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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자꾸 비워내면서 충만해집니다
이름만 들어도 이름만 불러도 좋은 사람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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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너를 이해 못하겠다'라고 말하는 가장 나를 이해해주는 엄마는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그래 빨리 집에 들어가라' 빨리 전화를 끊어버리려는 엄마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잠 푹 자는게 최고다 그래야 혈압이 내려가'

알딸딸한 술 기운으로 내딛는 발자욱엔 범벅된 눈물이 배어난다
솔파미레도시라솔 솔 솔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음을 내려 가며 침연한다

견딜 수 없는 건 아니다 내가 '고민이야'라고 말하는 것들은 내 표정을 만들기 위한 말일 뿐이라는 생각이.
그래..나는 얼마나 내 고민들에 충실했던가
나는 내가 헤어날 수 없는 늪이 되기를 바라지만 나는 나를 즐길 뿐이다
결국 나는 침연하는 시간들을 즐기고 있다




'추격자'를 보았다. 세상은 얼마나 허술한 것인가. 물이 흐려지면, 어항이 깨어져 버리면 죽고 마는 금붕어처럼 너무나 약한 개인들. 그런데 우리 금붕어가 될 수 밖에 없는 걸까.
겨우 살아 돌아온 미진을 기어코 따라가는 죽음의 운명, 피튀는 수없는 망치질이 퉁퉁퉁 내 마음에 못질을 해댄다.  

하지만 미진의 어린 딸에게 무슨 일있으면 연락해 라고 명함을 내미는 따뜻한 사람, 수많은 컷들로 몰아치는 긴박감 속에서도 그런 장면들은 오래오래 남는다.
노력하면 좋아질 수 있는데 무서워서 못살겠다 하지 않아도 되는데, 사회가 시스템이 허술하니까 우리 노력하면 되는데, 우리가 노력하면 세상은 더 좋아질 수 있어.

영화는 얼마나 많은 가능성들을 보여주는가 그리고 그걸 기어코 배제해나가며 얼마나 위험하게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을 보여주는가.
그렇기에 노력하면 세상은 좋아지는 것. 극장을 나서 반짝이 햇살을 보며, 나아질 수 있는데.. 중얼거리며.

집에 가기 무서워라는 친구의 말이 귀에 밟히는, 집에서 음식을 함부로 시켜먹지 못한다는 여학생들 이야기를, 지하철역에서 집까지 달려가는 여자의 이야기를.
경찰서 형사과장이 일 그만두고 운영한다는 강남의 여대생안마사집 그래서 불법이라도 아무도 건드리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줄줄 해주던 알바집 사장님, 외로움에 어쩔 수 없이 그런 곳을 찾아가지만 나보고는 조심하라던 사장님, 영화 시티 오브 갓에서 복수에 복수를 거듭하며 마을을 살인의 공포로 몰아가는 갱들을 최후에 눈 감아주는 경찰을, 그 경찰 뒷거래 사진을 찍은 주인공이 신문에는 싣지 않은 장면,

술 기운에 머리가 너무 아프고 나는 잠들고 싶지 않고.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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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슬고슬 눈

일상 2008. 2. 28. 01:23


          하늘이 고슬고슬한 밥을 한가득 지어주었습니다
          배고픈 자 모두 와서 나눠 먹으라고...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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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수 두 병을 까선 오목하니 작은 잔에 졸졸졸 따라 마시며 얼굴이 빨개진 우리
너의 집 방바닥이 너무 뜨거워 엉덩이를 이리저리 뒤척이며 좋다고 깔깔깔
우리가 쓰고 싶은 글을 담은 핸드메이드 잡지 '종이 끝은 불로 꼭 살짝 태워야 해 그래야 느낌이 살아'
그리고 우리가 직접 지을 카페 '쿠폰은 꼭 손으로 만들자. 벽에다 그림을 그릴게'
너는 곧 목수가 될 거고 나는 도자기를 구울게
그 누가 뭐라해도 좋다 비워도 비워도 우리에겐 나눌 것이 많고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콧노래를 부르며 삽질로 메울 것이니
 
현실을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무어가 있어 그 현실이 무언데

우리는 귓밥이 되어 버린 말들을 수집하는 여행가 남극에서 따뜻하게 베지밀을 데워서 펭귄에게 나눠주자 그래서 아버지가방에서우실까봐 어깨 토닥토닥 그래도 허공의 무늬를 헤아리며 온 하루를 보낼 수 있는 한량, 돌고래를 바라보다 죽고 싶어 돌고래야 안녕.
 
현실을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무어가 있어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 했던 날들을 견뎌내지 못할 역마살이면 충분해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 할 수 있는 감수성을 손톱 밑에 심어두자 글을 쓸 수 있게 글을 쓸 때마다
내 삶이 조직되도록

여전히 많은 고민들이 남지만 발그레한 얼굴을 식혀주는 찬바람을 맞으며 누워 버린다 이적 노래를 듣는다
 
'여전히 울겠지 여전히 웃겠지'

인생예보는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한 것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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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기는 짬뽕.

일상 2008. 2. 26. 15:31

이훈범시시각각] 총리감이 없다고요? [중앙일보]

누구나 아는 이솝우화 한 토막. 고깃덩이를 문 까마귀가 나뭇가지에 앉았다. 여우가 다가와 말했다. “아름다운 목소리의 까마귀님, 노래를 들려 주셔요.” 우쭐한 까마귀가 목청을 높였다. 입을 벌리는 바람에 떨어진 고기를 물고 달아나며 여우가 말했다. “멍청한 까마귀야. 고기나 먹지 그 목소리로 무슨 노래냐.”

이처럼 교훈 담긴 우화를 입에 달고 다닌 이솝이지만 정작 자기 처신은 그렇지 못했다. 그가 델포이에 갔을 때다. 사람들은 그의 이야기에 감탄하면서도 노예 신분인 그를 천대했다. 그러자 그는 델포이 사람들을 어리석다 깔보고 비웃었다. 화가 난 사람들은 그의 짐 속에 신전의 제기를 몰래 넣었다. 도둑 누명을 쓴 이솝은 절벽에서 내던져졌다.

그게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남을 향한 잣대의 치수는 촘촘하면서 나를 재는 잣대는 넉넉하기 십상인 거다. 우리 사회에 잘나간다는 사람들이 흔히 그랬다. 겉으론 근엄하게 세상을 논하고 세태를 걱정하면서 속으론 세상사 배 불리는 길로 잔머리를 굴렸고 세태를 앞질러 물을 흐렸다. 그래서 세상이 더 어두워지고 세태가 더 탁해지는데 부끄러운 줄도 몰랐다.

그런 이들 중에 요즘 땅을 치는 사람 많겠다. 전화를 끊고 나서 한숨 짓는 이들 참 많겠다. 새 정부 구성할 국무총리와 각료들 인선작업이 애를 먹고 있다고 해서 하는 소리다. 사람이 없다는 거다. 가진 자원이라곤 사람밖에 없는 나라에서 총리 할 사람, 장관 할 사람이 없다는 거다. 좌파 정권 10년에 우파 인력 풀(pool)이 바닥나서이기도 하지만 간단한 약식 검증에도 후보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간다는 거다. 재산·병역·학력처럼 세상에 드러난 사실만 놓고 보는데도 그렇단다.

약식검증을 통과하면 정밀검증에 들어가는데 이게 더할 건 두말이 필요 없다. 관계기관에 의뢰해 납세·부동산·주민등록·전과 기록들을 꼼꼼히 따져보고 학자의 경우 논문 표절 여부도 확인하는데 발 안 저린 사람이 별로 없는 모양이다. 기록 조회를 위해 본인 동의를 구하면 60% 이상이 고개를 젓는다는 거다. “청문회를 통과할 수 없어서”란다. 눈 앞의 떡을 보고도 밀쳐야 하니 땅 치고 한숨 안 쉬겠나 말이다. 설령 동의하더라도 검증을 해 보면 절반 이상이 탈락하고 만다는 거다. 처음에 100명을 놓고 검토했다면 이제 10명도 안 남는다. 후보의 능력을 따질 겨를이 있겠나. 거기에 누굴 시켰다 해도 인사청문회나 언론 검증 과정에서 뭔 문제가 터져나올지는 그야말로 신(神)만이 알 일이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됐는지 눈물 날 일이지만 개탄만 하고 있기엔 시간이 너무 없다.

그래서 하는 얘긴데 이참에 국민적 대사면을 하는 건 어떨지. 전문적 투기나 상습적 탈세처럼 파렴치한 범죄가 아니라 그저 한 순간 욕심에서 빚어진 어지간한 오점들은 눈 딱 감고 한 번 용서해 주면 어떨지. 평생 정직하게 살아온 많은 사람은 억울할 터지만 본래 용서는 정직한 사람 몫 아닌가. 이참에 용서하고 선을 긋는 것은 어떨지.
대통령 당선인에게 그랬듯 과거의 허물은 덮어두고 인재들에게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주면 어떨지. 그들 손에 걸레를 들려줘 세상을 투명하게 닦을 임무를 맡기는 건 어떨지. 그러면서 자신의 때까지 씻을 수 있게 하면 어떨지. 그렇게 함으로써 먼지가 켜켜이 쌓인 과거와 단절하고 정직한 사람이 손해보지 않는 맑은 사회를 함께 만들어가 보는 건 어떨는지.

그들에게 무작정 돌을 던지는 건 이솝의 우(愚)를 또 한번 범하는 짓이다. 어찌 보면 온갖 부조리를 관행과 관례라는 이름으로 눈 감아온 게 우리 자신 아닌가. 그들이 그걸 즐겼지만 나도 (기회가 닿았으면) 마찬가지였을지 모를 일 아닌가 말이다. 까마귀는 고기 잃고 망신을 당했지만 나무에 앉은 것이 목소리 예쁜 꾀꼬리라면 노래를 부르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다. 참으로 사람이 없다니 하는 말이다.


이훈범 정치부문 차장


이런 글을 썼었다니. 이런 언론에게는 재갈을 물려도 시원찮고 걸레를 물려 부패 맛이 어떤 건지 절절이 느끼게 해야 할 듯. 참으로 사람이 없는 게 아니라 새 정부가 끼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 노는 우물의 수질을 보여 주는 게지. 국민적 대사면이라니요. 대통령 당선인에게 그랬듯이라니요. 전문적 투기나 상습적 탈세를 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다보니 국민들이 참으로 넉넉하게 보이나 보다.
아무리 그래도 언론은 그러지 말아야지. 당신 까만 봉지에 꽁꽁 싸서 쓰레기 봉투에 담아선 버리고 싶어요. 흥.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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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세포가 바뀌었어요.
내 핏톨 속에 뭔가가 침입했어요.
(의사는 환멸스런 표정을 한다)
어떤 모양인지
어디를 흘기는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피돌기가 느려졌어요.
심장의 늪이에요.
내게 깨끗하게 날이 선 손도끼가 있다면
(가혹하지만, 정말!)
내 목 바로 밑을
가볍게 찍어보고 싶어요 딱
한 번만

                          황인숙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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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의 죽음

일상 2008. 2. 25. 03:01


민박집 청소를 하는 첫 날이었다 파란색 물뿌리개가 없어서 한참 찾다가 저기 산 밑에 굴러다니는 걸 발견하고 수풀을 헤치며 그 곳까지 걸어 갔다 키 큰 풀들이 매서워 자꾸 내 옷을 긁어 대니 그것들을 마구 밟으면서 걸었다 누런 풀 사이에 올바르게 서 있던 물뿌리개를 집어 들었는데 날이 추워서인지 안에 얼음이 얼어 있었다 그걸 들고서 다시 길을 되돌아 가는데 자꾸 역한 냄새가 났다 이 풀밭에 동물이 똥을 눴나 보구나 뭘 먹었니 왜 이리 역해 또 신나게 풀을 밟으며 물 뿌리개를 흔들며 걸어 갔다 돌아와선 물 뿌리개에 고인 물을 털기 위해 뒤집어서 흔들 었다 얼음이 영 빠지지 않아서 가득 물을 담아 놓은 큰 다라이에 물 뿌리개를 푸욱 담궈서 물을 넣고는 흔들어 뒤집었다 뭉클 손에 무언가가 닿는다 얼음 사이에 휴지가 끼었나 더 열심히 흔들어 얼음을 빼려고 했다 그래야 물을 가득 담지 또 철벙 손에 뭐가 닿는다 썩은 냄새 역하게 올라 온다 심장이 철렁 해서 물 뿌리개를 바닥에 내려 놓고는 두 발자국 뒤로 물러 난다 마음이 철렁 해서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비스듬히 안을 쳐다 본다 얼음 사이에 죽은 쥐가 끼어 있다 살에 닿은 죽은 쥐의 손
왜 너는 그 작은 물뿌리개 안에서 물에 빠져 죽었니 너가 죽고 얼음이 언거니 얼음과 함께 끼어 죽은 거니 아니면 니가 그 안에 스스로 무덤을 만든 걸까 그렇지 않아 죽임을 당했을 지도 모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쥐의 죽음 나는 왜 너의 죽음을 더듬어 보려 하는가 어쨌거나 내 손에 묻은 너의 죽음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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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10년 전의 일이다. 책을 쓰며 지새우던 밤. 자판기 커피를 뽑으러 나와서 올려보던 하늘의 희미한 별들만 기억에 남아 있다. 여느 ‘386세대’처럼 당시 나도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을 내적으로 방어하는 중이었다. 거의 10년 동안 나를 지탱해주던 하나의 신념체계가 무너졌다. 그 황량한 폐허 속에서 세계관의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처절하게 고민하던 시절. ‘미학 오디세이’는 그 시기에 내가 했던 독서와 고민의 초상이라 할 수 있다. 1권에 나오는 <장미의 이름>은 80년대의 독단에 대한 나의 개인적 반성이라 할 수 있다.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의 사명은 진리를 보고 웃도록, 진리가 웃도록 만드는 데 있는 거야. 유일한 진리는 진리에 대한 광적인 정열에서 우리가 해방되는 길을 배우는 데에 있기 때문이지.

80년대의 우리는 도서관의 호르헤 수사와 다르지 않아, “트리에르 지방에서 발생한 묵시론의 일파”를 광적으로 신봉했다. 언제더라? 내 친구 가운데 하나가 그 장의 함의를 간취하고는, 마르크스를 쉽게 내버린 나의 사상적 변절을 나무라기도 했다. 그는 제법 눈치가 빨랐으나, 정작 중요한 것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윌리엄과 아드소는 호르헤의 광신을 갖고 있지 않으나 신앙을 버리지는 않았다. 실제로 그 장은 “찬미예수”라는 아드소의 독백으로 끝난다. 내가 버린 것은 신앙이 아니라 광신이며, 마르크스가 아니라 그를 대하는 특정한 태도다.

진중권, 미학 오디세이 작가의 말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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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관객과의 가장 근접한 만남을 최우선 과제로 생각하는 '대중 영화'들에 있어
현실적 조건들은 흡수 가능한, 곧 그것에 지나치게 함몰하는 건 불필요한 요소들로
자리를 바꿔가고 있다.
물론 언제까지나 그 주제들이 우리 삶에 개입할 것은 분명하지만,
이 모든 걸 인정하며 하나의 완결적 매개로 완성된 영화는
그에 대한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를 넘어
대체 어떤 일관적 감성으로 관객과 호응할 것이냐가 더욱 중요한 시대로 나아가고 있단 얘기다.
이렇게 된다면 해당 시대의 사회적 쟁점과 그것의 영화적 변용에 집중하던 과거 영화평론의
매우 주요한 패러다임에 한 가지 요소가 덧붙여져야할 것이다.
그건 해당 영화의 일관된 감성을 방해하는 주변적 감성, 곧 관객의 통일된 이입과 연대를
방해할 또 다른 감성요소들의 오류적 난립을 얼마만큼 제거할 수 있을 것이냐의 문제다.

나는 이것이 최근의 많은 영화들에서 공통적으로 주목되는 징후라 생각한다.
일관된 감성적 리듬을 따라가며 그 아래 복속된 것들까지 자연스레 재배치하곤
다시 거대한 모함(母艦)으로 돌아와 다시 전쟁을 주관하는 것.

film2.0 319호 편집장의 말, 이지훈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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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에서 한 아이가 정신없이 놀고 있다. 순간, 한 모퉁이에서 트럭이 돌진해온다.
아이는 갑자기 커다란 외침을 듣는다."빨리 피해!" 그 소리에 깜짝 놀란 아이는 자기도 모르게 옆으로 비켜선다. 세월이 함참이 지난 뒤, 그 아이는 승려가 되었다.
쉰이 넘은 어느날, 참선을 하다 삼매에 들었다. 순간, 눈앞에 한 아이가 골목에서 트럭에
치일 뻔한 장면이 나타난다. 노승은 전신으로 아이에게 메시지를 전한다. '빨리 피해!'
결국 그 옛날 자신을 구해준 목소리는 수십 년 뒤에 '자기' 였던 것.

정화 스님이 일본의 한 사찰에서 수행하실 떄 전해들은 이야기라고 한다.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나, 아니 과거의 나를 구한다고?
영화 터미네이터, 보르헤스의 소설 따위에 나오는 황당한 픽션이 아니다.
요컨대
미래와 과거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시작도 끝도 없이 맞닿아 있다.
그래서 ' 깨달으면 좋고, 미래만 좋은 게 아니라 과거까지 좋아진다.'

고미숙, 나비와 전사 중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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