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중학교 때로 기억한다. 밤마다 공부하는 척 책상에 앉아선 짜릿하게 주파수를 맞춰가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좋은 노래들을 녹음했었다. 인터넷으로 노래를 쉽게 찾아 들을 수도 없었을 그 시절, 한 가득 쌓여 가는 노래 테잎은 배부르게 하는 보물이었다. 공테이프 살 돈이 없을 땐 영어테이프에 투명테이프를 발라가며 엄마몰래 노래로 덮어 씌우곤 했던 날들.
그 날도 여전히 오래된 영화필름이 돌아가는 소리처럼 약간씩 잡음을 내는 라디오와 마주하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흘러나온 노래, 척수가 짠해오는 여가수의 목소리.
아차. 급하게 녹음 버튼을 누른다.
허공을 떠다니는 슬픈 목소리가 끊어질까 숨마저 멈추며 노래를 듣는다.
yesterday yes a day like any day
alone again for every day
seemed the same sad way to pass the day
‘네, jane birkin 의 yesterday yes a day 노래 들으셨습니다’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퉁기는 나긋한 기타 소리에 명치에서부터 머리 끝 발 끝까지 차례차례 불을 밝히며 몸 안에 퍼져가는 구슬픈 그녀의 목소리. ‘Don't let him go'
오히려 난 공기 중에 흩어져 버릴 듯한 이 노래를 부여잡고 녹음된 테이프를 하루 수십 번 돌려 가며 들었다.
“어제는 다른 날과 마찬가지의 또 다른 하루
매일을 홀로 외로이
변함없이 슬프게 하루를 보내는 것 같아요
나 없이도 해는 지고
갑자기 누군가가 나의 그림자에 닿았죠
그는 말했어요
안녕"
이 노래가 담긴 그 테잎은 고향의 내 방 어딘가에서 긴 졸음을 자며 늘어져 있겠지.
흘러나오는 이 노래를 우연히 듣게 될 때마다 나는 잠시라도 내 시간을 멈추어 둔다. 그 순간만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허공을 떠다니는 노래가락만을 좇는다. 멍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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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끊임없이 흘러 들어오는 추억의 강을 받아 들이고 있던, 잠기지 못한 글들과 이미지가 떠다니던 바다가 있다 이 길로 계속 걸어가면 그 바다가 나올거라는 걸 알지만 아무도 가보진 못했다 제 안에 고인 바람을 밖으로 밀어내어 아무도 그 곳에 갈 수 없었다 아무도 그 바람을 맞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날서게 검푸르던 그 바다, 촉수가 얼어붙을 차가움에 갈매기도 발을 닿지 않았다 그러다 그 바다와 마주보던 하늘이 먼저 자기 마음을 조금 연다 쉼없이 떠다니며 틈을 내지 않던 구름들 중에 하나가 바다를 내려다 보기 위해 잠시 길을 멈추어 섰음이리라 그리고 그 사이로 한 줄기 햇살이 비치며 그 햇살을 타고 조그만 배 한 척이 내려왔다 넓고 넓은 바다에 비하면 아주 자그마한 유랑하는 배 그 한 줄기 햇살이 비친 곳은 바다가 생전 느껴보지 못한 따뜻함. 그것은 조그마한 배꼽이 되었다 이제 바다는 하루종일 그 배의 걸음 만을 좇고 있다 바다는, 밤이면 그 배가 고요히 머무르며 잠들 수 있도록 파도의 움직임마저 멈추어 버린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어느 순간 좋아하는 것에 얽매이고 있구나 싶은 때가 있다
시네필이라 할 자격도 없는 것 같은데 너무 영화에 집착하고 있다
즐기던 것이 나도 모르게 의무가 되어가는 기분 내가 조종하는 의무가 아니라 욕망에 조종당하는 나, 누가 이걸 고민하는 글을 최근에 본 것 같은데..기억은 안나는구나 내 것이 되는 게 가장 중요하므로 딱히 기원이라는 것이 중요하진 않다 지식이 제 멋대로 변형되면서 내 방식으로 체화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한꺼번에 책을 여러권 읽는 것이 나쁘진 않다 제 멋대로 굴러다니는 지식들 중에 내 마음에 남아있는 것들이 있는데 그런 것들이 내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내 마음에 남는 것들은 나의 감수성일진데 그 감수성은 어떻게 형성된걸까 보편적이지 않은 나만의 감동은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 생각해보니 이 생각을 대학1학년때 하다가 포스트잇에 적어서 수첩에 붙여둔 듯하다
이렇게 이야기는 아주 멀리 멀어져 가고 영원히 성(城)에 다다르지 못할 카프카 소설의 주인공 K처럼 나는 이렇게, 목적지는 도착하라고 있는 곳이 아니라 내일도 잠에서 깨라는 자명종과 같은 것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프롤레타리아트가 기존 세계질서의 해체를 고지한다면, 그것은 단지 프롤레타리아트가 [바-계급이라는]자기 자신의 현존재의 비밀을 표명하는 것일 뿐이다. 왜냐하면 프롤레타리아트는 이 기존 지배질서의 사실적 해체이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사유재산의 부정을 요구한다면, ...[그것은]이미 사회의 부정적 원리로서 구체화되었던 것을 사회의 원리로 고양시키고 있는 것일 뿐이다. -맑스
니체는 노예가 노예의 상태에서 벗어나 새로운 권력을 가진다면 그건 진정한 해방이 아니라고 했다. 박래군이 말했던 ‘사유재산제도를 비판할 것이 아니라, 이건 아예 없었다고 그 이전으로 거슬러가서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말도 되새겨 본다. 한 수업에서 지하철 운전수라는 수강생이, 노조에 가입하고서 사람들이 임금투쟁에 몰두하는 모습들을 보면 그것이 정말 의미있는 투쟁인가 하는 고민이 든다는 말이 아직도 밟힌다.
오래오래 기억에 남는 글과 말들은 다 저마다 이유가 있어서 내게 머물렀을 것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 없어서'라는 말로 나를 위로하고 있지만 차선책으로 잰걸음하며 걸어가고 싶진 않다. '이념을 신념하는 것'이나 '무리'가 싫어서 일대일 대응방식을 고민한다. 또 예술에 빠져든다. 하지만 재능이 부족하다는 걸 깨닫는 순간 다시 원점이다.
낭만적 지식인은 조직력의 결여를 그 약점으로 갖고 있지만, 그것은 또한 장점이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조직력이 없기 때문에 그는 싸움의 변두리로 밀려나지만, 그렇기 때문에 조직의 전체주의적 성격을 드러낼 수가 있다. -김 현
요즘엔 이런 글들도 많이 와닿는다.
이 모든 과정이 곧 삶이다. 하며 위로한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국가인권위 '독립' 관련 문제로 노숙 농성을 하는 날, 사람들이랑 박스를 구하기 위해 명동 거리를 돌아다녔다 이미 노숙하시는 분들이 한번 쓸어가셨는지 변변한 박스가 없었다. 우체국 건물 앞에서, '와- 우체국 건물이 왜 이렇게 좋은거야?' 하면서 감탄아닌 감탄을 하고 있는데 조금 앞선 곳에 박스 여러개를 쫑쫑 묶어선 커다란 가방을 매고 걸어가는 할아버지가 보였다 노숙하시는 분이신 듯했다. 날이 추운데 어디서 주무시려는 건지 뒤뚱거리며 걷다간 잠시 걸음을 멈추시곤 허리를 굽히시더라. 뭐하시나 보았더니 나름대로 멀쩡한 담배 꽁초를 하나 집어들고 계셨다. 그리고 그 자세로 한참이나 담배에 불을 붙이시는데 바람이 불어 잘 안되는 듯했다. 하얗게 샌 머리가 가로등에 비춰 찬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선명했다.할아버지가 그 굽은 자세로 한참이나 담배꽁초에 불을 붙이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점점 멀어져 갔다. 그 이미지가 아직도 너무나 선명하다.
하루동안의 노숙에도 손 끝이 까실해시고 피가 몰린 듯 벌겋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큰 스크린에서 방금 본 영화의 특정 화면이 얼얼하게 뇌리를 맴도는데 그걸 말로 제대로 집어낼 수 없어 묵묵히 있다가 오래 전의 영화에서 시간의 시련을 뚫고 강인하게 버텨온 예술성의 줄기를 제대로 집어낸 것 같은 포만감을 접수하며 과거의 영화를 즐기는 영화 공동체는 미래의 영화를 창작하고 감상하는 토대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_ 김영진
극장을 찾아 거리를 걷고 움직이는 행위자체가 또 다른 경험이다. 가까운 멀티플렉스에서, 집에서 컴퓨터로 영화를 보면서 그런 경험은 실종됐다. 감동이 사라지는 건 당연하다. 영화를 보고 싶다는 마음, 그리고 그 영화를 보러가는 초조함이 얼마나 짜릿한가. _김성욱
영화를 보는 것이란 이런 것. 영화는 내게 단순한 취미가 아니다.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 시간, 극장을 찾아 배회하며 만나는 상념과 풍경들, 극장에 앉아 스크린과 조우하였을 때의 벅참 기대 그리고 대화. 영화 속에서 나는, 수 없는 삶을 살며 삶의 방식을 배우고 타인을 이해하고 때론 나 아닌 수없는 것들이 되어 간다. 그건 내게 자유이기도 하고 또 탈출이기도 하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김이 폭폭 올라오는 단팥죽에 쫄깃한 떡을 똥똥 얹은 '오시루코'를 파는 가게다. 아아
깔깔깔. 똥 모양이예요. 똥꼬치다아.
폭신하고 달콤한 마음을 채웁시다아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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