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0년 전의 일이다. 책을 쓰며 지새우던 밤. 자판기 커피를 뽑으러 나와서 올려보던 하늘의 희미한 별들만 기억에 남아 있다. 여느 ‘386세대’처럼 당시 나도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을 내적으로 방어하는 중이었다. 거의 10년 동안 나를 지탱해주던 하나의 신념체계가 무너졌다. 그 황량한 폐허 속에서 세계관의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처절하게 고민하던 시절. ‘미학 오디세이’는 그 시기에 내가 했던 독서와 고민의 초상이라 할 수 있다. 1권에 나오는 <장미의 이름>은 80년대의 독단에 대한 나의 개인적 반성이라 할 수 있다.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의 사명은 진리를 보고 웃도록, 진리가 웃도록 만드는 데 있는 거야. 유일한 진리는 진리에 대한 광적인 정열에서 우리가 해방되는 길을 배우는 데에 있기 때문이지.

80년대의 우리는 도서관의 호르헤 수사와 다르지 않아, “트리에르 지방에서 발생한 묵시론의 일파”를 광적으로 신봉했다. 언제더라? 내 친구 가운데 하나가 그 장의 함의를 간취하고는, 마르크스를 쉽게 내버린 나의 사상적 변절을 나무라기도 했다. 그는 제법 눈치가 빨랐으나, 정작 중요한 것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윌리엄과 아드소는 호르헤의 광신을 갖고 있지 않으나 신앙을 버리지는 않았다. 실제로 그 장은 “찬미예수”라는 아드소의 독백으로 끝난다. 내가 버린 것은 신앙이 아니라 광신이며, 마르크스가 아니라 그를 대하는 특정한 태도다.

진중권, 미학 오디세이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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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에서 한 아이가 정신없이 놀고 있다. 순간, 한 모퉁이에서 트럭이 돌진해온다.
아이는 갑자기 커다란 외침을 듣는다."빨리 피해!" 그 소리에 깜짝 놀란 아이는 자기도 모르게 옆으로 비켜선다. 세월이 함참이 지난 뒤, 그 아이는 승려가 되었다.
쉰이 넘은 어느날, 참선을 하다 삼매에 들었다. 순간, 눈앞에 한 아이가 골목에서 트럭에
치일 뻔한 장면이 나타난다. 노승은 전신으로 아이에게 메시지를 전한다. '빨리 피해!'
결국 그 옛날 자신을 구해준 목소리는 수십 년 뒤에 '자기' 였던 것.

정화 스님이 일본의 한 사찰에서 수행하실 떄 전해들은 이야기라고 한다.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나, 아니 과거의 나를 구한다고?
영화 터미네이터, 보르헤스의 소설 따위에 나오는 황당한 픽션이 아니다.
요컨대
미래와 과거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시작도 끝도 없이 맞닿아 있다.
그래서 ' 깨달으면 좋고, 미래만 좋은 게 아니라 과거까지 좋아진다.'

고미숙, 나비와 전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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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김인권, 유용주

인용 2008. 2. 25. 01:13


나른한
아득한 봄날
우리는 양지바른 곳을 골라 그를 심었다
언젠가 우리가 1층이나 2층 슬라브에서
아님 고층아파트 옥탑 아슬아슬
생의 곡예를
땀의 묘기를 보여주고 있을 때
그 다시 진달래로
그 다시 개나리로
그 다시 민들레로
피어나길 간절히 바라면서
뜨뜻미지근 우리들 일그러진 막노동 생애를
소주처럼 털어넣었다
그는 우리들에게 못 박는 법을 알려주었지
거푸집을 구축하는 법
철삿줄을 알맞게 조이는 법
수평과 수직을 정확하게 보는 법
해체작업을 쉽게 하는 법
무엇보다 사람 좋아하고 사랑하는 법
평생을 막노동판에서 일하다 결국
그 무대에서 쓰러진 행복 불행한 사람,
나른한 아득한 봄날
추운 겨울 파카 속 우는 듯한 사진을
우리들의 마음 깊이 다시 한 번 비벼 넣으며
해미 홍천리 고향 뒷산에
다독다독 그를 심었다
해마다 씀바귀로
해마다 냉이 달래
해마다 다북쑥으로 다시 돋아나라고
그의 딱딱한 흙가슴을 열고
맑은 소주 한 잔을
고루고루 뿌려주었다


-유용주 '스승 김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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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의 '행복 이데올로기'는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 이데올로기 앞에서 우울,고통,분노,슬픔 같은 것의 인간학적 중요성을 말한다는 건 소용없는 일 같아 보이죠. " 나는 행복해야 한다"는 명령이 사람들을 너무도 강하게 지배하고 있어서
다른 이야기를 하기가 민망할 정도예요. 누구나 행복하게 살고 싶어하죠. 행복의 욕구 그 자체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 겁니다.
문제는 행복이란 게 저만치 어디에 있다, 그걸 내가 잡기만 하면 된다고 조바심치는 데 있죠. 이런 생각 때문에 우리는 그때그때 우리가 하는 일에서, 매 순간의 우리의 판단과 선택과 행동에서 행복을 얻기보다는 행복을 붙잡기 위해 일한다고 생각합니다.
행복 그 자체가 목적이 되면 아주 위험한 사태가 벌어집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라면 아무리 나쁜 짓이라도 오케이, 고약한 자들과 손잡고 악과 동맹을 맺는 것도 오케이라는 게 되거든요. 이게 행복 이데올로기의 위험성입니다.

대담 중 도정일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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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

인용 2008. 2. 25. 01:10


진리의 행보는 우리가 쳐놓은 학문의 울타리 따윈 거들떠보지 않죠.
학문의 경계란 자연에 실재하는 게 아니라 우리 인간이 진리의 궤적을 추적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그어놓은 거니까요. 진리는 학문의 국경을 비웃기라도 하듯 마음대로 넘나드는데 우리 대부분은 스스로 만들어놓은 학문의 골방에 쭈그리고 앉아 창 틈으로 새어들어 오는 가는 빛줄기만 붙들고 평생 씨름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 단순히 학제 '간(inter)'연구로는 안 됩니다. 여러 학제를 단순히 통합하는 '멀티(multi)'학문으로도 부족합니다. 이제 '인터','멀티'라는 단순한 조합을 넘어서 '트랜스(trans)'를 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인문학과 자연과학뿐 아니라 모든 학문분과가 활발하게 소통하고 서로 굳게 닫은 빗장을 열어젖힐 수 있는 새로운 학문의 공간이 탄생해야 합니다.

최재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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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하고 화려하고 세련된
무수한 '겉도는 말'에 유혹당하지 않도록
서로를 도와주면서
우리의 삶을 토론할 수 있는
'말'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나자.
우리 삶 한가운데서 나오는 지식,
자신의 내면에서 삭혀져 나오는 글을 쓰자.
힘을 빼기보다 힘을 솟게 하는 글,
만병통치약을 바라는 조급함 속에서 쓴 글이 아니라
'우리'를 만들어 가는 여유와 즐거움 속에 쓴 글,
생각을 풀어주고 마음을 풀어주고 그런 글을 말이다.

 

조한혜정, 글읽기와 삶읽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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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비주류에 대한 애정은 꾸준한 거 같다.
A. 그들이 다수라서 그래. 수많은 비주류들 합치면 주류보다 훨씬 많아.

   비주류들이여, 주류의 음모에 놀아나지 말자. 주류가 부러워하는 비주류가 되자는 거야.
   <왕의 남자>에서 연산군이 광대를 보고 부러워하는 표정을 짓거든. 그게 그 영화의 주제야.

Q. 이준익 감독에 대한 기대가 있는데 부담은 느끼지 않나?
A.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부담은 없어. 빚을 다 청산했는데 이게 딜레마야.

   
결핍이 에너지를 생성하는 힘인데 그게 자꾸 채워지니까 헤매고 있는 중이야.

한겨레, 이준익 감독 인터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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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타인이 내 삶에 개입되는 것 못지 않게 내가 타인의 삶에 개입되는 것을 번거롭게 여겨왔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그에게 편견을 품게 되었다는 뜻일 터인데 나로서는 내게 편견을 품고 있는
사람의 기대에 따른다는 것이 보통 귀찮은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할 일이란 그가 나와 어떻게 다른지를 되도록 빨리 알고 받아들이는 일뿐이다.



달을 보았으면 손가락을 잊어버리고 지붕 위에 올랐으면 사다리를 잊어버리고
개울을 건넜으면 징검다리를 돌아보지 않으며 ...
이게 다 깨달음을 얻었으면 그것을 표현하는 말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이예요




 
은희경, 타인에게 말 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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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으로 파괴된 세대가 스스로를 바꾸는 일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 몰라. 절망은 당신과 같은 다음 세대가 지난 세대를 답습하기 대문에 발생하는 거야.


"어머니...큰 배움이 없었지만 우리 형제들에게 늘 사람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서 말씀하셨죠."
"어떤 마음가짐요?"
"뭐 별것 아냐. 친구를 만나면, 먼저 어떻게 하면 이 친구와 즐겁게 지낼 것인가를 생각하는 마음가짐, 함께 지낼 때는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헤어질 대 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지를 생각하는, 뭐 그런 마음가짐..


"자식아, 죽었다고 다 없는 것이고, 살아 있다고 다 있는 것인 줄 아니."




방현석, 랍스터를 먹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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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권원칙을 논리적으로 확대하면 여러 가지 새로운 형태의 인권이슈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인권은 그런 식으로 발전하고 확장된다. 하지만 보통사람들이 일부 새로운 인권이슈들을 자기 삶과 동떨어진 비현실적인 문제로 느끼는 인식상의 격차가 생기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인식상의 격차를 줄이고, 새로운 유형의 인권이 결국 모든 사람의 존엄성을 보호하는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된다는 논리를 적극적으로 개발해야 하는 것도 인권운동의 과제다. 선진국과 개도국의 인권의식에 있어서도 이와 유사한 격차가 발생하곤 한다.



조효제, 인권의 문법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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