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라 토끼야

인용 2010. 10. 12. 00:12

"어, 어, 어!" 토끼는 소리를 치고, 자기의 누이를 감싸려고 일어선다. 어머니는 비웃으면서, 급히 일어나 사라진다. 그들은 두 집 사이의 좁은 공지에 와있는데, 그와 소녀 두 사람 뿐이다. 소녀는 제니스 스프린저다. 그는 자기 어머니에 대해 설명을 해보려고 애를 쓴다. 제니스의 머리는 그의 어깨를 유순하게 쳐다본다. 그녀를 팔로 껴안을 때 그는 그녀의 두 눈에 핏발이 서려 있는 걸 알아챘다.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이 있지는 않아도 그는 여자의 호흡이 눈물 때문에 뜨거워져 있음을 느낀다. 두 사람은 저지 산의 레크레이션 홀 뒤로 와 있다. 뒤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나 있고 자꾸 밟아서 굳어진 벌거숭이 지면이 있고, 지면에 묻힌 깨어진 유리병 조각이 눈에 띈다. 벽 쪽에서 두 사람은 확성기로 펴져 나오는 웃음을 듣는다. 제니스는 핑크색 무도복을 입은 채 지금 울고 있다. 그는 심장이 마비된 것 같음을 느끼면서 어머니는 '나'를 지금 붙잡고 있을 뿐이라고 되풀이해서 말해보지만, 소녀는 계속해서 울고 있으며 그가 두려워하던대로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하고 피부가 천천히 뼈에서 뭉그러지기 시작한다. 한데 거기서 뼈는 더이상 밖으로 드러나지를 않고 밑에서 비져나오는 것은 좀 더 녹은 것뿐이다. 그는 두 손을 컵모양으로 오므리고 그 녹아내리는 것을 받아 다시 맞추어 놓아볼 생각을 한다. 그러나 살이 그의 손바닥에 둥글게 방울져 떨어지자 고기가 그 자신의 비명때문에 하얗게 변하고 만다. 

달려라 토끼야, 존 업다이크, p94



몸과 마음이 맥을 못 추리는 그런 꿈. 요즘 자주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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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리는 시간을 거슬러 순식간에 아기 시절로 돌아갔다. 그는 이제 막 엄마가 목욕시킨 아기였다. 엄마는 그를 타월로 감싸 햇살 가득한 장밋빛 방으로 데려갔다. 그녀는 타월을 풀고 그를 기분 좋은 새 타월에 누인 다음 가랑이에 분을 발라주며 우스갯소리를 하고 젤리 같은 그의 작은 배를 토닥거렸다. 그녀의 손이 젤리 같은 그의 작은 배에 닿으면 찰싹찰싹 하는 소리가 났다.
  빌리는 기분이 좋아서 목을 울리며 옹알이를 했다.


커트 보네거트가 쓴 '제 5도살장'에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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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같은 영혼들과의 대화, 그리고 어울림 
[미디어현장]정혜윤 CBS PD 
 
 
최근에 라디오 PD는 어떤 직업이냐는 순진한 질문을 자주 받게 되었다. “라디오 PD는 방송이 끝나면 참 한가하지요?”란 질문을 들으면 솔직히 억울하다기보다는 상큼한 바람이 머리를 날려주는 것만큼이나 시원하고 기분이 좋다.

어쨌든 그래서 라디오 PD란 어떤 직업인가 하는 질문을 내 자신에게도 던져보게 되었다. 내가 처음 라디오 PD가 되던 일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면 그건 새빨간 뻥이다. 오히려 몇 가지 에피소드를 빼면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게 솔직한 말일 것이다.

이를테면 처음 CBS에 입사하던 날 길을 건널 때, 맨홀을 통해 하수구의 바람이 올라왔고 그 순간 나의 치마가 7년 만의 외출에 나오는 마릴린 먼로의 것처럼 휘날렸던 일은 기억한다. 왜냐하면 그 치맛자락 날리는 와중에도 나는 ‘이건 마치 영화같잖아’라고 생각하다가 결국 첫날부터 지각을 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 뒤로 이어질 수많은 지각의 서곡이었기 때문에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라디오 PD가 어떤 일인지 한동안 전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입사 후 대략 다섯 달 동안 “잘 모르겠는데요!”란 말만을 입에 달고 다녔다. 어느 날 나의 선량한 선배들이 은밀히 모여서 “저 애가 인간이자 PD가 될 수 있을까?” 라며 나를 안쓰러워했단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 때 그 사실을 알았다 해도 내가 훌륭해졌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입사하고 한 달쯤 있다가 나는 추운 한강에 가서 벌렁 드러누워 본 적이 있다. 그 당시 내 주머니에는 맥스웰의 공식(전파방정식)이 적힌 메모지가 들어 있었다. 노트 한 페이지에 부호가 가득 차는 아름다운 공식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이 알 수 없는 부호는 아니었다. CD의 무지개빛, 돌아가는 엘피의 바늘, 마이크의 온에어 불빛, 다 내게는 알 수 없는 부호들이었다. 나는 음악이, 말이, 호흡이, 한숨이 어떻게 저 하늘을 날아서 타인에게 해독 가능한 신호로 다가가는지 끝없는 신비감에 사로잡혔다. 나중에 하늘에는 전파를 반사하는 층, 헤비 사이드층이 있단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내게 말할 수 없는 위로가 되었다. 저 하늘에 비밀이 있고 라디오 PD로서 나의 역할은 저 하늘의 반사층처럼 매개자, 혹은 매개체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순수 매개체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루크레티우스는 인간을 허공에서 우연히 떨어져 내리는 돌멩이로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 돌멩이인 우리 인간의 움직임은 그저 덧없기만 한 것일까? 그런데 그렇게 낙하하는 와중에 우리 입자들은 우연히 서로 만나고 그리고 그때 조약돌들은 부딪혀 불빛을 낸다. 간단히 말하면 나는 매개자이자 매개체로서 이런 불빛들에 주목하는 사람, 이런 불빛들의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사람, 이런 불빛들의 과정에 동참하는 사람, 이런 불빛들과 같이 내 영혼도 낙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라디오 PD인 내 직업은 나를 끝없이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자 끝없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왔던 것 같다. 전파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면서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을 느끼는 것이 나의 직업이다. 그렇게 날아다니면서 나는 평범한 사람과 위대한 사람의 차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전형적인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완벽한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사람들은 서로 서로 섞이며 쏟아져 내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들은 말하기 어렵다는 것, 그래서 누구든지 자기의 비밀을 갖고 있다는 것, 그래서 오로지 말의 고백에 의존하는 라디오는 비밀의 입구(늘 질문을 던지고 의문하는 자만이 통과할 수 있는)라는 것 등을 알게 되었다. 나는 라디오 PD로서 끝없이 인간의 신호를 포착하는 사람, 그 신호를 반사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마치 하늘을 올려다보듯 인간을 바라보면서).

그런데 최근에 집중적으로 받는 한 가지 질문, 즉 “당신은 라디오 PD인데 왜 책을 읽고 글을 쓰지요?”에 대한 답변까지를 이 글에서 덧붙인다면 이렇게 낙하하면서도 자신의 궤도를 유지하려 하는데서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가치가 나오는 것이고 나는 그런 사람이 어디 있는지 절대 놓치지 않기 위해 책을 읽고 글을 쓰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정말 좋다. 정혜윤의 글. 처음엔, 그냥 박학다식한 사람의 빡빡한 글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은근 매력이 있어 조금씩 읽다가 이젠 어떻게든 다 뒤져서 그녀의 글을 찾아 읽는다. 악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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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습다. 나 브리게는 스물여덟 살이나 되었는데, 아무도 나에 대해 아는 사람도 없이 여기 내 작은 방 구석에 앉아 있다. 여기에 앉아 있는데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아닌 이 존재가 생각하기 시작한다. 회색빛 파리의 오후에 6층 방에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사람이 현실적이고 중요한 것을 한번도 보지 못하고 인식하지도 그리고 말해 보지도 못한 일이 가능할까라고. 인간이 보고생각하고 글로 쓰기에 수천 년의 시간 여유를 갖고 있었으나 이 수천 년을 마치 학생이 버터를 바른 빵과 사과를 먹는 학교의 휴식 시간처럼 흘려보내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인간이 많은 발명과 진보, 문화, 종교 그리고 세계에 대한 예지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표면에 머물러 있는 일이 가능할까? 약간의 가치가 있는 이 표면에조차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밋밋한 천을 씌워서 그것이 마치 여름 휴가철 응접실 가구처럼 보이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세계사 전부가 잘못 이해되는 일이 가능할까? 어떤 낯선 사람이 죽어가고 있어서 그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 서 있는데, 그 사람에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처럼 항상 대중에 대해서만 말해 왔다고 해서 과거가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인간이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났던 일인데, 그것을 돌이켜야 한다고 믿는다는 게 있을 수 있을까? 인간이 자기는 과거의 모든 것으로부터 태어났으므로 그것을 알고 있어야 하고,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말을 하나도 들을 필요가 없다는 걸 개개인 모두에게 각각 상기시켜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 모든 인간들이 결코 있지도 않았던 지나간 일을 정말 정확하게 안다는 게 있을 수 있을까?
모든 현실의 일들이 아무 의미도 없고, 그들의 인생은 마치 텅 빈 방에 있는 시계처럼, 어떤 것과도 연관 없이 그저 흘러가 버리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신>이라고 말하면서 무언가 공동의 것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을까? 두 명의 어린 학생들을 보아라. 한 아이가 칼을 한 자루 사고, 옆에 있는 아이도 같은 날에 똑같은 것을 샀다고 하자. 일주일이 지나서 두 아이들은 서로 칼을 보여준다. 그럼 그것들에는 비슷한 점이 아주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음이 드러난다. 두 개의 칼은 각기 다른 두 아이의 손에서 그렇게 달라졌다(그래, 하고 한학생의 어머니가 말한다. 너희들이 쓰는 모든 것은 금방 닳게 마련이지). 아, 그렇지, 마음속에 <신>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 <신>을 쓰지 않을 거라고 믿는 일이 있을 수가 있을까?
그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 모든 일이 있을 수 있는 일이라면, 있을 수 있는 일 같기만 하더라도 무엇인가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면, 그저 가능한 것 같기만 하더라도 이 세상의 모든 것들에게 무슨 일이든지 일어나야하리라.
이런 불안한 생각을 가졌던 사람은 아무라도, 하지 못한 일 중에서 무엇인가를 조금이라도 하기 시작해야 한다. 아무라도 좋다. 전혀 적임자가 아니라도 좋다. 이 젊고 보잘것없는 외국인 브리게는 6층 방에 앉아서 낮이나 밤이나 글을 써야만 할 것이다. 그래, 그는 써야만 한다. 그것이 그의 종말이 되기도 할 것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말테의 수기> 29쪽에서 32페이지에 걸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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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새로이 있다, 나는 혼자 있다고 말하진 않겠다, 아니다, 그건 내가 할 일이 아니다, 뭐라고 할까, 모르겠다, 나에게 되돌아온다, 아니다, 나는 나를 떠난 적이 없다, 자유롭다, 그래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이 쓰이는 것을 흔히 듣는다. 아무 일을 하든 자유롭다, 아무 일을 하지 않든 자유롭다, 아는 데 자유롭다. 뭐랄까. 의식의 법칙을 내 의식의 법칙을, 예를 들면 물은 깊이 빠질수록 올라간다는 것을 마침내, 왜냐하면 여백을 더럽히는 것보다는 본문을 지워버려 모든 것이 하얗고 매끈매끈하게 될 때까지 틀어막아버린다는 것이, 그래서 엉터리가 진면목을 개판의 무의미를 탈출구 없는 무의미를 드러낸다는 것이 더 잘한 일이리라는 것을. 그래서 틀림없이 마침내는 내 관찰 위치를 혼란시키지 않겠다고 결정하엿다. 그러나 관찰하는 대신에, 머릿속으로는, 연약하게도, 지팡이를 든 사내에게서, 딴 것에 쏠리고 말았다. 그때 새로이 속삭임, 침묵을 되끌어온다는 것은 사물들의 역할이다.


베케트 <몰로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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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있던 끔찍한 기억이 태어난 이후에도 생생히 되살아나, 이로 인해 심리적으로 혹독한 고통을 당했다고 한다. 그는 또한 삶의 온갖 풀 길 없는 문제들로 괴로워하다가 이것이 원인이 되어 가끔씩 심하게 앓아누울 때마다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저서들을 읽으면 신기하게도 병에서 벗어나곤 했다는, 실로 보기 드문 의식 세계를 지닌 극작가였다.

[사무엘 베케트 희곡전집 1], 베케트 소개글
 


고통이라 할지라도, 갖고 싶은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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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이군,  편집 공부 열심히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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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내 님이여

인용 2009. 12. 13. 23:41




그리움에서 그림이 나오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그림 그리다가 그리워하다..
뭔가 통하는 게 아닌가 싶어.
그리워하는 건 계속 반복하는 거잖아 그래서 쓰고 또 쓰고 여러번 쓰고
그래서 틀린 게 훤히 들어다보이게 그런 식으로 표현했는데..


다큐멘터리 <앞산전> 에서.



이진경 화가를 다룬 다큐 앞산전.
이 다큐를 보다 이 장면이 너무 좋아서.
화가의 폼하며 앉은 모양새며,
더욱이
물감이 흘러내리게 글을 쓰고 그걸 어설프게 가려보려 덧칠해둔 저 그림이 너무 좋아서.
저 느낌이 너무 좋은데 뭐라 표현을 못 하겠고나ㅎ


덧칠하다. 고쳐쓰다. 감추지 않는다...
(일부러 의도하는 것이라 해도) 잘못된 것을 뜯어내고 새 종이에 쓰는 게 아니라 흔적을 남기고 계속 가는 그런 방식에 요즘 꽂혀 있음. 

한유주는 그녀의 한 소설에서, 글을 쓰는 도중에 자신이 고쳐쓰고 있다는 사실마저 쓰더라. 지나친 강박증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여튼 그게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일종의 태도의 문제라고 느꼈기 때문인데, 모든 것을 쓸 수 있다고 전제하고 쓰는 것과 쓸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계속 쓰는 것은 다른, 그런 차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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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목숨.

인용 2009. 8. 21. 00:48

...

이것 역시 트레이닝에 불과할 뿐이라고. 저마다 인생은 그저 잔인한 장난에 지나지 않아.
자기 일을 싫어하고 돌봐야 할 생존자들을 모두 잃어버린 사회복지사를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
죽은 목숨.
바디백에 그녀의 시신을 집어넣고 있는 경찰들을 뭐라고 하지?
죽은 목숨.
앞마당에서 야단법석을 떨고 있는 기자들은?
죽은 목숨.
누구도 예외는 없다. 웃기는 건 우리 모두가 누군가의 급소를 찌를 수 있다는 것이다.


<서바이버>, 척 팔리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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