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해당되는 글 392건

  1. 2015.03.09 죽음
  2. 2015.01.26 물뿌리
  3. 2015.01.25 진심, 합의, 질문
  4. 2014.12.13 병원
  5. 2014.11.09 살핀다. (3)
  6. 2014.06.10 제철 과일만 잘 챙겨 먹어도,
  7. 2014.06.07 세월
  8. 2014.06.07 다나하시
  9. 2014.06.07 이젠 거기에 없다
  10. 2014.05.26 우리 누나 줄라고 (2)

죽음

일상 2015.03.09 02:38


꽤 넓은 공터였다. 그곳에 한복을 입은 이모들이 소리내어 울고 있었다. 사람이 서럽게 운다는 것의 느낌은 그때 형성된 것 같다. 공터의 끝엔 초가집이 있었고 그 주위로 꽤 많은 사람들이 북적였다. 집안의 아이들은 멀찍이 떨어져 놀고 있었다. 난 모래바닥에 이것저것 낙서를 하며 우는 소리를 들었다. 사촌동생이 저기 무얼한다고 해서 고개를 들었을 때, 형형색색의 화려하고 큰 무엇을 사람들이 하늘로 띄우고 있었다. 올라가는 그걸 보고 엄마와 이모들은 다시 크게 울었다. 엄마는 손으로 허벅지를 치면서 울었다. 사람이 죽어서 하늘로 간다는 말은 저걸 말하는 거구나 하고 생각했다. 내가 기억하는 작은 외삼촌의 장례식은 그랬다.

어쩌다 작은 외삼촌 이야기가 나오면 외할머니는 아직도 우신단다.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다 돼간다. 작은 외삼촌이 죽고 나서 외할머니 머리가 하얗게 세었다는 말은 어린 마음에 큰 충격으로 남았다. 외할아버지는 귀가 어두운 외할머니가 주방으로 가 있을 때만 작은 외삼촌 얘길 하신다. 니들 애미 죽으면 기원이 묘를 둘이 같이 있게 옮겨주고 싶다. 이번 설에는 그런 얘길 처음 하셨다. 외할아버지는 내가 상경하는 걸 반대하셨고, 막지 못한 걸 두고두고 후회하셨다. 그러지 않으신지는 몇 년 되지 않았다. 서울에 자취하는 니 외삼촌들을 보러 갔는데 기원이가 맨밥에 계란후라이 하나만 얹어 먹고 있더라. 그렇게 먹고 지낸 게 병이 된 것 같다고, 명절에 찾을 때마다 그 얘길 꺼내셨다. 그 얘길 꺼내지 않으신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귀여운 얼굴의 외할머니가 약간 굽은 허리로 종종 걸어와 앉는다. 그러면 외할아버지는 외할머니 손재주 좋다는 칭찬을 시작한다. 어디서 배우지도 않았는데 옷 한 벌을 뚝딱 만들었다고. 흰 비단 한복보다 하얀 외할머니의 머리칼. 그래서 난 온통 새하얀 머리칼만 보면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부모를 떠올리게 된다. 혼자 밥에 계란후라이를 얹어 먹고 있으면 괜히 죽은 외삼촌을 생각하게 된다. 그후로는 본 적 없는, 그때 서럽게 울던 엄마의 얼굴이 겹쳐진다. 가끔 내가 일찍 죽는 상상을 하는데, 엄마가 얼마나 슬플까를 생각하면 내 마음이 너무 아프다. 상상만으로도 그렇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산 자가 죽은 자 때문에 슬픈 것보다 산 자를 향한 죽은 자의 슬픔이 더 크지 않을까, 그런 짐작도 해보게 된다. 어쨌거나 작은 외삼촌이 외할머니의 곁에 있게 된다면 좋아하지 않을까, 괜히 그런 확신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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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뿌리

일상 2015.01.26 00:30


꿈에

푸르고 맑은 파도들을 보았다.

느리게 솟아 올랐다 보다 느리게 가라앉는 파도들의 행렬을.
그 푸르고 맑은 파도 하나에 내 친구가 묻혀 있었다.
눈을 감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아주 먼 곳에서부터 오랜 시간 그러고 온 것처럼.
높이 솟아 올랐다 천천히 내려오는 친구를 바라보는 사이

귀가 열리고 파도 소리가 들리고 바람이 불고 발가락들이 젖었다.  
나는 천천히 다가가 친구를 건져 바다 위로 날아 올랐다. 

손가락들이 젖었다.
발밑에서 물과 나비가 반짝거렸다.

울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장면을 보았다.

친구는 우리가 물뿌리라는 일본의 한 해변에서부터 날기 시작한 거라고 알려줬다. 
조금 더 바다의 중심으로, 계속해서 날 수 있을 것 같았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진심, 합의, 질문

일상 2015.01.25 12:40


엄마가 내 삶을 존중해 준다면 난 훨씬 기쁘게 살아갈 텐데, 그렇다는 내 말을 엄마가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좋겠다. 전화를 건 엄마는 꽤 오랜만에 딸에 대한 푸념, 걱정, 비난을 섞어 풀어 놓았고(당신이 던지는 화살이 온전히 나를 향해 있지 않다는 걸 이젠 안다), 난 진지함 반 건성 반으로 반응하는데 갑자기 엄마가 벼락같이 따져 물었다.
“그래 너는 사는 게 재밌나.”

본능적으로 이건 고민할 문제가 아니란 걸 알았기에 바로 “응. 재밌다.”고 답했고,  

“그래 그러면 됐다. 재밌으면 됐다.”며 내 성의 없는 대답에, 엄마는 진심으로 답했다. 진심을 느꼈다.
엄마의 체념과 안심이 뒤섞인 그 말에 조금 미안했고, 조금 더 고마웠다. 합의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는 것에 나 역시 안심했다. 그래도 아직은 엄마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하고 싶지는 않다. 여전히 노력해보고 싶은 거다 어쨌든 내 방식으로. 
그리고 사는 게 재밌느냐는 질문이 꽤 많이 다른 당신과 나의 합의점일 수 있다는 것에 나는 평소보다 더 많이 생각해보게 될 것이다. 아무래도 이제는 사는 게 재밌다고 쉽게 답할 수 없고, 어떻게 고민해도 답을 내릴 수 없는 세상이라서.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병원

일상 2014.12.13 01:32

병원의 외래실. 비어 있는 두 진료실의 문이 활짝 열려 있다. 대기좌석엔 남녀가 붙어 앉아 휴대폰을 함께 보고 있다. 그 앞엔 데스크 주위를 반복해서 왔다갔다 하는 한 남자가 있다. 그는 남녀에게 말을 걸더니 답을 들은 건지 외면당한 건지 다시 데스크 앞을 계속해서 걸어 다닌다. 데스크에 여간호사가 들어오자마자 남자는 다가가 접수증을 내민다. 오후 한 시 이십 분 예약을 확인해 달라는 말에 그녀는 주치의가 누군지를 묻는다. 톤이 좀 올라간 목소리로 남자는, 그러니까 주치의를 확인해달라, 고 한다. 등록번호를 컴퓨터에 두드려넣은 간호사가 이름 하나를 일러 준다. 남자는 뭐라고? 라고 되묻고 간호사는 또박또박 다시 이름을 불러 준다. 남자는 갑자기 한 손을 오른쪽 머리 위에 갖다 대더니 잠시 얼굴을 찡그린 채로 있다. 남자는 털모자를 쓰고 있고 그 털모자에 반쯤 가려진 반창고가 보인다. 남자는 소리를 지른다. 왜 데스크에 간호사가 아무도 없었느냐고. 눈이 커진 간호사는 지금 오지 않았느냐고 답하고는, 억울한지 약간 메인 목소리로 지금은 점심시간이라 자리를 비워도 되는 거라고 말한다. 간호사에게 더 바짝 다가선 남자는 병원이라는 곳에서 환자가 기다리는데 이런 식으로 자리를 비워도 되는 거냐고 아까보다 더 크게 소리를 지르고 그런 그를 잠시 빤히 쳐다본 간호사는 한숨을 푹 쉰다. 저희도 밥을 먹어야 할 것 아니에요, 라고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말하고, 뭐 이딴 곳이 다 있어! 라고 소리친 남자는 여전히 그의 머리에서 손을 계속 떼지 못하고 있다. 다시 접수증을 뺏어 든 남자가 털모자를 반쯤 벗었다가 다시 눌러 쓰며 좌석으로 가 털썩 앉는다. (2011. 12. 26)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살핀다.

일상 2014.11.09 02:41

 

꿈을 꾸었는데, 옛날 사람들이 보였다. 내가 옛날에 가까이 했던 사람들, 그때 그 시절 소중했던 사람들. 막 눈을 떴을 땐 내가 어떤 꿈을 꾸었는지조차 몰랐고, 그저 꿈에 눌려 배어나온 어떤 기운에 압도당한 채 부신 창문만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거리에 내팽겨친 듯한 짐들을, 각자 맡은 바가 있는 듯 신중하고 열심히 닦고 분류하며 상자에 담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앞에 한 사람, 고개를 돌리니 또 한 사람, 당장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여기 어딘가에 있을 사람들. 이 한 사람 한 사람이 너무나 반가워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마음을 표현하려 애썼다. 반가운 마음이 넘쳐흘러 벅찼다. 하지만 내 마음은 상대에게 전해지는 것 같지 않았공간만을 진동시키는 듯 했다. 이곳이 허물어질 것 같았다. 잘 지냈냐고 물어보고 잘 지내냐느냐고 물으며 얼굴 표정을 살폈다. 후회를 인정하면 내일 죽어야 한다고 말한 사람을 안다. 후회되는 게 너무 많다고 고쳐 말한 사람을 안다. 아름다운 꿈이었다. 일순간일지라도 오직 한가지 감정으로 꽉 채워진 기분은 오래도록 남아 황홀하다. 꿈일지라도. 소중한 걸 매번 허물어뜨리며 지나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폐허 속에서 기어코 기어나오는 것만을 수습해가며, 겨우.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만든 다큐 <그가 없는 8월이>엔 이런 장면이 있다. 오래지 않아 죽을 것을 아는 주인공이 잘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좋아하는 감을 더듬거리며 깎아선 성글게 집어 먹으며 이런 말을 한다. “제철 과일만 잘 챙겨 먹어도 건강하게 살 수 있대.” 잊혀지지가 않는다. 가여워서일 수도 있고, 가여우니까 애틋해지기도 하고, 무엇보다 약한 자가 부리는 소박한 의욕이 내 몸과 마음을 덥힌다. 이 열기 때문에 뭐라도 하고 싶어지게 만든다. 붙잡고 싶은 조건들을 찾는다. 제철이나 과일 같은 것, 제철 과일 같은 것. 그냥 제철 과일. 실은 안간힘을 쓰고 있단 생각이 든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세월

일상 2014.06.07 03:00


제사상에 깔 창호지가 한 장도 남아있질 않다는 걸 깨달은 건 제사를 지내기 삼십 분 전, 이런 휴일에 열려 있는 문구점은 없을 거라 짐작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부리나케 밖을 나섰다. 춥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아주 추운 설날 아침이었다. 아파트 상가를 다 돌아다녀도 문 열린 데가 없어서 큰 길까지 나갔다. 편의점에라도 가 볼 참이었다. 그때 저 멀리 옅은 분홍색의, 아마도 낡고 헤져서 그리 된, 잠바가 보였다. 할머니였다. 아니 대체 언제 외출하신 거지. 아침 내내 할머니가 집에 안 계신 줄도 몰랐다. 새삼 알았다. 우리 할머니 몸집이 저리 작으시구나. 오른손에 지팡이를 쥔 채 구부정한 몸으로 걸어오고 계셨다. “할머니!” 난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걸음을 멈추시더니 한쪽 팔로 무릎을 짚으며 허리를 펴시는 게 보였다. 난 후다닥 달려가선 이렇게 추운 데 왜 나왔느냐고 했다. 별 대답을 않으셨다. 난 창호지를 빨리 구해야 했기에 내가 지금 뭘 사야 한다고 대충 말하곤 가던 길을 뛰어갔다. 예상대로 창호지를 구할 순 없었다. 에라이 모르겠다 하고 다시 집 쪽으로 방향을 틀어 걷는데 아까 그 자리에 할머니가 아직도 서 계신 게 보였다. “할머니!” 난 달려갔다. 아니 이렇게 추운데 왜 아직 안 들어 가셨냐고 채근하니 별말도 않으셨다. 할머니 코에서 콧물이 흐르는 게 보였다. 그러고 뒤늦게 “저리로 한바꾸를 돌았다.” 라고 하셨다. 아휴 빨리 들어가요, 하면서 난 할머니를 뒤에 두고 앞장서 걸었다. 그 순간에도 난 할머니와 같이 걷고 있다는 당장의 상황보다 혼자 제사상을 차리고 있을 엄마를 도와야 한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급했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몇 걸음을 빠르게 걸어 버렸다. 그러자 갑자기 빠르게 땅을 짚는 지팡이와 뒤이은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나는 놀라 잠시 걸음을 늦췄다가 뒤돌아 보았다. 할머니는 지팡이로 앞을 가리키며, 어여 가자, 고 했다. 예, 하며 난 다시 고개를 돌렸고 그 순간 난 할머니께 죄송스럽다기보다 순식간에 빨라진 지팡이와 발걸음 소리가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기심에 참지 못하고 또다시 빨리 걸어 보았다. 다시금 후다닥 지팡이 짚는 소리와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웃음이 났다. 앞서 걸으며 소리 없이 내내 웃었다. 귀여운 할머니. 할머니는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며 살까. 내가 가늠할 수 있는 그런 생각과 고민거리들을 안고 살까. 아니면 나와 아주 많이 다른 사람일까. 짧은 순간 많은 생각을 하며 걸음의 속도를 줄였다. (2012. 01. 26)


 

어버이날이라서 연락했어요. 아주 오랜만에 아버지에게 보낸 문자. 정작 내용은 없는 문자였다. 이 문자에 아버진 대답은 않고 “할머니한테 자주 연락하라”고 답장이 왔다. 나는 더 답하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도 오랫동안 할머니에게 연락하지 못했다. 이렇게 산다. 이렇게 산다고 말해버려도 될 만큼 행동도 말도 무심한 날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다나하시

일상 2014.06.07 02:48

짙게 분칠한 하얀 얼굴, 까만 단발머리, 노란 저고리, 빨간 치마. 그리고 검은 옷고름. 그녀는 키가 작고 몸집도 작지만 한복 안엔 살집이 꽤 숨겨져 있다.

그녀는 바다를 배경으로 서 있다. 두 손을 모으고 있다. 잠시 정지. 파도가 철썩이는 소리. “와라오우!” 웃으라는 일본어가 들리고 그녀의 얼굴 클로즈업. 웃는다. 이를 드러내지 않고 입술을 한껏 올린다. 얼굴에 자글해지는 주름. 오십 대 후반의 여자. ‘김치-’ 라는 어색한 한국어가 들리고, 김치- 다나하시 에리코. 어디선가 부르는 그녀의 이름이 들린다. 찰칵. 

갑자기 한복을 입은 일본 중년의 여자들이 한꺼번에, 슬로우 모션으로, 그녀 주위로 몰려 들어와 살짝 분주하게, 이내 준비된 자세를 빠르게 취하고 동시에, 김치- 한다. 찰칵.  (2012. 01. 15)

 

 

 

지하철에서 실종자를 찾는 방송을 통해 알게 된 일본의 한 주부. 한국 연예인을 보러 이곳에 왔다가 실종됐다고 한다. 그 모습과 이름이 내내 맴도는 와중, 함께 떠올랐던 이미지들. 오랜만에 그녀의 이름이 다시 떠올랐다. 생사에 관한 소식은 여전히 알 수 없는 것 같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이젠 거기에 없다

일상 2014.06.07 02:33
 
여기는 내가 늘 오는 선술집이다. 밤에 골목을 배회하다 우연히 찾았는데 멀리서 보이던 따스한 주황빛이 참 좋았다. 불빛을 따라온 이곳은 간판도 없이 주택집들 사이에 아주 작은 공간 만을 차지하고 있었다. 올 때마다 너댓의 손님들이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 소리가 밖까지 배어나오진 않았다. 가게 앞엔 내가 앞다리를 높이 뻗은 것의 두 배는 될 법한 나무 상자들이 쌓여 있다. 난 항상 나무상자 꼭대기에 올라 술집 안을 구경한다. 나무상자는 꽤 널찍해서 내 큰 엉덩이가 앉기에 불편함이 없다. 사람이 가게로 들어가는 걸 본 적은 없다. 그리고 내가 이곳을 떠날 때까지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본 적도 없다. 이제는 익숙한 얼굴들이 늘 가게 안을 차지하고 있었다. 가끔 두건을 쓰고 앞치마를 두른 남자가 밖으로 나와선 내 옆에다 생선을 주곤 했는데 내가 먹을 것 때문에 이곳을 찾는 건 아니었지만, 물론 먹긴 했어도, 어쨌든 나를 홀리는 건 이 안의 사람들이다. 이들의 이야기를 엿듣는 것이 좋다. 나는 들을 수 있다. 내가 당신들의 이야기를 이 자리에서도 들을 수 있단 걸 알까. 즐거워하거나 슬퍼하는 내 표정을 인간들이 보지는 못 할테니 아마 한 번씩 창밖의 나를 보며 고양이다, 귀엽다, 배가 고픈 걸까, 정도의 대화 안줏거리로 삼겠지만 말이다. 나는 안다. 여기는 숨길 것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라는 걸. 그들은 모두 사랑하는 사이였다. 다양한 사연을 가진 연인들. 나는 이들의 이야기가 너무 재밌고 또 슬프다. 낮에 좀 먼 데까지 나가 돌아다니다가도 어디 누워 낮잠을 자다가도 나는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그들의 이야기는 늘 새로웠다. 밤마다 나는 홀린 듯 이 술집 앞을 찾는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안락한 이 나무 상자 위에 앉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슬픈 이야기를 매일매일 듣는다. (2012. 01. 19)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우리 누나 줄라고

일상 2014.05.26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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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 속에서 너는 정대의 얼굴을 떠올렸다 .연한 하늘색 체육복 바지가 꿈틀거리던 모습을 기억한 순간, 불덩어리가 명치를 박은 것같이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숨을 쉬려고 너는 평소의 정대를 생각했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대문을 열고 들어올 것 같은 정대를 생각했다. 여태 초등학생같이 키가 안 자란 정대. 그래서 정미 누나가 빠듯한 형편에도 우유를 배달시켜 먹이는 정대. 정미 누나와 친남매가 맞나 싶게 못생긴 정대. 단춧구멍 같은 눈에 콧잔등이 번번한 정대. 그런데도 귀염성이 있어서, 그 코를 찡그리며 웃는 모습만으로 누구든 웃겨버리는 정대. 소풍날 장기자랑에선 복어같이 뺨을 부풀리며 디스코를 춰서, 무서운 담임까지 폭소를 터뜨리게 한 정대. 공부보다 돈을 벌고 싶어하는 정대. 누나 때문에 할 수 없이 인문계고 입시 준비를 하는 정대. 누나 몰래 신문 수금 일을 하는 정대. 초겨울부터 볼이 빨갛게 트고 손등에 흉한 사마귀가 돋는 정대. 너와 마당에서 배드민턴을 칠 때, 제가 무슨 국가 대표라고 스매싱만 하는 정대.

천연스럽게 칠판지우개를 책가방에 담던 정대. 이건 뭣하러 가져가? 우리 누나 줄라고. 너희 누난 이걸 뭐에다 쓰게? 글쎄, 이게 자꾸 생각난대. 중학교 다닐 때 공부보다 주번이 더 재미있었다지 뭐냐? 한번은 만우절이라고 애들이 칠판 가득 글자를 써놨더래. 총각 선생이 지우느라 고생할 줄 알았더니, 주번 누구냐고 호통을 쳐서 누나가 나가서 열심히 지웠대. 다들 수업하는데 혼자 복도에서 창문 열어놓고 이걸 막대기로 탁탁 털었대. 중학교 이년 다닌 것 중에, 희한하게 그때가 제일 생각난다지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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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희 언니는 자주 그렇게 말했다. 쉬는 일요일마다 청계피복노조 사무실에서 노동법 강의를 듣던 그녀는, 자신이 배운 것을 빼곡히 노트에 정리해와 소모임에서 강의했다. 한자 공부를 할 거란 성희 언니의 말에 당신은 별다른 두려움 없이 그 모임에 들어갔었다. 실제로 언니들은 모이자마자 한자부터 공부했다. 1800자는 알아야 해, 신문은 읽을 수 있어야지. 각자 펜글씨 공책에 서른자씩 쓰고 암기하는 일이 끝나면 성희 언니의 어색한 노동법 강의가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 우리는 고귀해. 말문이 막히거나 기억이 얼른 안 날 때마다 성희 언니는 추임새처럼 그 말을 넣었다. 헌법에 따르면, 우리는 모든 사람들과 똑같이 고귀해. 그리고 노동법에 따르면 우리에겐 정당한 권리가 있어. 그녀의 목소리는 초등학교 여선생님처럼 상냥하고 낭랑했다. 이 법을 위해 죽은 사람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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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압니까, 자신이 완전하게 깨끗하고 선한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양심이라는 눈부시게 깨끗한 보석이 내 이마에 들어와 박힌 것 같은 순간의 광휘를.

 

한강, 『소년이 온다』 중에서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