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시위

인용 2009. 1. 2. 12:15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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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주주의란 단절과 틈을 가져오는 일종의 불일치 과정이다. 내가 민주주의에서 합의 대신
불화와 불일치를 강조하는 것은, 단지 민주주의가 다양한 의견의 갈등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합의라는 관념에 기초한 민주주의는 사회구성원인 우리
모두가 똑같은 경험을 공유한다는 잘못된 전제 위에 서 있다.
곧, 합의에 의한 민주주의라는
개념은 일종의 '객관적 필연성'같은 것을 전제하고 있지만 내 생각은 반대다.
민주주의란, 그리고 정치란 불화의 지점이며 그러한 불일치들이 발현되는 순간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2. 서양 철학은 언제나 그리스를 참고한다. 따라서 희랍적 개념들을 어떻게 번역하고
해석하며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아리스토텔리스의
정치학을 참고하는 이유는 로고스, 데모스, 통치 따위 개념을 그 어원에서 새롭게 분석하고 그러한 개념들이 역사적으로 거쳐온 분절에 관해 새롭게 생각해보기 위해서다.

  예를 들어 일반적으로 정치란 로고스를 가진 자들의 통치, 곧 어떤 자격과 능력이 있는 자들의
통치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관념에 대해서 새롭게 사유하고자 한다.
많은 논자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처럼 정치란 단순히 언어나 소통에 의거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민주주의란 통치할 자격이 없는 자들의 통치, 곧 평등 그 자체를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전제로 이해하는 정치적 사유를 말한다.

_시사IN, 랑시에르 인터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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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튀세르가 이론적 반휴머니즘에 대한 자신의 설명과 대위법을 이룰 '실천적 휴머니즘'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내지 않았다면 그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이유는 매우 명백하다-그러한 표현은 동어반복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알튀세르가 인정한 것처럼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실천은 그것이 세계관 즉 역사의 의미의 표상을 얻은 이상 스스로를 또한 하나의 휴머니즘으로 인식해야 한다.       _에티엔 발리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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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법칙/진은영

인용 2008. 12. 9. 00:44

연애의 법칙

진은영

너는 나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어제 백리향의 작은 잎들을 문지르던 손가락으로.
나는 너의 잠을 지킨다
부드러운 모래로 갓 지어진 우리의 무덤을
낯선 동물이 파헤치지 못하도록.
해변의 따스한 자갈, 해초들
입 벌린 조가비의 분홍빛 혀 속에 깊숙이 집어넣었던
하얀 발가락으로
우리는 세계의 배꼽 위를 걷는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포옹한다
수요일의 텅 빈 체육관, 홀로, 되돌아오는 샌드백을 껴안고
노오란 땀을 흘리며 주저앉는 권투선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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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점당한 삶 벗어나야 할 때
   <다양한 존재의 소통을 실험하라, 새 삶을 위해>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67196.html
 

2. 생태문화적 혁명이다 
     <자본지배 '벗어남' 넘어 '극복*대체' 노력을>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69900.html

 
3. 이미 실재한다
     <코뮤니즘 '발견'하고 현실화를 '발명'하라>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71396.html

 
4. 고전적 코뮤니즘과 접목해야
    <'자본주의 안의 코뮤니즘' 아닌 반자본주의로>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7290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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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대 기술의 문제는 무엇인가. 기술인 한에서는 그것도 '자연으로부터 무언가를 끌어내오는'
'탈은폐' 과정이다. 하지만 그것은 '참여를 통한 드러냄'이 아니라, 자연에게 빨리 내놓으라는
'닦달'과 같다.
"과거 농부들은 돌보는 자였다. 그의 일은 씨앗을 뿌려 싹이 돋는 것을 그 생장력에 맡기고 잘
자라도록 보호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경작은 자연을 닦아세우는 일이 되었다."
비료와 농약을 써가며 토지에게 내놓으라고 '닦달'한다. 자연은 강요받고 있다.
"바람의 힘으로 돌아가며 바람에게 자신을 내맡기는 풍차" 와 "대지로부터 광석을, 광석으로부터
우라늄을, 우라늄으로부터 원자력을 강요하는" 원자력 발전소의 차이.
"물의 흐름에 따라
돌아가던 수차" 와 "물의 흐름을 바꾸어 설립된 댐" 의 차이. 문제는 거기에 있다.

2. 나는 홉스를 리얼리스트라고 부르는 게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는 현실을 볼 때조차
상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푸코가 잘 지적했듯이 그의 전쟁은 "피도 전쟁도 없는 일종의 재현 게임"
이다. 국가는 적의 야만성, 테러의 공포를 끊임없이 상상케 함으로써 자신의 야만과 테러를 감추어버린다. 전쟁과 테러에 대한 공포를 환기시킴으로써 시민들의 자유를 빼앗고, 테러리스트의
야만성을 시청케 함으로써 자신의 침략전쟁과 테러를 못 보게 한다.
 그래서 나는 홉스식 전쟁이 사실은 실제의 전쟁을 은폐하기 위한 가짜 전쟁이고, 홉스가 말한
권리의 양도가 양도되지 않는 권리를 은폐하는 가짜 양도라고 생각한다. 진짜 쿨한 리얼리스트
였던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국가는 괴물이 아니라 "온갖 연기를 피우며 시끄럽게 짖어대는
위선적 개 한마리에 불과하다".

3. 우리에겐 불가능해 보이는 '국가없는 사회'가 원시부족들에게는 실재했다.
이런 이야기를 꺼내면 대개 이런 반응이 나온다. "당연하지. 그들은 미개하니까. 그들은 국가를
극복한 사람들이 아니라 국가를 갖지 못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인류학자 클라스트르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국가의 부재는 그들의 미개함이 아닌, 어떤 능력, 어떤 투쟁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들은 이런 사회가 단순히 '국가가 없는 사회'가 아니라 '국가에 대항한 사회'라고 말한다.


4. 역사를 가진 사람들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고들 한다. 최소한 그와 똑같은 정도의 진리로서 우리는 역사 없는 사람들의 역사가 국가에 대항한 투쟁의 역사였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_클라스트르

고병권, <고추장, 책으로 세상을 말한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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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 '길 안내' 중에서


열두 살때부터 시를 썼다. 무엇이든 다른 것을 할 수가 없을 때면.
시는 무력감에서 탄생한다. 그러므로 시의 힘은 무력감에서 나온다.
모터사이클을 타는 일과 정반대의 위치에 놓이는 것이 시를 쓰는 일이다.
모터사이클을 모는 동안 우리는 우리가 접하는 주변의 모든 사실과 빠른 속도로 타협한다.
몸과 기계는 나아갈 길을 찾는 눈을 따른다.
냉정함을 잃지 않은 채. 자유롭다는 우리의 느낌은 결정을 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이
지극히 짧다는 사실에서 온다.
그리고 어떤 저항이나 지연이 있게 되면 우리는 이를 비스듬히 비껴 가는
반동의 계기로 이용한다.
모터사이클을 몰 때, 삶을 계속 이어가고자 한다면 거기에 있는 것 이외에
어느 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시는 사실 앞에서 무력하다. 무력하지만 인내력을 잃은 채 무력한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시에 저항하기 때문이다.
시는 결과에 어울리는 이름을 찾지, 결정에 어울리는 이름을 찾지 않는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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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꼬맹이에게 천자문을 가르치는데, 그 읽기 싫어함을 꾸짖자,
'하늘을 보면 푸르기만 한데, 하늘 천(天) 자는 푸르지가 않으니
그래서 읽기 싫어요!' 라고 합디다. 이 아이의 총명함이 창힐을
기죽일 만합니다.

                                            박지원,<답창애지삼(答蒼厓之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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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에르케고르는 말했다. 사유의 체계는 가능할지 몰라도 삶의 체계는 불가능하다고.
삶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이해하는 사람은 그것을 하나의 이론적 체계로 담으려는 시도가 얼마나 부질없는지도 이해한다. 그런 시도에 대해 삶은 '존재의 낄낄거리는 웃음소리'로 답할 것이다."

고병권,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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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자신을 아나키스트로 규정하는 예술가 희완 트호뫼흐를 만나 오래도록 눈을 맞추는 사이가 되었다. 그와의 만남으로 나는 특정한 인생의 목적지를 향해 일사불란하게 자신을 다그치는 삶에 미련을 깨끗이 접고, 자유롭게 풀어놓은 영혼의 열망을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열망의 진화 자체가 중심이 되는 삶의 방식에 확신을 얻게 됐다.

+
희완에게는 자신만의 성이 있다. 내가 늘 가지고 싶어 했던 그것. 세상의 논리를 시선 하나로 간단히 유린하고, 경쟁의 뜀박질에서 슬쩍 비껴나 울울창창한 숲 속에서 자신의 열매를 가꾸는 사람들에겐 언제나 그런 성이 있다. 누군가는 그것을 지하실이라고 표현하고, 자크 뒤아멜은 '자신만의 소우주'라고 표현한다.

+
이만큼 살았는데 나에게 미래는 여전히 부정형의 그 무엇이고, 새롭게 밑바닥부터 선택해 만들어가야 할 그 무엇이다. 어찌보면 도대체 해 놓은게 뭐냐고 스스로를 다그쳐 볼 수도 있는 상황이다. 결국 통과시킨 법 하나 없고, 사회주의적 이상을 문화정책에서 실현하고자 했던 그 어떤 의도도 문서 밖을 벗어나 실현시키지 못했다. 벌어놓은 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 좋게 말하면 자유인지만 지금 당장 또렷한 직업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사방으로 열려있는 부정형의 미래야말로 내가 강렬히 열망하는 것이기에 나는 완벽히 내가 원하는 지점에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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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로 백날 먼 나라를 가봐야 여행자의 시선으로만 볼 수 있을 뿐이라고, 직접 다른 나라에 발을 딛고, 거기 사람들과 소통하고 생활하며 지내야 비로소 네가 원하는 것들을 얻을 수 있을거라고 충동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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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우리가 나눈 대화는 대체로 의미심장하고 진지한 것들이었으나, 가장 강한 잔상은 대화 내내 그가 자주보여주었던 '냉소로 쪼개지지 않는 1백%의 웃음' 이었다.


사진/언니네




아나키스트적 자발성과 자율성을 가지면서 때로는 촘촘히 모여 하나의 단단한 힘을 조직할 수 있는 연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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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자와 듣는 자를 가르지 않는 '우리'는 운동을 더욱 설득력 있게 만든다. 예를 들어, 혁명적 공산주의 연맹의 유명한 구호 '우리들의 삶은 당신들의 이익보다 소중하다'





내가 투자할 시간, 투자할 돈, 그렇게 해서 딴 학위가 나에게 확실한 미래를 보장할 것인가를 염두에 두고 더 분명하고 안전한 선택을 매순간 계산해야 한다면, 한 순간도 인생은 나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 불만은 터뜨리고 욕망은 충족시키면서 사는 것이 건강한 삶이다. 그러나 내가 충족시키고자 하는 욕망이 진정한 나의 욕망인지 아니면 모두가 욕망해야 하는 것이라고 정해진 일반적 욕망의 리스트일 뿐인지를 가늠해 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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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마술이 시작된 건 더 큰 용기와 에너지를 모아 파리에 갔을때였다. 창조와 파괴는 결국 동전의 양면임을 깨닫고, 새로운 인생을 창조하기 위해 내가 갖고 있는 기존의 틀을 철저히 부수고 벌거벗은 채로 다른 세상을 향해 나아갔다. 돌아와서 무엇이 되겠다는 구체적인 포부도 갖고 있지 않았으며, 오로지 내가 가진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찾겠다는 맹렬한 의지가 있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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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 미와 추에 대한 사회적 기호를 아직 익히기 전의 인간들은 얼마나 신선한 눈으로 세상을 창조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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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은 왜 어느 한순간도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살지 못하고, 왜 늘 다른 곳에서 보상받기를 원하는지 가슴치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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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진정한 욕망을 파악하는 것은 아주 사소한 데서부터 시작된다. 내가 좋아하는 색깔, 옷반찬,영화,작가,길,동네,나무에 이르기까지.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일일이 묻고 그 목록을 다 모아보면, 자기만의 색깔이 무엇인지 조금씩 드러나게 된다. 나의 색깔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가장 유의해야 할 것은 '한 우물'이데올로기의 강박으로부터 탈출이다. '한우물을 파야한다'는 시대를 초월하는 금과옥조이다. 살면서 이 주장에 대해 감히 시비거는 사람 몇 못봤다. 그러나 한우물 파기 싫으면 어떡해야 하는지, 그 우물에서 아무것도 안 나오면 어떡할 건지에 대해서는 답해주지 않는다.

+
중년 남성의 가슴 콩닥거리는 연애는 차단되어 있지만, 매춘은 무한이 허락되어 있을 뿐 아니라 끊임없이 부추기는 사회.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이고 흥미로운 관계 맺기인 연애를 특정 시기, 특정 연령층의 전유물로 규정하고 비좁은 김밥의 틀 속에 밀어 넣어버린 사회, 어쩔수 없이 옆구리 삐져나오는 비명과 분출되어 욕구들은 모두 어두운 음지속에 처넣어 버리는 사회. 이 숨 막히는 사회적 모순을 비집고 우리가 건강하고 싱그러운 연애를 계속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거칠게 말하자면 이 책은 하나의 처세술이다.
저자 자신의 삶에 대한 철학이 드러나는 문장은 너무나 유혹적인 그 자체로 프로파간다.
하지만 흔하게 깔린 처세술 책과는 전연 다르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곱씹지만 누구 하나 생각하는 대로 살긴 쉽지 않다. 얼마나 수많은 사람들이 이 말에 유혹당해 이 말을 소비하고 있는가. 그러나 실천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일단 그녀는 생각하는 대로 산다. 
더 나아가! 그 '생각' 에 마저 얽매이지 않는 뼛속깊이 자유로운 여자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생각 중 이 점이 훨씬 더 중요하다. 그건 욕망의 배치를 바꾸는 문제이기 때문에.
자. 한 발더 나아가야 한다는 것. 생각하는 대로 살아. 하지만 그 생각이 어떻게 만들어진 건지 들여다 보아야 해. 욕망은 충족시키며 살아. 대신 그 욕망이 어떤 욕망인지 볼 수 있어야 해. 이렇게.
그녀 삶에 공감하는 사람들에게는 무한한 부러움을, 미적지근하게 실천하지만 여전히 용기가 부족한 사람들에게는 더욱 더 원하는 대로 살라는 충동질을 주는 책이다.

그래. 비현실적이고 아직 철 덜들었다고 말하기도 하겠다. 하지만 괜찮다. 그녀는 철들지 않기로 마음먹은 사람이니까.


책을 읽다가 가장 인상에 남았던 부분은.
+ 내가 들은 첫 전공 강의는 무용과 관련된 과목이었다. 현대무용 비디오를 함께 보고 그 무용에 대해서 평하는 수업이었다. 한 10분 동안 연극성이 짙은 무용공연을 보고 난 뒤 선생이 학생들의 의견을 물었다. 한 학생이 손을 들어 무엇이 어떻게 흥미로웠는지 말했다. 두 번째 학생 역시 마찬가지. 세 번째, 네 번째 모두 마음에 들지 않은 점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무엇이 재미있었는지만 이야기했다. 무척이나 비판적인 표정을 지닌 마른 얼굴의 선생마저도 다르지 않았다.
나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저 무용에서 무엇이 나를 불편하게 했는지, 무엇이 부족해 보였는지를 헤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공연이 좋으면 통째로 좋았고, 싫으면 조목조목 싫었다.
무엇을 보건 그것이 통째로 좋지 않다면 내 눈에 거슬리는 것들을 헤아리고, 왜 거슬렸는지를 이론화하는 데 익숙한 나는 정작 그 무용에서 무엇이 나를 흥미롭게 했는지는 전혀 보지도 못했던 것이다. 이 첫 번째 무용수업은 내게 잔잔하게 다가와 혁명적인 메시지를 전했다. 그리고 앞으로 내 앞에 펼쳐질 세계에 열쇠를 제공하였다.


그녀가 파리 8대학 공연예술학과에 입학하고서 겪은 일이다.
'당신의 태도는 하나의 멋진 풍경입니다' 가  내가 아끼는 highfinish 를 풀어내는 문장이라면, 
좋으면 통째로 좋고 싫으면 조목조목 싫은 것이 사물을 바라보는 태도였던 내게도 (그래야만 한다고 난 왜 압박을 느꼈을까. 왜 그게 논리적사고라고 생각했을까) 혁명적인 메시지처럼 다가왔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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