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뭔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무엇을 하면 좋을지 조금도 어림잡을 수 없었습니다. 흡사 안개 속에 갇힌 고독한 인간처럼 꼼짝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고서 어디에서 한 줄기 빛이 비치지 않을까 기대하며 희망을 품기보다는 내 쪽에서 탐조등을 사용해서 오직 한 줄기 빛이라도 좋으니 끝까지 밝게 보고 싶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어느 쪽을 쳐다보아도 희미했습니다. 어렴풋한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자루 속에 갇혀서 나올 수 없는 인간과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나는 '내 손에 단 한자루의 송곳만 있으면 어딘가 한 군데 뚫어 보여주고 싶은데' 하며 조바심쳤지만 공교롭게 그 송곳은 남이 전해주지도 않았고 또 자신이 발견할 수도 없어서 그저 마음속으로 '앞으로 나는 어떻게 될까?' 라고 생각하며 사람들 몰래 우울한 날을 보냈습니다.

-나쓰메 소세키, '나의 개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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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인용 2008. 3. 30. 22:51


1. 가장 맛있는 음식이라고 하는 것은, 굶기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도달된 어떤 것이고,
글쓰기로 보게 되면 의미거부(언어의 무의미화)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도달된 어떤 것이다
_소설의 미로-이야기 혹은 화이트노이즈


2. 남성지배적인 직업과 정치적 권력을 가진 위치에 있는 여성의 운동은 페미니즘의 진보라고 자유주의자들은 주장했다. 그러나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은 가부장적 위계질서에 존재하는 기존의 조건에서도 남성과 경쟁함으로써 가부장제에 도전할 수 있다는 생각을 분명히 거부한다. 오히려 그들은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을 무력하게 하는 방법, 페미니즘이 다른 조건에서 여성에게 권력을 부여하게 되는 방법에 주목한다.
_페미니즘 무엇이 문제인가/캐롤린 라마자노글루


3. 나는 때로 그들이 말하는 관념의 높이에 아찔한 현기증이 느껴진다

맑스가 100년 전에 했던 말이 아니라, 맑스가 100년 전에 했던 그 일을 하라    _진중권


4. 민중의 삶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민중에 대한 주관적인 열정이나 소시민적 삶에 대한 일방적인 폐기처분에 의해서가 아니라 소시민적 자기 기반과의 끊임없는 마찰과 긴장 속에서 얻어진다 _하종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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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인용 2008. 3. 29. 17:05

깨끗하게 연을 끊고, 누구도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또다시 새로운 관계가 생겨나겠지.
그리고 문득 깨닫고 보면, 파국을 맞이하고 있겠지.
그 의미 따윈 생각하지 않고 그저 되풀이하고 있다보면 인생도 결국 끝이 나게 될까? 눈앞의 이 자그마한 할머니는 그런 일들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 왔을까?

                                                          혼자있기 좋은 날, 아오야마 나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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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주의 감상..

인용 2008. 3. 29. 11:57

자라나는 '신세대'는 무엇이든 거머쥐면 놓지 않으려는 편집광적 부모 세대를 보면서, 그들의 절도 없는 소유욕과 비합리적 언어를 대하면서 경멸과 환멸감에 젖어 있다. 부모들의 고질병에 스스로 분열증적 환자가 되지 않을 수 없겠다고 위협을 해보기도 한다. 가족주의적 집단에 의해 심하게 수단화되었다고 느끼는 많은 젊은이들이 생겨나고 있고, 그들은 오히려 고아가 되고 싶어한다. 그래서 기존의 가족 집단으로부터 탈출을 감행한다.

  그러나 이들이 스스로 개체로서 설 노력을 하거나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가기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그들이 여전히 자신의 응석을 받아 주던 '엉겨붙어 사는 가족'의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길을 찾기보다는 자신의 파편화된 삶을 통합시켜 줄 '원초적' 집단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언어를 만들어 가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함께 무엇을 만들어 가기보다 '집단주의적 감상'에 여전히 기대고 싶어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신세대 전위 집단들은 기성 세대의 위선적 도덕주의에 정면으로 도전을 하기도 하지만 일상으로 돌아오면 여전히 응석받이의 언어를 쓸 것이라는 혐의를 거두어 들일 수 없다. 그들은 미국에서 '삶의 양식'을 변화시키는 데 커다란 선풍을 일으켰던 반문화 운동가들을 부러워하고, 1968년 프랑스 5월 항쟁을 주도한 신세대 청년들을 부러워하지만, 막상 자신들의 삶을 일구어 가려 할 때면 쉽게 지쳐 버린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신세대들은 가족으로부터 충분히 분화되어 있지도 못하고 가족주의적 언어가 아닌 언어를 별로 들어 본 적도 없는 것이다.

                                                                                     글 읽기 삶 읽기/조한혜정(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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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중권 칼럼] 좌충우돌 20일을 평가한다  
 

 
  "새 정부가 탄생한 지 20일이 됐는데 내 생각에는 한 6개월쯤 된 것 같다".
 
  대한민국 1%를 섬기는 정부. 겨우 출범 20일 만에 피로감을 호소한다. 대통령 따라 배우기 운동 하느라 새벽잠을 못 자 하루 종일 '어리버리(early bird)'한 증상을 호소한다는 공무원의 처지에 관한 얘기라면, 이해가 간다. 또 출범 20일 만에 한꺼번에 노무현 정권 5년 치의 피로감을 느껴야 하는 불쌍한 국민들의 처지를 말하는 것이라면 이해가 간다. 대통령과 장관은 도대체 그 동안 뭘 했다고 그렇게 피곤할까?
 
  듣자 하니, "취임식 날 저녁 청와대에 들어갔는데 컴퓨터가 작동하지 않았고 열흘이 지나도 정상 작동하지 않았다"고 한다. 도대체 인수위는 그 동안 뭘 했던가? 오렌지를 '오륀지'로 표기해야 국가 경쟁력이 살아난다고 농담할 시간은 있으면서, 정작 청와대 업무의 인수인계를 챙길 시간은 없었단 말인가? 게다가 컴퓨터도 작동 안 했다면서, 청와대에 들어가 제일 먼저 한 일이 기껏 인테리어 바꾸는 공사였던가?
 
  노무현 정권이 청와대에 들어가 e-정부 시스템이라도 구축해 놓은 반면, 이명박 정권은 들어오자마자 테이블 갈고 칸막이 치우는 공사부터 했다는 사실. 또 e-정부 시스템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내에서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는 반면, 이명박 정권은 청와대에 들어가 열흘 동안 컴퓨터 사용을 못 했다는 사실. 이는 매우 상징적이다. 그런데 이건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이명박 대통령, 혹시… 컴퓨터 전원은 켜셨나요?
   
  보잉 747
 
  연속 7% 성장을 할 거라고 장담하더니, 갑자기 '경제 위기' 운운한다. 그저 집권하는 것만으로도 주가를 3000까지 끌어올리겠다던 슈퍼맨의 출현을, 증시는 1600의 폭락 장세로 환영한다. 어찌 된 일일까? 간단하다. 슈퍼맨이 나타나 경제를 살린다는 믿음 자체가 환상이라는 것이다. 한국 경제는 이미 세계 경제에 깊숙이 편입되어 있어, 한국 혼자서, 그것도 대통령 혼자서 살릴 수 있는 그런 게 아니다.
 
  이명박 정권에 기대감을 갖고 표를 던진 사람들. 그들은 '시장경제 살린다'고 하니 '재래시장 살린다'고 생각해 그에게 표를 던진 시장 할머니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게 어디 이 할머니들의 잘못이겠는가? 시장경제 살린다며 사진을 찍으러 재래시장으로 달려가니, 순박한 이들은 당연히 그 말을 그렇게 알아듣지 않겠는가? 이것이 바로 '민생 행보'라는 이름의 포토제닉 이벤트가 만들어내는 웃지 못 할 해프닝이다.
 
  아무튼 멋지게 보잉 747기에 오르려던 승객들. 탑승하려다가 보니, '보잉 747'이 아니다. 한나라투어에서 마련한 탑승기는 동체에 '뼁끼'로 747이라 쓴 쌍발 프로펠러기. 매직으로 'nike'라고 쓴 고무신이라고 할까? 뭘 더 바라겠는가. 싸구려 저가 여행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다. 그저 선진 랜드로 데려다 준다던 이 비행기가 캄보디아 정글에 추락하는 일만은 없기를 바라는 게 더 현실적일 것이다.
 
  법인세 인하
 
  'MB노믹스'는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수사법으로 이루어져 있다. △"큰 시장, 작은 정부가 경제를 살린다"는 최신 유행의 신자유주의 레토릭과, △대통령만 바뀌어도 경제가 성장한다"는 박통시절의 시대착오적 레토릭. 이 두 요소는 원래 서로 잘 안 어울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자는 시장주도의 성장전략, 후자는 정부주도의 성장전력이기 때문이다. 물론 2MB 용량의 두뇌에서라면 이 둘은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 게다.
 
  신자유주의 전략은 법인세 인하, 출자총액제한제도 폐지와 같은 규제 완화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제까지의 연구는 대체로 법인세 인하가 경제성장률을 제고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결과를 보여준다. 가령 미국에서 법인세, 소득세 인하는 반짝 효과에 그쳤을 뿐이다. 외려 세수의 감소를 가져와, 의회에서 감세안의 입법을 추진할 경우 세수결손을 충당할 방안까지 덧붙이라는 법안이 만들어질 정도였다.
 
  일본은 법인세, 소득세 낮춰서 재정이 파탄이 나는 바람에 이류국가로 전락한 경우. 일본인들은 감면해준 세금을 저축하는 행태를 보였단다. 우리의 경우에도 그 동안 10% 가령 법인세를 낮춰왔으나 성장률 제고 효과는 확인되지 않는다. 외려 기업들 사이에 빈부격차만 확대했다는 게 정설. 기업들은 세율인하로 획득한 자금을 사내유보금으로 적립하여, 자사주 방어에 사용하곤 했다. 지금 대기업들이 돈이 부족해 투자를 안 하는 게 아니다.
 
  실제로 인터넷으로 기사들을 검색해 보라. 법인세 인하가 경제성장률을 제고할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이 내놓는 근거는 놀라울 정도로 빈약하다. 그저 '외국에서 법인세 인하 경쟁을 하고 있으니, 우리도 해야 한다'는 식이다. 이게 MB노믹스의 이론적 토대다. 노무현 정권도 이미 법인세를 2% 낮춘 바 있다. 그런데 그게 성장률을 높이는 데에 도움이 됐다는 얘기는 없다. 거기서 다시 5%를 낮춘다고 뭐가 달라질까?
 
  출총제 폐지
 
  '비즈니스 프렌들리' 정권에서 추진하는 출총제 폐지도 마찬가지다. 출총제는 그 동안 이미 상당히 완화되어 있어, 투자 제약 효과랄 게 별로 없단다. 이것은 출총제를 폐지해도 투자 증대 효과가 크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느 보도에 따르면, 설문조사에서 출총제가 폐지될 경우 투자를 하겠다고 대답한 기업은 고작 1%에 불과했으며, 투자를 검토해보겠다고 한 기업의 수도 11%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와의 간담회에서, 중소기업의 92%가 현재 출총제 폐지에 반대한다는 얘기가 나왔다고 한다. 이 압도적인 반대는 대기업의 문어발식 사업 확장을 중소기업들이 매우 두려워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문제는 우리나라에서 고용의 88%를 담당하고 있는 게 중소기업이라는 사실이다. 보수언론에서는 대기업이 온 나라를 다 먹여 살린다고 말하나, 실제로 대기업의 고용기여율은 외려 해마다 떨어지고 있다.
 
  일본의 기술입국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 기술 생태계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이 애써 기술혁신을 해놓으면, 그 성과는 대기업에서 모조리 가져가는 게 대한민국의 거래 관행이다. 대기업이 아무리 잘 나가도, 그 효과가 전체 경제로 파급되지 못하는 것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산업 연관성이 파괴되어 있기 때문이다. 출총제 폐지는 중소기업인이 우려하듯이 이런 비정상을 더 강화하기 쉽다.
 
  MB 정권은 규제란 게 왜 존재하는지 잊은 모양이다. 기업은 사익을 추구하고, 정부는 공익을 추구한다. 그래서 사익의 추구가 공익에 위배되지 않도록 늘 적절한 규제와 감독이 필요한 것이다. 문제가 터질 때마다 '사태가 저 지경이 되도록 정부나 지자체는 뭐 했냐?'는 게 늘 언론의 상투적 마무리 멘트가 아니던가? 성과급까지 걸어놓고 규제완화 경쟁을 일으키는 앞으로 전국 곳곳에서 남대문을 불타오르게 할 것이다.
 
  대운하를 위한 삽질
 
  효과는 변변치 않고, 부작용은 만만치 않다. MB 정권 사람들의 두개골에 뇌라는 기관이 담겨 있다면(열어보지 않아서 독자들에게 확인해 드릴 수 없다), 이걸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 정부 주도로 성장을 주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놓은 것이 대운하 사업이다. '대운하사업을 민간 자본을 유치해 하겠다'는 개그는, 신자유주의 정책과 정부주도의 성장이라는 서로 모순되는 요소를 억지로 결합해 놓은 것이다.
 
  그래도 노무현 정권은 욕을 먹어가면서 인위적 경기부양은 삼갔다. 김대중 정권 시절에 일어난 카드 대란처럼 그 부작용이 만만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모든 도덕적 타락에도 불구하고 오직 '경제를 살리겠다'는 구호 하나로 당선된 정권은 처지가 다르다.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경기가 살아난다는 것을 가시적으로 보여줘야 한다. '경기'를 '경제'로 착각하는 생각은 이런 정치적 동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잠재성장률을 2%나 상회하는 성장. 이는 '뽕'을 맞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 뽕이 대운하 사업이다. 하지만 약물 투입으로 성적을 올린들, 몸이 망가지면 무슨 소용 있겠는가? 그냥 땅을 팠다가 다시 묻는 삽질로도 건설 경기는 살릴 수 있다. 하지만 대운하는 생태와 환경을 망가뜨리고, 그것을 복구하는 데에는 천문학적 액수의 비용이 든다. 그러니 운하보다는 그냥 땅을 팠다가 다시 묻는 사업 쪽이 차라리 더 경제적이다.
 
  물류혁명이라고 하더니 이제는 관광혁명이란다. 제 돈 내고 3시간 동안 24㎞짜리 터널에 들어갔다가 나와 LG 창업주 생가, 박정희 생가를 들러볼 '또라이'들이 한국에만 100만 명, 중국에 1000만 명이라고 한다. 독특한 취향을 가진 이런 관광객들을 위해라면, 차라리 서울시와 협조 하에 맨홀 뚜껑 열고 들어가는, 24km짜리 서울시 하수구 탐방 코스를 관광 상품으로 내놓는 게 낫지 않을까?
 
  만인의 웃음거리가 되자, 이번 총선 공약에서 대운하를 슬쩍 빼겠다고 한다. 이제는 아예 대놓고 대국민 사기극을 벌이겠단다. 자기들이 말하는 경제 살리기의 핵심이 대운하 사업이 아니던가? 자기들이 말하는 경쟁력 강화의 핵심이 영어 몰입 교육 아니던가? 그런데 왜 유권자의 심판을 받는 총선에서 정작 핵심 공약을 빼버린다. 한 마디로 일단 다수당이 된 다음, 그 여세를 몰아 곧바로 대운하 사업을 밀어붙이겠다는 얘기다.
 
  포토제닉의 전시행정
 
  사실 대통령도 답답할 것이다. 경제 살린다는 구호로 당선은 됐는데, 경제를 살릴 뾰족한 수는 없고. '경제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는 유인촌 주연의 드라마에서 나온 허구일 뿐이다. 현실은 허구와 다르다. 사실 그는 진짜로 경제를 살리는 방법을 모른다. 그러다 보니 경제 살리는 시늉을 하는 데에 치중하게 되는 것이다. 사진으로 구축된 이미지로 대통령 자리에 올랐으니, 그 자리를 유지하는 것도 동일한 방법으로 할 수밖에 없다.
 
  당선인 시절 그는 대불공단의 '전봇대'를 뽑았다. 이 이벤트는 물론 '전 정권의 무능'과 '새 정권의 효율'을 강조하는 시각적 상징으로, 당시에는 제법 설득력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가 사진을 찍고 지나간 그 자리에 무엇이 남았던가? 전봇대를 불평하던 그 트럭들이 과적으로 마구 망가뜨린 도로가 남았다. 물론 그것을 보수하는 것은 국민의 세금으로 해야 할 일이다.
 
  사관학교 행사에서는 연단을 없애더니, 청와대에 들어와서는 탁자를 원탁으로 바꾸고, 칸막이를 없애 버렸다. 이 격식파괴는 언뜻 노무현식 권위주의 해체로 보이나, 본질은 전혀 다르다. 모든 일에 일일이 참견하고 간섭하는 것은 그가 타인의 능력을 못 믿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명박식 격식 파괴의 악센트는 '실용'에 가 있다. 즉 자신이 정치적 형식주의를 기업적 실용주의로 바꾸어 놓고 있다는 메시지다.
 
  아침 일찍 출근해 샌드위치 먹는 것도 같은 맥락. 연구에 따르면 아침형 인간이나, 저녁형 인간이나 능력과 성과에는 아무 차이가 없단다. 괜히 대통령 따라해야 하는 장관 따라 해야 하는 국장 따라해야 하는 과장 따라 해야 하는 말단 공무원들이 안 됐다. 그는 하루 4시간 자는 능력을 과시하는데, 본디 '잠'이란 뇌가 휴식하는 현상, 아예 생각을 안 하고 사는 이는 하루 네 시간 잠만으로 충분할 게다.
 
  북조선식 현장 정치
 
  이 모든 포토제닉 이벤트는 결국 '일하는 대통령'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것이다. 성장에 대한 기대감을 부추겨 당선이 되었으나, 경제를 살리는 데 쓸 수단은 한정되어 있다. 국민들의 불만이 늘어갈수록, 그는 더욱 더 그것을 불만을 무마하기 위한 시각적 이벤트에 집착할 것이다. 기업을 향해서는 VIP룸의 개방, 핫라인의 개설, 서민을 향해서는 현장 방문의 이벤트를 강화할 것이다.
 
  이명박의 리더십이 북조선을 닮았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다. 그는 손수 '새벽별 보기 운동'을 실천하며, 공무원들에게 '천 삽 뜨고 허리 한 번 펴기 운동'을 주문한다. 현장에 강림하여 인민을 감동시키는 것(노무현의 경우, 괜히 민폐나 끼친다고 현장 방문을 되도록 삼갔다.), 현장을 방문해 사소한 것에까지 시시콜콜 교시를 내리는 것, 주변을 자기 심복으로만 채우는 것도 영락없이 수령 동지의 스타일이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걸까? 아마도 그의 의식이 수령 동지의 의식과 비슷하기 때문일 게다. 북조선에서 수령은 뇌수, 인민은 수족으로 여겨진다. 이명박 대통령의 의식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북조선에서 온 인민이 수령 덕에 살아가듯이, 그도 남조선 인민의 살 길은 오로지 자신만이 개척할 수 있다고 믿을 것이다. 그의 일인독재 스타일은 도취에 가까운 자기환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미래를 전망(prospect)할 능력이 없는 사람의 눈은 과거로 돌아가기(retrospect) 마련이다. 미래를 향해 기획(project)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제 꿈을 과거로 거꾸로 던질(retroject) 수밖에 없다. MB의 통치 스타일은 남조선의 박정희와, 북조선의 김일성이 경쟁을 하던 시절에나 통하던 것. 이 과도한 시대착오가 <조선일보> 눈에도 우습게 보였던 모양이다. 대통령에게 좀 더 큰 것에 관심을 가지라고 주문하는 것을 보니….
 
  한편으로는 '경제 대통령'이라는 강력한 카리스마, 다른 한편으로는 '큰 시장, 작은 정부'라는 신자유주의 이념. 양자는 충돌할 수밖에 없다. 생각해 보라. '작은' 정부로 어떻게 '큰' 시장을 살린단 말인가? 그것은 '동그란 삼각형'과 같은 형용모순이다. 이명박 정권의 자가당착, 자기모순, 좌충우돌은 바로 이 태생적 한계에서 비롯된다. 원칙과 철학 없이 우왕좌왕하는 행태는 앞으로 5년간 계속 반복될 것이다.
 
  최근의 예를 들어 보자. 그는 영어 교육의 강화를 위해 더 많은 교사를 확보하여 투입하겠다고 약속했다. 며칠 전에는 화성을 방문하여 '살인의 추억'이 있는 그곳에 경찰서가 없어서야 말이 되냐며, 다른 것은 몰라도 경찰 인력만은 늘리겠다고 말한다. 문제는 경찰과 교사는 공무원이라는 사실. 전 정권에서 공무원을 6만 명이나 증원했다고 비난했던 게 한나라당이다. 그런데 전 정권에서 늘린 공무원의 압도적 다수는 교사와 경찰이었다. 
   
 
 
  진중권/중앙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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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박 정부야말로 진짜 이념정부가 아닌가?
 
  노무현 정부는 보수언론과 학계의 '정답'과 달리 이념정부보다 오히려 실용정부에 더 가깝다. 그렇다면 이제 '실용정부'를 표방하는 이명박 정부가 과연 실용적인지 그 '정답'을 검증할 차례다.
 
  한국적인 맥락으로 볼 때 이념정부란 특정 이념에 갇혀서 정책목표, 정책수단, 정책구호 등이 경직적으로 그 특정한 이념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고, 정부의 요직도 같은 이념을 공유하는, 즉 코드가 맞는 사람들로만 채워진 정부를 의미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념은 사회주의 이념과 같은 좌파 이념뿐만이 아니라 우파 이념을 포함한 다양한 세계관 즉, 사회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모든 체계적 사고의 집합을 지칭한다. (한국에서는 좌파 이념만 이념이라고 생각하는 공부가 제대로 안 된 사람도 많이 있는 듯하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이념을 굳세게 따랐던 영국의 대처 정부, 미국의 레이건 정부, 현 조지 W. 부시 정부 등도 이념정부다. 그리고 나치즘을 신봉했던 독일 나치정부도 이념정부라고 할 수 있다.
 
  출범한 지 아직 한 달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이 이명박 정부의 실용주의를 완전하게 검증하고 판단할 수 있는 적절한 시기는 아니다. 그렇지만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나온 발언과 정책방향, 정부 출범 후 나온 인사, 그리고 이 대통령의 발언과 행보를 종합해 볼 때, 이명박 정부는 현재로서는 노무현 정부보다 훨씬 더 이념성을 많이 띤 이념정부에 가깝고 그 이념은 신자유주의와 개발주의가 복합된 '변종 신자유주의'라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적인 요소
 
  이명박 정부는 인수위 때부터 작은 정부, 민영화, 규제완화, 시장원리에 의한 경쟁, 감세, 노동시장의 유연성, 사회복지의 축소 내지 시장화 등을 강조해 왔다. 잘 알다시피 이러한 내용은 대처, 레이건, 현 부시 정부가 고수한 신자유주의의 금칙과 같은 것이다.
 
  아주 단순히 요약하자면 신자유주의는 다음과 같은 경제운용의 원리를 포함하고 있다. (1) 정부에 의한 시장 개입은 시장실패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최소화해 시장이 자유롭게 작동할 수 있도록 한다. (2) 이러한 시장에서는 기업이 세금과 규제, 그리고 경직된 노동시장의 부담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경쟁하고 기업의 수익률도 올라간다. (3) 기업이 잘 되면 궁극적으로 국가 경제가 성장하고, 그래서 실업도 감소하고, 세수도 늘어난다. (레이건 대통령 당시에는 이를 공급중시경제학(Supply-side Economics)이라고도 불렀다)
 
  정책적으로 이명박 정부는 정부기구의 축소, 법인세·종부세·양도세 감세, 재벌기업에 대한 출자총액제한제 폐지, 금융산업 구조개선을 위한 법률(금산법)' 완화, 수도권 규제 완화, 공기업 민영화, 사회복지의 축소, 건강보험 민영화 등 신자유주의 이념에 너무나도 충실한 경제 정책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교육정책도 신자유주의의 원칙 아래 시장과 경쟁에 충실하게 나아가고 있다. 노동정책도 정규직의 확대보다는 시장의 원리에 따라 자유롭고 유연하게 노동의 수급이 이루어지는 것을 최선의 가치로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이명박 정부는 정책방향에서 볼 때 신자유주의 이념에 매우 충실한 이념정부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인사를 보더라도 경제뿐만 아니라 교육, 노동, 복지, 환경, 문화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신자유주의의 이념을 공유하거나 저항 없이 따르는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 각 부처의 장관들은 그 부문의 전문성보다는 신자유주의적인 이념을 공유하면서 신자유주의의 혜택을 주로 보았거나, 앞으로 볼 상류층 사람들로 대부분 채워져 있다. 상당수는 개인적으로 시장에서 막대한 부를 축적한 것을 시장에 잘 적응하는 경쟁력 혹은 능력으로 인식하고, 그러지 못한 사람은 시장에 적응하지 못하는 바보로 치부하는 경향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정책방향과 인사는 왜 문제일까? 이를 아주 단순하게 이해하기 위해 신자유주의의 경제 메커니즘에 대한 한 가지 예를 들어본다.
 
  대기업의 임원진은 보통 평사원과 달리 억대의 어마어마한 연봉을 받아간다. 평사원과 노동시간을 기준으로 비교할 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차이다. 이에 대해 신자유주의는 이렇게 설명한다. '회사의 이익창출에 기여하는 만큼 연봉을 받아가는 것이 시장논리다. 임원진이 기여하는 부분이 일반 평사원보다 훨씬 높아 연봉이 그만큼 차이 나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기여도와 연봉을 어떻게 기계적으로 계산하는지에 논란이 있겠지만 일단 여기까지 인정하기로 하자. 그렇다면 회사가 경영난에 허덕이고, 적자를 보는 상황에 돌입하면 어떠한 일이 발생할까? 이 경우 불행하게도 신자유주의는 임원진을 고용조정하기보다는 일반 평사원 아니면 비정규직을 노동시장의 유연성이라는 이름으로 고용조정 할 것을 권고한다.
 
  물론 임원진도 감봉을 당하겠지만 그 고통은 평사원이나 비정규직이 직장을 잃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는 일부 임원진이 책임을 지고 물러나지만 대개의 경우 이들은 새로운 회사에 다시 임원진으로 채용되거나 그 동안 벌어놓은 막대한 자산(부동산, 예금, 주식, 펀드 등)으로 평사원이나 비정규직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안정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이렇게 신자유주의는 경제가 잘 나갈 때 상위층이 엄청나게 버는 것을 당연시하는 한편, 경제가 안 나갈 때는 노동시장의 유연성이라는 이름으로 하위층이 책임을 지게 한다.
 
  거기다 사회보장을 최소화하거나 민영화를 하게 되면 자산소득이 많은 상위층은 노동시장에서 잠시 물러나 있어도 질 좋은 사회보장과 의료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있지만 노동시장에서 벗어난 중·하위층은 그런 혜택에 접근하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물론 경기가 좋아지면 노동시장의 유연성이라는 이름으로 실업자의 재취업이 가능하게 되지만, 국가경제의 구조가 상위층의 소비력에 의존하는 것으로 되어 버리면 경기회복이 전반적인 고용확대로 이어지기 어렵다. 게다가 지식 서비스, 하이테크 산업이 경제의 핵심으로 자리 잡게 되면 상위층의 고급인력 이외에는 취업의 기회가 많이 늘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이러한 신자유주의 이념에 충실해 신자유주의 정책을 급속도로 도입하게 되면 정부가 1997년 금융위기 이후 개혁을 위해 시장의 강자(재벌)들을 묶어 놓았던 규제를 거의 다 풀어줄 수 있다. 재벌기업들을 규제한 이유는 무분별한 확장과 건전치 못한 지배구조를 가지고 금융위기에 기여했기 때문인데도 말이다.
 
  규제를 갑자기 풀면 시장이 매우 불균형·불균등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는 법인세 감세, 출총제 폐지, 금산법 완화, 사회복지 시장화, 노동시장 유연성 강화는 한국의 경제구조를 재벌기업과, 이미 상당한 자산을 가진 자에게 특혜를 주는 구조로 급속히 바꿀 것이다.
 
  금융시장의 장기적 안정도 담보하기 어렵다. 신자유주의 선진국인 미국의 서브 프라임사태 및 계속 되는 금융 불안이 보여주는 것과 같이 근본주의적인 신자유주의에서는 시장이 방향감각을 쉽게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신자유주의는 상위층이 확대한 부를 사회전반으로 흘려보내는 적하효과 (trickle-down effect)를 이념적·이론적으로 강조하고 있으나 실제로 상위층은 경제가 잘 나갈 때 훨씬 많이 취하고, 경제가 안 나갈 때 중하위 층을 희생양으로 삼기 때문에 적하효과는 매우 제한적이다. 반대로 미국, 일본, 영국 등 신자유주의 정책을 도입한 정부 하에서 격차가 확대된 것이 증명되고 있고 적하효과는 검증되지 않고 있다.

 
  박정희식 개발주의의 결합
 
  이러한 신자유주의에 소위 '개발주의'가 접합되면 정부는 시장의 강자를 위해 매우 강력한 협력체제를 구축하게 된다. 즉 위에서 기술한 대기업과 상위층에 대한 특혜에 장애가 되는 것을 정부는 강력한 힘으로 제거해 나가는 역할을 하게 된다. 민영화에 대한 저항세력, 사회복지 축소에 대한 반발세력, 비정규직의 농성, 노동자의 파업 등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세력은 강력한 국가의 힘으로 제거되고, 그 과정은 박정희식 개발독재의 형태를 띠게 된다.
 
  아직 이명박 정부가 박정희식 개발주의의 모습을 전면적으로 보여주고 있지 않지만 코스콤 비정규직 농성에 대한 물리력의 동원, 대운하 발상, 노조에 대한 인식, 법치에 대한 인식, 소위 '좌파세력 척결'과 같은 구호 등을 보건대 개발주의적 사고는 이명박 정부에서 이미 넘쳐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박정희식 개발주의는 핵심적으로 투입(input)을 늘려서 산출(output)을 증가시키는 매우 초보적인 경제발전 모형이다. 투입을 늘리기 위해 국가는 강제적으로 투입을 동원(mobilization)하는 역할을 한다. 과거 개발 독재 시절에는 안정적인 투입을 위해 국가가 노동을 통제하고, 재벌기업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며, 국민의 '정신력'을 고양해 노동시간을 늘렸다.
 
  그때는 그것이 가능했다. 높은 경제성장(output)을 이루어 냈다. 그러나 경제가 성숙해 지면 경제성장에는 투입보다 생산성의 향상이 훨씬 중요해 진다. 정보, 지식, 하이테크, 서비스 산업을 지향하는 지금의 한국 경제는 정신력으로 무장해 새마을 운동을 하거나 노동을 통제해 노동 강도만을 높일 단계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이명박 정부의 패러다임은 운동장에서 구보하고, 새벽에 출근하고 한밤에 퇴근하며, 월화수목금금금 열심히 일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투입 위주의 개발주의 정신에 갇혀있다. 게다가 '비즈니스-프렌들리'라는 구호와 기업과의 핫라인 설치 등은 과거 재벌기업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던 개발주의의 관성에 지나니 않는다.
 
  사실 정부가 신자유주의의 원칙을 철저히 따른다면 정부가 비즈니스 프렌들리하기보다는 규제는 완화하되 쓰러지는 기업은 쓰러지도록 하고 시장에서 살아남는 기업은 간섭하지 않아야 한다. 대통령이 기업과 핫라인을 설치하고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외치면 기업들에게 오히려 개발주의적인 잘못된 시그널을 보내게 된다.

 
  Deja Vu: 정실 자본주의?
 
  이렇게 신자유주의와 개발주의라는 이념이 합쳐지면 시장에서 강자 중심의 지배 심화, 재벌기업과 정부와의 정경유착, 재벌기업에 대한 건전한 규제와 감시의 약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진다.
 
  이러한 그림은 어디서 많이 본 그림이다. 바로 97년 IMF경제위기 직전의 한국 정치경제다. 그때는 이것을 정실자본주의(crony capitalism)으로 불렀던 것으로 기억한다. 공교롭게도 지금 이명박 정부의 경제 요직은 금융위기 당시의 사람들로 다시 채워져 있다.
 
  강자 중심의 정치경제구도 재편과 함께 소수의 약자들에게 주어지는 안전장치가 순식간에 사라지면, 그리고 정부는 약자들이 스스로 살아남지 못하면 자연 도태되어야 한다고 방관한다면 앞으로 5년간의 이명박 정부는 참으로 피곤하고 힘든 나날이 될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진정으로 실용정부를 추구한다면 변종 신자유주의라는 이념의 덫에서 빨리 빠져나와 흑묘백묘의 정신으로 양극화 해소와 건전한 자본주의의 장기적 발전에 도움이 되는 정책을 편견 없이 연구·채택하고 그에 맞는 인사를 실용적으로 찾아내야 한다. 
   
 
 
  이근/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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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만리, 김소월

인용 2008. 3. 11. 21:56

말니지 못할만치 몸부림하며
마치 천리만리나 가고도 십흔
맘이라고나 하여 볼까
한줄기 쏜살갓치 버든 이 길로
줄곳 치다라 올나가면
불 붓는 산의, 불 붓는 산의
연기는 한두줄기 피어올나라



"불 붓는 산의, 불 붓는 산의 연기는 한두줄기 피어올나라"

봄,봄이잖아,봄이니까, 무언가를 향한 정념으로 나도 저만치 달떴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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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의 모든 날들이 그러할 것이다.
바람이 내 앞에 놓인 끝없는 시간을, 전혀 믿지 않는 것을 믿는 체하며
행복하게 살아야 할 그 지루한 나날들이 함성이 되어 숲을 흔들었다.

                                                                     -꿈꾸는 새, 오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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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글과 이어질 수 있는 중요한 내용


누더기 차별금지법 반대, 정체성의 정치학을 넘어서자 / 연구공간 수유+너머 연구원 현민

1.

지금까지 소수자 운동은 기존의 사회체계에 소수자들의 삶을 포함시키라는 요구로 나타났다. “우리에게도 너희와 같은 삶을 달라!” 인권의 보편성은 이를 매개하는 유일무이한 도구였다.
하지만 성공적으로(?) 추가될 때조차도, 소수자들의 삶은 특수, 예외, 주변의 자리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소수자들은 대표적인 사회복지 실천대상이었다.

소위 진보진영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한때 유용했던
슬로건은 “그래, 너희의 정치는 개인적인 것에 불과하지”라는 싸늘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소수자 운동은 계급, 민족과 같은 거대서사에 비하면 참 볼품없어 보였다.
그래서 ‘주변'운동이라는 꼬리표가 떨어질 날이 없었다.

궁리 끝에 우리는 개인의 실존적인 삶을 고백하기 시작했다. 정체성의 정치학. 예컨대 동성애를 ‘취향'의 문제로 취급하는 사람들에게 대응하기 위해서, 성적 지향이 노출될까봐 전전긍긍하는 동성애자들의 삶을 생생하게 드러냈다. 그렇게 우리는 다수자의 인정과 동의를 구하면서 이 운동의 중요성을 강변했다.

2.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을 시정하기 위한 차별금지법안은 보수 기독교계와 재계의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기존 20개의 차별 사유 중 7개가 삭제되었고, 구제조치는 실효성을
담보하기 어렵게 됐다. 보수 기독교계는 “동성애는 자기책임이 수반되는 행위로 인권보호로
접근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재계는 “학력이 명시된 것은 기업의 경영권에 대한 과도한 침해”라고 말했다. 유감스럽게도 삭제된 성적지향, 학력, 병력病歷, 범죄전력, 언어, 가족형태 및 가족구성, 출신국가는 하나같이 개인의 ‘책임'과 ‘자율성'의 영역이라는 혐의를 뒤집어쓰기 쉬운 것들이다.

어쩌면 우리는 보수 기독교계를 납득시키기 위해서 동성애DNA에 관한 논문을 실은 최신 과학저널을 인용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현대사회에서 과학만큼 동성애의 존재를 잘 입증할 수 있는 수단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우리는 그게 - 과학을 환원주의 논리와 결합시키는 것 -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지 또한 알고 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떤 정체성이 인위적이라는(만들어졌다는) 보수 기독교계의 지적에는 곱씹을만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정체성의 생산은 동시에 관계의 생산이기 때문이다. 권력이 정체성을 정체停滯시켰을 때, 비단 하나의 정체성을 주조하는 것만이 아니다. 하나의 정체성에 포함되기 위해 배제되어야 하는 영역이 있는 한편, 이를 통해 위치를
공고히 하는 영역도 있다. 나는 소수자 운동이 이 논리를 더욱 밀고나가서 소수자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가장 자연스럽다고 여겨지는 다수자조차 어떻게 만들어지고 위치 지워지는지를 드러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트랜스젠더를 ‘남성이 되고 싶은 여성' 혹은 ‘여성이 되고 싶은 남성'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남성이 되고 싶지만 질을 제거하고 싶지 않은' 트랜스젠더는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성애자들은 그런 트랜스젠더를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해부학적 수술은 다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서약을 받아내고, 이성애 관계를 맺을 것을 다짐한 다음에야 행해진다. 이때 만들어지는 것은 소수자 트랜스젠더만이 아니다. 동시에 다수자 남성과 여성도 만들어진다.

마찬가지로 비장애인들은 장애인용 화장실이 시각장애인이나 청각장애인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거꾸로 비장애인들은 장애인용 화장실을 보고, 자신이 장애인과 다른 세계 속에 살고 있다는 인식을 획득한다. 소수자 장애인이 만들어질 때 다수자 비장애인도 만들어진다. 이처럼 다수자와 소수자, 보편과 특수는 둘 다 권력의 산물이다.

4.

그러므로 나는 소수자 운동이 정체성의 정치학을 넘어서 권력의 이분법
(다수자/소수자, 보편/특수)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운동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병력, 가족형태, 범죄전력, 학력과 같은 범주들은 소수자의 정체성이라는 틀로는 연대하기 쉽지 않다. (한편 이번 사건을 계기로 성소수자 진영에서는 기존의 LGBT - Lesbiana·Gay·Bisexual·Transgender - 와 같은 범주가 아닌 퀴어queer 주체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하고 있다. 이는 고무적인 현상이다.) 나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명제를
추가하면서 기존의 소수자 운동에서 불명료했던 지점을 좀 더 분명히 하고자 한다.

첫째, 소수자 운동은 진보운동이다. 소수자 운동은 딱한 사람들의 처지를 돕는 운동이 아니다.
또한 특이한 사람들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주장하는 운동도 아니다. 소수자 운동은 미시권력을
문제 삼는데, 이때 ‘미시'는 소소하거나 사소한 영역이 아니다. 미시권력은 자본, 국가, 민족,
시장과 같은 거시권력이 매끄럽게 작동하기 위해서 (은폐되어야 하는) ‘전제들'을 구성한다.
가령 임금노동의 생산성이 확보되기 위해 가정은 쉼터가 되어야 한다. 가정이 쉼터가
되기 위해 여성은 돌봄의 미덕(?)을 지녀야 한다. 소수자 운동이 문제 삼아야 하는 건
정확히 이 차원이다. 정치철학자 샹탈 무페의 표현을 빌자면, 소수자 운동은 정치(통치)의 논리로 환원되지 않는 ‘정치적인 것'을 끊임없이
상기시켜야 한다.

둘째, 소수자 운동은 대중운동이다. 소수자 운동은 대중이 민족, 노동자와 같은 거대(?)범주로
포함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또한 소수자 운동은 개인이 어느 하나의 정체성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대중은 균질적이지 않고 혼성적이기 때문에, 권력의 분류학을
초과하기 마련이다. (심지어 한 명의 개인조차 그러하다.) 가령 질과 음경을 둘 다 가지고
태어난 양성구유자는 성소수자인가 장애인인가.
소수자 운동은 분류학 너머를 사고해야 한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가장 대중적일 수 있다.
 소수자 운동은 그동안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왔다. 하지만, 이제 이 질문은 “나는 어디에 있는가”로 바뀌어야 한다. 정체성에 대한 탐구는 진실을 찾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 질문은 권력의 좌표 안에서 현재의 위치를 인식하고 다른 소수자들과 연대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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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으면서 시작하자

인용 2008. 3. 9. 01:57

전체에는 외부가 없고 원자에는 내부가 없다



적을 선명히 함으로써 자기를 선명히 하려는 시도는, 자기를 오염시키는 내부의 타자들을 색출하는 동일자의 논리를 양산했다. 괴물과 싸우는 자의 최대 위험은 그 자신이 괴물로 돌변하는 것이다.

타자의 절대 권리를 희생자의 절대 권리에서 찾고, 그 절대 권리를 영원한 정의( justice)로
바꾸어내는 사유의 전개과정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우리는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의 삶보다 죽음을. 그가 삶 속에서 느꼈을 행복보다 십자가에서 느꼈을 지옥 같은 고통을 환기시킨 사제들, 그들이 어떻게 통치자가 되었는지를 생각해보라.
독재나 테러에 희생당한 자들의 얼굴을 활용하는 오늘날의 제국주의자들을 보라. 그들은 자신들의 침공이 희생자가 요구하는 무한한 정의에 대한 화답이라고 주장한다.



'스스로 프롤레타리아와 결합한 자코뱅당원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의 일부라고 선언했던 로자 룩셈부르크'


코뮨주의자란 그 자체로 활성화된 대중이면서 또한 대중을 활성하는 자이다.


우리는 구체적 실험에 대해 '그렇게 해서 세상이 바뀌겠냐'라고 묻는 사람들,
총체적 플랜을 제시하라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이렇게 답한다.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말'을 자신의 삶을 바꾸지 않는 변명으로 삼지 말라고.
중요한 것은 당신의 삶을 바꾸는 것이다.
그리고 여러 대안적 실험들을 소통시키고 확산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세상이 바뀐다.


우리는 결국에 웃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웃으면서 시작하자고 말한다.


                                                                                           '코뮨주의 선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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