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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툭툭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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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치코
그냥, 그저, 한없이 선량해보였던 히사코
데이코의 남편이자 히사코의 동거남인 겐이치. 전쟁 후 무기력함에 빠져살다 데이코를 만나고 새 삶을 시작하려하지만 벼랑 끝에서 사치코에게 떠밀려 죽는다
데이코, 그저 좋은 가정을 꾸리는 게 꿈이라고 했던 그녀는 결혼 일주일만에 남편을 잃었다
여자는 한밤중 느닷없이 일어나더니 냉장고로 간다. 냉장고 안은 고깃덩어리들도 그득하다. 여자는 고기뭉텅이들을 정신없이 끄집어내고는 모두 버려 버린다. 그리고 다시는 고기를 먹지 않는다. 꿈이었다고 했다. 꿈 때문이라고, 밤마다 꿈에 어떤 얼굴들이 나타난다고. 그녀는 그렇게, 살다가, 더 이상 살던대로 살 수 없게 되어버린다. 처음엔 단순히 고기를 먹을 수 없어졌던 그녀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둘 수 없던 주위 사람들에 치이며, 정말 미친 인간이 되어버리고, 나무가 되고 싶다는 그녀는 더 이상 아무것도 먹지 않고 햇빛만을 쬐이며 나무껍질처럼 바싹 말라간다. 영화 <채식주의자>는 돌연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여자와, 그런 그녀로 인해 뒤틀리는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다.
영화의 원작을 읽었다. 개봉 전부터 이 영화를 기대했던 건, 원작 소설 때문이었다. 이미 내용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지만서도, 단숨에 그 소설을 읽어 내려가면서 느꼈던 그 빙글거림을 이미지로 보고 싶었다. 인간 육체에 발린 이상한 끈적거림을 만진 듯한 기분, 나무껍질에 맨살이 슬리는 야릇함.
영화를 보는 내내, 고통스러웠고 불편했고 안타까웠고 조금 슬프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이 좋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영혜라는 인물 그 존재를 통해 나는 빙글거리거나 울렁거리거나 휘청거리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영화 속 영혜는 이해하고말고의 대상, 어떤 욕망의 대상이었다. 나는 영혜라는 캐릭터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 했다. 물론 그게 연출의도였을지도 모르겠지만. (보통 인물을 잡을 때, 인물이 바라보는 시선 쪽에 여백을 남겨둔다. 하지만 이 영화에선 영혜를 제외한 인물들을 잡을 때 보는 시선 쪽을 닫아버렸더라) 영화의 구성으로 보면 영혜, 영혜의 언니(지혜), 영혜의 형부(민호) 세 명의 시점에서 각각 진행되는데, 실제 영혜의 부분에선 그리 힘이 없다.
그녀가 꾸었다는 꿈, 그녀가 보았다던 그 얼굴들
원작 소설이 있는 영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나의 과제로 남았다. 원작을 넘어선다는 영화란 어떤 것인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던 소설 속 인물들이 어떤 구체적인 형상으로 빚어져 쨍한 화면에 드러났을 때, 그 긍정적이기도하고 부정적이기도한 ‘깸’의 느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좀 더 영화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뭐 이러한 고민 말이다.
덧) 최근 체홉의 단편소설들을 읽었다. 그러다 만난 글귀다. 영혜가 생각났다. 사는 건 이토록 불가해하고 환상적이라 생각해보면, 영혜라는 존재가 그리 버겁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인생이나 저승 세계나 매한가지로 불가해하고 무섭습니다. 유령을 두려워하는 자라면 나도, 저 불빛들도, 그리고 저 하늘도 두려워해야 마땅하지. 왜냐하면 이 모두가 잘 생각해 보면 저승의 망령들만큼이나 불가해하고 환상적이니까.
일단 마케팅 탓이라고 하겠다. 파란의 러브스토리라 했으니, 그게 형부와 처제의 사랑이라고 했으니, 그런 줄만 알았다. 영화 장르가 단순히 멜로라고 믿고 극장엘 갔으니까. 형부와 처제의 사랑이라니, 키스 장면 하나 제대로 안 보여줄 줄 어찌 알았겠는가.(사실 그렇잖은가. 잘 안 보였다 -_-) 그렇다고 멜로가 아닌 것도 아니다. (감독도 멜로라고 했으니) 어쨌든 나는 관객으로서 미리 영화에 대한 지식이 있었고 영화를 본 후 그게 상당한 오해라는 걸 알았다. 결코 사랑이야기라고만은 할 수 없는 이야기. 형부와 처제의 러브스토리라고 알고 간 게 이 영화를 온전히 이해하는데 지장이 있는 건 아니었을까,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어쨌든 나는 이런 위치에서 영화를 보았고 '어떤 지점'이 계속 불편하게 다가왔다.
미리 말하자면 이때의 내 불편함은 내가 익숙해하던 어떤 틀이 있었기 때문에 느꼈던 것이지 결코 부정적인 의미는 아니다. 이전까지 내가 보지 못 했던 영화이기 때문이다.
배경
일단 내가 불편했던 점은 인물의 배경 설정이었다. 사건이 철거현장에서 벌어지고 중식(이선균)이 철거대책위 위원장이라는 점. 왜 배경이 재개발과 철거가 이뤄지는 장소였고 주인공이 운동권이고 투쟁을 하는 사람이어야 했을까.여지껏 멜로물을 보면서 그 인물의 배경이 불편했던 적은 없었다. 두 인물의 사랑에 몰입할 수 있는 적절한 배경이 설정됐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형부와 처제의 사랑, 불륜 등 금기시되는 사랑은 흔히 중산층의 욕망으로 다뤄지지 않는가. 그러니까 나는 여지껏 철거민과 같은 사회적으로 크고도 예민한 소재와 사랑에 대한 얘기가 결합한 영화는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친구는 물었다. “철거라는 소재를 수단으로 사용해서?” 아니다. 난 오히려 인물의 배경이 너무나 중요하게 부각돼서 불편을 느꼈던 것이다. 감독이 너무나 적극적으로 이용해서. 나름 상업영화라고 내놓고 만들었으면 이런 소재를 안 쓸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으니까. 사회이슈를 다루는 영화도 아닌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사회적인 얘기를 깔아두었을까
더 솔직해져보자. 철거 얘기 등은 마치 인권영화제에서만 나올 법한 영화라고만 여겼다. 파주에서 집요하게 철거민와 용역깡패들의 싸움을 집요하게 보여주는 장면은 내가 지금 다큐를 보고 있나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중식과 은모가 철거현장에서 물대포를 맞다가 대화를 나눈 다음 장면에서 은모와 중식이 사랑을 고백하는 행동은 느닷없었다. 물대포가 쏟아지는 현장에서 허름하고 낡은 방 안으로 옮겨지고 갑자기 '나를 사랑하긴 했었나요?' 라는 대화를 나누는 게, 맞지 않는 두 개가 결합한 느낌. 이 경계에서 느낀 내 불편함. 그래서 더 기막힌 장면!
거칠게 나누어보자면, 개인의 문제와 사회의 문제를 같이 붙여놓았을 때의 어색함이라고 생각한다. 80년대 학생운동이 한창이던 때, 연애 이야기는 마치 하찮은 것으로 취급되었던 그때의 그 사고방식과 지금의 내 경직된 사고의 틀이 내용은 다르더라도 틀에서는 비슷한 것 같다. 결국 이 영화가 좋았던 것은, 흔히 사회의 영역이라고 하는 것과 인간 개인의 영역이라고 하는 것을(내가 이런 틀을 갖고 있구나를 이번에 깨달은!) 갖다 붙이고 뒤섞으면서 경직된 두 이분법을 무너뜨리면서 나아갔기 때문이다.
이 글을 한참 쓰던 중 문득 김연수 작가가 떠올랐다. 그의 소설을 읽은 것은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과 단편 하나 뿐이지만 그 책들에서 풀어나가던 이야기나 고민들이 비슷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나는 이 영화를 두 번 보았다. 처음 보았을 땐 인물의 배경과 개인의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이해는 잘 되지 않고 중식은 너무나 가여워서 마음만 아팠다. 두 번째 볼 때는 주인공들의 상황에 휘둘리기보다 인물들이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대처하는 각자의 방식, 결정하기까지의 복잡한 심정들을 조금은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됐다.
영화의 후반부, 화염병을 던지고 사람들이 용역에게 맞고 물대포가 쏘는 철거현장을 부유하듯 걸어가며 중식에게 향하는 은모를 스테디캠으로 유유히 따라갔을 때, 그리고 중식 앞에 섰을 때, 그리고 질문했을 때.
“이런 일 왜 하세요. 이 일이 형부한테 무슨 보람이 되죠?”
“처음엔 멋져 보여서 그 다음엔 내가 갚을 게 많은 사람인 것 같아서. 지금은 잘 모르겠다. 그냥 늘 할 일이 생기는 것 같애.”
아마 모두가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믿으며 곱씹었을 대사.
할 수만 있다면 좀 더 깊이 인간을 이해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인물을 이런 상황에 던져둔 것은 감독의 당연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인간은 사회에 영향을 받는 존재이고 사회와 개인이 부딪쳤을 떄 인간 존재라는 게 더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인물
이 영화에는 인물들의 감정을 쫓아가기 힘든 부분이 많다. 저 인물 갑자기 왜 저런 말을 하지? 쟤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건가 싶다. 중식을 괴롭힌 은모가 언니 은수에게 강제로 끌려가 사과를 해야했을 때, 왜 그랬냐는 중식의 물음에 은모는 느닷없이 '우리언니괴롭히지 말라'고 한다. 지금까지 은모의 감정이 촘촘히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런 내 감정을 '중식도 느꼈을 거라고' 생각하면, 갑자기 인물들이 진짜 살아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인물이 '이해되지 않는 게' 아니라 내가 종잡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나에게 이해받기 위해 만들어진 캐릭터가 아니라 자신의 호흡대로 영화 안에서 시간을 살고 있다.
감정이란 걸 카메라로 담기란 참 어려운 것이어서, 어떻게든 표정으로 연기로 드러내고 그 맥락이 이해되게끔 서사를 진행시킨다. 그럴 때 인물에게 이입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독은 이걸 비틀면서 인물과 배경 모두를 관객에게 익숙치 않은 방식으로 만들었다. 이걸 어색해하고 편안해하지 않으면서도 내가 끝내 박수를 칠 수밖에 없던 것은 무엇보다 삶에 더 가까워지고자 한 영화였기 때문이다. 더 영화다워지려고 하는 영화 속에서 이 영화는 삶에 더 가까우려 한다. 삶이란 게 워낙 모호하고 복잡해서 그에 지쳐 영화에서는 잘 만들어진 '이야기'를 보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영화에 '또 하나의 삶'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면서도 '삶과는 다르길' 기대하는 것 같다. 지금 내가 <파주>에 대해서 희미하게나마 말할 수 있는 것 이런 말 같다. 너무 삶 같아서 불편해.
거친 사고를 자꾸 다지고, 묻지 않고 넘어가는 것들을 어린 애처럼 자꾸 물어본다. 은모처럼. 알고 그러는지 모르고 그러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은모처럼.
그래서 내가 좋았던 장면은 오히려 쳐내지 않은 곁가지 같은 것들이었다. 감독은 인물 하나 하나에 꼭 서사를 만들어준다. 친구의 아버지가 혼자만 장사나가서 미안하다고 전해주라고 딸한테 돈봉투 주고 가는 장면에 시간을 할애할 때, 사건이 종료됐는데도 카메라는 떠나지 않고 이제 투쟁하는 일 그만두겠다는 사람의 모습까지 응시할 때. 박찬옥 감독의 전작 <질투의 나의 힘>과 아주 많이 다르면서도 이 점은 굉장히 비슷했다.
귀찮아서, 어차피 이해받지 못 할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냥 뭉뚱그려 '말해버리고' 마는 실은 복잡한 인간의 심정을, 카메라로 본다고 보이는 것도 아니란 걸 알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쉽게 적을 만들어버리고, 불안한 게 싫어 남들도 나조차도 명확한 언어에 희생시키고, 복잡한 사연에 다 귀기울일 수 없어서 무심한 나를 탓하며 후다닥 도망가고. 그래도 어쨌든 살아가야 하니까, 다 따지다가 한 마디도 못 하고 아무 행동도 못 하고 아무 글도 못 쓸 것 같으니까. 왜 사냐. '아-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자꾸 할 일이 생기는 것 같다.'
글 쓰는 나 역시 점점 더 모호해지는 게 사실이다. 쓸 수록 인물들은 더 알 수 없고 이 영화가 뭔지 모르겠다. 그래도 어떻게든 이 영화 어땠다고 이야기하고 싶은 이 마음은 뭔지. 그냥 영화의 마지막에 어딜 보는지도 모르겠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는 은모의 얼굴을 딱하니 갖다 박으면 가장 좋은 건데, 싶다.
답사를 마치고 돌아와 친구들과 공유하기 위한 몇 편의 글을 쓰면서, 이미 많이 무뎌진 감성으로 당시의 아픔과 슬픔을 유추하며 좀 오바 해서 글을 썼던 것 같다. 그땐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대단하다고 믿었고, 물론 여전히 그 감수성에 대한 희망은 있지만, 지금은 또 조금 변해버렸는지, 고통스러워하는 것에 너무 취하지는 않으려는 태도에 대해 많이 생각하는 것 같다.
어쨌든 그 수업 덕택이었는지 죽었다 깨어나도 알지 못 할 것 같은 그 시절의 고통이 어렴풋이나마 내 관심의 영역이 되도록 해주었다. 당장 내 할아버지, 할머니의 일이라는 말 뿐이었던 말이, 내 할아버지가 왜 그렇게 작은 방에서만 지내며 괴로워하다 죽었는지를 고민해보게 했다. 시간이 또 지나니 그저 ‘앎’이란 것이 되어버렸지만 그 앎이란 게 적어도 속지는 말자는 다짐은 계속하게 만드는 것 같다. 그 때의 기억이나 친구들과 나눈 이야기들, 고민들이 소위 말하는 ‘역사의식’이라는 걸 준 건지도 모르겠다.
국사가 아닌 국문학 수업이었다. 예술이라고 하면 늘 서양의 것들만을 떠올리곤 했다. 고전을 접하는 것도 서양문학이었고 영화도, 연극도 그러했다. 그러다 접한 한국의 소설들이었다. 5,60년대의 소설을 많이 접했다. 단순히 읽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소설의 흔적을 따라 간 곳이 여수였고 순천이었다. <해방전후>나 <비오는 날> 등 그저 교과서의 지문으로만 존재했던 소설이었을 뿐인데, 아주 진지하게 접할 기회가 생긴 거다. 그 당시의 소설을 읽는 것은 엄청난 고통을 강요받는 일이었는데, 읽을 때마다 눈물이 많이 났다. 그러면서도 다 읽어보겠다는 심정으로 열심히 읽은 기억이 난다. 소설 속에서 드러나는 당장 몇 십 년 전의 한반도의 풍경들을 살펴보는 것이 재미이기도 했다. 그저 사람이야기가 아닌, 거부할 수도 도망갈 수도 없는 상황이나 시대 아래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하는 개인들의 고뇌가 매력적이기도 했다. 그때 감동 깊게 읽은 소설 중 하나도 오발탄이다. 밑줄 박박 그으면서 베껴 적고 느낌도 달았던 기억이 난다.
영화 오발탄을 보고 나서, 한반도의 해방 전후를 예술로 다룰 때 나올 수 있는 뻔한 주제들에 공감하고 말진 말자 하면서도, 결국 남는 건 영화가 그려낸 그 시대 그 사람들이 겪었을 아픔이다. 그 아픔이 머릿속으로만 상상가능한 거라 할 지라도, 이렇게 '볼 수 있는 게' 행운이란 생각도 든다.
“만들지 않으면 안 될 그 절박한 심정, 우리 육성으로 이 사회의 시대를 표현해야겠다. 이 자세가 가장 중요했다고요.“
영화 오발탄과 관련한 인터뷰에서 유현목 감독은, 처음과 마지막에 위의 말을 반복한다. 어떤 사명감이 있었다면서 말이다. 오발탄이란 말은 ‘신이 잘못 장전한 총알’ 이란 뜻이다. 어디로 날아 박혀야 할지 알길 없는 사람들이, 짊어진 ‘노릇’들에 괴로워하거나 아니면 짐짝처럼 되어버린 제 몸뚱이 때문에 괴로워 한다.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칠 곳이 없고 붙어살려고 해도 먹고 살 수 없는 사람들. 그래서 잘못된 건 전쟁 난 세상이라고 탓해 봐도, 신이란 게 어딨냐고 따져봐도, 그건 정말 헛주먹질 같다. 영화를 보면서 머릿속에 드는 이미지 중 하나가 허공에 헛주먹질이었으니, 어쩌면 견고한 물질보다 더한 게 허공 같은 시대인지도 모른다.
영화 속에서 모든 인물은 어떤 ‘행동’을 하든지 무너지고 만다. 나름 살아보겠다고 푼돈 벌어가며 이런저런 ‘노릇’을 하는 가장 철호도 그렇고, 소심하고 무력한 형을 탓하며 윤리나 도덕을 버리겠다는 동생 철호도, 결국 은행털이라는 행동을 택했지만 도망치다 감옥에 잡힐 뿐이다. 살아보겠다고 나선 여동생과 남동생도 마찬가지다.
오발탄이라는 뜻에 신이라는 주체가 있는지 몰랐던 나로선, 신이 뭔데 내 목적을 미리 만들어놓느냐, 방향 잃은 인간이면 좀 어떤가 더 좋은 거 아닌가 하며 속상해하지만, 찢어지게 가난해진 사람들에겐 이 생각마저 사치인 것 같다. 이런 고민을 하는 자들은 오히려 더 힘들 뿐이다. 오발탄의 영호가 그랬듯이.
괴기스럽게 "가자"라고 외치는 어머니. 소설의 내용이 영상으로 어떻게 구현됐는가를 보는 재미도 있다. 소설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가자'라고 외치는 어머니는 영화에서도 역시 아주 센 이미지를 준다.
몸과 마음이 다 아파, 짜증이 나겠다 정말.
영화 오발탄의 마지막 시퀀스는 인상적이다. 돈을 아낀다고 미련하게 치통을 참던 철호가 가장 절망스러운 사태에 이르러서야 치과엘 간다. 동생은 은행을 털다가 감옥엘 가고, 아내는 아이를 낳다가 죽어버리고, 전쟁이후 미쳐버린 어머니는 ‘가자’라고만 외치고. 감당하기 힘든 사건들이 한꺼번에 다 벌어지자 철호는 결국 이를 뺀다. 그것도 아내가 죽자 생긴 돈으로 치료를 한다. 철호는 위험하다는데도 한꺼번에 사랑니를 두 개나 빼버린다. 빼버린 이 때문에 어지러운 건지, 벌어진 상황들에 적응을 못 하는 건지, 철호는 비틀거리며 여기저기를 쏘다닌다. 입밖으로 흐르는 피도 닦지 않은 채.
슬픈 것도 아닌 화가 나는 것도 아닌 '짜증'. 철호는 얼마나 짜증이 날까 싶었다. 뽑아버린 이의 자리는 욱신거리고 피는 계속 나고 위로할 수 있을 밥 한술조차 뜰 수 없고, 가족의 상황을 생각하면 속이 상하지만 또 그들이 ‘짐짝’처럼 느껴지기도 하다. 오히려 죽어버린 아내 때문에 슬플지라도 마음은 홀가분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에 마음이 복잡해지더라도 더 직접적인 고통은 지금 내 몸에서 떨어져나간 이빨 때문에 생긴 구멍이 주는 것인데 정신도 사납고 이도 아프고 복합적으로 아프니 얼마나 짜증이 날까.
늘 그렇듯..
답답하면서도 이게 당시 한반도의 한 풍경이라고 하면, 이해해야 한다는 압박이 든다. 이야기가 슬퍼서 울고 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는 또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또, 정말 지독하지 않은가. 돈 아끼겠다고 치통을 참는 철호의 모습은 요즘의 내 모습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스스로 가난해지길 선택했다 하지만, 쓸 데 못 쓰고 바짝 쪼아 사는 모습은 여전히 도덕이나 윤리에 얽매인 거 아니냐는 영호의 공격이 들리는 듯하다. 그렇다고 영호처럼 은행강도를 해버리면? 별 수 있나. 감옥으로 갈 수밖에. 영호는 자족하며 웃었을까? 과연.
시대에 짓눌리지 않고 잘 도망치며 사는 삶을 살고 싶다고 늘 생각하면서도, 역시나 어려운 일이라고 징징대고 결국은 사회 탓을 하는 걸로 자위해버리는 내가 싫지만 살아야는 겠고, 요즘 시대엔 차라리 방향 잃은 인간이 낫다고 생각하면서도 이게 불안해서 계속 눈치보고 두리번 거리는 내가 보이니 말이다.
정말, 별 수가 없다. 그래도 살아야지. 문득 술자리에서 국에 밥을 말아 열심히 먹던 친구의 모습이 떠오른다.
어느새 이런 생각에까지 이르러 청승떨고 있는 나를 보면, 이런 게 참말 리얼리즘 영화가 주는 게 아닌가 보다,, 싶다.
영화 <더 로드>를 본 후, 얼굴에 살얼음이 낄 듯한 추위를 뚫고 따뜻한 방에 돌아오자마자 내가 한 일은, 밀린 빨래와 청소를 한 일이었다. 괜히 쌓아둔 박스를 괜히 뒤적거리고 책장의 책들을 여미는 일. 거기다 밥에 간장과 참기름을 비벼서 아주 맛있게 먹었다면 더 좋았겠지. 그냥, 그러고싶게 만드는 영화들이 있다.
여느 재난 영화처럼 멸망해가는 지구의 모습은 없다. 살려고 몰려다니는 사람떼도 없다. 그저 아버지와 아들, 거의 폐허가 된 풍경 위를 닳은 신발로 때가 잔뜩 낀 행색으로 걸어가는 두 사람을 비춰줄 뿐이다. <우주전쟁>을 보았을 때가 기억난다. 재난영화를 보고나면 그렇듯, 내가 하는 모든 고민들이 아주 하찮아지고 이내 무기력해져서 비틀거렸다. 그러다 지치면 좀 더 착해지는 일로 괜히 희망을 품게 되는 것 같다. 그러다 시간이 좀 지나면 영화 내용을 잊는다.
<더 로드>는 울컥, 하는 공포도 엉엉,하는 감동도 없다. 여느 재난영화처럼 스펙타클한 광경도 없다. 여느 재난 영화들이 집중하는 시점과는 다른, 이미 많은 것들이 스러진 직후의 풍경을 담았다. '아직 살아있는' 지구의 모습을 보여준다. 거의 죽어가는, 과 아직 살아있는, 은 많이 다르다. 몇 번이고 생각해보다, 아직은 살아있는, 이라는 표현이 더 맞다는 생각을 한다. 겨우 숨을 할딱거리는 공간. 그 안에 아직 사람들의 흔적이 있다. 그 '흔적들' 때문에 나는 좀 마음이 아팠다. 파괴되는 도시의 모습이나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보다도, 소멸과 상실의 흔적들이 더 강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이 영화, 기대만큼! 엄청 큰 뭔가가 다가오진 않는다. 행복했던 과거와 절망적인 현재를 황금빛과 회색빛으로 교차해 보여주거나, 희망을 주려는 마지막 장면은 작위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래도 이 영화 좋다고 말하고 싶은 건, 소박한 마음가짐을 갖게 해주는 그 느낌 때문이다. 거창해 지지 않고, 야무지고 꼼꼼한 손매무새 같은 것을 떠올리게 만든다.
오래 굶다 아버지와 아들은 음식이 가득한 지하장소를 찾는다. 마음이 놓여 조금은 편안한 잠을 잘 수 있게 된 날 밤, 그제야 생긴 여유 덕에 아버지는 잠든 아들의 잠바 주머니를 뒤적여 보게 된다. 그 안에서 나온 부러진 빗, 병뚜껑, 때가 낀 낡은 물건들. 그것들을 책상 위에 쪼롬히 늘어놓는다. 때가 낀 손톱으로 부러지고 망가진 것들을 만지는 손길.
가장 좋은 건, 아주 오랜만에 하는 목욕 장면이다. 아버지는 때가 잔뜩 낀 아들의 손가락을 거품으로 씻어 주고 뜨거운 물을 머리에 부어 준다. 아이가 칫솔에 치약을 가득 짤아서 입 안에 물 때, 가득 거품내서 양치질 하는 장면들에 코끝이 짠해진다.
먹는 것에 감사해, 편히 잠잘 수 있는 것에 감사해, 내 옆에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감사해, 결국 이 영화 이런 얘길 하는 건가 보다 싶어, 착하고 교훈적인 영화구나 싶다. 시시하다 싶다가도, 알고 보면 가장 어려운 건데, 그래 이런 것들은 아무리 강요받아도 좋으니까.
이 영화는 희망 없는 곳에서 희망을 말한다. 모든 것이 죽어가는데 끝까지 제 아들을 살아가게 하려는 아버지.
"죽고 싶단 생각해요?"
길에서 만난 노인에게 아버지가 묻는다.
“이런 세상에선 그것도 사치야”
왜 그렇게 살아남으려고 할까. 제 아들을 지키기 위한 아버지의 사랑은 맹목적이다. 사는 것이 희망도 아니고, 오히려 살아남는 것이 고통인 세상에서 왜 그렇게 살려고 하는 걸까. 차라리 죽고 싶다는 어린 아들을 아버지는 왜 그토록 살리려 하는 걸까. 죽어 버렸고, 더 이상 살 수 없어서 자살했고, 죽지 않으면 사람을 잡아 먹으며 살아 가야한다. 그런데도 계속 살아가는 게, '희망'이라 말할 수 있을까. 어떻게든 살아있으라는 말, 진실일까. 아니 진심일까.
그래서 묻고 싶었는데, 그러자
"죽으려는 게 오히려 사치" 란 노인의 대답. 여전히 미적지근하지만 나는 입을 다문다.
잘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잘 걷지도 못 하는 다리로, 조금씩 허기를 해결하며 계속 걸어가던 영화 속 노인의 그 뒷모습 때문에. 그리고 다시 길을 떠나는 노인 뒤에 서 있던, 아버지와 아들의 먹먹한 모습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