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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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린치, <멀홀랜드 드라이브>중에서

자주 가는 블로그에서 이 동영상 보고 어찌나 반가운지.
정말 압권이다. 이 장면..!
'전율'이라고 할 수밖에.


데이빗 린치의 영화를 이해하면서 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영화는 감정을 '움직이게 한다' 
영화를 볼때 처음엔 감정을 강요당한다 (대부분의 영화들이 그렇듯이. 그리고
거기서 멈춘다.)
하지만 그 경지를 넘어 감정이 스스로 움직이게 하는 영화들이 있다 
난 그런 영화들이 좋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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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치킨집.
전경, 재문은 무표정한 얼굴로 음식을 만들고 있다 그때 후경에서 젊은 남자가 오토바이에서
내려서는 급히 가게 안으로 들어 온다
'형 죄송해요. 늦잠을 자서 그만'
'너 내가 오늘 뭐 해놓으라고 했어. 너 제일 나쁜 게 뭔지 알아? 무책임한 거야!'
 
'무책임'이라. 그렇다. 영화가 중반부로 넘어가면서 나오는 이 장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책임의 문제. 영화 중 가장 강렬했던 두 장면 중 하나이다. 

하지만 문제는 무책임한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책임과 무책임을 논하는 영화 속 인물들의 관계다.

2.
친구 예준을 위해서라면 아내와의 섹스도 도중에 그만두고 나설 정도로 그를 끔찍이 위하는 현재 공항 식당 요리사인 재문. 그리고 한때 운동권 출신이고 지금은 금융계에서 잘 나가는 외환딜러인 재문의 친구 예준과 재문의 아내인 헤어디자이너 지숙. 그런데 이들 셋이 같이 서 있는 모습은 왠지 위태로워 보인다. 재문과 지숙 부부는 경제적으로 예준에게 큰 도우을 받고 있고 예준 역시 그들을 기꺼이 돕는다. 신혼여행 호텔비 지원부터 최근에는 재문부부가 선망하고 고대했던 미국으로의 이민계획이 사기당하자 예준에게 또 도움을 받았다. 아니 예준이 부부에게 자신의 도움을 받을 걸 요청한다. 재문은 소극적으로 지숙은 적극적으로 그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들인다.
돈 있는 사람이 사정이 덜한 사람에게 도움주는 일, 그래 당연하다. 이런 관계가 파생될 수 밖에 없는 영토가 있기 때문에 그건 당연하다. 하지만 예준이 재문 부부에게 툭하면 내뱉는 '책임을 진다'는 말은 상대적으로 우월적인 위치에 있는 강자가 약자를 대하는 태도로 보인다. '선물'과 다르게 '돈'을 주고 받는 것은 한쪽에게 빚지는 기분이 들게 한다. 이 빚지는 기분이 만들어 내는 뒤틀린 책임 관계. 예준이 재문에게 돈으로 책임져 주는 일은 그만큼 다른 방식의 정당한 보상을 전제로 한다. 그만큼 이들의 관계는 사회적 징후를 드러내는 알레고리 장치다. 
그래서 예준과 재문의 관계는 철저히 권력 관계다. 예준은 재문을 위한다고 하지만 그럼으로써 스스로의 현재 모습을 합리화하고 싶은 것 같다. 이러한 그의 마음은 재문과 지숙이 '빈말이라도 미안하다는 말 못하냐'고 말하자, 오히려 버럭하며 '니들이 누구 덕에 살고 있는데!' 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표출된다. 회사에서 잠든 예준의 주위로 청소하고 있는 아주머니가 등장하고, 이 장면이 치킨집을 청소하는 재문의 모습으로 전환되는 것은 이 셋의 관계가 얼마나 권력적인지를 암시해주는 듯하다. 평화로워 보이지만 자칫 잘못하면 균형이 깨지고 마는 이들의 평등한 듯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관계. 생각해보면 모든 평등해 보이는 관계 속엔 언제든 예속의 가능성이 있다. 돈이면 다 된다는 (그렇다고 착각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더욱이.

잘못된 것은 무책임한 게 아니라 책임과 무책임을 논하는 '이들의 관계'다.




3. 일단 예준

예준은 재문에게 아들을 낳으면 민중혁명을 줄여 '민혁'으로, 딸을 낳으면 마르크스의 아내였던 '레니'로 이름을 지으라 한다. 그만큼 예준은 아직도 과거 자신이 경험했던 운동권의 정신을 이어나가려고 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 경험의 긍정적인 측면이라고 하면 더불어 사는 삶을 실천하는 것일진대, 지금의 예준은 현재 몰인정함때문에 회사동료들에게 비난을 받는다. 그 비난은 이런 대사들로 표현된다. '운동권 출신이라면서 이래도 되냐'. (하지만 예준 세대 중 운동권 아닌 사람 꼽기가 더 힘들지 않은가) 예준에게 운동권 생활의 추억을 아름답게 공유할 수 있는 건 친구 재문 뿐이다. 그리고 재문은 예준을 지적, 물질적으로 동경하는 존재다.  
다시 한번 곱씹어 본다. 한때 운동권 출신이지만 지금은 금융계에서 잘 나가는 외환딜러인 예준, 이 수식어가 특별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예준의 갖고 있는 욕망은 어떤가?  그가 자본주의의 첨병에서 일한다는 문제보다 자신의 행동이 사람 관계를 무너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운동권이고 뭐고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문제이기도 하니까. (좀 딴 소리지만 이런 사례들은 내게 늘 아쉽다. 왜 그럴까. 그런 경험들이 현재 삶에 자양분이 될 수 없을까. 살아가면서 양심에 어긋나지 않을 만큼이라도 실천하면서 살 수 있도록 하는 좋은 경험으로 작용할 수는 없는 걸까. 그 경험을 낙인과도 같게 만든 변해버린 개인의 삶이 문제일까. 실천성이 부족한 운동권 논리의 문제일까 -_-) 
 
4. 이들의 현재 관계가 절정으로 치달았다 바닥으로 치게 하는 사건.

  헤어 디자이너인 지숙이 미용박람회를 위해 프랑스를 찾은 사이 재문의 집에서 술을 마시던 예준이 실수로 재문의 갓난 아이를 질식사시킨다. 하지만 이 죄를 재문이 뒤집어 쓰고 감방까지 간다. 지숙도 그렇게 오해했다. 예준은 자신의 죄를 대신 뒤집어 쓰고 감옥으로 간 재문을 대신해, 그의 아내인 지숙을 지켜 주는 것으로 책임을 지려 한다. '내가 지숙씨 책임지고 잘 보살필게' 또 그 방식은 어마한 돈을 지원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경제적 지원을 넘어 친구의 아내를 욕망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로 불안하게 안정을 현상유지했던 권력관계가 조금씩 뒤틀리기 시작한다. 그것은 예준의 어리석음 때문이다. 예준이 말하는 '책임'은 돈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는 재문보다 더 무너지기 쉬운 사람이었는 지도 모른다. 그는 재문에게 경제적 도움을 줄 수 있었지만 끊임없이 재문이 가진 것을 욕망했다.
 
5.
재문이나 지숙 역시 다를 건 없다. 비록 예준때문에 그들의 가정마저 파괴되긴 했지만, 그들이 예준에게 기대했던 경제적인 욕망은 위태로운 상황을 품을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재문은 예준에게 책임을 다했다. 그에 대한 고마운 혹은 빚진 마음을 대신 죄를 뒤집어 쓰는 것으로 보답했다. 그것은 자신을 무너뜨리면서까지 온 책임을 다한 것이다. 그는 무책임한 것을 너무도 싫어하기에. 하지만 재문이 예준에게 느끼는 책임감 역시 갖지도 않았으면 더 좋았을 감정이었다.  
그런 면에서 영화가 말하는 책임이나 무책임은 예속하고 예속받는 권력 관계에서 파생됐다. 그래서 이들 관계의 책임지고 말고는 문제는 전혀 '문제적'이지 않다. 문제는 그 관계를 파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영화의 결말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예컨대 만약 예준이 진실을 말했다고 이들의 관계가 달라졌을까. 예준이 재문에게 미안하다고 백번 사죄하거나, 자신이 민혁이를 죽였다고 부부 앞에 무릎 꿇는다면 기존의 관계를 유지 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세상도 돌아가는 게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런 관계는 위태롭다. 파괴되기 이전 그들의 관계도 좋아 보이지는 않으니까. 그것은 겨우 덜 나쁜 쪽으로 가는 방향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현상 유지가 오히려 서로에게 해악이다. 물론 인간 관계,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이 관계는 지극히 알레고리적이라는 것. 모두가 똑같은 것을 욕망하는 상태에서 더 가진 자가 덜 가진 자보다 우위에 서서 휘두를 수밖에 없는 권력을 너무나 잘 알기에. 




6.
그래서 감독은 끝까지 갔을 것이다. 이 어긋난 관계를 끝까지 밀어 부쳐서 파괴시켜 버린 다. 두 남자가 지켜주고 욕망하는 존재였던 지숙의 복수를 통해서. 지숙의 복수는 예준을 향한 것 뿐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사건의 진실을 알고는 예준을 가둔 채 자신의 고급 헤어샵에 불지른다. 예준이 준 돈으로 얻은 그 헤어샵을. 영화 속 지숙은 재밌는 인물이었는데 그녀 역시 예준에게 느낀 '힘'은 곧 그의 부와 명예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예준이 자신의 손가락을 빨 때 기분이 안좋았다고 말하는 것처럼 찝찝한 감정을 계속 갖고 있다. 그래서 그녀가 예준에게 복수를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녀는 예준의 부를 이용한 것에 가까워 보인다. 예준과의 섹스이후 자위 장면을 보아도 지숙은 다른 무엇에 예속되지 않는 자기만의 욕망을 갖고 있는 인물로 보인다. 또 지숙이 자기 욕심을 위해 프랑스로 가지 않았다면 민혁이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민혁이가 생명이라는 사실은 차치하고) 민혁이의 죽음으로 인해 이들의 권력관계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영화는 천장으로 옮겨간 불길이 숨이 멎을 정도로 이글거리는 모습을 몇 초간 보여 준다. 강렬했던 두 번째 장면인데, 난 왠지 눈물이 울컥 날 것 같았다.  



7.
지숙이 아이를 낳을 때 재문이 짓던 그 서글픈 표정처럼, 둘 사이의 첫째 아들인 민혁은 어쩌면 태어나지 말아야 할 혹은 어차피 숨막혀 질식사 할 수 밖에 없는 '욕망'이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드러나는 지숙이 임신한 그 아이는 과연 무엇을 상징할 수 있을까?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지숙이 손님의 머리칼을 계속 서걱서걱 잘라내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나는 자꾸만 소박해졌다. 지금 사회에서 그런 심적 여유가 생길지는 의문이다. 아니다. 자본의 욕망이 제 스스를 불사르는 모습을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 지켜보는 우리에게는 오히려 기회인지도 모르겠다. 결국은 돈이 문제라고? 아니다 우리가 문제인거지. 돈의 자리는 언제든지 다른 것으로도 대치 가능한 것이라 생각되니까. 

이런 영화를 통해 우리네 모습을 자꾸 되돌아보고 더디더라도 더듬거리며 나아가다 보면 좀 달라질까. (애매함에도 불구하고 쓸 수 밖에 없는 이 단어) 진정한 관계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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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수 감독/유영길 촬영 감독
서울아트시네마


임철우 소설가는 '곡두운동회' 라는 작품으로 접했다. 마을주민들이 좌우로 갈리어지고 생과 사를 오간 반나절의 시간 속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한 이야기다. 소설엔 이념도 모르는 주민들이 이념때문에 죽게 되고 그 생과 사를 결정하는 국가의 폭력을 담았다. 여기서 곡두는 허깨비를 뜻한다. 이념도 모르는 평범한 사람들이 이념때문에 죽어야 하는, 그 이념의 허구성. 그래서 소설 속 한 아이의 생각은 정곡을 찌른다. 운동장을 새끼줄로 나누고 좌 우로 갈려진 주민들과 그들을 지휘하는 반란군의 모습을 보며 '하나의 운동회' 같다고 하는 시선이.

임철우 작가는 집요하게 이념의 문제가 가져다 준 한국 역사의 아픔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의 소설들을 조합해서 하나의 시나리오로 만든 영화가 '그 섬에 가고 싶다' 이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고향에 묻기 위해 문재구는 아버지의 꽃상여를 배에 싣고 고향친구 김철과 함께 섬으로 향한다. 하지만 섬에 가까워지자 섬사람들의 맹렬한 반대가 시작된다. 이는 문재구의 아버지인 문덕배와 마을 사람들의 아픈 기억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일단 사람들만 마을에 들어온다. 시인인 김철은 마을을 돌며 지난 시간을 회상한다. 영화는 김철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섬마을의 풍경과 사람들의 일상을 보여 준다. 6.25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의 한국사람들의 생활을 자세히 보여준다. 어느 날 갑자기 신내림을 받아 무당이 되는 누구네 집 엄마, 떠돌이 장수와 과부댁의 만남, 딴 집 살림을 차리고선 늘 섬밖으로 나가는 재구의 아버지 문덕배, 밖으로만 떠도는 남편에 곱추인 딸 때문에 힘들어 하는 문덕배의 아내, 그리고 곱추인 딸의 죽음,
미리 영화의 간단한 내용을 본 나는, '이데올로기로 인해 억압당하는 주민들을 사실적으로 담아내면서, 열린 카메라 구도를 통해 화해의 공간을 모색한다'는 설명을 잊을 정도로 대부분의 내용이 섬마을 사람들의 일상을 보여주는데 할애된다.
  곱추인 딸이 죽고
반쯤 미친 문덕배의 아내를 문덕배가 섬 밖으로 데리고 나가고선 며칠 안되어 바로 새 여자를 마을에 들여오자, 마을 사람들은 그를 멍석에 말아 심하게 팬다. 이 사건이 마을 사람들이 학살당하는 계기가 된다. 니들이 뭔데 나를 심판하냐며 소리지르며 문덕배는 섬을 떠난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인민군이 섬에 들어 온다. 인민군은 섬마을 사람들을 국민학교 운동장에 불러 모은다. 운동장엔 새끼줄로 금이 그어져 있다. 이 새끼줄은 사람들을 사상에 따라 분리시키고자 하는 도구다. 약삭빠른 몇몇 마을 사람들은 인민군 만세를 외치며 자신이 반동분자를 색출해 내겠다고 나선다. 날도 뜨거운 여름 한 낮, 이념도 뭣도 모르는 마을 주민들은 순식간에 생사가 갈린다. 지주나 공무원, 경찰들은 우로 몰려 죽게 됐다. 그때 문덕배가 등장한다. 인민군들은 인민군이 아니라 정부군이었다. 정부군은 섬에서 나온 문덕배의 멍이 든 얼굴을 보고선 무슨 일이냐고 묻고, 문덕배는 좌익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애매한 말을 흘렸다. 그 한마디에 정부군은 섬의 좌익
들을 색출해 내고자 연극놀음을 한다. 일부러 인민군이 되어 교묘하게 좌익을 처단하겠다는 거였
다. 순식간에 상황은 반전되고 사람들의 원망은 문덕배에게 향한다. 그제서야 덕배가 변명해보았
자 소용없다.
그리고 이 날은 죽은 마을주민들의 공동제사 날이 된다.
그러니 마을주민은 죽어도 죽은 문덕배의 상여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갈등은 최고조로 치닫고 화가 난 마을 이장은 바다 위에 떠 있는 문덕배의 상여에 불을 지른다.

카메라는 저 멀리 빠지고 한스런 판소리가 흐르고 불에 타버린 상여를 육지로 끌어 올리는 마지막 장면. 어쨌든 살아남은 자들에겐 풀어야 할 숙제가 너무 많다. 짙푸른 밤, 저 멀리서 보이는 두런
두런 상여를 끌어 올리고 있는 조그만 사람들은 아픈 역사로 인해 겪은 기억만큼 사는 일이 고단
해 보인다. 그래도 살아가겠지. 그렇다면. 그렇다면! 





시인 김 철이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에는, 대부분이 마을에서 겪은 추억이다. 그리고 국가에 의해
마을의 일상이 순식간에 깨지는 사건은 상대적으로 짧게 처리됐다. 영화는
허깨비같은 이념
이, 어떻게 마을 사람들의 일상과 관계를 파괴하는지 보여준다.
좌익을 색출하겠다고 사람의 생사를 가지고 연극놀음을 한 국가라는 존재의 폭력은 이미 눈에 드러난다. 그들의 뻔뻔한 행동은 욕을 하고 욕을 해도, 사실 오늘날까지 욕을 먹지만 변함이 없다. 
  하지만 내가 영 찜찜했던 부분은, 자세하게 묘사됐던 섬마을의 일상이 그리 아름답진 않았다는
것이다. "전쟁의 폭력과 대비되는 순수한 일상"이라는 상투적인 대조법이 아니라는 점은 나에게
또 다른 생각을 갖게 했다.
그건 폭력의 일상화. 

  이 영화의 전반부에 묘사된 섬마을 일상엔 슬픔과 한이 서려있다.
특히 여인들에게서 그런 모습이 나타난다. 매일 남편에게 맞던 한 부인은 갑자기 신내림을 받는다. 그리고 문덕배의 부인은 반쯤 미쳐서 섬마을을 떠나 죽는다.
집안엔 신경도 쓰지 않고 외도하는 남편에 곱추인 딸마저 병으로 죽자 문덕배의 부인은 지붕으로
올라가 날이 다 저물도록 내려오질 않는 장면이 있다. 짙어지며 짓누르는 붉은 노을 아래 초가집
지붕 위에 가엾은 새처럼 그녀는 앉아 있다. 그 모습은 그 자체로 한이었다. 또 그녀는 문덕배가
딴 집 살림을 사는 섬 밖 마을에 갔다가 돌아오는 강에서 비를 맞는다. 그때 노를 젖으며 한에 서
린 노래를 부르는 장면 역시 비중있게 묘사된다.
한국이 가지고 있는 마을 공동체 생활의 이웃 사랑과 이로인한 정겨움이 드러나면서도 이렇게 고
통스러워 한 여인들의 모습 역시 큰 비중으로 다뤄진다. 
  그리고 이 섬마을 사람들이 문덕배에 가한 폭력 사건. 정신나간 마누라를 내팽겨치고 금세 다른
여자를 마을로 들여온 문덕배는 호되게 마을주민들의 심판을 받는다. 멍석말이로 심하게 맞은 문
덕배가 분노하며 섬마을을 떠난다. 그리고 그의 보복심은 국방군이 섬에 들이닥쳐서 무고한 양민
을 학살하는 계기가 된다. 분한 마음에 국방군에게 스치듯 말한 '마을에 좌익이 있는 것 같다'는
한마디에 마을주민이 학살된 것이다.

  물론 이건 우연성의 문제로 무리한 연결일 수도 있다. 또 그의 평소 행동은 마을 사람들에게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수 있다. 그렇다고 마을사람들이 심판한답시고 마구 패고 쫓아내는 것은 공동체성이라고만 하기에도 찝찝한 부분이 있다. 그래서 무척 복잡하고 조심스런 문제다. 

  어쨌든 쉽게 단죄하지 않되 일상의 폭력 문제는 논의대상으로 이야기 돼야 할 것이다.
전쟁으로
인한 폭력 경험은 또 다시 일상으로 스며든다. 그리고 일상 속엔 언제든지 전쟁과 학살같은 사건
이 벌어질 수 밖에 없는 씨앗을 품고 있다. 전쟁이 일상을 단절시킨 것이 아니라 전쟁은 일상의 연
장이라는 거다. 이젠 전쟁이나 폭력이 일상을 부순다 라는 말을 할 때는 그 맥락을 잘 고려해야 겠
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이념대립과 전쟁의 학살 문제는 일상의 회복이 아닌 일상의 혁명을 통해 그 재출현을 막을
수 있다는 걸.

.
4.3 사건을 바탕으로 쓴 '대량학살의 사회심리'라는 논문엔 이런 글이 있다.

'4.3에서 '그들'의 경계를 확장하고, 학살을 정당화한 심리문화적 요소는 무엇인가? 이 글에서는
우리나라 폭력 문화의 한 요소로 죄인에 대한 처벌과 보복 심리를 들고자 한다. 물론 우리나라의
유교적 권위주의나 위계질서 숭상, 제주의 고유한 가족과 공동체 문화 등 다른 여러 문화적 요소
들도 학살 과정에 영향을 미쳤겠지만, 처벌과 보복 문화가 좀더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 때문이다. 4.3 동안 죄에 대한 인식, 죄인을 규정하는 방식, 죄인을 처벌하는 심리문화는 적의 범위를 확대하고 학살을 정당화한 배경이었다. 또한 보복 심리는 죄인의 처벌 과정과 맞물려 폭력의 상승 작용을 가져온 한 요소였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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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

영화가아니었다면 2008. 9. 21. 22:25


a child crying, Diane Arbus(1923~1971)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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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6시 40분 서울아트시네마. 난 구석 테이블에 자리 잡고 앉아선 커피우유에 빨대를 꽂곤 신나게 마신다. 그리곤 영화 포스터에 자질구레한 소식지들을 잔뜩 집어와선 정신없이 읽고 있었다. 무심코 고개를 들었는데 맞은 편 의자에 배우 안성기가 누군가와 이야기 하고 있다. 눈이 마주쳤는데 너무 놀란 표정을 지어 버렸다. 웃긴 건 안성기를 보는 순간 ‘어찌 저리 이쁘게 잘 컸을고’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 아역배우로 줄기차게 자란 그에 대한 이미지가 컸다 보다.
촬영감독 유영길 회고전 개막식이라 그런지 감독, 배우들이 눈에 띄었다. 그래도 영진위 위원장은 훌륭한 촬영감독 회고전 개막식에 많은 영화인들이 오지 않은 것을 섭섭해했다. 그러니 일찍부터 찾아와서 자리를 채우고 있는 안성기가 새삼 좋아지더라.
사실 난 촬영감독의 존재에 대해 별 의식이 없었다. 결국 영화라는 것은 촬영을 통해 영상으로 구현되는 것인데 말이다. 카메라 뒤엔 늘 촬영감독이 있었다. 그래서 촬영감독들의 사진 중에선 얼굴이 온전하게 보이는 사진이 없다고 한다.

 

7시, 개막식이 시작됐다. 다른 축사 무엇보다 유영길 감독의 부인이 기억에 남는다. 무대에 올라와 말을 시작할 때부터 이미 울음 섞인 목소리였던 부인은 남편에 대한 긴 얘기 대신 언젠가 신문에서 보고 오려둔 칼럼을 읽겠다 하셨다. 영화 강의 시간에 한 여학생이 영화 스텝들의 극빈한 생활을 보고와선 울었다는 얘기로 시작되는 글은 위험한 영화 촬영 때 아무도 나서고 있지 않은데 유영길 촬영감독이 몸을 던져 자신이 직접 스턴트맨을 대신했다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죽음마저도 불사하는 그의 영화에 대한 열정. 그렇지만 촬영감독을 비롯한 영화 스텝들은 늘 뒤에서 묵묵히 갖은 고생을 하지만 주목을 받지 못하고 한없이 부족한 금전적 대우를 받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배우 황정민의 수상 소감처럼, 잘 차린 밥상을 배우들이 맛있게 먹는 것이 영화 촬영인지도 모른다.

아트시네마에서도 촬영감독 회고전을 여는 것은 유례없는 일이란다. 그래서 더욱 필요한 일일 것이다. 관객들은 쉽게 소비하고 말 뿐인 한 편의 영화에 담긴 스텝들의 땀과 열정.
워낙 말이 없던 남편에게 해준 것은 밥 밖에 없는 것 같다며 눈물 짓던 감독의 부인. 그리고 그녀가 읽어내린 칼럼을 통해 짐작되는 넉넉지 못했을 그들의 생활. 그 그림자.

개막식 상영작은 유영길 촬영감독의 유작인 '8월의 크리스마스'. 서투르지만 난 영화를 어떻게 촬영했고 그의 영상미학은 무엇일까를 고민해보며 내내 그의 카메라 뒤에 서있으려 했다. 개념조차 없는 문외한 관객이지만 그런 작은 의지들이 자꾸만 날 영화보게 하는게 아닐까.
내가 본 8월의 크리스마스는 그림자. 빛이 너무 많아 그림자였다. 그래서인가. 회화같은 장면들이 많아서 좋았다. 말 그대로 풍경화. 날 좋은 날 그늘에 앉아서 그림을 그리면, 햇빛에 따라 다른 색깔을 가진 나뭇잎들을 세세하게 표현하고 그림자까지 표현해서 입체감 살리기에 열중했었지-

유 감독은 빛에 대해 아주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허진호 감독이랑 맥주 한잔을 할 때도 내내 말이 없다가 자동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선 벌떡 일어서서 허감독, 저 자동차에 비치는 불빛을 보라고 할 정도로 빛에 빠져 있던 사람. 쓰레기통을 보고서도 빛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고 하던 빛에 예민했던 촬영감독.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의 화면들은 빛이 아주 많은데 그것이 사물의 희게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촘촘히 들어앉아 있었다. 빛의 배려를 담다. 그리고 그만큼 사물들의 그림자도 풍성했다. 숱이 많아 여름 바람에 크게 울렁이는 나무들이 만들어내는 진한 그림자처럼.



유독 사물과 사물을 매만지는 손에서 풀샷으로 이어지는 카메라의 움직임이 많더라. 그래서 잠시라도 사물의 표정에 천착하게 될뿐더러 무엇보다 사물을 매만지는 손길에 집중하게 됐다.
내겐 배두나나 심은하가 그렇다. 손매무새가 너무 예뻐서 그녀들의 행동을 보면 꼭 집으로 돌아와 청소를 하고 싶어진다. 야무지게 비질을 하고 걸레질을 하고 싶어진다. 영화에서도 정원이 채소를 뽀득 씻고 있거나 다림이 아이스크림을 떠먹을 때 그리고 손수건으로 캔 뚜껑을 야물게 닦아선 정원에게 내밀 때나 그럴 때, 자꾸만 손매무새에 눈길이 간다.



영화 말미에, 행위는 지속되는데 시공간만 바뀌는 장면이 계속 생각난다(정원은 계속 사진첩을 넘기고 있고 시공간은 자연스레 이동한다. 사진첩을 클로즈업했다가 뒤로 빠졌을 때 바뀌어 있는 시공간) 그것은 한 테이크일까 몽타쥬일까. 이런 엉뚱한 생각도 떠오르고 말이다. 기술상으로는 연속편집한 몽타쥬이겠지만 행위와 시공간이 분리되는 그 장면이 왜 자꾸 떠오르는 것인지.
인간의 행위는 시공간과 분리될 수 있는가?
시간이 흐르니까 인간이 변하고 죽는 것일까. 인간이 변하고 결국 죽으니까 시간은 흐른다는 것일까. =_= 가령 '눈이 내리니까 니가 보고싶다' 와 '니가 보고 싶으니까 눈이 와.' 이것은 아주 느낌이 다르잖아. 이것은 결국 시공간 탈주에 대한 내 욕망인 것인가. 여튼 정리되지 않은 뭔가가 징그럽게 머리에 붙어 있는데 표현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이미지들을 카메라를 통해 구현해내고- 그 구현해낸 영상 속엔 보이지 않는 것들이 또 담겨 있다. 카메라가 담아 낸 보이지 않는 것을 내가 볼 수 있게 될 때 나는 영화의 맛을 더 알아갈 지 모르겠다.


바람 타고 여름 햇빛 한껏 들어오는 버스 안. 정원이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듣고 있는 노래.
산울림의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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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통해 그 흔적을 보유한 자는 다른 길로 들어설 수 없다

나는 고독하다고 오브제는 말하는 듯하다

뉴스영화는 피와 눈물을 잊어버린다

역사가로서의 자질

오히려 미완으로 끝난 영화의 역사를 말하자

부동과 침묵을 통해 전달되는 모든 것을 확신할 것

손이 있는지 확인하지 말 것 그렇다고 눈도 믿을 수 없다 손을 볼 수 있는 눈을 기를 것

신은 인간을 버렸다

스크린은 사마리아인의 옷처럼 하나의 헝겊에 지나지 않는다
결과는 스크린이 아니라 시의에 비쳐진다

'오직 영화만이'

야수로 변하지 않도록 공간과 빛과 빛나는 하늘에 취한다

영화는 투사하기 때문에 거대한 역사

영화는 상품으로 전락했다 '마음의 불'로 그것을 태워야 한다. 그리고 다시 소생하는 것이 예술이다

고독의 역사 역사의 고독

내게 영화는 욕망 혹은 무의식

나 자신에게 역사가 있대도 영화가 없었다면 알지 못했을 것



'영화만이 역사를 말하는 유일한 것인데 그게 수행된 적은 단 한번도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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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고 빛 환한 아스팔트 길은 재미없으니까 나는 자꾸만 샛길로 빠져드는가 봅니다.
아니 좀더 명확히 말하자면 그건 필연이지요 필연. 아 체념일수도 있겠네요. 내 끌리는대로
해버린 무책임한 사람이니. 하지만 그러니까 당신과 나의 사랑도 가능했겠지요.
하지만 경계라는 것은 명확히 존재하나 봅니다. 저쪽으로 걸어가야 한다면 감내해야 할
고통이 너무 크니까요.
당신이 소리내어 울고 싶은 만큼 나도 소리내어 울고 싶어요.
어딘가에선 우리로 인해 상처받은 이가 가슴을 쥐어뜯고 있겠지요.

그래요 이 모든 것들 다 허깨비예요.
너무 먼 길을 달려와 돌아가지도 못하는 내가 바보인가요.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는 당신은
현명한 것인가요. 그런데 어쩌겠어요 그렇다고 사랑하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을.
당신과 나의 첫 섹스처럼 그렇게 구질구질하고도 황홀한 경험은 또 다시 찾아올까요.

아아 인생이란 왜 이리 구질구질하고
자아가 되지 못한 타자는 불쑥불쑥 나타나 생채기를 내고
욕망은 이토록 내 감정을 빠작빠작 부스러기내는지.

그래요. 그래도 결론은 이 모든 게 허깨비라는 것.
'세상 다 그런거라고. 그래도 남들은 티안내고 산다고'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게 맞는가 봅니다.


영화가 끝나고 누군가 뒤에서 흐느껴 우는데
정말 나도 울고 싶었습니다.

이토록 희극이자 비극인 영화라니요,

그게 인생이라니요.
사는 일이 까무룩합니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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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 보고마 보고마 하다가 상영관에서 거진 다 내리기 임박한 날 어느 밤 9시가 넘어 관객 4명과 함께 보았다. 극장위치도 모르고 무슨 역에 있던 것 같더라 하는 지식으로만 찾아가선 결국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야위치즘 굽슨. 극장 완전 썰렁하다. 감자 여사와 함께 삼겹살을 먹고 온지라 마음도 다복해진 것이 극장 좌석도 뒤로 한껏 젖혀지는 것이 몸과 마음 풍요로왔다. 이 극장 참 좋구나. 상영관 천장에 별들이 떠 있고 별똥별도 떨어진다. 하아 소원이나 빌어볼까.
원래 영화보는 것이란 그렇지 않나. 영화만 남는 것이 아니라 극장 가기까지의 과정이 좋은 거잖아. 그래서 영화는 문맥이다. 난 극장가서 기다리는 시간동안 읽을 책을 고르는 일에 더욱 신중하다. 님은 먼곳에 영화를 보기 전 짬에 읽은 책은 정지환의 대한민국다큐멘터리. 한국 현대사를 다시 쓰는 마음으로 왜곡된 역사나 침묵당한 기억들을 바로 잡고자 하는 한 기자의 노력 결과물이다. 그러고보니 이 영화랑도 꽤 궁합이 잘 맞는 듯하다. 가장 고귀한 것은 인간의 생이다. 한국 현대사 속엔 얼마나 파괴된 개인의 생이 많은가. 전쟁과 국가폭력의 시대를 살아가야 했던 개개인의 생들엔 여전히 볕이 들지 않고 있다. 정말 중요한 건 우리의 일상인데 말이다. 결국 내가 '순이' 의 인생을 체험해본 것도 그 중요성을 또 다시 실감한 계기가 되었다.


순이의 밴드가 베트콩에 붙잡혀서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정만은 돈을 벌러 왔을 뿐이니 살려달라고 말한다. 그러자 베트콩은 말한다. 그럼 한국군이랑 똑같구만. 그러자 정만은 난 돈을 벌러 왔지만 한국군은 평화를 위해 온 거라고 한다. 베트콩은 다시 묻는다. '당신은 평화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라고. 정만은 당신들이 우리를 죽이지 않고 살려주는 것이라 한다. 하지만 그 어떤 말도 총부리 앞에선 의미없고 역겹게 들릴 것만 같은 순간, 순이는 이렇게 말한다. '남편 만나러 왔어요'

그 순간 획득되는 일상성. 전쟁이 빼앗은 가장 중요한 걸 깨닫게 하는 순간.

평화를 위시한 폭력이, 돈에 대한 맹목이 전쟁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전쟁이 부순건 일상성이다. 전쟁폭력은 일상을 절단시켰다. 전쟁 앞에서 인간들의 생은 얼마나 무기력한가. 전쟁과 폭력 앞에선 물론이거니와 나만해도 힘든 일 앞에서 외면하거나 그냥 에둘러 가버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순이는 제 앞에 닥친 일을 피하지 않고 베트남까지 간다. 영화가 좋았던 건 순이가 사랑하는 남편과 재회하기 위해 전쟁터를 찾아가는 단순한 구조의 신파가 아니라(물론 그랬다면 전쟁이 파괴한 일상성이 더 잘 드러날수도 있겠지, 하지만 삶이란 그리 간단하지 않다. 그 복잡한 걸 다 그러안고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더 중요할지도) 여성에 대한 이중억압, 남편과의 불편한 관계, 복잡한 감정 그러한 모순들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그걸 다 그러안고서 순이는 길 위로 오른다.  
그래서
남편을 찾으러 간 것이 순이의 자의든 타의든 간에 자신을 이이상 살아가기 힘들게 하는 것을 제 눈으로 확인하러 떠난 한 여성의 궤적은 하나의 생존투쟁과 같았다. 그러므로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행동이었다. 아예 도망가 버릴 수도 있었지만 시어머니의 성화에 순이는 베트남으로 떠날 수 밖에 없었다.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했고 스스로 한 선택을 끝까지 밀어부치고 나간다.
 그리고 그 노력은 베트콩이 전쟁 와중에도 계속 공부를 가르치고 아이를 키우며 생을 꾸려 나가는 것과 크게 달라보이진 않더라. 전쟁이 부순 걸 계속 회복시키고자 하는 의지 같은 것.

죽을 고비 넘겨가며 만난 남편 박상길에게 순이는 따귀를 야멸차게 날린다. 그녀가 따귀를 때리는 대상은 자신을 억압한 가부장제일수도, 전쟁폭력일수도, 그저 미운 인간 박상길 일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서 한마디도 하지 않고 따귀를 열렬히 날리는 순이가 마치 이렇게 말하고파 하는 것만 같았다.

'니가 뭔데!..((시팔)) '

(물론 이 말은 박상길 역시 외칠 자격이 있다고 본다. 아니 그 역시도 그렇게 외쳐야만 한다고 본다. 군대와 전쟁으로 인해 그의 세계와 인간성은 거의 파멸직전까지 갈 뻔하지 않았던가)

순이는 자신을 숨막히게 하고 일상을 절단하는 것 앞에서 무릎꿇지 않고 정면돌파하며 끝까지 나아가보았다. 그러니까, 잘 살거야, 잘 살았을거야. 무엇보다 베트남에서 고생할 때 순이가 보여준 따스한 웃음과 남편을 만나겠다는 고집이 어떻게든 돌만 벌겠다던 주위 사람들을 변화시켰잖아. 당장 옆에 사람이 변하게 할 수 있다는 거. 그거 정말 대단한 힘이다.


그나저나 헬기 안에서 순이가 노래를 부르고선 이어지는 그 초록빛 평원 풍경 어쩔거야. 그 장면 때문에 나 하루 종일 붕붕 헬기타고 날아 다닌다.


노래는 더 좋다 =_=

 

사랑한다고 말할 걸 그랬지이
님이 아니면 못 산다 할 것을
사랑한다고 말할 걸 그랬지이
망설이다가 가버린 사람

마음주고 눈물주고 꿈도 주고
멀어져 갔네 님은 먼 곳에
영원히 먼 곳에 망설이다가
님은 먼 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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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레트 메나헤미 감독(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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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다시 떠올리면, 무엇보다 화면 색감이 너무 예뻐서. 내 눈에 보이는 풍경을 저런 필름의 색깔로 다시 채색할 수 있다면?


이스라엘에서 태어나 팔레스타인과의 전시상황 때문에 군에서 남편을 두 번이나 잃은 승무원 미리. 중국인 이주노동자의 아이로 태어나 엄마와 떨어질지도 모르는 불안 상태에 늘 놓여 있는 아이, 누들. 삶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슬픈 운명에 놓인 두 사람이 떠밀리듯 만나서 만들어 내는 관계에 관한 이야기.

통하지도 않는 몇 마디 말과 눈짓손짓으로 미리가 갖고 있는 아픈 이별을 누들에게 말해주고, 그걸 알아차린 누들이 아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위로를 해주는 장면.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시간이라는 건 어그러지기 쉬워서 난 몇 번이고 얼그러진 시간의 틈으로 불쑥 나타난 어린 시절의 나와 대면하곤 하니까. 다르지만 같은 아이와 어른의 마주침. 그 짧은 순간에 두 사람이 (단지 언어만이 아닌) 대화로 치유를 할 수 있다는 것이야 말로 기적이 아닐까. 미리의 눈에서 똑 떨어지는 눈물이 내 마음에서도 똑 떨어지는 기분이란. 더구나 그것이 내가 아주 좋아하는 통통한 포도알의 즙만 같다면. 아.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미리와 누들의 관계를 큰 줄기로, 가지 친 주변 인물들의 관계 역시 흥미로웠다.
처제를 좋아하는 형부,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미리의 언니. 그들 삶의 공허함은 그 때문이었을까. 별거상태인 부부의 복잡한 감정. 삶이 엉망이 되어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있지만 그래도 끌림에 충실하고픈 것이 사람이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는 붙으면 붙고 밀어내면 밀어내지는 자석과 같지 않아서 불은 면발처럼 엉키고 설켜있다. 불어버린 면발을 먹어야 하는 그 서글픔.
하지만 그 시간을 온전히 살아내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은 아픔과 고통을 딛고 더 나아진다.
'진부하기 짝이 없는 명제들, 그래도 그것은 진실.'  자신을 들여다 보려는 노력을 끝까지 해내는 영화 속 그들의 모습이 좋았다.

섣부른 결말이었지만 이 영화의 해피엔딩은 내게 정당했다. 아니 고맙다. 미리가 법을 어기면서까지 누들을 친엄마에게 데려다 주었을 때((아. 오히려 부정되어 마땅한 법이라면 어겨야 한다. 우리가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데. 그렇다는데.)) , 다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을 준 아이를 떠나보내야 할 때, 또 반복되는 이별 앞에서 미리는 슬프기보다 한결 나아진 자신의 모습을 본다.

누들을 보내고 야무지게 가방을 끌며 여유롭게 걸어가는 하나의 풍경 같은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바라본다. 그 순간, 젓가락을 사용해서 한번에 후루룩 국수를 빨아 먹는 법을 누들에게 배워선 미리가 그걸 해내자 식당 손님들이 다같이 박수치는 장면이 오버랩되며, 나는 짝짝짝 박수쳐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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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없이 타인을 위해 도움을 주는 관계를 맺는 것. 그런 관계가 또 나를 위하게 된다는 평범한 관계의 진리를 우린 너무 잊고 산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 국가 혹 우리와 이주노동자의 관계처럼 '관계'라고 이름붙이기도 큰 논쟁거리일수록 이런 진리에 대한 믿음이 더더욱 필요하지 않을까.

 너도 좋고 나도 좋고 우리 모두 좋아진 누들과 미리의 모습은 세상에게 자꾸만 새로운 관계 맺기를 하자고 말하는 것만 같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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