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해당되는 글 393건

  1. 2014.05.26 우리 누나 줄라고 (2)
  2. 2014.03.17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2)
  3. 2014.03.10 아무도 없기를,
  4. 2014.02.24 타닥, 타닥,
  5. 2014.02.16 불안의 꿈
  6. 2014.01.22 책임감을 느낀다는 것.
  7. 2013.11.19 절빛
  8. 2013.10.12 떠돌고 싶다
  9. 2013.09.15 외투
  10. 2013.08.18 불투명하지 않은 세계였던 것이다.

우리 누나 줄라고

일상 2014. 5. 26.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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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 속에서 너는 정대의 얼굴을 떠올렸다 .연한 하늘색 체육복 바지가 꿈틀거리던 모습을 기억한 순간, 불덩어리가 명치를 박은 것같이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숨을 쉬려고 너는 평소의 정대를 생각했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대문을 열고 들어올 것 같은 정대를 생각했다. 여태 초등학생같이 키가 안 자란 정대. 그래서 정미 누나가 빠듯한 형편에도 우유를 배달시켜 먹이는 정대. 정미 누나와 친남매가 맞나 싶게 못생긴 정대. 단춧구멍 같은 눈에 콧잔등이 번번한 정대. 그런데도 귀염성이 있어서, 그 코를 찡그리며 웃는 모습만으로 누구든 웃겨버리는 정대. 소풍날 장기자랑에선 복어같이 뺨을 부풀리며 디스코를 춰서, 무서운 담임까지 폭소를 터뜨리게 한 정대. 공부보다 돈을 벌고 싶어하는 정대. 누나 때문에 할 수 없이 인문계고 입시 준비를 하는 정대. 누나 몰래 신문 수금 일을 하는 정대. 초겨울부터 볼이 빨갛게 트고 손등에 흉한 사마귀가 돋는 정대. 너와 마당에서 배드민턴을 칠 때, 제가 무슨 국가 대표라고 스매싱만 하는 정대.

천연스럽게 칠판지우개를 책가방에 담던 정대. 이건 뭣하러 가져가? 우리 누나 줄라고. 너희 누난 이걸 뭐에다 쓰게? 글쎄, 이게 자꾸 생각난대. 중학교 다닐 때 공부보다 주번이 더 재미있었다지 뭐냐? 한번은 만우절이라고 애들이 칠판 가득 글자를 써놨더래. 총각 선생이 지우느라 고생할 줄 알았더니, 주번 누구냐고 호통을 쳐서 누나가 나가서 열심히 지웠대. 다들 수업하는데 혼자 복도에서 창문 열어놓고 이걸 막대기로 탁탁 털었대. 중학교 이년 다닌 것 중에, 희한하게 그때가 제일 생각난다지 뭐냐.

 

_

성희 언니는 자주 그렇게 말했다. 쉬는 일요일마다 청계피복노조 사무실에서 노동법 강의를 듣던 그녀는, 자신이 배운 것을 빼곡히 노트에 정리해와 소모임에서 강의했다. 한자 공부를 할 거란 성희 언니의 말에 당신은 별다른 두려움 없이 그 모임에 들어갔었다. 실제로 언니들은 모이자마자 한자부터 공부했다. 1800자는 알아야 해, 신문은 읽을 수 있어야지. 각자 펜글씨 공책에 서른자씩 쓰고 암기하는 일이 끝나면 성희 언니의 어색한 노동법 강의가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 우리는 고귀해. 말문이 막히거나 기억이 얼른 안 날 때마다 성희 언니는 추임새처럼 그 말을 넣었다. 헌법에 따르면, 우리는 모든 사람들과 똑같이 고귀해. 그리고 노동법에 따르면 우리에겐 정당한 권리가 있어. 그녀의 목소리는 초등학교 여선생님처럼 상냥하고 낭랑했다. 이 법을 위해 죽은 사람이 있어.

 

_

선생은 압니까, 자신이 완전하게 깨끗하고 선한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양심이라는 눈부시게 깨끗한 보석이 내 이마에 들어와 박힌 것 같은 순간의 광휘를.

 

한강, 『소년이 온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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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5.27 23:5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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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떤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떄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차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 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ㅡ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ㅡ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알람 없이 새벽의 희미한 햇살로 잠을 깨는데 익숙해질 즈음, 그렇게 깨고도 한참이나 가만히 누워 있는 걸 즐기게 된 여행의 날들하고도 어느 아침, 이 시를 아주 오랜만에 다시 읽었었다. 중얼중얼 조그맣게 소리내어 읽는데 갑자기 눈물이 줄줄 흘렀고 겨우 마저 읽었을 즈음엔 이미 코가 꽉 막혀있었다. 침낭으로 다시 깊숙이 들어가 얼굴을 파묻고 마저 펑펑 울었다. 여행의 허세였을 법도 한데, 아마 그때부터인가, 이 시를 읽으면, 들으면, 눈물이 날 것 같다. 특히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에 오면 앞서 얼굴을 뱅글뱅글 돌던 눈물이 코끝으로 우르르 몰려든다. 나를 나이게 하는 무수한 것들이 이 말에 매달려 있는 것만 같다. 아무리 내가 그러하지 않으려 해도. 그리고 숱한 사람들에 대한 믿음까지. 비슷하게 그러할 거라는, 꿈꾸어도 좋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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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3.20 10:2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를 나이게 하는 무수한 것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해도,
    그것들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지만은 말아요.
    그러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거,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속에 사는거,
    그치만 역시 그러하지 않으려 해도...

아무도 없기를,

일상 2014. 3. 10. 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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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에 사는 동물들을 돌보는 교육을 받았고, 난 이제 많은 사람들과 함께 그 일을 책임지고 하게 될 참이었다. 관리자가 짐을 넣을 가방을 사람들에게 하나씩 나누어주었는데 그 가방을 손에 받아들자 난 문득 지금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그만 나가자고 마음 먹었다. 꿈이었다. 함께 있던 무리엔 낯선 이도 있었고, 동창도 있었고, 내 동생도 있었고, 동물들도 있었다. 상기할수록 난 아름다운 풍경 속에 있었고 꿈 속 이야기는 신비로웠다, 물론 이런 생각을 꿈 속에서도 했더라면 나는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을까, 어쨌거나 나는 어렵지않게 돌아서 나갔다. 등을 보이고, 웅성거리는 소리에 고개만 돌리곤 그만하겠다고 말하고, 다시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계속해서 걸었다. 그렇게 꿈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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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닥, 타닥,

일상 2014. 2. 24. 02:58

저녁밥을 먹고 볼만한 티비 프로그램도 다 보고 나면 엄마와 나는 이부자리에 누워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이야기하길 좋아하는 엄마는 옛날 살던 얘기도 해주고 누구 욕도 하고 대개는 사람들 걱정을 하였다. 한동안의 수다가 끝나고 나면 어느새 긴 침묵, 고요해진 방 안, 그리고 소리 하나가 들린다. 벽을 보고 누운 엄마는 꼭 손가락으로 벽을 퉁겼다. 손등을 벽 쪽으로 향한 상태에서 약지 그리고 중지 순으로 반복해서 두들기는 소리. 타닥, 타닥, 타닥. 등을 보이고 누운 엄마 뒤에 나도 같은 모양으로 누워선 간헐적인 그 소리를 듣다 잠들기도 하고 엄마 등을 긁어주기도 했다. 멍하니 옆으로 누워 있다 보면 그 모습이 보이고 소리가 들린다. 엄만 무슨 생각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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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꿈

일상 2014. 2. 16. 22:06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진행하는 팟캐스트를 조금 듣다가 바닥에 누웠다. 게스트인 소설가 김연수의 목소리가 막 흘러나왔다. 처음 듣는 그의 목소리인데 왠지 익숙했다. 바닥이 점점 따뜻해지고 있었다. 아직은 책상에만 앉아 있으면 손가락이 시린 계절이다. 자고 일어나면 손끝 발끝까지 데워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잠에 들었다. 숲속이었다. 거기에 야외 스튜디오가 있었고 그 자리에 신형철과 김연수가 녹음을 하고 있었다. 그 옆에서 나는 기계를 만지작거리며 음량을 조절해주었다. 작지만 복잡한 기계에 열중하는 사이, 두 사람이 사라지고 목소리만 남았다. 이제 목소리들의 음량은 일정했고 나는 둘이 있던 자리에 남은 소형 녹음기를 보았다. 예뻐보여 그걸 챙겼다. 숲에서 조금만 걸어나가니 숲과는 완전히 분리된 듯한 공간이 펼쳐졌고 그곳은 운동장이었다. 사람들이 열을 지어 앉아 방송을 듣고 있었다. 나는 그 어디쯤에 앉아 방송에 필요할 만한 장비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나무판자로 지붕 같은 걸 만들었다. 숲속 나무들만으로는 비를 완전히 피할 수 없을 것이었다. 아마 그런 걱정에 나무판자들을 잇고 못질을 했다. 김연수가 불안하다고 말했다. 주위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하던 걸 그만두고 다시 숲으로 걸어갔다. 스튜디오에는 피디와 작가들이 있었다. 녹음기가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피디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녹음기를 어쨌냐고 물었다. 나는 그녀의 턱만 보였고 그 턱에 눌릴 것만 같아서 사태를 잘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불현듯 알게된 건 나에게 목소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꿈에서 나는 벙어리였다. 찌를 것 같은 턱을 밀어내면 낼수록 오히려 내가 점점 작아졌다. 점점 눈앞의 화면이 닫히고, 아주 천천히 의식이 열렸다. 김연수가 낭독을 하고 있었다. 뭉개진 목소리가 점점 선명하게 들렸다. “우리도 손을 흔들며 웃었다. 손을 흔들고 웃는 그 단순한 동작들이 우리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손을 흔들고 웃는다는 그 느낌이 좋아 몇 번 되뇌어 생각하는데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웅얼거렸다. 온기가 돌아 말랑해진 몸을 움직여 옆으로 누우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고 마저 조금 더 잤다. 후에 찾아보니 김연수가 낭독했던 책의 이름은 <불안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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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밝히려는 노력조차 부담스러워서 제껴두기만 하던 내 죄책감은, 그 본질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어차피 알 수도 없거니와, 그러니까 죄책감이라는 망령때문에 괴로웠던 건, 내가 받은 만큼 베풀지 않고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평가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한 시절에 그리고 여전히, 어떤 공간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에게서, 받은 게 많다. 그리고 그 받은 것들이 정말 소중하다.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고 믿는 당위들에 부응하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에 괴로웠던 것 같다. 이런 마음의 상태는 내가 느끼는 연민이나 동정심을 처리해야만 하는 것으로 치부한다. 피하게 만든다. 해야만 한다고 믿는 걸 하지 않아서 느끼는 죄책감과, 내가 받은 만큼 베풀지 못해서 느끼는 죄책감은 다르다. 고통을 고충으로 바꾸어 생각하면서 마음이 좀 밝아졌던 것만큼이나 괜찮은 깨달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저 마음이 편해지기 위함이 아니다. 어쨌거나 내가 나에게 늘 바라는 것은, 할 수 있는 만큼은 행동하는 것이다.

2.

 

불편한 신발을 바꾸는 것만으로 삶이 훨씬 나아진다는 어느 영화의 대사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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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빛

일상 2013. 11. 19.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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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돌고 싶다

일상 2013. 10. 12. 19:23

In Morocco - 2013 from Vincent Urban on Vimeo.

 

쏟아지는 별 아래 눕고 싶다

몰아치는 파도 앞에 서고 싶다

 

다시, 낯선 곳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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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투

일상 2013. 9. 15. 04:19


카키색에다가 검은색을 많이 섞어 색이 좀 점잖았고 표면은 벨벳 같은 것이어서 문지르는 대로 결이 쓸렸다. 안감은 두툼한 흰 털인데 그게 무슨 털인지는 한 번도 알 생각을 못 하였다. 그 흰 털이 목 위까지 올라와 있어서 자크를 끼워 목 끝까지 올리면 목도리를 한 것처럼 따뜻했다. 내가 입으면 기장이 엉덩이를 조금 못 덮을 정도까지 내려와서 아무데서나 엎드려 자도 맨 살 보일 염려는 없는 옷이었다. 가장 좋은 건 주머니가 아주 깊다는 것인데 작정하고 주머니를 뒤지면 잊고 있던 물건도 나오고 그랬다. 휴대폰을 넣고 카드 지갑에 또 그 위에다 손을 얹어도 넉넉한데 그 깊숙한 아래에 집 열쇠가 이미 들어 가 있고 심지어 받고 잊은 명함도 주머니 벽에 오래 붙어 있기도 하는 식이었다. 한겨울에 입고 다니면 바람도 못 뚫고 둘어와서 오래 걷다 실내로 들어가 자크를 내리면 옷 안에서 시큼한 냄새와 함께 따뜻한 공기와 훅 올라왔다. 옆으로 기다란 흰 종이백 안에 들려 내 손에 쥐어진 옷. 다음 날 풋내 나는 새 옷을 목 끝까지 올려 입고 호수에서 돌도 던지고 난로가 있는 식당 안에서 전도 먹었다. 겨울엔 줄곧 이 옷만 입었다. 창문으로 찬바람이 들어오는 겨울 책상에 앉아 무얼 해야 할 때, 내복 위에다 그 외투를 입고 있으면 참말로 따뜻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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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진전없이 항상 달고 다니는 물음. 세상 돌아가는 게 너무 신기하다.

이 구절을 읽으며 물음의 한귀퉁이는 조금 허물어졌다.

 

*

 

무도(舞蹈)병에 걸린 듯 발작적으로 움직이던 그 승강기 안의 아녜스를 상기해 보자. 사이버네틱스 분야 전문가면서도, 그녀는 그 기계의 머릿속에서 일어난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전화기 옆에 놓인 소형 컴퓨터에서 세탁기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매일 마주치는 그 모든 물건들의 작동 원리와 마찬가지로 언제나 괴상하고 불투명하기만 했다.

 

그런 반면 괴테는, 기술 수준이 어느 정도 일상의 안락을 허용해 주기는 하되 교양인이라면 주변 집기들의 작동 원리를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짧고 독특한 역사의 한 순간을 살았다. 괴테는 자신의 저택이 무엇으로 어떻게 건축되었으며 어째서 석유 등이 빛을 내는지 알았고, 자기가 사용하는 망원경의 원리를 알았다. 물론 감히 직접 외과수술을 해 보지는 않았을테지만, 몇 차례 시술 과정에도 참관해 본 만큼 의술을 아는 사람으로서, 자신을 보살핀 의사와 견해를 주고받을 수 있는 정도도 되었다. 불투명하지 않은 세계였던 것이다. 유럽사에서 위대한 괴테기(期)는 바로 그랬다. 이 시기는 요동하고 춤추는 승강기 안에 갇힌 인간의 가슴에 향수의 상처를 남길 것이다.

 

베토벤의 작품은 위대한 괴테기가 종결되는 바로 그 시점에서 시작된다. 세계는 점차 자신의 투명성을 상실하고 불투명해지며 이해할 수 없게 되어, 불가사의 속으로 걸음을 재촉하고, 그런 세계에게 배반당한 인간은 자기 내면 깊은 곳으로, 자신의 향수, 꿈들, 반항 속으로 도피한다. 내면에서 들려오는 고통스러운 목소리에 정신이 팔려, 이제 더는 바깥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들을 듣지 못한다.

 

『불멸』, 밀란 쿤데라, p119-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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