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

허우 샤오시엔/ 대만 (1990)


1945년부터 1949년까지 대만의 비극적 현대사 그 역사 속을 살아간 사람들

1945년 8월 15일 일본으로부터의 해방
그 해방은 그저 일본으로부터의 해방
억압체제의 무너짐이 아닌
그저 다른 억압으로의 교체일 뿐
공직자들의 부정부패 폭정폭압 그들 안중에 없는
사람들의 실업 허덕임
돈과 폭력의 세상
죽어가는 사람들 누구의 자식이자 누구의 아버지 조금씩 허물어지는 가족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의 국가에 대한 저항
그건 계속 살아가겠다는 의지
짓밟아도 죽어서라도 살아가겠다
'떳떳하게 살아라 아버지는 무죄다'



가족 중 누군가는 죽고 누구는 소리없이 잡혀가는 비극적 시대를 살아 내야 해야 했던 사람들.
그 상처를 안은 채 그래도 여전히 식사를 준비하고 식탁에 모여 밥을 먹는 가족들

앞서는 사운드 게으르게 뒤좇는 카메라
사운드로 포개어 지는 테이크와 테이크
그렇게 맞물리며 계속 돌아가는 그들의 역사 곧 우리네 역사

특정한 순간들을 오래 응시하는 카메라, 대만전통의식들 그리고 사소한 차 우려내기까지
프레임 안의 소소한 것들에 눈이 가게 하는 카메라, 저 너머 흐려진 곳에서 먹지 말라는 제사 음식을 주억거리며 계속 먹는 고문으로 정신이 나간 아들, 주위상황은 안중에도 없이 물걸레로 바닥을 열심히 닦는 사람, 근육없는 몸뚱아리로 파닥거리는 아가의 몸짓 그런 것들 그런 것들  

미래의 희망을 말하기보다
풍랑의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저 나름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들
그래서 슬픔
그러니까 믿음 인간에 대한 믿음
그것이 또 희망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

인권영화제 개막작 "파벨라 라이징"
 2006/ 브라질리아, 미국/ 다큐
감독 : 제프 짐발리스트 & 맷 모차리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 파벨라는 브라질의 빈민촌을 말한다. 리우데자네이루는 마약거래조직들이 성행하고 길거리에서 언제 총을 맞아 죽을 지 모르는 곳이다.  물질적 조건들은 아이들을 마약조직에 몰리게 하고 그런 아이들은 14세에서 25세 사이에 거의 죽는다.
앤더슨이란 사람은 친구가 없다. 그의 세대는 마약거래단에서 활동하다 대부분 죽었다. 

어느 날 마약거래단 두목이 경찰 네 명을 죽이고 경찰들은 이내 마을에 들이닥쳐 21명의 주민들을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죽은 주민들 중에 마약단과 연루된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형을 잃고 무고한 주민들의 학살을 본 앤더슨은 이제 자신의 의지이자 운명과도 같은 삶을 살게 된다.  '왜 서로가 서로를 죽여야 하는지 이 폭력을 중단시킬 순 없는 것인지.' 그는 마약거래를 하던 삶을 파괴하고 아프로레게라는 음악 그룹에 들어 간다. 그들이 존경하는 창조와 파괴의 신 '시바' , 아프로레게는 시바효과를 믿는다. 앤더슨은 풀뿌리 문화 운동을 시작한다. 거리 공연을 하고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친다. 아이들이 마약조직원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접근할 만한 공동체가 다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아이들이 다양한 문화적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토대를 만드는 일을 한다.

마약단의 폭력, 경찰의 폭력. 그래서 아프로레게는 외부세력을 믿지 않는다. 빈민들의 상황과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사람은 빈민촌에 사는 자신들 뿐이다. 폭력은 폭력을 낳을 뿐이다. 폭력을 낳지 않기 위해선 폭력을 멈추어야 한다. 나의 폭력이 멈추었더라도 외부의 폭력은 살아 있다. 하지만 그 폭력이 나를 덮쳐도 나는 절대 총을 들어선 안된다. 힘겨운 운동 속에서 앤더슨은 한번씩 밀려오는 상실감에 혼자 음악을 틀어 놓고 울면서 죽은 친구들을 위해 기도 한다. 힘들 때면 새벽에 바다로 나가 파도를 타며 다시 힘을 낸다.  

알기 때문이다. 자신의 마을을 사랑하기 때문에 마약거래와 폭력으로만 인식되는 모습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고, 정직하고 조용하게 살아가고 싶은 주민들의 마음을 알기 때문에 지켜 주고 싶기 때문이었으리라.
 

시체와 총 물리적 폭력이 등장하지만 오히려 영화는 비폭력적이다. 음악이 폭력보다 강하다는 것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오히려 폭력적인 장면은 비폭력의 가치를 더욱 강조하는데 도움을 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영화의 이미지는 감정을 담고 있다. 수많은 쇼트들이 모여 말을 한다. 쇼트들은 3초를 넘기지 않고 빠르게 말을 만들어 내다 이내 늘어지며 울림을 만든다. 카메라 각도와 편집은 갖은 기교를 부리며 시적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처연한 음악이 깔리다 이내 아프로레게의 역동적인 공연에 음표가 오선지 가장 위로 튀며 감정을 이끈다. 후반부로 갈수록 앤더슨이 영웅처럼 부각되는 것에 화려한 편집이 한 몫을 한다. (영화가 점점 앤더슨이란 인물에만 집중이 되면서 그 자체를 영웅적 기적으로 만드는 것이,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함께 기적이 되고자 하는 앤더슨의 마음과는 배치되는 흐름이라 약간 아쉬움이 남았다)


엔딩 크레딧이 끝나고서 하나의 장면이 등장한다. 영화 중간에 열심히 공부하라는 앤더슨에게 뚱하게 자긴 마약 거래단이 되겠다고 말하고선 가버린 꼬마의 모습. 그리고 그 아이가 아프로레게에 들어 갔다는 자막이 뜬다. 그렇게 스크린의 영화는 끝났지만 영화는 삶 속으로 들어가 계속 된다.
관객들은 다시 한번 감동의 박수를 친다.

                                                  박수 소리가 마로니에 공원을 울린다.
많은 사람들이 마로니에 공원 무대위에 설치된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다. 올해 인권영화제는 거리에서 상영 중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등급 (이하 영비법)은 상영 전 등급분류를 의무화하고 있다. 단 영화진흥위원회에 '추천'하는 영화제에서 상영하는 영화 등 몇 가지 경우를 제외한다.
하지만 인권영화제는 그 '추천제'도 거부하며 . 지난 13년 동안 정부의 사전심의를 받지 않고 상영해왔다.  영비법의 작은 틈새의 자유에 만족하지 않고 '등급을 받지 않을 권리' 또한 표현의 자유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특히 비영리 영화제에 대해서는 자율권이 주어져야 하며 현재 영비법이 가진 모호하고 추상적인 잣대(...반국가적반사회적,비윤리적인 내용인 것으로 일반 국민정서에 악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는 것 : 제한상영가 규정 중에서) 가 영화를 자의적으로 재단할 가능성을 비판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올해 인권영화제 모토는 바로 '그들만의 심의를 심의한다'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세계인권선언 제19조는 '모든 사람은 의견과 표현의 자유에 관한 권리'를 가진다고 했다. 이 권리는 간섭받지 않고 의견을 가질 자유와 모든 매체를 통하여 국경에 관계없이 정보와 사상을 추구하고, 접수하고, 전달하는 자유를 포함한다. 19조, 그 표현의 자유의 의미를 담아 인권영화제측은 전문가 9명과 시민 10명으로 이뤄진 '19조 위원회'를 만들었다. 상영작을 미리보며 대안적 심의를 고민했다. 심의자체의 필요성에 대해 오고 가는 논쟁과 영화를 보는 다양한 시선의 차이들을 공유하는 그 자체가 기존의 심의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값진 시작이었다. '밀실의 검열을 광장의 수다로’ 라는 모토에서 느낄 수 있듯이 말이다.

본디 심의라는 것의 본뜻은 '가려져 있던 사물의 참된 의미를' '말을 통한 의논과 대화의 과정을 통해' '자세히 밝혀내는 실천' (전규찬, 2005) 이다. 그래서 심의란 것은 거르기 위한 심의가 아니라 권장하는 친절한 서비스가 되어야 한다는 연세대 임정희 교수의 말은 귀담아 들을 만하다. 즉 경고성이 아닌 권장형의 형태가 필요하다.
인권영화제는 이번 행사를 계기로 영비법 개정 운동을 꾸준히 해나갈 계획이다. 다시 거리로 나온 제12회 인권영화제. 안이하지 않은 촘촘한 인권의 시선으로 '영화를 위해 그리고 영화를 통해' 거리에서 시민들과 소통 중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제12회 인권영화제는 다음 달 2일까지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선 매일 저녁 8시에, 주말엔 영상미디어센터 미디액트에서 영화를 상영한다. http://blog.naver.com/hrfilms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을 억압하고 있는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름답지만 부패하기 쉬운 살아 있는 송장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


전주국제영화제상영작/감독 김동주

 

  50대인 장필은 고시원에 살고 있다. 50년이라는 켜켜묵은 그의 역사를 내가 알 순 없다. 다만 그는 지금 벌집처럼 덕지덕지 붙어 있는 신림의 한 고시원에서 살고 있고 광고지를 붙이러 다니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



사용자 삽입 이미지

카메라는 CCTV 처럼 장필의 행동을 감시한다. 앵글의 움직임은 전혀 없다. 정해진 몇몇 장소에 서 있는 카메라는 고정된 몇 개의 장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번갈아 보여주며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고시원에서 일어날 수 있는 아주 소소한 일상들, 공용 욕실에서 몰래 남의 비누를 쓴다거나 열려 있는 남의 방을 살짝 훔쳐 본다거나 자주 물건이 없어진다거나 하는 디테일들은 감독의 7개월간의 체험이 있었기에 나올 수 있었다. (아는 사람들은 낄낄대며 또 씁쓸해 하며 볼 장면들)

1평도 안되는 고시원 방에서 사는 장필은 하루 벌어 하루 쓰며 조금씩 푼돈도 모은다. 그는 나무를 깎아 작품을 만드는 재주도 있다. 가난하지만 성실하고 인정이 많아 고시원의 젊은 친구에게 전 재산 6만 원도 선뜻 빌려 준다. 돈을 빌려간 젊은 친구는 장필과 비교되는 인물이다. 그는 불성실한데다 노름에 빠져 있고 장필이 맡을수도 있었던 고시원 총무자리도 빼앗는다. 총무로서 고시원을 청소하는 젊은 친구의 비질은 짜증스럽고 엉성하다.

장필은 어느 날 젊은 여자에게 속아 남은 돈을 털어 고물 모니터를 산다. 결국 되팔지도 못한 채 빈털털이가 된다. 한 푼도 없는 장필이 젊은 친구에게 6만 원을 갚으라고 하자 그는 되려 고시원비에서 깎으라고 한다. 우물쭈물 별 말도 못하고 돌아선 장필은 모니터를 속여 판 여자를 처음 만난 골목길에서 마냥 기다린다. 모니터값 23200원을 받기 위해. 결국 여자를 만나고, 조심스레 모니터값을 달라 부탁한다. 여자는 되려 내가 돈없어서 그랬던 건 줄 아냐며 화를 된다. 그리고 장필을 향해 돈을 바닥에 집어 던진다.

그 순간 장필은 흥분했다, 분명 흥분했을 것이다. 그는 우발적으로 벽돌의 집어 그녀 머리를 친다. 카메라 잠시 암전. 다시 켜진 카메라 앞에 여자는 이미 죽어 있다. 이제 장필은 살인자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가장 낮은 계층의 있는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를 갉아 먹고 있는 모습. 서로의 사정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서로가 서로의 짜증이고 속일 수 있는 만만한 대상이다. 아이러니하지만 너무나 사실인 풍경. 장필의 살인은 미약했어도 존재했던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었을 때, 그와 동시에 자신의 존엄성이 무너졌을 때 벌어졌다. 장필은 말한다. "여자가 솔직하게만 말했어도 죽이진 않았을 거라고."

살인을 저지른 장필은 죽인 여자의 지갑에 든 돈으로 성매매를 한다. 이 장면에 대한 감독의 말은 의미심장했다. '돈이 생겼을땐 여자를 사고 싶은 욕망이 생길 수 있는 개연성이 충분히 있다' .

장필이 살인을 저지른 이후, 카메라는 장필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간다. 왜 삽입된 지 모를 장면들도 간간이 들어가 있다. 살인 이후로 장필은 자신의 욕망과 죽음에 대해 자각을 하기 시작한 듯하다. 장필이 고시원방에서 실제사람 같은 여자 인형에 장필은 화장을 하는 뜬금없는 장면처럼.

장필은 물고기 한마리를 키웠다. 좁은 방에서 유일하게 생명력이 느껴지는 건 어항 속 물고기였다. 그 물고기가 죽자 장필은 아주 정성스럽게 금붕어를 산에 묻는다. 마치 자신도 그렇게 곱게 묻히고 싶다는 듯이. 자기가 죽인 여자처럼 자신도 그렇게 비참하게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그래서 영화의 후반부는 전반부에서 묘사한 장필의 가난한 일상생활에선 느껴지지 않았던 슬픔이 느껴진다.

  그 사이 고시원의 젊은 친구는 불성실한 탓으로 쫓겨나고 이제 장필이 고시원 총무가 된다. 성실한 그는 아주 꼼꼼하게 바닥을 비질한다. 빗자루가 될 정도로 비질에 집중하는 장필의 모습을 마지막 장면으로 영화는 끝난다. 영화의 제목처럼 그는 금붕어가 될 수 있을까. 빗자루와 금붕어라는 전혀 상관없는 물건처럼 그건 그냥 재밌는 언어의 조합처럼 느껴질 뿐이다. 그래서 더 신비롭고 쓸쓸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고시원이야기가나오니까말인데

수많은 사람들이 고시원을 집으로 살아간다(여기서말하는고시원은비싼고시텔같은데말고열악한고시원) 하루종일 밖을 떠돌다 쪽방으로들어가 웅크려 자는 노인들을 많이 만났다. 또 어떻게든독립해야하는 20대들이 부모에게 손벌리지 않고 굴러 들어가는 곳도 고시원일 수 밖에 없다. 박민규소설 갑을고시원체류기엔 가난한20대의 고시원생활을 끔찍하리만치 우스꽝스럽게 묘사한다 눈물난다.

고시원 생활을 해보면 가장 열악하다 느낄 수 밖에 없는 건 화장실 공동사용이다. 이 영화를 보면 장필이 주전자에다 소변을 보는 장면이 있다. 방에 있다보면 화장실까지 이동하는 것조차 귀찮은 일이 된다.
그렇게일상의동선이짧아지는만큼 삶의동선도짧아지는것만같다. 벗어날수없는굴레.

또 고시원에서의 인간관계는 영화처럼 서로가 서로를 갉아먹는 짜증스런 존재가 되기싶다. 서로에게 미묘한 동질감을 느끼면서도 자신을 노출시키거나 부대끼고 싶진 않아 한다. 작은방으로 들어가버리면 그만이다. 장필에게 죽임을 당한 여자가 내가이런동네에살고싶어사는줄아냐며 소리지른것처럼. 그래도 장필은 가난한 환경 속에서도 부대끼는 사람들과 정을 나누며 인간미를 잃지 않으려는 사람이었는데 그것마저 깨지는 순간 살인이 일어난게 아닐까 싶다.

고시원도 주거권침해라면서 그런 공간들을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열악한 환경이나 재난의 위험이 높은데도 얼기설기 지어진 고시원이 많다. 아예 최저주거환경의 기준을 제도로 높이잔거다.
맞는 말이다.

벨라 테르의 영화 '페밀리 네스트'에선 가난한 부부가 시부모댁에 얹혀살며 겪는 불화 속에서 자주 울고 자주 하소연한다. 그리고  '우리들만의 집만 있었더라면' 이란 말을 지루하도록 꺼낸다. 영화제작당시 헝가리에는 집이 남아돌아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아오는 집은 없었다고 한다.
적당히 뒹굴수 있고 깨끗하게 사용할 수 있는 화장실과 부엌이 있는 집은 너무 중요한 삶의 조건이다. 집이 투기의 대상이 되고 그래서 밤이면 불꺼진 아파트들이 얼마나 많은데 이 넓은 땅에서 그런 공간 하나 없는 사람들은 그럴만하니까 그런 걸까. 그런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눈 여겨볼만 한 부문은 바로 ‘베트남영화 특별상영전’이다. 전주국제영화제에선 지난 4년 간 비서구 지역의 영화를 발굴하자는 목표로 쿠바, 마그렙, 소비에트 연방, 터키 영화들을 소개했다. 그리고 그 노력은 올해 베트남 영화로 이어졌다.

비서구 영화들을 발견하는 건 ‘서구의 시선’으로 혹 ‘우리의 시선으로’ 만 타자를 보았던 것에서 벗어나서 비서구 영화인들 당사자의 시선을 볼 수 있다는 데서 의미 있다. 비서구 영화인들에게도 자신들이 관찰의 대상으로만 타자화되는 것을 끊임없이 밀어내는 작업을 하도록 돕는다.

영화산업이 발달하지 않은 나라에서는 영화를 제작하기 어려울 뿐더러 타국에서 그들의 영화를 접하기도 어렵다. 현재 베트남에선 한류열풍 영향으로 한국 영화가 많이 상영되고 있지만 정작 한국에서 베트남 영화는 굉장히 생소하지 않은가.

50년대부터 시작된 베트남 영화의 역사는 총 세 시기로 나뉜다. 전쟁 시기의 영화, 통일 후의 영화 그리고 1986년 개혁 이후의 영화이다.

베트남은 1953년 영화산업이 공식적으로 탄생한다. 당시 영화들의 목표는 외부 침략자를 몰아내고 국가의 독립과 통일을 성취하는 것이었고 전쟁 시기 혁명적 영화제작은 그 자체로 독립투쟁이었다. 두번째는 1975년부터로 남베트남이 미국으로부터 해방된 시기다. 이후로 베트남 영화는 비로소 전쟁이란 소재에서 점점 벗어나 현실 생활을 주제로 한 내용이 나오기 시작했다. 마지막 시기는 1986년부터 지금까지의 영화들. 12월 제 6차 베트남공산당의회는 국가의 상황을 포괄적으로 변혁시키기 위한 정책(도이모이)를 발표한다. 이 개혁정책의 핵심은 국가경제를 국가제원체계에서 국영시장경제체제로 바꾸는 것이었다. 영화가 다루는 주제는 더 다양해졌고 새로운 영화형식과 기법들이 이 시기에 탄생한다.

이번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는 7편의 영화들은 50년대부터 10년 단위로 대표작들을 꼽아 베트남 영화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했다. 상영작들을 살펴보면, 주제는 달라졌지만 여전히 일관 되게 포함되는 소재는 ‘베트남 전쟁’이다.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도 서구나 우리의 시선에서만 보았지 ‘베트남이 바라본 베트남’ 의 모습을 접하긴 힘들었다. 베트남 전쟁은 우리의 역사 속에서도 끊임없이 평가해야만 하는 부끄러움이자 상처이다. 베트남 감독이 만든 베트남 전쟁 영화를 보면서, 가해자로서의 반성하고 피해자로서의 감성을 공유하며 더 나은 미래를 함께 만들자고 생각할 수 있다면 가장 큰 수확이 아닐까.

그 중 전쟁 시기에 만들어진 ‘하노이에서 온 소녀’ (1974)와 아직 치유되지 않고 있는 베트남 전쟁의 상처를 다룬 ‘미세스 남’(2000) 두 편의 영화를 소개한다.

‘하노이에서 온 소녀’  1974  (감독/응우엔 하이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작품은 전쟁 시기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연일 미국의 폭격이 일어났던 1968년 하노이에서 살아가는 응옥 하 라는 소녀에 대한 이야기다. 응옥 하가 가족들과 보낸 행복한 시간과 폭격으로 폐허가 된 도시을 대비시켜 전쟁이 어떻게 베트남 가정을 파괴하는 지를 보여 준다. 특히 응옥 하가 가족과 행복했던 때를 묘사할 때 애니메이션 기법들을 삽입해 행복했던 기억을 꿈과 환상적인 느낌으로 표현해 더욱 애틋함이 느껴진다.

감독은 폭격 당시 하노이에 있었으며 가족들과 함께 지하 방공호로 대피했던 기억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응우엔 하이닌 감독은 전쟁에 대한 기억을 여전히 아쉬워했다. 그는 그 기간동안 미국의 폭격이 얼마나 잔인했는지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고 계속 강조했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아픔을 생각하는 건 이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에게 말이다.

전쟁시기에 만들어진 선전선동식의 베트남 영화와는 다르게 이 영화는 어린 소녀를 주체로 그 아이의 눈망울에 담긴 폐허가 된 도시의 모습을 담는다. 그리고 그 어린 소녀는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마저 전쟁때문에 멀리 떠나버린 상태에서 잃어버린 동생을 찾아 나선다. 희망을 암시하는 결말은 굉장히 비장하게 느껴진다. 이유없이 무자비하게 우리를 죽이는 전쟁이여, 죽는 개개인을 넌 신경도 쓰지 않겠지만 그래 우리도 널 무시하고 끝까지 살아내리라.


‘미세스 남’ 2000 (감독/라이 반신)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남홍은 자신이 어떻게 전쟁에서 살아남았는지 몰랐다. 다만 동료들이 자신을 구해줬다는 것 뿐. 베트남 전쟁 때 간호사로 일하던 그녀는 폭격으로 심하게 다쳤는데 다행히 동료들의 노력으로 구사일생했다.

전쟁은 끝났고 상처가 남았다. 전쟁 후 급속도로 성장해가는 호치민 시에서 남 홍은 전쟁 이전의 평온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그녀는 그냥 살아갈 수 없었다. 그녀의 일상은 두 개다. 먹고 살 정도의 기본적인 경제생활만 영위하는 그녀는 그 외 대부분의 시간을 베트남 전쟁 전사자들의 유골을 찾는데 보낸다.
자신의 동료들이 수없이 죽었다. 그녀는 안다. 베트남의 도시가 발달하고 사람들이 개개인의 일상을 꾸려나갈 수 있게 된 건 전사자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란 걸. 그녀는 숲 속을 뒤지며 무덤의 흔적을 찾는다.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하며 절망 속에서 쓴 군인의 일기와 유골을 비닐에 곱게 싼다.

아직도 숲에서 전사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녀는 자신의 일이 영혼 깊은 곳에서의 부름과 같은 것이라고 믿는다. 그녀는 오늘도 초에 불을 밝히고 전사자들을 위해 기도한다.

전쟁은 끝났지만 상처는 남았다. 그 누군가는 동료들의 죽음을 잊지 않기 위해 매일 숲 속으로 간다. 하지만 남 홍처럼 전사자들의 유골 발굴 작업 하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이들은 가족을 잃은 전쟁의 피해자들일 뿐이다. 땅을 파느라 손이 다 닳아가면서 전쟁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사람은 남 홍 같은 늙어가는 개인일 뿐인 것이다. 유골을 찾는데 드는 비용을 개인들이 충당하기엔 벅차다. 하지만 정부는 도시를 개발하는데 집중한다. 개발이 전쟁의 상처를 다 잊게 해줄 것이라 믿는걸까. 가족의 유골을 찾지 못한 자들에겐 발전만 하는 국가의 모습이 위로가 되진 않는다. 
아직 추스려야 할 전쟁의 고통이 많다. 그건 전쟁 가해국의 사과만이 아니라 자국 정부의 노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래서 이 영화는 전쟁을 겪고 난 베트남이 스스로를 반성하는 영화다.

다큐의 나레이션은 영어로 했다. 그건 감독이 이 다큐를 통해 남 홍의 이야기를 '세계’ 에 알리고자 하는 욕심이 크기 때문이다. 베트남 영화 감독들은 여전히 목마르다. 아직 전쟁에 대해 할 말이 너무나 많고 치유되지 않은 채 봉합돼 가고 있는 전쟁의 상처를 자꾸 드러내 곪지 않길 바란다. 그리고 전쟁을 반성하고 다시금 반복하지 않도록 현재의 잘못된 점을 부단히 고쳐 나가길 간절히 원하고 있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




사용자 삽입 이미지


죽은 아내의 33주기 기일 날 의식을 치르기 위해 숲을 찾는 노인 시게키, 그리고 그를 말 없이 뒤따르는 여인 마치코. 그녀는 사고로 아이를 잃었다.
일본불교에서는 33주기 기일이 되면 죽은 이가 이승을 완전히 떠나 부처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고 믿는다. 시게키는 이제 소중한 이를 보낼 시간이다. 시게키와 마치코는 아내의 무덤을 찾아 숲으로 떠난다.

마치코는 정신없이 숲을 헤매는 시게키를 묵묵히 뒤따른다. 시게키가 마음 가는 대로 할 수 있게. 그저 뒤에서 지켜볼 뿐이다. 하지만 시게키가 죽을 것만 같을 땐 온 몸을 다해 그에게 관여한다. 위험한 계곡을 건너려 할 때 가지 말라고 위험하다고 미안하다며 울부짖기 시작하는 마치코는 소중한 누군가와 더 이상 몸으로 부대낄 수 없게 될 죽음이 너무나 사무친다. 그건 죽은 제 아이에게 소리치는 말이기도 하다.

차분하고 맑게 연주되는 영화의 공기는 한번씩 크고 낮게 울리는 장면으로 마음을 진동시킨다.  

시게키는 '나는 살아 있습니까' 라고 물었다. 위는 채워져도 마음은 늘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소중한 사람에 대한 그리움은 마음을 더욱 허전하게 했다. 그는 오랫동안 '존재하지도 그렇다고 부재하지도 않은 소중한 사람' 때문에 고통을 겪었다. 그리고 드디어 아내와 진짜 이별을 하게 되는 순간, 죽을 고비를 넘겨 다다른 아내의 무덤 바로 그 앞에서, 그는 '33년 동안 함께 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한다. 오랫 동안 이 고통이 끝나기만을 기다린 그가 고맙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곁에 없는 죽은 자를 웅켜 잡고 있으면서 생기는 상실감은 이제 떨치고, 아내가 완전히 죽음으로써 영원히 함께 살게 되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죽은 자와 영원히 함께 하게 되면서 시게키도 살아 있게 된다. 시게키는 이제 더 이상 나는 살아 있으냐고 묻지 않을지도 모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영화는 건강하다. 자연에 흠뻑 젖고 깊게 묻히는 그들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육체성 때문이다. 온 몸이 너덜너덜해지도록 폭력을 휘두르는데서 느끼는 육체성이 아니라 녹차밭에 푹 묻혀 뛰어다니는 모습에서, 숲 속에서 엎어지고 뒹굴며 흙으로 얼룩지는 모습에서, 쓰러진 시케키를 마치코가 알몸으로 감싸 안고 따듯한 온기를 전해주는 모습에서, 그리고 아내의 무덤 앞의 젖은 흙을 두 손 힘주어 파는 모습에서 말이다. 그렇게 자연에 사람에 부대끼는 육체는 살아있음으로 서로를 치유한다. 시게키와 마치코가 그랬듯이.


영화의 한 시퀀스는 길다. 차분하게 관찰한다. 실재감을 느낀다. 난 카메라의 눈이 마치 엄마가 울면 왜 우나 싶어 몸을 재바르게 움직이며 이쪽 저쪽 쳐다보는 아이 같았다.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기도 하고 멀찍이서 멀뚱 쳐다보기도 하면서. 문득 마치코의 죽은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죽은 자는 자신을 어떻게 치유하고 있을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웅장한 나무를 흔드는 바람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나무는 자신의 육체로 바람의 존재를 보여준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서로가 서로를 증명해주는 존재들이다. 나무가 바람을, 바람이 나를, 나는 너를.    '나는 살아 있습니까?' 마주 보거나 나란히 앉아 나지막히. ‘우리는 살아 있습니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


퀴어 스폰, 퀴어의 아이들(감독/ 안나 볼루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동성애 결혼 문제로 논쟁이 붙으면 꼭 나오는 말이다. ' 아이들을 생각해라. 퀴어 부모 사이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올바른 분위기에서 성장할 수 있을까.' 더 이상 논의가 되지 못하게 마무리 지어 버리는 이야기곤 했다. 과연 그럴까? 하지만 다들 당사자를 입을 통해 들어보지도 못했잖아. 그래서 안나 볼루다 감독은 퀴어 가정에서 성장하는 10대들과 카메라로 마주했다. 

영화는 그들이 퀴어 가정으로서 살아가는 고통을 카메라 프레임 밖으로 숨기거나 과장하여 즐거움을 연출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영화를 통해 느낀 퀴어 가정 아이들이라서 다른 점은? 감독의 말대로 그들은 누구보다 '관대’하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받는 상처는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여러 고통들 중 하나일 뿐 아이의 인생을 망치지 않는다. 오히려 아이들은 그걸 받아들이고 ‘자신의 모습은 자신이 선택하는 거예요’ 라고 생각할 줄 안다.

인상적인 건 학교에서 수군거림을 이겨내야 하는 아이가 있는 반면 학교에서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아이도 있다는 거다. 그건 그 아이가 다니는 학교엔 동성애자 부모를 둔 아이에 대한 편견이 없기 때문이다. 아이는 오히려 특별한 자신의 가족을 자랑스러워 한다.

이 지점에서 사람들(퀴어가정에 대해 우려가 컸던 관객) 은 퀴어 가정 아이들에 대한 호기심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각자의 생각은 차별로 고통 받는 아이들을 둘러싼 환경을 구성하는데 내가 가담하진 않았을까 하는 불안함으로 나아갈 것이다. 퀴어 부모 사이에서 자라는 ‘아이들의 미래를 걱정’ 하는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을까? 그렇게 좌표를 이동해나가는 것. 퀴어 가정을 문제 삼는 것에서 뒷걸음질 쳐 퀴어 가정이 행복할 수 있기를 고민하기. 그건 더불어 사는 서로에 대한 예의. 

사실 ‘정상 가족’이라는 틀에서 아이들은 더 고통스러운 환경에 노출될 수 있다. 그러니까 배워온 대로 형식을 갖춰 가족을 구성하는 것이 행복의 필요조건은 아니다. 아이들에게 ‘자신이 모습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다는’ 결정권과 ‘차이’ 조차 인식하지 않을 수 있는 넓은 눈을 가지게됐을 때 나도 너도 아이들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을거다.  


조금은 딴 얘기.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열려 가고 있다고들 한다. 가족의 재구성에 대한 담론은 언제적부터 계속 제기되는 문제인거고. '정상가족이데올로기' '이성애가족규범'이라는 말은 이미 수많은 언어 속에서 소비되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의 생각은 항상 나와 관계되지 않을 때만 유효하다. 특히 성, 젠더의 문제는. 예컨대 동성애에 대해 사람들의 거부감이 많이 사라져가지만 정작 '당신 가족 중에 동성애자가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라는 질문으로 옮겨 가버리면 동성애에 대한 생각은 마치 다른 사람의 대답이었던 듯하다. 다른 질문이 되어 버리는 거다.  하지만 퀴어들이 진짜 상처받는 대상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인거다.
그만큼 아는 거랑 변하는 거랑은 다른 거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

"곤충의 무수한 홑눈 속에서 그것들을 상상할 때와 같이 모든 표면들이 분할되고, 모서리가 잘려서 면으로 되고, 분해되며, 파열된다." (장 엡스탱)


"영화는 현실을 통하여 현실을 재현한다. 구체적으로, 카메라가 재현하는 현실의 대상들과 매순간들을 통하여."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

대통령과의 저녁식사_파키스탄국토순례(사비하 수마르)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사용자 삽입 이미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파키스탄의 무샤라프 대통령. 감독은 '군인에게 민주주의가 가능할까'라는 의문으로 영화를 시작한다. 그리고 직접 대통령과 만나 그에게 파키스탄의 민주주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 질문한다. 대통령과의 만남과 국민들의 만남을 두 축으로 하는 영화 구성은 대통령이 생각하고 있는 파키스탄의 민주주주의가 실제로 얼마나 가능성이 있고 국민들이 움직여줄지를 비교해 볼 수 있게 한다.

파키스탄이 민주주의로 가는 여정은 험난해 보인다.
종교 근본주의자들과의 갈등으로 늘 자살폭탄테러의 위험에 노출된 파키스탄. 그들은 코란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면서 여성의 인권을 억압할 수 있다는 걸 고려하지 않는다. 또 마을 내에 지배체제를 고수하면서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 실현을 막고 있다. 감독은 직접 마을을 찾아가 그들의 여성인권침해가능성과 지배적인 마을 운영방식에 의문을 제기한다.
나는 무샤라프 대통령에게도 묻고 싶었다. 종교근본주의자들의 독단이 민주주의 실현에 어려움을 주는 만큼 대통령도 미국을 등에 업고선 서구식 민주주의만을 쉽게 들이려고 하는 건 아닌가 하고 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하지만 정작 국민들은 '민주주의 자체'를 원하는 것 같진 않다. 아니 원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민주주의에 대해 토론하는 건 상위층 사람들의 식탁에서 뿐이다. 거리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은 민주주의가 사치라고 생각하고 더 많이 가난한 사람들은 대통령이 누군지조차 관심이 없다.  
경제만 살리면 독재든 상관없다는 한 파키스탄인의 말은 그들보다 훨씬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우리나라에서도 여전히 공감이 가능할 수 있는 말이었다. 이처럼 민주주의란 건 그 시대 사람들이 지향하는 가치에 따라 우선순위가 한 없이 밑으로 떨어질 수 있는 것인가 보다.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부토 전 총리의 귀국 날에 종교근본주의자들이 폭탄 테러를 일으키면서 대통령이 긴급조치를 내리는 장면이 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듯한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그래도 감독은 중얼거린다. '이것도 다 민주주의로 가는 길일거라고.'
현재 파키스탄의 정치상황은 더욱 급변했다. 부토 총리가 살해당하고, 무샤라프는 총선에서 대패하고 군부와 미국에도 지지를 잃어 간단다. 파키스탄 정치권에 새로운 움직이 있을 것인가. 그나저나 정치의 움직임이 국민들에게 변화가 오긴 할까?
이런 파키스탄의 복잡한 상황이 영화 안에 성실하게 담겨 있다. 그리고 난 사비하 수마르 감독의 노력이 우리 사회에도 고스란히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우리나라는 과연 민주주의 국가인가? 민주주의는 끊임없는 과정에 있는, 완성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계속 반성이 필요한 작업이다. 그럼 한국이란 특수한 맥락에서 작동하는 민주주의는 어떤가? 난 국민들에게 목소리만 주었을 뿐 정작 그 목소리를 듣는 귀를 가진 지배자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정작 목소리에 힘은 없는 거다.

87년 우리에게 갑자기 찾아온 민주화는 급한만큼 문제도 많았다. 87년체제는 모든 결정이 '법으로 수렴'되는 현상을 만들었다. 법 조항에 포함된 민주주의의 실현은 온데간데 없고 '법의 권력'만 남은 것이다. 많은 사안들에서 대법원의 판결 하나로 민주적인 토론이나 사람들의 참여는 봉쇄된다. 새만금이 그랬고 대운하도 그렇지 않을까. 또 빈익빈 부익부의 실현을 위해 법은 봉사하고 있는 게 아닐까. 요즘 뉴스를 보면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법대로 하자' 라는 말 쓸쓸함. 우리에게 진짜 민주주의는 있는가 라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나저나 우리, 민주주의를 원하기는 한걸까.

영화를 보면서 내가 갸우뚱 한 건 무샤라프 대통령이 감독의 저녁식사 요청을 흔쾌히 받아 들이고 촬영도 기꺼이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름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다는 내가 '한국에선 저렇게 청와대로 들어가 대통령과의 만담을 카메라에 담는 게 가능할까? 라고 생각한 건 아이러니다. 여하튼 우리나라에서도 저런 형식으로 민주주의에 대해 고민하는 영화가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민주주의의 당위를 설득하기보다 나라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서 민주주의 자체에 대해 고찰할 수 있는 영화를.우리에게 더 필요한 건 그런 작업이 아닌가 싶다. 아. 대통령과의 저녁식사 약속도 잡아야겠지. '국민을 섬기겠읍니다'는 말 한마디로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다고 착각하게 하는 대답 말고 무샤라프 대통령보다는 나은 대답을 들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

WAR/DANCE

영화가아니었다면 2008. 4. 15. 00:50


전장을 울리는 춤 (USA 2006 / 안드레아 닉스 파인, 션 파인)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상영


여전히 정부군과 반군의 내전이 계속 되고 있는 북부 우간다. 이 전장 속에 위치한 피난촌엔 파톤고라는 초등학교가 있다. 이곳에는 조금씩 파동을 그리며 전장을 울릴 춤을 추는 학생들이 있다.

'아마 우리의 이야기가 믿기지 않을 겁니다. 들려 드리지 않으면 믿지 않겠죠.' 라는 어린 아이의 나레이션으로 시작되는 영화. 이 영화의 주인공은 바로 전장 한가운데를 살아가는 아이들이다. 우리는 흔히 내전 지역 혹 아프리카의 모습하면 떠올리는 이미지가 있다. 전쟁의 참상과 배고픔으로 고통스럽고 무기력한 표정의 사람들이 널브러진 풍경. 물론 그것도 진실이다. 하지만 또 다른 진실. 영화는 바로 희망을 찾는다. 그건 구호에 나서는 타국의 움직임이나 정부의 노력도 아닌 바로 그 곳, 전장인 그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발견한다. 가해자의 반성도 아닌 아무런 죄도 없는 피해자들의 노력은 보는 이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준다. 더욱이 그 피해자가 아이들일 때. 영화는 파톤고 초등학교 세 아이들의 이야기와 그들이 음악대회를 준비하는 이야기로 구성됐다.
카메라는 세 아이의 고통스러운 기억 속으로 들어 간다. 반군에게 살해당한 부모, 형제, 그리고 소년병으로 끌려가 제 손으로 행한 살인의 기억. 아이들이 억눌린 기억을 말할 수 있도록 하고 그 고통을 음악과 이미지로 표현해 낸다. 그 아이들의 입장에서 최대한 카메라라는 언어로 서술하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발견되지 않은 새로운 주체들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는 것은 늘 타자화의 대상으로 서술됐던 약자들의 긍정적 힘을 보여주는 데서 의미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희망을 말한다.
아이들의 이야기는 고통에서 끝나지 않는다.
2005년 파톤고 초등학교는 처음으로 전국 음악 대회에 참여 하게 됐다. 아이들은 합창을 하면서 기악연주를 하면서 전통춤을 추면서 협동심을 배운다. 특히 아촐리 부족으로서 그들의 전통춤인 브왈라를 배우는 것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소속감과 자신감을 얻을 수 있는 일이었다. 아이들은 말한다.
음악을 하면 '과거의 기억을 잊을 수 있어요' 음악은 아이들에게 치유제였다. 그 치유제인 음악은 이제 더 큰 희망이 된다. 한 아이가 말한다. '최고의 실로폰 연주가가 될 거예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대회 당일 캄팔라로 떠나는 날, 일찍 일어난 아이들이 양치질을 하고 얼굴과 발뒤꿈치를 야무지게 씻는다. 분주히 악기들을 옮기고 차에 싣는다. 나름 비장한 풍경 속에서 무심코 흘리듯 지나가는 한 아이의 대사. '평화를 직접 보게 되니 설레요'
 
난 대회심사를 받는 선생님과 아이들의 몸짓과 표정에서 드러나는 긴장을 함께 느끼며 그들을 바라보던 편향된 시각들을 조금씩 지워 나간다. 같은 국가 사람들에게도 살인자, 반군들이라는 오해로 아이들은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분명 꼴찌할거라는 편견 속에서 판톤고 초등학교 학생들은 전통춤 부문에서 당당히 상을 탄다. 그 상은 단순히 '이겼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감 나아가 아촐리 부족으로서의 자랑스러움을 안겨 주었다. 또 영화를 본 관객들의 찬사는 그들에게 더 많은 힘을 보탤 것이다.  

그들의 노래소리, 악기연주, 춤이 조금씩 파동을 그려 나간다. 전장을 울린다. 더 이상 무기를 들 수 없을 정도로.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