 작업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성차별적인 임금 문제 자체를 다루려는 건 아니다. 그건 좋은 기사들이 충분히 역할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KEC지회를 어떻게 영화적이게 만들 수 있을까. 계속되던 고민.
 
28.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하는 하룬 파로키의 전시를 보러간 적이 있다. 그는 노동과 노동자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그의 전시 도록을 보다가 내가 주요하게 가져갈 아이디어를 얻었다. 각종 영화들에서 노동자들이 공장 문을 나서는 장면을 편집한 비디오 설치물 <110년간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의 소개글을 일부 옮기면,
 
“(중략) … 우리는 이를 다큐멘터리와 산업영화, 프로파간다 영화들에서 발견하는데, 음악과 단어들을 배경으로 흔히 쓰는 이미지는 ‘피착취자들’, ‘산업 프롤레타리아들’, ‘주먹이 된 노동자들’, 혹은 ‘대중 사회’와 같은 문자의 의미를 부여받는다. 공동체의 외양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노동자들이 서둘러 문을 지나자마자, 그들은 개인으로 흩어지는데, 대부분의 서사 영화들이 다루는 것은 노동자들의 바로 이러한 존재 양태이다.”(하룬 파로키)
 
이걸 읽고 나는 즉각적으로 내 작업은 ‘공장 문을 나선 뒤에도 노동자가 개인으로 흩어지는 게 아니라 공동체의 외양을, 아니 다른 공동체의 형태를 유지하는 장면들을 포착하고 싶’어 한다는 걸 발견했다.
 
29. 그래서 KEC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의 이미지는 꼭 찍고 싶었다. 하지만 3교대 근무인데다가 노동자들은 끼리끼리 띄엄띄엄 퇴근해서 머릿속에 그렸던 이미지를 담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내가 촬영하는 모습이 사측에 노출되는 걸 항상 조심해야 했기에 공장 주변에서 무리하게 작업할 수가 없었다. 사측과의 사이가 좋지 않은 KEC지회에 불리한 상황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걸 계속 염두에 두었다.
 
30. KEC지회의 남녀 성비는 비슷하다. 연령대는 20대 후반 ~ 60대 초반까지 다양하게 분포돼 있다. 젊은 노동자들의 유입이 거의 없어서 평균 연령대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 나이든 사람 중에는 남성이 훨씬 많다. 노조 설립 30년 만에야 여성지회장이 나왔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는, 회사뿐 아니라 노조 자체도 남성중심이다. 하지만 이제 이 조직은 지금 변화하고 있다. 조직 차원에서 2018년에 처음으로 여성의 날을 챙겼다. 회사나 사회의 변화를 요구하면서 동시에 내부적으로도 변하려고 노력한다. 나이 많은 남성 조합원들은 그 변화에 동참한다. 촬영을 할수록 나는 이 점이 참 좋았다. 사소하지만 이런 모습들을 담고 싶었다. 여성 간부의 교육에 묵묵히 경청하는 나이든 남성 조합원들의 얼굴, 여성의 날에 함께 무언가를 하는 모습 등…. 이런 변화와 별개로 작업을 하면서 생긴 의문은 있다. 최초의 여성지회장은 이 조직이 가장 침체기일 때 선출됐다. 왜 항상 여성 리더는 위기의 순간에 등장하는가. 이 문제의식으로도 많은 이야기를 풀 수 있을 것이다. 이건 지회뿐 아니라 이 사회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현상이다. 하지만 이 작업에서만큼은 조합원들의 지지로 선출된 이 젊은 여성지회장이 민주적이고 포용하는 방식으로 조직 내에서 변화를 만들어나가는 모습을 더 중요하게 보고자 했다.
 
31. 나의 관심은 여성노동자에서 조직과 공동체, 그리고 민주노조로 이어졌다. 사실 이건 다 이어진 문제들이다.
 
32. KEC지회를 촬영하고부터 내가 기사에서 눈을 밝히며 찾게 되는 단어는 ‘민주노총’이었다. 그리고 복수노조 체제의 사업장인 경우 민주노총 산하의 노조는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유념해서 보았다. 꽤 많은 사업장에서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의 대응이 달랐다. 집배원 과로사가 문제가 되던 때 우체국 노조의 파업이 그랬고, 지금도 계속되는 있는 톨게이트 노조도 그랬다. 민주노총을 바로 민주노조라고 말하기는 조심스럽지만 분명 민주노총 산하의 노조들이 덜 타협하고, 더 노동자의 입장을 위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민주노총에 대한 혐오는 심하다.
 
33. 촬영하는 동안 틈틈이 KEC나 KEC지회로 인터넷 검색을 했다. 그러다 문득 ‘KEC 임단협’ 으로 검색했는데 재밌는 결과가 나왔다. “KEC지회 임단협 7년 연속 무파업 평화적 타결”, “KEC지회 임단협 6년 연속 무파업 평화적 타결”, “KEC지회 임단협 5년 연속 평화적 무파업 타결”… KEC지회가 소수노조가 된 2010년 이후의 기사들이었다. 이 기사에 KEC지회는 없었다. 기사의 제목을 보고 바로 의문이 들었다. 무파업은 과연 좋은 걸까? 저들이 말하는 ‘평화’란 대체 뭐지? 그리고 궁금했다. 2018년 임단협에 관해서는 어떤 기사가 나올까? 8년째 무파업 평화적 타결이 될까, KEC지회라는 변수로 인해 새로운 결과가 나올까. 사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나로서는 중요하지 않았다. 극적인 사건을 바라며 작업하고 싶지도 않았다. 과정에서 발생하는 의미들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일단 결과를 다룬 저 기사는 활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승리하지 않으면 소수자들의 역사는 지워지기 쉽다.
 
34. 지회장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안 싸우면 아무것도 안 바뀐다!” 흔한 말일 수도 있지만 이 말이 날카롭게 내 마음에 각인된 건, 경험해본 자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35. KEC노동조합에서 KEC지회로 소속을 바꾼 여성 대의원이 있었다. 언젠가 술자리에서 “차별받을 텐데 KEC지회로 어떻게 넘어올 생각을 하게 됐느냐?”는 질문을 했다. 그 왈, “일하다 다친 적이 있는데 관리자가 조퇴를 안 시켜줬다. 주변에서 아무 반응도 없을 때 대신 싸워준 언니들이 있었다. 그게 KEC지회 사람들이었다. 고맙고 멋졌다”. 물류센터에서 일할 때가 생각났다. 싸울 줄 아는 사람들, 싸우지 않으면 고쳐지지 않는다는 걸 뼈저리게 경험한 사람들. 나중에 이 이야기를 꼭 인터뷰로 담고 싶었다. 하지만 서울로 돌아오는 고속버스에서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건 너무 중요한 경험이지만, 하지만 그런 이야기들은 이미 많이 나오지 않았느냐고. 나의 감동과는 별개로 영화의 방법은 달라야 하지 않겠느냐고.
 
36. 필요하면 인터뷰를 하겠다는 계획이 있었다. 하지만 관찰 다큐에 관심이 생긴 만큼 인터뷰를 넣지 않고도 밀고 나갈 수는 없을까 고민했다. 이미 내 촬영분에는 회의와 교육, 문자로 말이 넘치고 있었다. 추가로 인터뷰는 넣지 않기로 결정했다.
 
37. 관찰 다큐에 계속 관심을 두던 와중 한 온라인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소다 가즈히로라는 다큐멘터리 감독의 작품을 보게 됐다. 재밌어서 볼 수 있는 작품은 모조리 찾아봤다. “그냥 보여주는 건데 왜 이렇게 재밌지?”, “대체 어떻게 보여주고 있는 거지?” 이 작업을 하는 내내 계속되는 질문이다.
 
38. 서울과 구미를 한 번 오가는 데 6시간이 걸렸다. 나는 이동하는 시간이 좋다. 갇혀 있는 시간이 오히려 자유롭다. 내가 선택한 작업이지만 매번 촬영장에 도착하기까지는 마음이 버겁다. 버스 안에의 시간은 서울과 구미에서의 내 시차를 좁혀주었다. 작업 모드로 전환시켜주었다. 구미에 거주지를 두고 집중적으로 촬영할 수도 있었지만 개인적인 여건도 있었고 무엇보다 오가는 일 자체를 내가 즐겼다.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또 가까워지는 거리감에서 긴장을 느끼며 촬영대상을 대하는 나만의 거리감을 찾으려고 했다.
 
39. 구성에 대한 구상을 시작한다. KEC지회를 점점 알아가는 흐름으로 이어붙이고 싶다. 현재의 시간이 흐르면서도 과거에 대해 점점 알아가는 구성이 될 것이다. 점점 이 조직에 친밀해지는 기분이면 좋겠다. 잠시만이라도 노동조합을 함께 체험한다는 감각을 주고 싶다.
 
40. 2018년의 마지막 달, 김용균 노동자의 죽음을 들었다. 사회적으로 추모 분위기가 계속 됐고 나도 내내 우울했다. 그의 고향이 구미라고 했다. 몇 시민단체와 KEC지회, 아사히비정규직지회를 중심으로 구미역에 작은 분향소를 차렸다. 역의 한 켠에서는 성탄절 트리가 반짝이고 캐럴이 들렸다. 나는 멀리서 이 모든 풍경을 촬영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분향소를 쳐다보지도 않고 지나갔지만 또 많은 사람들은 멀리서 쳐다보거나 가까이 다가오기도 했다. 오래 머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데, 그래도 이 작은 분향소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 이런 자리를 만들어줘서 다행이라고, 그래서 사람들은 무엇을 빨리 잊지 않는 것 같다고 말이다. 그날은 평소 발언을 잘 안 하던 총무부장님이 마이크를 오래 쥐고 있었다. 조금씩 더듬거리며 느리게 말을 이어나갔다.
 
41. KEC의 2018년 임단협 교섭은 생각보다 길어져서 해를 넘겨도 끝나지 않았다. 소수노조 KEC지회가 끼어들면서 순조롭지 못한 탓이다. 그러던 1월 말 갑작스럽게 잠정합의안이 나오고 투표일이 결정됐다. 나는 급히 구미로 갔다. 투표 직전 조합원들에게 잠정합의안을 설명하는 장면을 찍지 못해 아쉬웠다. 며칠 머무르며 8년 만에 하는 투표의 설렘, 사람들의 마음가짐,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그보다 중요한 성과들 같은 걸 담으려고 했다. 언제나 과정, 어떤 문제의식을 갖고 싸웠느냐 하는 과정, 그리고 작은 성과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42. 2019년 초부터 촬영본을 모니터링하기 시작했다. 하염없이 촬영본을 돌려보는 일에 지치기도 했다. 그래도 내가 찍은 것들을 열심히 보는 게 편집에 있어 가장 중요하다고 스스로를 독려했다. 촬영본을 보며 느낀 건 카메라가 불현듯 줌(zoom)하는 순간이 많다는 거다. 중요하다고 느낀 순간에 줌 버튼을 눌렀다는 건 알겠는데 촬영하던 순간에는 전혀 의식하지 않은 행동이다. 어떤 줌은 마음에 들고 어떤 건 마음에 들지 않았다.
 
43.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무엇이 될까. 촬영도 언제고 끝날 것이다. 지회사무실이나 신사무실에서의 장면을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다. 영화가 끝나도 현실에서 삶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그러다 곧 3・8 여성의 날이 다가온다는 걸 알았고 구미로 갔다. 촬영분이 마음에 들었다. 지회사무실 밖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문을 사이에 두고, 혹은 창문 너머로 찍었다. 이후에도 촬영은 6월 정도까지 틈틈이 계속 했다.
 
44. 2019년 4월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편집을 시작했다. 일단 간단한 원칙 하나를 세웠다. 컷은 (전 작업보다는) 짧게, 시퀀스는 길게.
 
45. 여성조합원들과 어울리고 촬영하는 동안 종종 내 청소년 시절을 떠올렸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넘어갈 즈음이면 인문계로 갈 학생과 실업계로 갈 학생으로 나뉜다. 딱히 공부는 적성에 맞지 않아서, 대학에 갈 생각은 없어서 혹은 집안 형편 때문에 일찍 취직을 해야 해서 등, 자발적 혹은 비자발적으로 실업계를 선택한 여학생들이 떠올랐다. 실업계로 가는 여학생들은 실습을 위해 빨리 학교를 떠나기도 했다. 한 반에서 수업을 들었던 몇 친구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KEC에 다니는 대부분의 여성노동자들은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상대적으로 일찍 사회에 뛰어든 여성들이다. 이직을 하지 않았다면 연차가 15년은 되는 프로들이고. 나는 그들이 오래 헤어졌다 다시 만난 친구들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서로가 겪은 경험은 다르지만, 그래서 서로에게 줄 것이 있는 그런 관계.
 
46. 편집하는 동안 입장, 당파성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예전에 옮겨둔 문장을 자주 꺼내본다. 당사자와 당사자성은 다르고, 지배 세력이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히 당사자성이라는 말. 노동자가 당사자라면 민주노조 조합원들은 당사자성을 가진 사람들이 아닐까?
 
“물론 당파성은 약자의 사실(facts)이나 과학이 아니라 부분적 지식(situated knowledge)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백인을 포함해 앎의 의지를 지닌 모든 이들에게 매우 설득력이 있다. 볼드윈은 진실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이나 보편성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보여준다. 우리가 알고 있는 흑인(사회적 약자)에 대한 통념은 거의 대부분 실제가 아니다. 그것을 알고 있는 당사자도 있고 그렇지 않은 당사자도 있다. 그래서 투명한, 인지 가능한 ‘당사자’와 사회적 실천으로서 ‘당사자성’은 다른 개념이다. 지배 세력이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히, 당사자성이다.” (정희진, 지성과 당파성 -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 다큐매거진 DOCKING)
 
47. 나는 1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관찰하고 촬영하며 내 나름대로 각 인물의 역할과 성격을 가늠했다. 주요 인물이 아닌 잠깐 등장하는 인물에도 그 사람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컷을 담고 선택하려고 했다. 가령 모든 뒷정리와 사무실의 살림을 도맡아 하는 총무부장님이나, 주로 타인의 말을 듣기만 하다가도 한 번씩 발언을 하면 누구보다 인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법규부장님의 모습처럼. 기본적인 원칙으로는 최대한 여성조합원들의 얼굴을 많이 노출시키고 그들에게 더 많은 발언권을 주려고 했다.
 
48. 편집본에 “안녕”, “수고했어”, “고마워” 같은 일상적인 말이면서 서로에 대한 예의가 되는 말을 많이 넣으려고 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나누는 이런 사소한 말들이 관계에 있어서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KEC지회를 관찰하며 새삼 느끼기도 했고.
 
49. 편집본에서 내가 가장 아끼는 장면은 산책을 한 뒤 돌아가는 차 안에서의 대화다. 바빠서 극장에도 못 갔다느니 카메라에 찍히기만 할 게 아니라 우리도 영화를 봐야 한다느니 같은 대화를 나누다가 잠시의 침묵 뒤 배태선 교육국장님이 이런 말을 한다. “리얼하다. 사는 게.” 차창 밖으로 보이는 구미의 밤 풍경. 어쩌면 흔할지도 모를 이 말이 내게 강렬했던 건 나는 그 감각을 잘 모르겠어서다. 사는 게 리얼하다는 건 뭘까? 재현, 표현방법 같은 걸 고민하며 살아서인지 나는 항상 삶과 거리를 두고 있는 기분이다. 그건 저항하며 사는 사람이 더 잘 느낄 수 있는 삶에 대한 감각일까.
 
50. 사람들의 능동적이고 당당한 말과 태도를 일부러 더 드러내고자 했다.
 
51. 영상 편집을 할 때 리듬을 잘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잘하지는 못해도 늘 염두에 두고 있다. 컷들이 모여 시퀀스가 되고 시퀀스들이 모여 하나의 영화가 된다. 출렁출렁 한 편 전체에 리듬감이 잘 만들어지면 좋겠다. 편집하다 가장 기분이 좋을 때는 내 마음에 들 때다. 어떻게 해야 내 마음에 들 수 있을까, 의 생각으로 넘어가진 않는다. 내 마음이 드는 순간을 믿어보려고 한다. 열심히 노력해도 내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러다 문득 이 컷에 뒤잇는 다음 컷을 커서로 쭈-욱 들어서 앞 컷의 아무 데나 툭 하고 놓아본다. 그러고 돌아가서 재생을 하면 기가 막히게 내 마음에 들 때가 있다. 어떻게 이 지점에서 두 컷이 붙었을까. 나는 몹시 만족스러워한다. 우연이라고 할 수도 있고 필연이기에 나는 그저 행했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재밌다. 물론 아주 드물게 시도한다. 영상의 마지막에 ‘인터내셔널가’가 시작되는 부분이 그랬다.
 
52. 최종 편집본을 들고 구미로 갔다. 조합원들에게 영상을 처음 보여주는 자리였다. 3시간이라고 하니 다들 그건 아닌 것 같다던 원성… 물론 기본적으로 존중하는 태도에서 나온 불만이었지만. 시사를 하는 동안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긴장을 해서 오래 앉아 있는 게 힘들지도 않았다. 지회장님, 수석부지회장님, 국장님과 식사를 하며 다큐에 관한 의견을 들었다. 그래도 내가 생각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는 말을 해주었다. 하지만 꼭 빼야 할 장면들이 있었다. 여성조합원들이 담배 피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여기는 지방이라서….” 의도적으로 더 배치했던 장면들이라 아까웠지만 삭제했다. 아쉬워서 그에 관한 글을 써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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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유리문은 한번 밀릴 때마다 오래 제자리를 잡지 못한다. 사무실 바깥에서 들리는 사내방송 음악소리가 들렸다 말았다 한다. 점심시간이 되자 이곳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노조 조합원들이 사용하는 이 사무실은 1987년에 만들어진 뒤로 책상도, 사물함도, 문짝도, 심지어 식물들 역시 한 번도 바뀌거나 죽은 일 없이 각자의 자리에서 버티고 살아온 것 같다. 생기는 덜하지만 묵직한 책임감이 느껴지는 분위기다. 시간대별로 다른 빛깔의 볕이 사무실에 들고 나간다. 볕이 전혀 들지 않는 공간도 있다.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 원탁이 있는 작은 홀을 지나 문턱 하나를 넘으면 정면에 문이 하나 보인다. 누군가 저 안에 사람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그냥 창고로 쓰는 곳이리라 생각하고 말, 벽 같은 문. 나무로 된 문짝에 달린 둥근 손잡이를 돌리면 벽지가 누런 두 평 남짓한 방이 있다. 창문 대신 환풍기가 하나 달린 공간에 볕이 들지 않는 건 사실이지만, 이 방의 벽지가 노란 건 담배 연기 때문이다. 방에 놓인 검은 가죽 소파에 앉아 있는 사람은 대부분 여자들이다. 오랫동안 지회장의 사무실로 쓰이던 이 방이 여성 노동자들의 흡연실이 된 건 2010년 파업 이후다. 파업하는 몇 달 동안 여자, 남자 가릴 것 없이 같은 천막에서 생활하고 서로의 면면들을 다 보게 되면서 가장 눈에 띈 건 담배 피우는 여자들이었다고 한다. 화장실에서 몰래 담배를 피우던 여성 노동자들이 파업 중엔 어쩔 수 없이 밖에서 담배를 피우게 됐고, 함께 생활하는 몇 달 사이 자연스레 어울려 피우기 시작했다. 경진아 너도 담배 피웠냐, 선희 너도 피우는 구나, 하면서. 파업 후 조합원들이 다시 회사로 복귀하자 담배 피우는 여자들은 파업 이전처럼 조용히 광장에서 사라졌다. 아직도 사내 흡연구역에는 남자들뿐이다. 노조는 지회장이 쓰던 방을 담배 피우는 여성 노동자들에게 내어주었다. 이들은 애써 노력하기보다 아직은 편한 공간에서 담배를 피우기 원한다. 오히려 자유로운 건 회사 밖이고, 집회 현장 같은 곳들이다. 흡연자들은 쉬는 시간이 되면 다급하게 낡은 유리문을 지나 문턱을 넘어 창고처럼 보이는 방으로 들어가 끼리끼리 담배를 피운다. 노조에 비흡연자가 늘면서 최근 문틈으로 담배 냄새가 새어나온다는 항의를 받았지만, 흡연하는 여성 노동자들은 당당하다. “아니 우리만큼 노조 사무실에 자주 오지도 않는 것들이 왜 우리 탓을 하고 그래!”, “우리가 여기서 담배 안 피우면 노조 사무실에 매일 오겠다고 각서 써. 그럼 내가 여기서 담배를 안 피우지.” 웃지도 않고 말하는, 어쩐지 간절한 목소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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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첫 시퀀스에서 최초의 여성지회장인 이종희가 등장하는 이 다큐는 황 부지회장이 발언하는 모습으로 끝이 난다. 제작을 끝내고 소식 하나를 들었다. 새로운 지회장으로 황미진이 선출됐다고. “윤미 동지의 영화가 예언한 게 아니냐”는 배국장님의 즐거운 농담. 신기하고 기뻤다. 무엇보다 여성이 계속 대표의 자리를 이어나간다는 사실이 좋았다. 당당한 태도, 밝은 모습을 잊지 않으려는 행동들, 표정들, 따뜻한 분위기… 이런 조직의 분위기에는 오랜 시간 더 많이 억압받았던 여성노동자이자 여성조합원들의 연대의 힘이 분명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54. 조직과 공동체의 힘에 대해 쉽게 냉소하지 않을 것. 작업을 떠나 개인적으로 이번 작업에서 얻은 가장 중요한 교훈이다.

 

(2020.1월 작성)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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