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해당되는 글 399건

  1. 2024.11.12 좋은 곳으로 밝은 빛을 따라
  2. 2024.03.03 도살장 앞에서
  3. 2021.02.09 꿈+
  4. 2020.12.06 경계
  5. 2020.10.12 덕분에
  6. 2020.06.27 서울복합물류 B동 3F
  7. 2020.05.31 시시미미
  8. 2020.01.19 원주민 고양이
  9. 2019.11.03 횡단보도에서
  10. 2019.01.13 사이에서

한 고양이의 숨이 멈추는 순간을 지켜보았다. 마지막 숨을 쉬기 직전 예감할 수 있었다. 어디선가 툭 하고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고, 한껏 부풀어 올랐던 꼬리가 이내 다리 사이로 내려와 몸을 감쌌다.

숨이 멈추면 그 존재가 그 존재이게끔 해준 무엇들은 어떻게 될까. 어디론가 떠날까. 몸에 그대로 남아 있을까. 숨과 함께 사라질까.

검은 고양이었다. 풍채 좋고 마음씨도 넉넉했다. 그는 한 스님과 함께 살았다. 얼마나 오래 길에서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스님과는 2년간 함께 지냈다. 스님은 예전에 무슨 이야기를 하다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좋은 곳으로 밝은 빛을 따라 가라고 기도했어”. 그 말이 좋아서 혀끝에 맴돌도록 외웠다가 집에 와서 적어두었다.

좋은 곳으로. 밝은 빛을 따라.

스님이 “관세음보살” 읊조리며 엉덩이를 팡팡 치면 마치 목탁처럼 리듬감 있게 탁탁 받아쳤다던 그 꼬리의 움직임도, 완전히 멈추었다.

생에 마지막 날들의 통증은 다 잊고 안 아픈 몸으로 밝은 빛을 따라 잘 가렴. 마지막 순간에 들었던 목소리만은 잊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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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살장 앞에서

일상 2024. 3. 3. 18:44

나는 카메라를 그만 내린다. 그리고 고향집에서 챙겨온 내 오래된 옷을 가방에서 꺼내 트럭 위로 올라간다. 여전히 가뿐 숨을 내쉬며 눈을 깜박이는, 많이 고통스러운지 몸을 뒤틀며 몸부림치는, 눈앞의 이 어린 돼지를 옷으로 감싼 뒤 뒤돌아 달리기 시작한다. 태어나 6개월이면 죽임 당하는 돼지의 크기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아주 아기는 아닌, 다행히도 내 품에는 꼭 맞는 이 돼지를 도살장의 계류장으로부터 도피시킨다. 도망친 곳은 도살장에서 조금 떨어진 공터의 작은 화단. 흙 위에 그를 눕힌다. 돼지를 치료해야만 한다. 살릴 수 있을까. 받아 줄 동물병원이 있을까. 이런 구조는 돼지의 고통을 연장시키기만 하는 게 아닐까. 이제 어째야 하나.

아, 여기서 상상이 더 이어지지 않는다. 상상해. 예상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2분째 내 폰에는 죽어가는, 아니 아직 죽지 않은 어린 돼지의 모습이 녹화되고 있다. “돼지 아직 살아 있어요” 나는 트럭 위를 올려다 보며 말한다. “죽었어”. 잘못 들은 걸까 의심하는 사이 트럭 위와 계류장을 오가던 장화들은 사라지고 없다. 살아 있는데, 그것도 고통스러워하고 있는데 왜 죽었다고 말하는 걸까. 전쟁터 같다. 죽은 시체와 아직 살아 꿈틀대는 몸들이 아무렇지 않게 방치되어 있는 곳. 사실 보고 있는 이 순간 심한 동요를 느끼지는 않는다. 이런 장면은 이미지로 접할 때 마음이 더 괴롭지 정작 현장에서 보고 있을 때는 사진과 영상으로 볼 때 만큼 괴롭지는 않더라. 그래서 반대로 이미지의 힘이 강력하기도 하고. 그래도 지금 보고 있는 이 돼지의 고통이 내 몸에 영원히 각인될 거라는 건 알겠다. 죄책감, 무력감과 함께.

자루 안에 돼지들이 담겨 있었다. 어떤 돼지는 하체가 밖으로 나와 있었고, 몸이 들썩이는 게 보였다. 아직 죽지 않았다. 아니, 아직 살아 있다. 그 위로 자루에 담기지 않은 검은 돼지가 눈을 뜨고 있었다. 돼지의 눈은, 돼지의 눈은, 돼지의 눈은… 친구의 말대로라면 “무언가 알고 있는 눈” 같다. 온몸이 젖어 있다. 양돈장에서부터 이미 죽어 가는 어린 돼지들을 아무렇게나 담아서 도살장에 보낸 걸까. 아니면 이곳에 와서 무슨 일을 당한 걸까. 여기까지 이동시간도 길었을 텐데 이 상태로 계속 버텨야 했던 걸까.

죽은 돼지의 등에서 엉덩이로 내려가는 동그란 곡선이, 트럭 난간에 얹어진 돼지의 가느다란 두 다리가 마치 곤하게 자고 있는 내 반려동물의 모습과 같았다. 그 이미지가 겹쳐지자 일순간 마음이 찌르듯 아팠다. 하지만 반려동물과 비슷해서 더 연민을 느끼는 내 감정은, 인간의 심리는 되도록 존중하지 않으려 한다. 접촉면이 필요하다는 건 안다. 그래야 변화가 시작된다는 것도. 그렇다면 질문해보자. 이 돼지의 몸은 인간의 몸과 다를 게 없지 않냐고. 너무 비슷하다고. 이 몸들에서 엄청난 괴로움이 발생하고 있다.

다시 이곳에 왔을 때 그 사이 돼지 하나가 땅에 떨어져 있었다. 소독을 위해 계류장의 입구마다 수시로 물을 분사하고 있었다. 물의 압력에 밀린 걸까. 몸부림치다가 떨어져버린 걸까. 아까 눈을 뜨고 있던 그 돼지일까. 트럭 기사와 직원들이 없는 틈을 타 빠르게 다가가본다. 눈에서 피가 흐른다. 아직 살아서 몸을 떨고 있다. 하필 땅에 물이 고인 자리에 돼지의 코가 닿아 숨쉬기가 너무 힘들어 보인다. 안 되겠다. 몸을 밀어서 옆으로 옮겨주자. 옮겨주자. 옮겨주어야 한다… 차마 손으로 못 하겠으면 발로라도 해주자. 그런데 지금 코에 물이 닿는 고통을 없앤다고 이 돼지에게 어떤 도움이 되나. 차라리 빨리 죽는 게 그로서는 고통을 그만 멈추는 길 아닌가. 그런데 대체 이 도살장이라는 곳은 뭐하는 곳인가. 동물을 죽이는 곳. 그래, 죽이는 곳. 죽이는 게 왜 이렇게 쉬울까. 왜 이 동물들의 목숨값은 이리도 하찮은가. 내가 보고 있는 이 풍경은 예외 상황도 아니잖아. 매분 매초 벌어지고 있는 축산업의 현실인데. 인간이 만들고 묵인하는 시스템인데. 지난 한 달 간 국내에서만 2백 만 명의 돼지를 도살했다. 내가 본 돼지와 같은 도태된 동물은 통계에 잡히지도 않을 것이다.

도살장에서 멀어질수록 다시 익숙한 일상의 풍경으로 돌아왔고, 인간의 이익을 위해 벽 너머로 거대한 학살이 벌어지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돌아가는 세상에 조금 현기증이 났다. 인간의 삶과 죽음은 너무 무겁고, 동물들의 삶과 죽음은 너무나 가볍다.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야 눈물이 푹푹 났다. 몇 년 전 생각이 났다. 다른 지역에서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고 있던 어느 날 늦은 밤에 사람들과 골목을 걸어가고 있었다. 생전 들어보지 못한 괴기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고양이었는데 그건 발정 소리는 아니었다. 일행 중 한 명이 고양이를 무서워해서 우리는 빠르게 그 거리를 지나갔다. 마음이 계속 쓰였던 나는 다음 날 아침 일찍 그곳에 다시 갔다. 골목 한 쪽에 누더기가 된 고양이가 웅크린 채로 있었다. 밤새 그러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쳐다보자 울었다. 몰골이 너무 참혹해서 나는 오히려 물러났다. 골목 반대편에서 가만히 쳐다보다가 사진 한 장만 찍고 돌아갔다. 구조를 해서 치료를 해줘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나는 오늘도 중요한 촬영을 해야 하고 그렇다고 지역의 캣맘들에게 연락할 여력도 안 되고 등등... 결국 서울로 돌아가는 고속버스에서 울었다. 촬영도 잘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갑자기 그 고양이의 모습이 떠오르는 순간 가여워서 눈물이 쏟아졌다. 그날 이후로 아픈 고양이들을 더 지나치지 못하게 된 것 같다.

자루에 담겨 뒤엉켜 있던 돼지들은 작은 포크레인에 실려 육가공 공장으로 실려가고 있었다. 집에 가려다 못 가고 또 다시 들렀을 때 그걸 보았다. 돼지들이 실린 포크레인 버킷 위로 팔락거리는 귀가 보였다. 슬프게도, 바람에 흔들리듯 살랑거리는 그 귀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짧은 삶 사는 동안에도 좁은 시설에서 온갖 소음 스트레스에 시달렸을 귀.

깨끗하게 포장된 고기로만 인간에게 소비되는 돼지의 몸이 한때 분명 살아있었고 살고 싶어했던 존재라는 것을 더 많은 이들이 알아주길 바란다. 살아있는 축산(피해)동물의 몸, 인간의 이익을 위해 무수히 죽임 당하는 그들의 몸이 더 드러날 수 있기를 바란다.

https://youtu.be/o83NLKNCI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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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일상 2021. 2. 9. 20:47


1-23. 새벽에 잠깐 깼다 다시 잠들자 나는 고래의 배 아래에 있었다. 아주 느릿하고 꼼꼼하게 그의 배를 살피며 꼬리를 향해 미끄러져 내려갔고 더는 숨을 참을 수 없어 꿈에서 깨고 말았다. 아직 완전히 스치지도 못했는데. 고래를 가까이서 바라보면 숨 막힐 듯 벅차고 황홀하다. 이것도 경험이라고 할 수 있을까?  

1-24. 소변이 마려워서 공중화장실로 들어갔는데 문을 여는 칸마다 변기에 똥이 차 있었고, 마지막 칸의 문까지 닫아야 했을 때 느낀 희미한 절망감. 왜 그냥 문을 닫아버리고 말았을까 싶은 현실에서의 의아함. 꿈에서는 왜 우회하거나 다른 선택을 하지 못할까. 변기 뚜껑을 닫고 물을 내리고 다시 뚜껑을 들어 올려 맑아진 물을 확인하는 방법 같은 것.

1-25. 잠에 들기 전 그날 저녁에 보았던 최시형 감독의 영화 <영시young poem>의 장면들이 떠올랐다. 장면들이 떠오르자마자 반쯤 희미한 정신으로 '아 나 이 영화 옛날에 봤던 거네' 하고 생각했다. 아닌데. 오늘 처음 본 영화였는데. 보자마자 멀어지는 영화, 벌써 추억이 되어버린 이미지들, 마치 내 것처럼, 아련하게. 멋지다고 생각하며 잠들었다.

1-26. 숱한 꿈을 꾸었지만 복기하고 간직하는 데 실패한 아침. 방 밖에서 고양이 소리가 틈입하는 순간 스산히 날아갔다, 라고 쓰는 순간 고양이 꿈을 꿨다는 게 떠올랐다. 우리 집에 지하실이 있다는 걸 알고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아주 커다란 상자가 보였고 안에 있는 건 누군가 갖다 버린 개들이었다. 상자를 완전히 열기도 전에 그 개들이 나에게 안길까 두려우면서도 어떻게든 내가 책임져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며, 내가 개들을 버린 자를 잡겠다고 처벌하겠다고 생각하며 눈 쌓인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등 뒤에서 '아니 그보다는 일단 이 아이들을 보살피는 데 더 에너지를 쓰자'는 말소리가 들렸고 나는 계속해서 발이 푹푹 빠지는 길을 걸어 경찰을 만나러 갔지만 당신은 자격이 없다는 답변, 아니 용기가 없다고 했던가? 다시 돌아온 지하실에는 모든 개들이 사라졌고 난 안아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마음이 아픈데 빈 상자에 난 계단을 따라 내려갔을 때 소복하게 모여 나를 올려다보는 고양이들. 바깥으로 뛰쳐나간 개들이 남겨두고 갔다고 했다.

1-27. 목욕탕에 여자들이 모여 앉아 있고 그 위로 세찬 물이 쏟아진다. 그들 중 한 여자가 힘겹게 일어서더니 다른 이들의 어깨를 주물러주기 시작한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시간을 들여 천천히. 잘 보이지는 않지만 섬세한 손길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모두에게 안마를 끝낸 여자가 이제 내 쪽으로 걸어온다. 걸어나온다. 젖은 얼굴로, 자신은 연극하는 사람이라며 방금 전까지 내가 보았던 한 컷의 긴 장면을 상세히 설명하기 시작한다. “내가 한 사람 한 사람을...” 집중해서 듣느라 온 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다. 꿈속에서의 보기. 꿈속에서의 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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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일상 2020. 12. 6. 23:42

문득 떠오른 15년 전의 기억. 런던의 밤, 빠르게 지나가는 차들, 횡단보도 앞에서 서성이던 우리들. 나는 차도와 인도의 경계에서 방향 잃은 사람처럼 자꾸 두리번거리며 일행들과 외따로 서있다. 그저 도로 건너편의 화려한 풍경을 더 잘 보고 싶었던 걸까. 그 순간을 떠올리면 속눈썹이 시원해지는 것 같다. 커다란 2층 버스는 내 머리가 뒤로 빠지자마자 지나갔다. 아무것도 모른 채 바로 들었던 생각, 살았구나. 죽음의 기운을 전혀 감지하지 못한 채 죽을 수도 있던 그때, 내 몸을 인도 쪽으로 당긴 선배가 있다. 그 선배가 이제는 이 세상에 없네. 같이 걷다 넘어지길래 내가 웃으며 왜 자꾸 넘어져요 하니까 내 다리가 길어서 그래 하며 웃던 사람. 죽고 나면 모든 게 괜찮아지나요, 선배? 땅보다 낮은 곳으로 끌어내리는 어떤 중력으로부터도 가벼워지나요, 영혼도? 

 

 

내가 잊지 못하는 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도 내가 놀라지 않게 잡아끌던 그 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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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일상 2020. 10. 12. 00:42

덕분에 마음 밑바닥에 늘 사랑이 찰박인다. 가끔은 내가 가진지도 몰랐던 사랑의 에너지가 폭포수처럼 몸 안에 쏟아진다. 손끝 발끝에 불빛이 반짝이고, 덕분에 마음껏 사랑을 쓰며 살아야지. 사랑의 힘으로 싸워야지. 사랑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버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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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복합물류 B동 3F

일상 2020. 6. 27. 01:50

서울복합물류 B3F

 

컨베이어 벨트를 지나가는 박스가 찢길 때마다

손목 약한 사람들은 먼지를 먹었다

 

먼지가 먼지를 먹을 때마다

사람들은 매번 이발하는 걸 잊었다

 

그들은 산발한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고

컨베이어 벨트 아래로 뛰어 든다

 

그래도 꿈에서 깨지 못하고

여전히 박스의 무게는 가늠할 수 없다

 

손목이 꺾일 때마다 손 안에 새소리가 고였다

바코드가 찍히자 먼지를 털며 달아나는 송장번호 10183478832800번 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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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미미

일상 2020. 5. 31. 22:36

장난감 낚싯대를 눈 앞에서 흔들면 미미는 그걸 따라 이리 펄쩍 저리 펄쩍 뛰며 쫓아다닌다. 반면 시시는 동요하지 않는 편이다. 일단 거리를 두고 물러서서는 목표물이 움직이는 걸 오래 지켜본 뒤 사냥 자세를 제대로 취해 달려든다. 실패하면? 시도한 적 없다는 듯 모른 척하며 돌아선다. 밥도 미미는 한 자리에 앉아 묵직하게 끝까지 먹는다면 시시는 꼭 두 번, 세 번에 걸쳐 나눠 먹는다. 먹으면서도 시시는 미미가 먹는 걸 계속 곁눈질한다. 용변을 볼 때 실수로라도 눈이 마주치면 시시는 바로 불평을 터뜨리며 화장실 밖으로 나오는 편이고, 미미는 쳐다보거나 말거나다. 자신의 일에 있어서만큼은 깐깐해 보이지만 한 번씩 똥꼬에 똥을 달고 나오는 건 시시다. 미미가 예민하게 구는 건 양치할 때, 발톱 깎을 때이고 시시는 그런 일들엔 요란하게 굴지 않는다. 미미는 가끔 사람처럼 몸을 한껏 늘여자는데 시시는 어릴 때 이후로 배를 드러내놓고 잔 적은 없다. 참 다른 둘. 엄마를 닮았을까 아빠를 닮았을까. 길에 살면서 영향을 받기도 했겠지. 점점 서로를 닮아가기도 하겠지. 나를 닮은 것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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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민 고양이

일상 2020. 1. 19. 19:58

"어떤 대상을 불쌍한 존재로 보면 여러분들은 뭘 하겠어요? 길고양이가 불쌍하니 어떻게든 구조하고, 입양 보내고, 집고양이처럼 다들 편하게 사는 쪽에 에너지를 쏟고 몰두하게 되실 거예요. 또는 길고양이를 아주 천덕꾸러기, 민원만 일으키는 그런 존재로만 본다면 어떤 접근을 하겠어요? 민원 해결하기에 급급한 대상으로 보고, 그 이상의 해결책을 찾는 방향으로는 발전이 안 된다는 거죠. 그런 부분에 있어서 오랜 기간 저희 관악길고양이보호협회와 관악구에서는 많은 고민을 해왔어요. 이 길고양이를 어떤 존재로 볼 것이고 길고양이 문제를 어떤 관점에서 접근해야 되는지. 가장 핵심적인 건 이거였던 것 같아요. 길고양이는 영역 동물이에요. 영역 동물이라는 건 무슨 얘기냐면요, 고양이들이 살고 있는 그 땅에 주민들이 다 이사를 가도, 캣맘이 한 명도 없어도, 공무원이 구의원이 다 바뀌고 모든 게 다 사라져도 거기서 살아간다는 뜻이에요. 우리보다 더 원주민이에요. 없어지지 않아요. 주민은 이사 갈 수 있고 환경을 바꿀 수도 있어요. 하지만 길고양이들은 그곳을 영역으로 삼고 원주민처럼 사는 아이들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적어도 고양이는 민원유발자도 아니고 천덕꾸러기도 아닌, 살아 있는 생명으로서 그냥 우리보다 더 앞서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원주민으로서의 대우를 받아야 하는 거죠. 뒤늦게 들어와서 인간 위주와 편의대로 환경을 만들어놓고 고양이들이 살지 못하게 한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뭐겠어요. 우리가 흔히 하는 얘기 있잖아요, 공존. 또 요즘 우리가 많이 듣는 말 있잖아요. 길고양이는 길에 사는 우리의 작은 이웃이라고. 작은 이웃으로 보고 길고양이와 함께 살고자 모색하는 길은 주민이 다 떠나고 캣맘이 하나도 없어도 이 아이들이 살 수 있는 삶의 환경과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는 거죠." (관악길보협 서유진 대표의 발언 중, 2020년 1월 8일 서대문구 동물정책 토론회에서)

+관악길고양이보호협회(관악길보협) https://cafe.naver.com/gwanakanifri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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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고양이를 보면 반갑다. 매일 채워두는 사료를 한그릇 싹싹 비운 걸 확인할 때마다 보람되고 안심된다. 그럼에도 여전히 내 마음을 가장 많이 지배하는 건 가엾고 불쌍하다는 마음이다. 아픈 고양이를, 죽은 고양이를 볼까봐 두렵다. 이미 겪은 슬픈 일들을 잊지 않는 걸로도 마음이 버거울 때가 있다. 하지만 이제는 다친 고양이를 구조하는 일로는, 나 혼자 전전긍긍하며 동네에서 몰래 밥주는 걸로는, 이 상황이 별로 나아지지 않는다는 걸 안다. 사실 이건 인간사도 마찬가지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건의하고 요구할 수 있는 것들을 해나갈 것이다. 그러다 보면 비슷한 뜻을 가진 사람들도 많이 만나게 될 테고. 이 과정을 관악길보협이 앞서 해나가고 있다. 많은 도움을 받는다.    
고양이 덕분에 나는 주위를, 동네를 돌아보게 되었다. 무엇보다 좋은 시민이 되고자 노력하게 되었다. 고마운 고양이들. 그런데 나는 어쩌다 이렇게 고양이를 사랑하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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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단보도에서

일상 2019. 11. 3. 17:51

초록불로 바뀌자마자 한 아이가 달려간다. 통통한 여자 아이. 구르는 발소리가 묵직하다. 휠체어를 미는 노인이 뒤따른다. 서두르지만 좀처럼 빨리 나아가진 못한다. 횡단보도의 끝에 다다르자 아이는 좌측으로 계속 내달리고 노인은 오른쪽 길로 꺾는다. 내가 가는 길은 노인 쪽이다. 휠체어에는 다른 노인이 있다. 그의 머리칼은 정수리부터 둥그렇게 세고 있다. 이마에만 챙이 있는 모자를 썼다. 기운이 없는지 어깨는 약간 앞으로 기울어졌고, 양손으로 휠체어 손잡이를 쥐고 있다. 힘주어 잡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때 "할아버지!" 하고 부르는 소리. 다시 반대로 달려온 여자 아이가 휠체어를 미는 노인의 등을 딱 때린다. 질책하는 목소리였지만 돌아보지도 않고 계속 걸어가는 남자 노인. 휠체어 뒤에는 노란 유치원 가방이 걸려 있다. 아이는 걸음 속도를 조절하며 휠체어 옆에서 나란히 걷고, 이내 여자 노인의 손을 잡는다. 걸어가는 셋의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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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에서

일상 2019. 1. 13. 13:16


<노동여지도>를 읽다가 발견한 구절이다. 송민영이라는 이름이 있어서 책을 더 읽는 건 그만두었다. 생각이 나 그의 추모게시판에 들어갔다. 오랜만이었다. 나는 그와 인연이 없다. 어떤 사람인지도 모른다. 사회진보연대의 활동가였다는 것밖에. 그것도 그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야 알게 된 사실이다. 왜인지 모르겠는데 그의 죽음에 대해, 아니 그의 존재에 대해, 그러니까 그 사람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에 대해 오래 생각했고 한동안 그의 흔적을 찾았다. 아마 또래라서, 여성이라서, 또 사회운동을 하던 사람이라서 유독 끌렸을까. 그 사람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었고, 또 친해지고 싶었다. 부질 없는 생각이었고, 그냥 마음 놓고 했다. 추모와 애도 사이에 있는 기분이었다. 모르는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는 정도는 넘었는데 그렇다고 지인은 아니라서 끝내 더 나아가지는 못하는 상태. 그에 대한 기억을 내 안에서 퍼올릴 수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몇 달은 잠에 들기 전마다 추모게시판을 들여다봤다. 2016년이었고 여름이 시작되면 나는 긴 배낭여행을 떠날 예정이었다. 출국하고 낯선 땅에서 거의 한 달은 완전한 고독 속에서 지냈다. 홀로 움직였던 그 시간 동안 이 세상에 없는 자들과 함께 하는 기분이었다. 그들은 모두 나와 인연은 없는 사람들이었고, 그 중 한 사람이 송민영 님이었다. 살고 있다는 감각을 느끼고 싶어서 그렇게 여행을 갈구했는데 다만 삶이 얼마나 죽음과 가까운지 알겠는 기분으로 지냈다. 그런 기분은 다시, 정말 존재했음 그리고 어떤 삶이 있었다는 깨달음으로 이어기도 했다. 아주 잠시였지만, 그 깨달음은 사라지지는 않고 마음 어딘가에 쌓이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몇 년 전부터 저런 생각에 휩싸여 지낸다. 그것도 모르는 사람들의 죽음, 알고 싶어도 더 알 수 없는 사람들로 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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