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라는 존재는 '저편'과 '이편'이라는 두 가지로 정확히 분열되어 있었다. 나에게 '이편'의 세계는 값싼 모조품으로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저편'에 바로 인생의 진실이 있다. 나 자신도 '저편'으로 가야 한다. 거기에서 어떤 경험을 하게 되든 그것만이 진정으로 살아가는 길인 것이다.
그런 내 내면의 목소리에 반론하지 못하고, 질질 시간만 끌며 '이편'에 눌러앉아 있는 나를 부끄럽게 여기고 있었다.

2. 나는 '아우슈비츠'가 단순하게 우리에 대한 도덕적 경종으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근대에 기인하며, 지금도 현실 그 자체에 내재한다. 제국주의와 식민지 지배는 '일부 인간은 인간이하'라고 하는 사상, '인간은 비인간이다'라는 원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그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는 한 '아우슈비츠는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3. '이해'하고픈 강한 욕구와 초조함 그리고 '이해'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거부. 이런 균열은 이성적인 쁘리모 레비에게 죽음의 순간까지 고뇌를 제공했다. 쁘리모 레비에게 '독일인'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소통 불능의 깊은 균열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은, 그야말로 심신을 갉아먹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4.
원한이라는 것, 이 진실한 도덕 감정의 원천, 언제나 억눌린 사람들의 도덕이었던 것.
그 원한이 싸워 이긴 자들의 사악함을 뛰어넘을 기회는 거의 없다
.
혹은 전혀 없다고 해야 할 것인가. 우리 희생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각각의 원한마다 '끝장을 내지' 않으면 안된다. 그 말은 옛 강제수용소의 은어로 사용되었던 것과 같은 방법, 즉 죽이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끝장을 내야 하며 또한 곧 끝장을 낼 것이다. 그때까지는 원한 어린 푸념으로 때가 오기를 참아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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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잠, 황인숙

인용 2008. 2. 25. 00:23


지금은 내가
사람이기를 멈추고
쉬는 시간이다
이 시간 참 많은 사람들이 나를 찾아온다
알 듯한 모르는 사람들과
모를 듯한 아는 사람들
그리고 전혀 모를 사람들

어떤 사람이 공연히 나를 사랑한다
그러면 막 향기가 난다, 향기가
사람이기를 멈춘 내가 장미꽃처럼 피어난다
톡, 톡, 톡톡톡, 톡, 톡
지금은 내가
사람이기를 멈추고 쉬는 시간
아는 이 모두를 저버린 시간

문득, 아무래도 상관없다,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톡, 톡, 톡톡톡, 톡, 톡!
사람이기를 멈춘 내
영혼에 이빨이 돋는다
아는 이 모두가 나를 저버렸다!

톡, 톡, 톡톡톡, 톡, 톡,
모두 다 꿈이라고
절세가인 날씨의 바람이 나를 흔들어 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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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먹자

영화가아니었다면 2008. 2. 24.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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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싸이보그구나 영군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괜찮아 이제 선생님이 알았으니까
                    아는거 다음에는 믿는게 중요하거든 선생님 믿지?
                    근데 아는거 믿는거보다 제일 중요한게 뭔지 알아?
                                          먹는 거야 밥 먹는 거.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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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중학교 때로 기억한다. 밤마다 공부하는 척 책상에 앉아선 짜릿하게 주파수를 맞춰가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좋은 노래들을 녹음했었다. 인터넷으로 노래를 쉽게 찾아 들을 수도 없었을 그 시절, 한 가득 쌓여 가는 노래 테잎은 배부르게 하는 보물이었다. 공테이프 살 돈이 없을 땐 영어테이프에 투명테이프를 발라가며 엄마몰래 노래로 덮어 씌우곤 했던 날들.
그 날도 여전히 오래된 영화필름이 돌아가는 소리처럼 약간씩 잡음을 내는 라디오와 마주하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흘러나온 노래, 척수가 짠해오는 여가수의 목소리.

아차. 급하게 녹음 버튼을 누른다.
허공을 떠다니는 슬픈 목소리가 끊어질까 숨마저 멈추며 노래를 듣는다.

yesterday yes a day like any day
alone again for every day
seemed the same sad way to pass the day



‘네, jane birkin 의 yesterday yes a day 노래 들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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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퉁기는 나긋한 기타 소리에 명치에서부터 머리 끝 발 끝까지 차례차례 불을 밝히며 몸 안에 퍼져가는 구슬픈 그녀의 목소리. ‘Don't let him go'
오히려 난 공기 중에 흩어져 버릴 듯한 이 노래를 부여잡고 녹음된 테이프를 하루 수십 번 돌려 가며 들었다.

“어제는 다른 날과 마찬가지의 또 다른 하루
매일을 홀로 외로이
변함없이 슬프게 하루를 보내는 것 같아요

나 없이도 해는 지고
갑자기 누군가가 나의 그림자에 닿았죠
그는 말했어요
안녕"

이 노래가 담긴 그 테잎은 고향의 내 방 어딘가에서 긴 졸음을 자며 늘어져 있겠지.

흘러나오는 이 노래를 우연히 듣게 될 때마다 나는 잠시라도 내 시간을 멈추어 둔다. 그 순간만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허공을 떠다니는 노래가락만을 좇는다. 멍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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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다

일상 2008. 2. 19. 20:34


끊임없이 흘러 들어오는 추억의 강을 받아 들이고 있던,
잠기지 못한 글들과 이미지가 떠다니던 바다가 있다
이 길로 계속 걸어가면 그 바다가 나올거라는 걸 알지만 아무도 가보진 못했다
제 안에 고인 바람을 밖으로 밀어내어 아무도 그 곳에 갈 수 없었다 아무도 그 바람을 맞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날서게 검푸르던 그 바다, 촉수가 얼어붙을 차가움에 갈매기도 발을 닿지 않았다
그러다 그 바다와 마주보던 하늘이 먼저 자기 마음을 조금 연다
쉼없이 떠다니며 틈을 내지 않던 구름들 중에 하나가
바다를 내려다 보기 위해 잠시 길을 멈추어 섰음이리라
그리고 그 사이로 한 줄기 햇살이 비치며 그 햇살을 타고 조그만 배 한 척이 내려왔다
넓고 넓은 바다에 비하면 아주 자그마한 유랑하는 배
그 한 줄기 햇살이 비친 곳은 바다가 생전 느껴보지 못한 따뜻함. 그것은 조그마한 배꼽이 되었다
이제 바다는 하루종일 그 배의 걸음 만을 좇고 있다
바다는, 밤이면 그 배가 고요히 머무르며 잠들 수 있도록 파도의 움직임마저 멈추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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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귀신이다 산목숨으로서 이렇게 외로울 수는 없는 법이다(고대 시인 침연의 시 중 한 구절)


문득 어머니의 필체가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리고 나는 고향과 나 사이의 시간이
위독함을 12월의 창문으로부터 느낀다
낭만은 그런 것이다
이번 생은 내내 불편할 것


골목 끝 슈퍼마켓 냉장고에 고개를 넣고
냉동식품을 뒤적거리다가 문득
만져버린 드라이아이스 한 조각,
결빙의 시간들이 피부에 타 붙는다
저렇게 차게 살다가 뜨거운 먼지로 사라지는
삶이라는 것이 끝내 부정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손끝에 닿은 그 짧은 순간에
내 적막한 열망보다 순도 높은 저 시간이
내 몸에 뿌리내렸던 시간들을 살아버렸기 때문일까
온몸의 열을 다 빼앗긴 것처럼 진저리친다
내 안의 야경을 다 보여줘버린 듯


수은의 눈빛으로 골목에서 나는 잠시 빛난다
나는 내가 살지 못했던 시간 속에서 순교할 것이다
달 사이로 진흙 같은 바람이 지나가고
천천히 오늘도 하늘에 오르지 못한 공기들이
동상을 입은 채 집집마다 흘러들어가고 있다
귀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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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고작 따뜻하고 자의적인 사랑을 품고,
부정확한 행동들을 끊임없이 하지요.
새해가 밝았습니다.
당신에게 친구라 하는 이는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겠지만
말하지 않아도 아는 건 조폭들이나 하는 짓거리고
소통 없이 아는 건 다만 제 식대로의 감정이입일 뿐이니
그대가 고작 위로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면 세상은 여전히 혼자입니다.
낭만성에 기대어 스스로를 반쯤 속이지 마시오.
그대의 행복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대가 행복하려면, 최소한 행복하지 않을 각오쯤은 해야 할 겁니다.
그대가 이 말을 십분 인정한다 해도, 그대는 여전히 나의 친구가 아닙니다.
이런 말은 아주 가끔씩만 그대에게 진실일 테니까요.
많은 이들이 쉽게쉽게 세상에 냉소하지만
척수에 얼음물이 쏟아지듯 짜릿한 냉소는 내 별로 본 적 없소.
세상은 늘 기쁜 것이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외롭고 혼자인 곳 천지로군요.
남들이 문제 아니고 서로가 비밀이어야 하는 두 지구인처럼
차라리 나 당신 맘 알면 안 됩니다. 당신도 내 맘 알면 안 됩니다.
허허롭게 바람개비만 돌아도 사랑은 저리 슬픈 걸.
함부로 탐하고 함부로 질투하다
함부로 극진하고 함부로 내버리는 악마도 못 되는
인간관계의 좀비들은 다만 제 속에 갇힌 혼자만의 슬픔에 소란스러울 뿐
허공의 음악을 들을 수가 없지요.

유성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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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철이라는 것은 드는 것일까. 문득 어릴 적 라디오에서 들은 이야기가 생각난다.
철이 든다는 것은 철새의 머리에 든 철 때문에 지구의 한 극으로 끌려가는 것과 같은 것이라......나 뭐라나 그렇게 들은 것 같은데..
시간에 마모되는 내 기억력을 장담할 수 없기에 왜곡되고 변형된 이야기겠지만 어째 그럴싸하지 않은가. 철이 든다는 것은 특별한 게 아니라 하나의 극으로 끌려가는 것처럼 나이가 들어가는 것뿐이라고. 나이듦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고.

어릴 땐 철이 들고 싶었다. 더 나아지겠지라는 기대감. 하지만 그래도 철들만하다 싶은 나이가 되었는데 과아연 나는. 지금의 내 나이가 16살 때 학교에 막 부임한 내 영어선생님과 같은 나이라고 생각하니, 그땐 선생님이 참 훌륭해 보였다. 하지만 막상 내가 그때의 나이가 되고 보니 나는 하나도 변한 것이 없는 것만 같다.
웅얼중얼 중얼웅얼 내가 이러고 있는 건 영화 ‘주노’를 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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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16살인 주노. 생애 첫 섹스와 함께 첫 아이를 임신하게 된 미-성년자. 듣기도 해도 막막한 이런 상황. 집에서 내팽겨지고 아이 아빠에게 배신당하고 미혼모의 집에 가서 힘들게 생활하는 모습을 비극적 혹은 희망적으로 보여줄 것만 같다. 소재만 들어서는...........이게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미혼여성 인식의 한계인가. 두둥.

이 영화가 좋은 건 16살이 16살만큼 생각하고 16살이 생각한대로 자기 삶을 결정할 수 있으며 결정만한큼 책임질 수 있는 나이라는 걸 보여준다는 거다. 철이 들지 않았다는 이유로 늘 자기 삶을 강요받기 일쑤였던 청소년은 주노를 통해서, 자기가 먹은 만큼의 나이에서 얼마나 저다운 결정을 내릴 수 있는지, 또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주노는 비록 임신을 하긴 했지만 울며불며 자책하지 않고 아기를 낳기로 결심하고 좋은 양부모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배가 너무 불러 학교에서 놀림이 되지만 학교친구들이 자신을 보고 ‘좋은 귀감’이 될 거라는 반성 섞인 농담까지, 그리고 진정한 사랑을 찾는 용기. 말 그대로 ‘어리다고 놀리지 말아요’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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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알아요. 철든 어른이라고 해도 알고 보면 철든 척 하든 것일수도. 군것질을 하고 싶지만 안하고 싶은 척. 갑갑한 사회질서에 억압받는다고 생각하면서도 품격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뿐임을....(라고 말하면 나 너무 건방진가요)
주노가 아이를 낳기로 결심하고 아이를 좋은 양부모에게 입양하기로 결정했을 때 얼마나 확신이 섰냐는 질문에 주노는 104% 확신한다는 대답한다. 제 삶에 대한 책임은 그 누가 대신해 줄 수도 없으며 자신이 확신에 차 가면서 이뤄낸다는 것. 영화는 철이 든 어른의 시선도 철이 안 든 어른도 시선도 아닌 17살 주노의 눈을 맞추며 만들어 졌다.

또 하나는 한국인으로서 바라본 영화 주노는 더욱 의미깊었다는 것.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이혼한 전 남편이 재혼한 여자의 가정에서 함께 식사를 하는 모습에서 문화적 차이를 느꼈는데 영화 주노를 보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주노가 "I'm pregnant." 라고 말했을 때 부모님의 반응. ‘어떻게 하고 싶냐’고 물으며 당사자의 결정을 존중하는 부모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머리채를 휘어잡고 내 자식이 아니라느니 해서 기를 죽여 죄인처럼 만드는 게 한국사회의 모습일텐데. 그렇게 한다고 해서 얼마나 더 좋은 선택을 대신해 줄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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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생부터 주노는 외로웠을지도 모른다. 부모님이 일찍이 이혼하고 엄마는 재혼해버렸으니까. 새엄마가 들어오고 새엄마가 낳은 여동생이 함께 사는 가족은 한국식으로 보면 불우한 가정이라고 하겠지만, 영화에선 ‘친엄마와 안살면 불행해’, 어릴 적 동화가 가르쳐준 것처럼 ‘계모는 나빠’ 와 같은 편견이 없다. 서로를 보듬어줄 수 있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이 가족의 탄생인 것을.
마냥 행복해보이던 주노 아이의 양부모가 될 바네사와 마크 부부가 이혼하려고 했을 때, 주노는 믿음에 대한 배신에 너무 서러워 엉엉 운다. 하지만 그것 역시 자신의 편견이라는 걸 깨달았는지 욕심을 버리고 자기 아이를 진짜 사랑해줄 수 있는 바네사를 제 아이의 엄마로 인정하게 된다.
또 어른이라고 당연히 부모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걸 바네사의 남편 마크를 통해 보여준다. 그가 자신의 숨겨왔던 자신의 자유로움을 선언하며 아빠가 될 자격이 없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비난할 순 없다. 오히려 이해와 공감이 앞선다. 

이렇게 영화는 하나하나의 캐릭터가 살아 숨쉰다. 한 명 한 명 그 누구도 편견없이 나쁜 사람이 되지 않은 카메라의 따뜻한 시선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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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계절의 변화에 따라 구성됐다. 그리고 내내 길을 따라가는 장면이 많았다. 주노가 가는 길을. 설마 임신일까 싶어 조마하며 임신테스트기를 사러가는 주노를 따라서, 자기 아이의 양부모가 되어줄 사람을 만나러 가는 주노를 따라서. 그렇게 끝까지 지켜봐주고 응시하고 싶어하는 감독의 마음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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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너무 심각해지지 않으면서도 104% 훌륭한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이런저런 조건을 갖추지 않아도 104%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나 역시 현재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자 가장 아름다운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우리를 이끄는 지구의 끝을 향해 아름답게 날개짓하며 날아가자.  머리에 든 철이 조금 무겁더라도 감수하면서 말이다. 주노처럼 조금 더 용기있게 유쾌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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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유신 독재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지만 18년 만에 저절로 무너졌다. 지금? 다들 문제라고 하지만 유신독재보다 독하지 않다. 문제는 '아니면 아니고, 그렇다면 그렇다'고 이야기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 존재를 가지고 사는 것이 행복 추구다. 그렇지 않고 먹고 사는 데만 신경 쓰면 개, 돼지와 다를 게 무엇인가. 짐승 비하가 아니라 그보다 나은 삶이라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혁명가가 따로 있겠어? 모든 조건이 맞아서 터지면 그게 혁명이고, 거기 서있는 사람이 혁명가가 되는 거지. 우리가 감히 만들 수는 없지만 그러나 한사람 한사람 마음이 제대로 되어야지. 이제, 새로운 시작이니까.


오랜 기간 사회운동을 하면서 '낮은 곳'을 지켜온 동력이 있다면?

난 부모의 유산이라고 본다. 부모를 통해서 받은 그 신앙이지. 나 뿐 아니라 우리 형제들이 부모로부터 땅 한 평 받은 건 없지만 머리털 나기 전부터 아버지-어머니 모두 다 시골에서 이웃들과 더불어 사는 모습을 봐왔지. 예를 들면 어머니는 늘 없이 사는 형편에도 양식을 만들어서 '어느 집 솥 안에 넣어놓고 와라'고 내게 심부름을 시켰다. 또 스케이트를 만들겠다고 남의 대나무를 잘라왔더니 아버지가 불호령을 내려서 다시 용서를 빌러 가기도 했다. 이런 무수한 일들이 굉장히 큰 유산이 됐다.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큰 유산을 받았지.


-문정현 신부님, 프레시안 인터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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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렇게

일상 2008. 2. 17. 18:28

어느 순간 좋아하는 것에 얽매이고 있구나 싶은 때가 있다

시네필이라 할 자격도 없는 것 같은데 너무 영화에 집착하고 있다

즐기던 것이 나도 모르게 의무가 되어가는 기분 내가 조종하는 의무가 아니라 욕망에 조종당하는 나, 누가 이걸 고민하는 글을 최근에 본 것 같은데..기억은 안나는구나
내 것이 되는 게 가장 중요하므로 딱히 기원이라는 것이 중요하진 않다
지식이 제 멋대로 변형되면서 내 방식으로 체화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한꺼번에 책을 여러권 읽는 것이 나쁘진 않다
제 멋대로 굴러다니는 지식들 중에 내 마음에 남아있는 것들이 있는데 그런 것들이 내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내 마음에 남는 것들은 나의 감수성일진데 그 감수성은 어떻게 형성된걸까 보편적이지 않은 나만의 감동은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 생각해보니 이 생각을 대학1학년때 하다가 포스트잇에 적어서 수첩에 붙여둔 듯하다

이렇게 이야기는 아주 멀리 멀어져 가고 영원히 성(城)에 다다르지 못할 카프카 소설의 주인공
K처럼 나는 이렇게, 목적지는 도착하라고 있는 곳이 아니라 내일도 잠에서 깨라는 자명종과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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