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고 싶은데.

인용 2008. 10. 18. 23:10


아마 가을 햇살이었다. 아직도 옷에 땀이 배는 어줍은 가을이지만,
차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던 그 붉은 햇살은 가을이었다.
언니네 이발관 노래를 들어서였나.
햇살에 제 모습을 드러내는 부유하는 먼지처럼 살짝 기분이 뜬 상태였지.
그때 복잡한 대로로 서서히 밀려 들어 가면서 청계천 가에 서 있는 마차를 보았다.
우린 아마 같은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나보다.
세워둔 마차 앞에 서 있는 한 아주머니를 보곤
스치듯 그가 말한다.
' 저 아줌마 웃는 거 참 예쁘다'
나도 그 생각하고 있었는데, 속으로 옹알거리곤
' 응 '
하고 답한다. 
왜 일까. 나 알고 있는 그의 모습들 중 가장 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그 순간 그의 목소리가 가을 햇살을 청아하게 가로 질러 내 귓가에 오래 머물고.

그렇게 나는 추억을 쌓아 가는가 보다.

모든 건 때가 있는 거란다. 보통의 명제가 절박한 명제가 되는 순간,
나에게 찾아온 이 어떤 시절이  
단 한번도 날 울리진 않았으면 좋겠다.


그가 담배를 끊은 것은 뒤늦게 자기 건강 상태에 불안을 느꼈기 때문은 아니었다. 열여덟 살부터
피워 왔다. 그래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담배 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입안이 텁텁하다. 쓰다.
그렇다면 끊자고 생각했단다. 그날부터 아무 어려움 없이 끊을 수 있었다.
 "뭐든 때가 있는 법이다."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_이름없는 독, 미야베 미유키


한 순간을 위해 나는 한 없이 채우며 충만해지곤
한 순간이 지나면 한줌 없이 빠져나가 공허해져요.





"서울 하늘은, 원하는 색깔이 나오지 않아 이런저런 색을 혼합해보다 그만 어떠한 색깔도 만들어 내지 못한 채 망쳐 버린 지저분함 물감 같아." _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 김형경


울고 싶은데, 나는 이름이 없어요.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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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나는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을 썼다. 그 소설을 쓰면서 나는 이십 대에 이 세상을 보면서 느꼈던 의문으로 다시 돌아갔다. 왜 우리가 간절히 열망하는데도 이 세계는 조금도 바뀌지 않는가? 그런 게 우리가 사는 세계라면 우리는 마땅히 현실에 순응하고 권력에 복종하면서 살아야하지 않을까? 더 이상 뭔가를 간절히 열망하면 안 되는 일이 아닌가?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을 쓰면서 나는 그 의문에 해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어쩌면 열망은 그 열망이 이뤄지는 일과 아무런 관계가 없으리라. 열망으로 이뤄지는 일은 하나도 없다. 열망은 결코 원인이 아니다. 열망은 그 자체로 결과이리라. 열망은 단지 열망하는 그 순간에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뿐이다. 과연 이것이 해답이 될 수 있을까? 어쨌든 나는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을 나만의 방식으로 다 썼다. 다 쓰고 나니까 이십 대의 내가 이해됐다. 결코 바뀌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 세계가 이해된 게 아니라.

김연수, '밤은 노래한다' 작가의 말 중에서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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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박/권대웅

인용 2008. 10. 10. 22:55
민박
권대웅


반달만한 집과
무릎만한 키의 굴뚝 아래
쌀을 씻고 찌개를 끓이며
이 세상에 여행 온 나는 지금
민박 중입니다
때로 슬픔이 밀려오면
바람 소리려니 하고 창문을 닫고
알 수 없는 쓸쓸함에 명치 끝이 아파오면
너무 많은 곳을 돌아다녀서 그러려니 생각하며
낮은 천장의 불을 끕니다
나뭇가지 사이에서 잠시 머물다 가는
손톱만한 저 달과 별
내 굴뚝과 지붕을 지나 또 어디로 가는지
나뭇잎 같은 이불을 끌어당기며
오늘 밤도 꿈속으로 민박하러 갑니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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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되겠기에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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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이 울산 과학대 비정규직 투쟁과 생계형 절도 문제를 1면에 낸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1면에 내는 시각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한국사회의 본질을 드러내는 정치적 장면은
울산 과학대 아주머니들이 쫓겨나는 장면입니다.
내가 어디서, 어디를 볼 것인가. 중요한 것은 퍼스펙티브(perspective)입니다. 내가 우파냐 좌파냐보다 중요한 게 어느 위치에서 바라보는가인 거 같아요.

지식인들이 삼성경제연구소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어요. 진보적 지식인도 삼성경제연구소를 벤치마킹하려 합니다. 어떤 면에서 발 빠르게 분석하고 대응해 괜찮은 면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 속에서 지식의 성격이 변질되고 지식이 결국 목적을 잃어버리는 거죠. 지식은 객관적 팩트가 아닙니다. 굉장히 착각들 하는데, 사람들은 객관적 지식을 쌓은 후 자기 성향에 따라 그것을 쓰는 게 아닙니다. 지식을 쌓는 과정이 지식을 쓰는 과정입니다. 내가 어떻게 지식을 얻었느냐는 내가 무슨 지식을 얻었느냐와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저는 최근 진보적 지식인들이 자괴감에 빠진 걸 많이 봤습니다. '그동안 내가 공부 안했나 보구나' '기업연구소, 테크노크라트는 저렇게 축적할 동안 나는 뭐 했나' 하고요.
자기 삶을 다 부정하는 것인데요. 이런 부정이 양심의 가책이나 반성에 그치지 않고 아예 운동 진영에서의 이탈로 이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들 스스로가 이제 지식을 생산성이나 효용성의 시각에서 보게 되는 거지요.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중에서 '대의 불가능한 사회의 지식인' _ 고병권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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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네 난봉도 이쯤에서 끝내야지. 더 이상은 세상이 용납하지 않을 테니까."

세상이란 게 도대체 뭘까요. 인간의 복수일까요. 그 세상이란 것의 실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무조건 강하고 준엄하고 무서운 것이라고만 생각하면서 여태껏 살아 왔습니다만, 호리키가 그렇게 말하자 불현듯 "세상이라는 게 사실은 자네 아니야?"
라는 말이 혀끝까지 나왔지만 호리키를 화나게 하는 게 싫어서 도로 삼켰습니다.

"그건 세상이 용납하지 않아.'
'세상이 아니야. 네가 용서하지 않는 거겠지.'
'그런 짓을 하면 세상이 그냥 두지 않아.'
'세상이 아니야. 자네겠지.'
'이제 곧 세상에서 매장당할 거야'
'세상이 아니라 자네가 나를 매장하는 거겠지.'
'너는 너 자신의 끔찍함, 기괴함,악랄함,능청맞음,요괴성을 알아라!'
갖가지 말이 가슴속에서 교차했습니다만, 저는 다만 얼굴에 흐르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으면서
"진땀 나네. 진땀." 하고 웃을 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때 이후로 저는 '세상이란 개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 비슷한 것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이라는 것이 개인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저는 예전보다는
다소 제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저는 점차 세상을 조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세상이라는 곳이 그렇게 무서운 곳은 아니라고까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즉 여태까지 저의 공포란, 봄바람에는 백일해를 일으키는 세균이 몇십만 마리, 목욕탕에는 눈을 멀게 하는 세균이 몇십만 마리, 이발소에는 대머리로 만드는 병균이 몇십만 마리, 전철 손잡이에는 옴벌레가 우글우글, 또 생선회, 덜 익힌 쇠고기와 돼지고기에는 촌충의 유충이나 디스토마나 뭔가의 알 따위가 틀림없이 숨어 있고, 또 맨발로 걸으면 발바닥에 작은 유리 파편이 박혀서 그게 온몸을 돌아다니다가 눈알에 박혀서 실명하는 일도 있따는 등의 소위 '과학적 미신'에 겁먹는 것이나 다름없는 얘기였던 겁니다.


+
삼 일 동안 저는 죽은 듯이 잠만 잤다고 합니다. 정신이 돌아오기 시자하면서 제일 처음 중얼거린 헛소리는 집에 갈래, 라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집이 어디를 가리키는 건지는 당사자인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하여간 그렇게 말하고는 엉엉 울었다고 합니다.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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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인용 2008. 9. 29. 20:56
"응"

문정희

햇살 가득한 대낮
지금 나하고 하고 싶어?
네가 물었을 때
꽃처럼 피어난
나의 문자
"응"
동그란 해로 너 내 위에 떠 있고
동그란 달로 나 네 아래 떠 있는
이 눈부신 언어의 체위
오직 심장으로
나란히 당도한 신의 방
너와 내가 만든
아름다운 완성
해와 달
지평선에 함께 떠 있는
땅 위에
제일 평화롭고
뜨거운 대답
"응"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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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되어야 할 것은 배고픈 사람들이 도둑질을 했다거나 착취당한 노동자가 파업을 일으켰다는
 사실이 아니라, 배고픈 사람들 중 대다수는 왜 도둑질을 하지 않는가. 또 착취당하고 있는 사람들
 중 대다수는 왜 파업을 하지 않는가라는 사실이다"   (라이히, '파시즘의 대중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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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없는 십오 초 / 심보선


아득한 고층 아파트 위
태양이 가슴을 쥐어뜯으며
낮달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치욕에 관한 한 세상은 멸망한 지 오래다
가끔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난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그림자 거뭇한 길가에 쌓이는 침묵
거기서 초 단위로 조용히 늙고 싶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내는 오후
과거가 뒷걸음질 치다 아파트 난간 아래로
떨어진다 미래도 곧이어 그 뒤를 따른다
현재는 다만 꽃의 나날 꽃의 나날은
꽃이 피고 지는 시간이어서 슬프다
고양이가 꽃잎을 냠냠 뜯어먹고 있다
여자가 카모밀 차를 홀짝거리고 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듯도 하다
나는 길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다
남자가 울면서 지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궁극적으로 넘어질 운명의 인간이다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 동산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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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토왕폭 중간에

빨간 옷 입은 등산가 한 사람

몇 시간째 매달려 있다

천길 낭떠러지 아래엔 몇 천길 웅덩이

그 낭떠러지 한가운데

일부러 태풍 견디라 지어놓은 현공사

바람 불 때마다 온 집을 흔들며

그 안의 부처들, 우르르 우르르 울고 있다

희디흰 내 뼈들에 매달려 사느라

손톱이 다 빠져버린

내 평생의 살들이 진저리치고 있다

허공을 움켜잡고 수억년째 견디는

저 밤하늘의 별들도

오늘 밤 깜빡깜빡 운다

모두 참 위태롭다




살아있다는 것/ 김혜순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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