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는 왜 그렇게 나를 애지중지하셨을까. 그 생각만 하면 자신이 소중해진다. 그분이 사랑한 나의 좋은 점이 내 안에 지금도 살아 숨 쉬는 것처럼. 그건 삶이 비루해지려는 고비마다 나를 지탱해주는 힘이 되었다. 우리가 여행을 할 때 가장 자주 하는 말은 아마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는 소리일 것이다. 그러면서 자꾸자꾸 사진을 찍어대듯이 사람이 한세상 살고 나서 남길 수 있는 게 사랑밖에 없다면 자꾸자꾸 사랑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손자가 고삐를 잡은 마상에 앉아서 이 힘든 여행이 훗날 손자에게 무엇이 되어 남을까 상상해보며 부디 사랑받은 기억이 되기를 빌었다.” (박완서, 『노란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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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 2019. 7. 8. 00:25

꿈을 꾸었는데, 온 몸에 짐을 잔뜩 지고는 길을 헤매다 크고 밝은 홀로 발이 이끌렸다. 홀 곳곳에서는 사람들끼리 모여 쉬거나 놀거나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한켠에서 열리는 행사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마이크를 쥔 여자가 한 무리의 사람들 앞에서 강연을 시작하고 있었다. 자신을 어디 대학교의 시간강사라고 소개했다. 이제 그 내용은 기억나지 않고 다만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 재밌어서 멀찍이 서서는 혼자 한참을 웃었다. 무거운 몸으로 훌쩍훌쩍 웃었다. 웃으면서, 웃으니까 좀 낫다고, 웃어도 괜찮다고, 이렇게 기분이 나아지면 좀 더 지내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잠에 들기 전까지 온몸을 웅크리며 떠올리지 않으려 했던 슬픔도 이미 사라진 것 같았다. 땀을 흘리며 화장실로 들어섰을 때 한 노인이 나에게 "2점 감점!"이라고 소리쳤다. 그때 울었다면 좋았을 텐데. 깨고 나서도 울지 못하고 어두운 마루를 빙빙 돌았다. 슬픔보다는 아픔, 아니 고통에 가까운 느낌이 따라다닌다.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고 잊어서도 안될 일을 겪었다. 친구 말대로 힘든 일은 힘들게 겪을 수밖에 없다. 할 수 있는 건 매일 매일의 기도. 그건 결코 나를 위해서는 아니어야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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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글빙글

여행 2019. 1. 15. 12:50

 


2016년의 배낭여행에서 찍은 영상들 중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다. 얼마나 긴 시간 동안 회전하는 노동을 반복했을지 모를 저 인형에는 빛과 그림자를 반씩 섞어만든 어떤 영혼이 깃들었을 것 같다. 시안에서 진시황릉 병마용갱을 보고 나오는 길에 찍었다.

나오는 길에 맥도날드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한숨이 나올 만큼 더웠다. 아이스크림을 파는 창구의 줄이 무척 길었고, 아이도 어른도 기분 좋아 보이는 표정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아이스크림을 받아서는 뜨거운 볕을 피해 맥도날드 건물 아래에 앉았다. 시원하고 달콤한 것이 몸 속을 타고 내려갈 때마다 조금씩 기분이 좋아지고 있었고 나와 같이 그러고 앉은 사람들이 열댓 명은 되는 우리 앞으로, 누군가 빠르고 요란하게 지나갔다. 전력질주해서 누군가에게 당도한 맥도날드 직원은 손님에게 잔돈을 잘못 챙겨준 모양이었다. 적은 액수인데다 바빠서 모른 척할 법도 한데 입구도 좁은 창구에서 굳이 나와 이 더운 거리 위를 달린 거다. 그는 손에 쥔 동전을 상대에게 건네주고는 손님의 표정도 보지 않고 다시 매장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급해서 빨리는 가야겠는데 지친 다리가 상체를 따라가지 못해 곧 바닥에 엎드릴 듯 위태롭게 움직이고 있었다. 다시 내 앞을 지나 좁은 창구 안으로 들어가는 그의 얼굴은 땀으로 반질거렸다. 스무 살은 됐을까 싶은 앳된 얼굴의 여자였다. 그는 숨을 짧게 내쉬더니 다시 능숙하게 아이스크림 주문을 받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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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에서

일상 2019. 1. 13. 13:16


<노동여지도>를 읽다가 발견한 구절이다. 송민영이라는 이름이 있어서 책을 더 읽는 건 그만두었다. 생각이 나 그의 추모게시판에 들어갔다. 오랜만이었다. 나는 그와 인연이 없다. 어떤 사람인지도 모른다. 사회진보연대의 활동가였다는 것밖에. 그것도 그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야 알게 된 사실이다. 왜인지 모르겠는데 그의 죽음에 대해, 아니 그의 존재에 대해, 그러니까 그 사람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에 대해 오래 생각했고 한동안 그의 흔적을 찾았다. 아마 또래라서, 여성이라서, 또 사회운동을 하던 사람이라서 유독 끌렸을까. 그 사람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었고, 또 친해지고 싶었다. 부질 없는 생각이었고, 그냥 마음 놓고 했다. 추모와 애도 사이에 있는 기분이었다. 모르는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는 정도는 넘었는데 그렇다고 지인은 아니라서 끝내 더 나아가지는 못하는 상태. 그에 대한 기억을 내 안에서 퍼올릴 수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몇 달은 잠에 들기 전마다 추모게시판을 들여다봤다. 2016년이었고 여름이 시작되면 나는 긴 배낭여행을 떠날 예정이었다. 출국하고 낯선 땅에서 거의 한 달은 완전한 고독 속에서 지냈다. 홀로 움직였던 그 시간 동안 이 세상에 없는 자들과 함께 하는 기분이었다. 그들은 모두 나와 인연은 없는 사람들이었고, 그 중 한 사람이 송민영 님이었다. 살고 있다는 감각을 느끼고 싶어서 그렇게 여행을 갈구했는데 다만 삶이 얼마나 죽음과 가까운지 알겠는 기분으로 지냈다. 그런 기분은 다시, 정말 존재했음 그리고 어떤 삶이 있었다는 깨달음으로 이어기도 했다. 아주 잠시였지만, 그 깨달음은 사라지지는 않고 마음 어딘가에 쌓이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몇 년 전부터 저런 생각에 휩싸여 지낸다. 그것도 모르는 사람들의 죽음, 알고 싶어도 더 알 수 없는 사람들로 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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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 나의 엘리자


임경섭



엘리자와 그녀의 어린 아들을

헤일리는 마지막까지 뒤쫓고 있었다

여물이 잔뜩 묻은 광포로 아들을 둘러멘 엘리자는

얼음이 풀려 물이 붇기 시작한

오하이오강에 다다르고 말았다

수면 위로는 겨울을 견뎌낸 

거대한 얼음덩이들이 유속만큼 빠르게

달의 반대편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엘리자는 지쳐 울지도 않는 아들을 앞섶으로 끌어안은 채

마른 물억새밭 사이 기슭에 주저앉아 눈을 감았다

그녀는 누구에게 기도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1

마님,

오 나의 스토 마님!

우리를 어찌하시려고 이곳까지 끌고 오셨나요

별빛도 반사하지 않는 저 차가운 강물 속에

우리 모자를 빠뜨려 죽이시려고 여태껏

그리 먼 길을 돌고 돌아 여기까지 오게 하셨나요?

오 스토 마님,

이제까지 우리 모자를 살려두신 거라면

그 이유라도 알 수 있게

제발 여기서 죽게 내버려두지 마세요.

혹 이곳에 죽음이 필요하다면 저만 죽여주시고

아무것도 모르는 제 어린 아들은 제발

오 제발 살려주세요 마님도 아시죠?

제 아들이 저 악독한 백인 헤일리의 손에 들어간다는 건

죽음보다 더 황폐한 일이라는 것을 말예요

오 마님!

제 아들만은 이 어두운 강을 건너가게 해주세요


#2

엘리자, 나의 엘리자,

내가 어찌 참혹한 죽음의 강으로 너를 내몰겠느냐

나에겐 너희를 죽일 힘도, 너희를 어떤 방향으로

인도할 힘도 없단다 내가 적은 단어들과

내가 만든 문장들이 고삐가 되어

너희를 이곳까지 끌고 온 것이란다

사랑스러운 나의 엘리자, 생각해보아라

내가 너희를 지금 저 깊은 겨울 강물에

빠뜨려 죽인다고 해보자

내가 너희를 수십번 죽인다고 해도

내 글을 읽지 않은 사람에게

너희는 죽은 게 아니지 않느냐

또한 내가 너희를 영원히 살려둔다 한들

아무도 내 책을 펼치지 않는다면

너희는 영원히 태어나지도 못할 것 아니냐

엘리자, 너무 서글퍼하지 말아라

너희는 살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그런 행복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를 끌어안고 있는 배경들이

배경들을 조합하고 있는 기호들이

너희 모자의 삶을 결정할 것이란다 다만

너희는 반복되는 굴레 안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테니

내가 이번만은 기적같이 너희 모자가

저 광막한 겨울 강을 건널 수 있게끔 힘써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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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치히 동물원

슈레버 일기


임경섭



세살 된 아이를 데리고

내가 찾아간 곳은 동물원이었다

그곳은 가질 수 없는 것들로 가득했다


어제 내린 비로

하늘빛이 무척 푸른날이었지만

군데군데 얕은 물웅덩이들이 놓여 있어

나는 말간 하늘보다는

앞서 내달리는 아이를 주로 쳐다보며

숲처럼 우거진 포장길을 걸어야 했다


말을 막 배우기 시작한 내 아이는

처음 보는 동물을 마주할 때마다

그것들을 갖고 싶다 했지만

나는 그때마다

그것들을 가질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있었다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해 설명하는 대신

나는 아이에게 동물원에 대해 말해주고 싶었다


내가 알기로 동물원은 움직이는 사물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동물원 안에선 그 어떤 사물도 움직이지 않았으니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동물원은 움직이지 않는 동물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 어떤 동물도 스스로 그곳을 선택한 적 없었으니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동물원은 움직이지 않는 동물들을 모아놓은 곳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을 모아놓은 주체가 빠졌으니

나는 그대로 말할 수 없었다

동물원은 인간이 움직이지 않는 동물들을 모아놓은 곳이었다

그러나 인간도 동물이었으니

나는 그대로 말할 수 없었다

동물원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모아놓은 곳이었다

그러나 스스로를 가둔 테두리는 보이지 않을 만큼 넓었으니

나는 더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세살 된 아이가

아무 말 하지 않는 나를 데려간 곳은

동물원이었다

그곳은 경계와 경계들이 놓여 있는

경계의 안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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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마다 꿈에서 레일 돌아가는 소리를 듣는다.  
(내가 컨베이어 벨트라고 알고 있는 걸 여기서는 레일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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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벌려고 이 일을 시작했지만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집 재계약 때문에(서류상 중소기업 재직증명서가 필요한 상황) 발등에 불이 떨어졌고 예상했던 기간보다 나는 더 오래 이 일을 해야 할 상황이다. 힘들어도 '경험'이 될 거라고 생각했던 일이 절박한 생계가 되었다. 그러자 조금 불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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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밤 따뜻한 물로 샤워할 수 없다면 이 일을, 그것도 이 계절에는 못 견뎠을 거다. 따뜻한 물로 씻으면 볼과 손등과 무릎이 녹아서 빨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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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믹스커피가 마시고 싶어 관리자들이 일하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며칠 전 서류를 부탁하러 갔다가 사무실에 믹스커피가 많은 걸 봤다. 문을 열자 낯익은 직원이 보여서 "믹스커피 좀 가져가도 될까요?"라고 물었다. 이어폰을 낀 그가 짜증스런 얼굴로 "네?"라고 물었다. "믹스커피 좀 가져가려고요." "뭐요?" 난 정수기 위의 믹스커피를 가리키며 "저것 좀 먹고 싶어서요."라 했고, 그제야 그는 이어폰을 귀에서 빼더니 귀찮은 표정을 지으며 "몇 개 챙겨줘."라며 맞은편 여자에게 말했다. 여자는 내가 재직증명서 서류를 부탁했던 하청업체의 관리 직원이다. 그가 믹스커피를 손에 가득 쥐여준다. 기분이 몹시 나빴지만 여자 직원에게만은 고맙다고 또렷하게 말했다. 돌아 나오면서 '나는 지금 불쌍한가?'라는 생각을 떠올렸다. 타인이 나를 불쌍하게 만든다. 그런 것 같다. 그래도 따뜻한 커피를 마시니 애써 넉넉해지는 마음. 고작 믹스커피 몇 봉지를 얻으러 갔다 생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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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함과 친절함은 중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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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게실에 앉아 매일 코카콜라 500ml를 마시는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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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위와 미세먼지에 시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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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무환경이 좋지 않아 그만두는 사람이 많다. 신입이 많으니 분위기는 어색하고 오래 다닌 사람들(그래봤자 몇 개월 더)의 텃세가 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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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레일을 뛰어넘어야 할 때가 있다. 춥다고 긴 패딩을 입었는데 생각 없이 레일을 건너려다 식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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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에 틈틈이 읽는 책은 <남극의 여름>. 남극에서 물류를 이동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들은 수십 시간 운전이라는 반복 노동을 하는 동안 파리로 돌아가면 무슨 일을 할지 상상한다고 한다. 누군가는 하루에 한 곡만을 무한 재생하기도 하고. 나도 일이 좀 적응되자(이 일은 단순 작업이라 배우는 건 금방이다. 익숙해지면 속도를 내는 문제로 접어드는데 사실 이게 본격적인 고난의 시작) 손이 기계처럼 노동하는 동안 머릿속은 근질근질해지기 시작했다. 출근길마다 '오늘은 무슨 생각을 할지'를 정해본다. 오늘은 지난 배낭여행의 순간들을 복기했다. 파키스탄 훈자의 별을 올려다보고 또 올려다보았다. 자세히 복기하려 할수록 기억은 더 선명해진다. 보면 볼수록 더 많이 보이는 별처럼. 그렇다고 정신의 전부를 딴 곳에 보낼 수는 없다. 그러면 꼭 실수가 생긴다. 균형을 잡는 긴장이 필요하다. 음악은 들을 수 없다. 지시를 내리는 무전기 소리를 들어야 해서다. 누군가 이어폰을 한쪽 귀에 끼고 음악을 듣다가 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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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에 비누가 생겼다. 쉬는 시간마다 꼭 비누로 손을 씻는다. 비누 묻은 손을 문지르면 구정물이 비져 나오는데 그걸 보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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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쉬는 시간에 맞춰 하고 있던 일이 딱 끝난다. 이 일의 노동 시간에 적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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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은 전형적인 저임금 고강도 노동이다. 단기간에 꽤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좋은 아르바이트라고 생각해서 시작했는데 이렇게 일하고 겨우 이 돈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화가 난다. 생각할수록 많이 화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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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때 아파서 잔업을 못 하겠다고 손을 든 사람이 있었는데 다른 동료들이 웃으며 "안돼. 안돼." 하며 데리고 갔다. 다들 웃어서 나도 웃고 말았는데 나중에 문득 그 장면이 떠올랐고 마음이 서늘해졌다. 동료가 아프다는데 쉬라고 하지는 못할망정 일을 하자고 관리자 앞에서 데리고 간다는 거, 정말 웃을 일인가. 한 사람이 빠지면 전체의 일이 많아져서다. 더구나 손이 빠른 사람이면 순순히 보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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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임이 오늘부터는 '개인적인 불이익'이 생기지 않도록 피킹(주문장에 적힌 물품을 찾아 박스에 담는 일) 나간 시간을 기록하라고 했다. 내 주업무는 검수(박스에 담긴 물건을 바코드로 검수한 후 포장해서 내보내는 일)다. 하지만 레일 위에 박스가 적으면 우리에게 피킹을 시킨다. 쉬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으려는 거다. 관리자는 개개인이 하루에 검수를 몇 건이나 했는지 체크하는데, '피킹한 시간은 빼야 검수한 박스의 갯수를 정확히 체크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야 건수가 적어도 이해해줄 수 있기 때문이란다. 과연 그건 배려일까. 분단위로 시간을 쪼개서 감시받는다. 주임 왈, 어제는 전체 건수가 적어서 CCTV를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확인해본 결과 "여러분이 화장실을 너무 자주 간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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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순간 관리자들의 친절함에 넘어가지 말자.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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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수와 피킹하는 노동자를 파견하는 하청업체와 검수와 피킹하는 노동자를 관리하는 주임을 파견하는 하청업체가 다르다는 걸 알았다. 사실 나는 주임들은 인터넷 쇼핑몰 소속 정규직인 줄 알았다. 그래도 저쪽 하청업체는 춥다고 파카를 단체로 입혀줬다. 이렇게 하나씩 새로운 정보를 알아가는 재미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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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영하 10도를 넘기는 날이 많다. 손등이 동창에 걸렸다. 동상은 아니라 다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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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피킹만 7시간을 했다. 물류센터를 계속 걸었다. 사각형의 한 면에서 한 면까지 걷는데 대략 5분 정도 걸린다. 이제는 팬틴 샴푸가 어디 있는지, 김치 사발면 6개입 박스가 어디 있는지, 복음자리 잼이 어디 있는지 잘 알겠다. 최대한 적게 걸을 수 있는 동선도 익혔다. 4시간이 넘어가자 체력이 뚝뚝 떨어지는 걸 실시간으로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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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킹을 끝내고 검수하러 돌아왔는데 박스에 동봉하는 사은품이 다 떨어지고 없었다. 레일 건너편의 조장에게 더 없는지 물어보려는데, 나를 돌아보는 조장님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창백했다. 이마에서부터 피로가 흐르고 있었다. 이 시간쯤 되면 저런 얼굴이 되나? 이 추위에 매일 잔업까지 해서 힘들 텐데 다들 꾸역꾸역 잘도 버티고 있다. 결국 한 사람은 아파서 6시에 퇴근했다. 인사하고 떠날 때 얼굴을 봤는데 입술이 부어 있었다. 주임은 다음 주는 되도록 하루만 쉬어 달라고 "제발 부탁한다"고 말했다. 부탁이라고 말하니 더 얄미웠다. 이렇게 사람을 갈아서 회사를 운영해야 할까.(이런 전형적인 표현이 막 튀어나온다.) 휴게실에 앉아 있는데 누가 "오늘 사무실에 오예스가 쌓여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다른 누군가가 "아니 이런 날에 잔업시키면 김밥은 줘야 하지 않냐"고 투덜거렸다. 그래도 난 김밥보다 오예스가 더 좋고 오예스를 포장할 때마다 먹고 싶었는데 잘됐다 싶었다. 기다렸지만 결국 안 나왔다. 회사가 노동자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게 피부에 와닿아서 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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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우니까 마트 안 가고 인터넷으로 물품을 사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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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회사에 진절머리를 내지만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일터일 터. 애사심이 있는 사람도 있을 테고. 입 밖으로는 회사 욕을 하지 않아야겠다. 어쨌거나 난 '조금만 더 버티면 그만둘 수 있다'라는 마음을 먹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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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업을 하고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스크린도어에 내 모습이 비쳤다. 추위를 이기려고 남들보다 더 뚱뚱하게 옷을 껴입었고, 대충 봐도 꼬질해 보였다. 시선을 내리면 패딩 소매에는 시커먼 때가 묻었고 몸에서 먼지 냄새가 난다. 이런 게 싫어서 조장을 비롯한 몇 사람들은 작업복과 일상복을 꼭 분리해서 입는다. 하지만 탈의실이 따로 없으니 번거로운 일이다. 아버지가 일하는 공장에 따라간 적이 있다. 퇴근하고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하니 아버지는 "이렇게 가면 식당에서 싫어해." 땀에 절고 더러운 작업복을 입고 있어서라고 했다. 그래서 당신은 아들이 깨끗한 곳에서 옷 더럽힐 일 없이 일하는 게 좋다고 했다. 순간 짠하고, 오래 씁쓸했다. 왜 더러운 작업복을 부끄러워해야 하나 싶어서. 하지만 오늘 지하철에서 정장을 잘 차려입은 한 여성을 보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직업의 위계? 그런 걸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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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물의 위치에 있지 못하는데도 속물근성을 가진.
(이거 왜 썼을까. 다시 보니 기억이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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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을 하면서도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는다! 일주일에 이틀은 쉬어야 하는데, 쉬고 싶은데, 하루만 쉬기를 강요받고 어떻게든 변명거리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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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5일

일한 지 한 달째. 오른팔이 너무 결린다. 왼팔만 쓰려고 노력한다. 같은 날 입사한 분은 손목터널증후군에 걸렸다고 했다. 그분의 주업은 패션디자인이다. 일감이 줄어서 부업으로 여기서 일을 한다고 했다. 둘 다 손목을 많이 쓰는 일인데 당장 어느 것 하나 멈출 수도 없어서 걱정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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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조회시간. 조장은 주임에게 "레일 지나가는 박스를 보고 무거워 보인다 싶으면 작업대로 안 옮기고 그냥 지나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도 신입들이 그런다."고 고자질했다. 주임은 동조하며 "또 발각되면 그만두게 하겠다"고 했다. 지금 주임의 리더십은 제로다. 사정은 이렇다. 박스 안에 물건이 많으면 두 박스에 분리해야 하고, 그러려면 주문장을 하나 더 프린트해서 각 박스에 따로 붙여야 한다. 작업대마다 프린트가 있지만 대부분이 고장 났다. 좋은 자리는 연장자가 맡으니 프린트가 고장 난 작업대는 신입들의 자리다. 그래서 주문장을 추가로 뽑으려면 레일 건너편의 선임에게 부탁해야 한다. 욕을 먹지 않으려 박스 하나라도 더 해야 하는 분위기에서 잠시 작업을 멈추게 하는 부탁은 하기 꺼려진다. 중요한 건 고장난 프린트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입밖으로 말을 꺼내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내가 일하는 한 달 사이에도 반 이상의 사람이 바뀌었다. 떠나면 그만인 곳이다. 이런 상황은 다시 업무의 효율을 떨어트릴 테고. (이후 주임이 바뀌었다. 적어도 이 사람은 고장난 프린트기를 고쳐주는 일부터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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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사람들 뒷모습만 봐도 누가 누군지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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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청소를 시켰다. 관리자의 지시가 꼬였는지 한 사람이 혼자 휴게실 하나를 다 청소한 모양이었다. 그 사람이 다짜고짜 나한테 와서 왜 청소하러 안 왔느냐고 따졌다. 반대쪽 휴게실을 청소했다는 말을 내가 꺼낼 새도 없이 그 사람은 자기 화만 쏟아내고 사라졌다. 퇴근하는 길에 화장실에서 그를 만났는데 미안했는지 괜히 이런저런 이야기를, 비누가 어떻고 물이 어떻고 하는 말을 늘어놓고 갔다. 재밌는 사람. 걷는 모습이 특이한 사람. 


일을 하다 보면 곁눈으로 피킹하는 사람들이 보일 때가 있다. 유독 한 명이 눈에 들어온다. 정말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다. 주문장을 확인하고 해당 위치에서 빠르게 물품을 뺀 뒤 레일 위의 박스에 담는 동작이 리드미컬하다. 흥이 느껴진다. 열심히 노동하는 풍경의 양면성이 있겠지만, 어쨌거나 성실하게 노동하는 인간을 보는 건 기분이 좋아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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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야 들어오지." 

(누구 말을 옮긴 건데 어떤 맥락이었는지 이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 이제야 기억났다. 따뜻한 휴게실에서 차가운 물류창고로 나가기 싫어서 모두 신음소리를 낼 때 누군가 꺼낸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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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이 되기 30분 전 레일에서 거친 소리가 나더니 결국 멈췄다.... 고장 났다! 자꾸 배실배실 웃음이 났다. 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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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게실에 종이컵과 믹스커피가 있길래 '드디어 회사가 이 정도는 제공하는군!' 하며 믹스커피 봉지의 윗귓퉁이를 이로 물어찢는 순간 피킹팀 조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거 다 주인 있는 거예요!" 일순간 조용해지고 모두 나를 쳐다봤다. 그 사람은 나뿐 아니라 모두 들으라는 듯 "여기 있는 건 다~ 개인 물품이에요. 물어보고 먹으세요!" 만약 이 자리에 우리 검수팀 조장님이 있었다면 내 편을 들어주지 않을까. 서러워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조장이라는 사람이 종이컵과 믹스 커피를 공급하라고 관리자들에게 건의는 못할망정! 센 노동강도와 저임금보다 견디기 힘든 건 일하는 사람들 사이의 삭막함이다. 환경이 이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해도 개인에 대한 미움이 덜해지진 않는다.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도 인간적인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좋고 그런 사람들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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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리 중이라 설사가 난다. 하지만 화장실에 편히 못 간다. 평생 다닐 회사가 이렇다고 생각하면 아찔한데 조금만 더 버틴다고 생각하면 또 안심이 된다. 이런 생각을 반복하고 있는 내가 한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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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과 간식 먹는 시간이 제일 행복하다. 식당밥이 맛있다. 모든 물류센터 식당의 밥은 맛있을 것 같다. 열심히 일하고 먹는 밥은 맛있다! 그리고 식당은 따뜻하다. 점심시간을 꽉 채워 식당에 머문다. 점심을 먹고는 식당 옆 편의점에서 파는 천 원짜리 초코퍼지 두 개를 잔업 간식용으로 산다. 먹을 때는 두 입째에 초코가 베어 나오도록 하는 게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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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이 시간을 어떻게 추억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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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과 칼을 고무줄로 묶어 다니면 피킹할 때 편하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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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톱을 기른다. 손톱이 짧으면 때가 손톱 안까지 파고든다. 이것도 이제야 깨달은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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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3일

늘 마스크 낀 모습만 보던 사람이 같이 밥을 먹자고 했다. 서른 살이라고 했다. 엔터테인먼트 회사에서 음악 프로듀서? 교육? 무슨 일을 하다가 알바로 왔댔는데 너무 작게 말해서 안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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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검수팀으로 들어온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의 취미는 편의점에 새로 들어오는 과자를 먹는 거라고 했다. 난 사람들이 꼬북칩을 많이 주문해서 나도 먹어봤는데 너무 맛있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 사람은 꼬북칩 별로라고 했다. 둘이서 하루동안 입고팀에 파견돼서 알하며 조금 친해졌다. 그 친구에게 초코퍼지를 선물했는데 맛있었는지 대답은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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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눈을 뜨면 출근하는 게 자연스러워진 한 달째, 나는 이 일을 그만두었다."로 시작하는 글을 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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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먹은 게 잘못됐는지 배 아픈 걸 참지 못하고 업무 중에 작업대를 이탈했다. 급하면 당연히 화장실에 가도 되지만 나는 눈에 띄는 게 싫어서 웬만하면 참았다. 누가 뭐라 하는 것도 아닌데 뛰어서 이동하는 걸로 눈치를 봤다. 볼 일을 보고 다시 작업대로 돌아왔을 때 한 선임이 말했다. "어디 갔다 왔어?" 추궁하는 말투였다. 화장실이요... 하고 자리로 돌아왔을 때 내가 잘못 들은 거길 바랐다. 관리자가 아닌 동료에게 저런 말을 듣는 게 더 서럽다. 물론 좋은 동료도 있다. 내가 한 실수를 함께 처리해주고 편하게 말도 걸 수 있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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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읽는 책은 <노동의 배신>이다. 직업에 귀천은 없다고 늘 생각하면서도 이 일에 연민의 시선을 갖고 있는 내가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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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두해서 일을 하다 보면 퍼즐 맞추듯 물품들이 박스 하나에 기가 막히게 똑 맞아들어갈 때가 있다. 평평해진 표면 위로 박스 날개를 덮을 때의 뿌듯함. 죽고 싶은 사람이 있다. 군것질을 좋아하는 그는 마지막으로 과자를 종류별로 원 없이 먹은 후 죽기로 한다. 그가 주문한 과자들을 내가 포장하고 있다. 배달된 박스를 개봉했을 때 그는 이 '정갈한 예쁨'에 감동해서 죽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다. 박스 안의 상태가 너무 마음에 든 나머지 도취된 상태로 잠시 이런 상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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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0일

일을 그만두겠다고 했는데 명절을 포함해 5일간의 휴식을 주겠다는 제안을 받아들이고 다시 회사에 출근했다. 이제 일주일 남았다. 5일을 쉬고 나니 염증이 생겼던 왼손 중지도 많이 가라앉았다. 일이 할 만하다. 돌아보면 이 일에 대한 분노도 많이 잦아든 것 같다. 결국 이렇게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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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면 가장 후회되는 건 물류센터의 노동환경에 대해 근로감독관을 파견해달라는 요구를 안 한 거다. 이건 회사 사람들과 직접 부딪치지 않고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일을 그만두고 지난 1년간 물류센터에서 노동자가 죽었다는 기사를 볼 때마다 괴로웠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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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

일상 2018. 12. 14. 01:12


어제는 노란뿔테였는데, 오늘은 테가 없는 안경을 끼고 있다. 남자는 최근 안경을 끼기 시작했다. 한 달 새 안경이 바뀐 건 세 번째다. 하나같이 얼굴에 맞지 않아 보인다. 내가 남자를 지켜본 지도 일 년이 지났다. 퇴근이 빠르면 8시, 늦으면 9시, 10시, 때로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도 그를 만난다. 아니 본다. 지하철 2호선에서 내려 발뒤꿈치들을 따라 계단을 오른 뒤 화장실로 몰려가는 사람들을 피해 조금씩 뒷걸음질 치며 개찰구를 통과하고, 그러고도 열 걸음 정도 더 걸으면 집으로 가는 방향의 출구가 나온다. 그 출구로 나가기 위해 오른쪽으로 꺾기 직전, 뚜렷한 이목구비에 짙게 화장한 모델의 얼굴이 커다랗게 박힌 화장품 광고판 아래가 바로 남자의 자리다. 나는 오늘도 남자를 스쳐 지나간다. 스쳐 지나가면서 본다. 보는 걸 들키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보고 싶다. 오늘은 어떤 안경을 꼈는지, 어떤 옷을 입었는지, 물론 옷이 바뀌는 일은 거의 없지만, 어떤 모양으로 앉아 있는지, 곁에 얼마나 많은 봉지를 늘어놓았는지, 머리카락이, 눈썹이 얼마나 자랐는지 구두코는 얼마나 닳았는지 나는 매일 그런 것들을 빠르게 탐색한다. 남자는 보통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있거나 모로 누워 주위를 응시한다. 가끔 잠을 자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꼭 바닥에 볼을 대고 있는 채로다. 바닥의 서늘함이 좋거나 어쩌면 신발 굽 소리를 듣는 건지도 모르겠다. 오늘 남자는 검은 봉지에 얼굴을 박고 무언가를 먹고 있다. 얼굴에 맞지 않은 안경은 흘러내릴 것 같다. 그 위로 희끗하고 풍성한 눈썹이 꿈틀거린다. 봉지가 커졌다 줄어들 때마다 눈썹이 흩날린다. 남자의 몸에서 유일하게 생명력이 느껴지는 존재. 눈썹은 계속 자라고 언젠가 머리카락보다 더 길어질 게 분명하다. 사람들은 부드럽게 포물선을 그리며 남자의 주위를 지나간다. 오늘도 주위에는 봉지들이 늘어져 있다. 퇴근이 늦은 언젠가의 밤이었다. 한적한 역사 안을 한 남자가 기어 다니고 있었다. 잘 보이지 않는지 바닥을 노려보며 손으로 뭔가를 붙잡고, 붙잡고 하며 헛손질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발에 채이곤 하는 먼지와 머리카락 뭉치였다. 남자는 먼지를 붙잡아 봉지 안에 가두었다. 형형색색의 봉지들이 남자를 따라다녔다. 이렇게 더운 날씨에 파카를 입은 사람을 보는 건 괴로운 일이라고, 아니 슬프다고, 아니 그보다는 우울해진다고, 생각했다. 이내 발길을 돌려 출구로 가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을 때 등 뒤에서 남자가 뒤따라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서서히 걸음을 늦춰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번화한 역 주변을 걸으며 남자는 봉지와 담배꽁초를 주웠다. 봉지는 야무지게 말아 주머니 깊숙이 넣었고 담배는 구석에 앉아 피웠다. 남자는 담배를 피우며 무언가를 계속 응시했는데 거리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펼쳐져 있어서 그가 무엇을 보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남자는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상품 매대 사이에서 남자가 보였다 안 보였다 했다. 남자는 컵라면을 집어 계산대로 가서는 지폐를 건넸다. 건넸다가 도로 가져가서는 손으로 여러 번 잘 펼쳐서 다시 건넸다. 점원이 동전을 거슬러줬고, 남자는 동전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가만히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보였고, 주머니 깊숙한 곳을 탐색하는 손을 따라 고개는 점점 바닥을 향했다. 계산대 앞을 막은 남자를 점원이 더 이상 못 참아줄 즈음 그가 다시 신중하게 꺼낸 손에는 한가득 동전이 있었다. 남자는 손바닥을 좌우로 몇 번 흔들어 동전을 정렬시킨 뒤 계산대 앞의 기부함에 동전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점점 주변의 소음이 사라지고 툭 툭 동전이 동전들 위로 하나씩 떨어지는, 신속하게 낙하하는 소리만이 내 귀를 울렸다.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받아 밖으로 나온 남자는 익숙하게 건물의 귀퉁이에 쪼그려 앉았다. 라면을 먹는 남자를 계속 지켜보았다. 지켜보는 걸 멈출 수 없었다. 그 이후 퇴근할 때마다 남자를 본다. 남자는 며칠 자리를 비우기도 하는데 전보다는 깨끗해진 모습으로 돌아온다. 한 달째 남자는 자리를 비우지 않는다. 먼지를 줍느라 손끝이 까맣다. 이제 남자를 스쳐 출구로 올라가는 찰나, 무심코 남자의 자리에 발을 디뎠다. 선 채로 내려다보이는 남자는, 작다. 무척 작다. 누구에게도 위협이 될 수 없을 정도로 작다. 가까이 다가선 나를 남자가 올려다보려는 순간 나는 광고판의 모델로 눈길을 돌린다. 가지런한 눈썹 아래 크고 까만 눈동자 안으로 사람들이 지나다닌다. 난 모델에게 시선을 유지한 채 빠르게 자리를 피한다. 나는 매일 그를 관찰하며 남자가 살아온 시간을 가늠해본다. 지금의 자리를 잡게 된 사연을 짐작해본다. 기부함으로 동전을 하나씩 떨어트리던 그 마음을 궁금해한다. 다만 궁금해하고 짐작해볼 뿐 나는 그저 포물선을 따라 남자 주위를 지나갈 뿐이다. 남자의 시선이 되어보고 싶지만 남자와 시선이 마주치는 것은 두렵다. 지금처럼 매일 남자를 스쳐 지나가겠지만 만나지는 않을 작정이다. 사람들의 발뒤꿈치를 따라 지상으로 가는 계단을 오른다. 바깥의 더운 열기가 전해지자 하루의 피로가 몰려오기 시작한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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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겨두고 요즘 가장 곱씹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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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영화는 픽션이고 다큐는 넌픽션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모두 필름 메이커의 입장이다. 영화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담론’의 일부이며 효과이다. 말할 것도 없이, 다큐멘터리에서 중요한 것은 ‘현실’이 아니라 현실을 보는 시선, 입장성(standpoint), 위치성(position), 당파성(partiality)이다. 이것은 보편, 중립, 객관을 넘어서는 다른 세계다.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는 자기 위치를 역사 속에서 자각한 당사자의 당파성에서 나온 작품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관객이 느끼는 쾌감(‘미학적 성취’)은 이러한 깨달음 때문이다. 

물론 당파성은 약자의 사실(facts)이나 과학이 아니라 부분적 지식(situated knowledge)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백인을 포함해 앎의 의지를 지닌 모든 이들에게 매우 설득력이 있다. 볼드윈은 진실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이나 보편성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보여준다. 우리가 알고 있는 흑인(사회적 약자)에 대한 통념은 거의 대부분 실제가 아니다. 그것을 알고 있는 당사자도 있고 그렇지 않은 당사자도 있다. 그래서 투명한, 인지 가능한 ‘당사자’와 사회적 실천으로서 ‘당사자성’은 다른 개념이다. 지배 세력이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히, 당사자성이다. (정희진, 지성과 당파성 -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 다큐매거진 DOCKING)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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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 열 시 수업을 듣기 위해 종로로 가던 버스, 졸다가 깨면 눈썹 사이로 들어오던 햇살의 이미지가 아직도 기억난다. 그리고 수업시간에 창으로 들어오던 봄빛, 창가를 자주 서성이던 선생님의 움직임, 말과 말 사이의 약간 긴 침묵마다 강연 제목처럼 꿈꾸는 듯 혹은 우울한 듯한 표정을 짓던 그 얼굴. 내가 2007년 4월에 처음 듣게 된 김진영 선생님의 벤야민 강의에서였다. 그때 옮겨둔 벤야민의 말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사랑 안에서 영원한 고향을 찾는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사랑 안에서 영원한 여행을 찾는다." 

선생님도 그랬을까. 나는 벤야민보다 벤야민을 이야기하는 그의 강연에 더 홀려버렸다. 이후 십 년간 그의 강의를 자주 혹은 긴 공백 이후 다시 찾았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강연에서 얻는 감정이나 주목하게 되는 지식도 달라졌던 것 같다. 이 과정이 앞으로도 당연히 계속될 거라 믿었고 살면서 그런 게 있다는 게 큰 의지가 됐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다시는 김진영의 강의를 들을 수 없다는 사실에 서러운 감정이 밀려왔다. 그렇게 위독하신 줄 알았으면 잠시라도 소통했을 텐데, 지난 십 년 동안 수업에 간간이 나타나던 일개 수강생이 있는데 내가 당신에게 정말 많은 걸 받았다고, 덕분에 내 영혼이 조금은 더 자유로워진 것 같다고. 정말 그랬으니까. 왠지 낯간지러운 자유라는 말을 지금만큼은 당당하게 쓸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강연은 하나의 체험이었다. 벤야민을, 바르트를, 아도르노를, 프루스트를, 또 그들을 매개하는 선생님의 말을 모조리 다 흡수하고 싶어 열중하다가도 어느 순간 말 하나, 문장 하나를 붙잡고 먼 곳으로 가 있는 나를 발견했고 가끔은 수업 내용과 전혀 상관없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면 선생님의 구두코가 보였다. 동그랗고, 단정하고, 소박하던. 좁은 바닥이 망망대해처럼 한없이 넓어지고 그 위에서 부드러우면서도 엄격하게 움직이던 구두코의 움직임. 언젠가 수업시간에 그렸던 그 구두코 그림이 내 방 어딘가 깊숙한 곳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선생님은 그게 자신이 바라는 바라고 했다. 강연을 듣다가 드는 딴 생각, 그게 진짜라고. 나 김진영이 하는 강의가 아니면 결코 유발될 수 없는 그런 효과가 있다고. 정말 그랬다. 그게 나를 자유롭게 했던 것 같다. 생애 첫 배낭여행을 떠나면서 그의 블로그에 있는 글들을 모조리 출력해서 가져갔었다. 한 장씩 읽으며 버렸고 잊고 싶지 않은 문장은 옮겨 적었다. 히말라야 자락에서 사라졌을 그의 글들. 그때 옮겨 적은 글이 있다. 

"바르트의 어머니가 또한 그랬던 것처럼, 할머니의 목소리를 평생 한번도, 그건 안된다, 라고 말해본 적이 없는 목소리 (R.바르트 『카메라 루시다』), 그러니까 죄와 회개 같은 건 알지도 못하는 묻지도 않는, 오로지 위안과 구원만을 알고 있는 절대적 사랑의 목소리."(김진영)

내가 마지막으로 들은 강연에서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생은 아이들 같은 것, 화초 같은 것." 자주 살피고 꾸준히 보살펴야 한다고. 그냥 이 말이 너무 예뻐서 자주 되뇌었다. 생은 아이들 같은 것, 화초 같은 것. 생은 아이들 같은 것, 화초 같은 것, 생은…….  

그러고 보니 그 강연의 마지막 시간에 선생님이 자신이 쓴 소설을 읽어주었다. 수줍으면서도 들뜬 목소리, 그리고 곧 멀리 날아갈 것처럼 꿈꾸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우울한 그 표정,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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