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해당되는 글 399건

  1. 2008.11.01 부디 나의 뜻대로 아무것도 되지 마소서 1
  2. 2008.11.01 지금은 계속 걸어
  3. 2008.10.19 손 잡고 같이 가자 2
  4. 2008.10.08 orobroy 1
  5. 2008.10.04 무슨.
  6. 2008.10.04 1초의 안녕.
  7. 2008.10.02 삶은여행이니까 1
  8. 2008.09.22 another sad song
  9. 2008.09.21 슬퍼-할. 2
  10. 2008.09.19 계속 불안하려구. 1

하필이면 이 시간 바로 지금 당신의 새로운 글을 보게 되다니요.
그러잖아도 흔들리던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하고 이제서야 비로소 평화로워진다.

내일 책을 사야겠다.

여전히 조심스럽게, 수주웁게
'그래도 된다면, 그대 마음을 빌어 위로받고 싶어요. 그대 글 말고 그대 마음'



생활여행자, 유성용

<서문>


나의 것도 아닌 일상, 그렇다고 당신의 것도 아닌 일상
말하자면, 누구의 것도 아닌 일상.


이것은 생활을 여행처럼 할 수 있다는 제안서가 아니다. 다만 방대한 공해 속을 걷다 깜빡깜빡 죽고 깨어나던, 벗어나지도 뿌리내리지도 못한 누군가의 일상의 기록이다. 생활은 ‘한 사람 몫’의 인생을 감히 넘어서지도 그리고 함부로 넘어설 수도 없는 영역이다. 그곳에서는 이름도 없는 우연의 사건들 그리고 무수한 진정성들이 거짓과 아무런 구분도 없이 험하게 그러나 별 무리 없이 펼쳐진다.

그 속에서 열심히 나에 집중하며 서른여덟 해를 살아왔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길을 모르는 나에게 내가 길을 물었던 기억. 지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한 마디는 나라는 것은 그렇게 열심히 살아봐야 허공에 거대한 구름을 피워 올리는 일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열심히 살았다는 것은 사실 아무런 최종심급도 아니다.

생활여행자란 무엇인가. 그것은 생활에서 나의 집을 잃고, 나의 가족을 잃고, 나의 친구와 애인을 잃고 뿌리 없이 사는 이야기다. 마치 여행 속에서 우리가 그래야 하는 것처럼, 생활 속에서 나에 대한 관심을 줄이고, 내 밖의 풍경과 사건들 속을 헤매면서 나의 것도 되지 못하는 누군가의 일상 속을 걷는 일이다. 급박하고 변화무쌍하면서도 한편 너무 따분한 이생에서 우리가 뭔가를 느끼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늦은 일이다. 사랑하면 당신의 사랑은 이미 고갯마루를 넘어선 것이며 이제 너무 혼자라면 그대는 이미 혼자인 시간들이 끝나가고 있는 것이다. 죽고 싶다면 이미 살만해지는 것이고, 살만하다면 이제 죽을 일만 남은 것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모든 늦어버린 것들의 기록이다. 세상에 대해 코멘트주의자가 되지 마라. 생활이든 여행이든 그것은 온전히 체험하는 자의 몫이다. 그것은 내 속에서 홀로 하는 자문자답이 아니니, 차라리 나의 기원은 이런 것이어야 하리. 부디 나의 뜻대로 아무것도 되지 마소서. 그때라야 얼핏 고질적인 버릇과 증상으로 열심히 에너지를 소비하는 나라는 허튼 구름의 무늬라도 눈치 챌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내가 나일 때 당신은 당신이 아니고 나에 갇힌 또 다른 나였으니, 내가 모래알처럼 작아져서 나도 모를 무엇일 때에라야 당신은 혹 살아있는 당신이 될까.

세상은 나와, 나와, 나와, 나의 구름밭이다.  

쉬!

사는 일의 현명함을 구하지 마라.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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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계속 걸어

일상 2008. 11. 1. 01:08

남은 건 황폐한 자의식뿐.
자의식이란 자신에 대한 의식이다. 밑도 끝도 없이 '나는 누구인가?' 라는 물음에 빠져드는 것이다. 이 질문은 자아라는 관념을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설정하고 있기 때문에 구조 자체가 오류다. "생각하는 것이 뇌의 상태이고, 생각하는 주체는 언어의 형식상 여기에 잘못 끼어든 것이고, 그런 것은 원래 필요없다." 요로 다케시라는 뇌과학자의 말이라고 한다.
- 고미숙, 나비와 전사 중-


 
이것도 나고 저것도 나야,
라고 생각하던 것이 무너지고

이도 저도 내가 아닌 것만 같아서.
왜. 나는 왜 지금 나를 긍정하지 못하는 것인가.

'자의식'을 깨야 한다. 실컷 깨지고 한껏 열려야 한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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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잡고 같이 가자

일상 2008. 10. 19. 23:46



어디가니 아가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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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obroy

일상 2008. 10. 8. 23:56





스페인 피아니스트 Dorantes의 곡.

이 음악 듣고는
이 새벽
아무 것도 못할 것 같은.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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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상 2008. 10. 4. 17:52

이렇게 발톱 하나 깎는 데도 꼼꼼하지 못한 내가
글은 무슨 글.
걸레 하나 구석구석 싹싹 거품을 내고 물기 없이 야무지게
쥐어 짜지도 못하는 성격 급한 내가
글은 무슨 글.

모든 것은 시작하지 않아서 못하는 것이라는 자기 기만.
그 자기 기만에 늘 내 욕심은 지고 말 뿐.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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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초의 안녕.

일상 2008. 10. 4. 01:00

1초 간. 

락커에서 휴대폰이 떨어지는 1초의 순간 난 생각했다.
'한 두번 떨어진 것도 아닌데 떨어져도 괜찮아'
그 생각에 난, 땅으로 곤두박칠 치는 휴대폰을 향해 성의껏 손을 지 않았다.
어머. 하는 제스처만 취했을 뿐.
하지만 휴대폰은 처참히 두 동강이 났다. 친구의 표현대로라면,
분단되었다 -_-

그 동안 산전수전 다 겪으며 지금까지 버텼잖아.
이게 마지막일 줄 알았더라면 난 휴대폰의 마지막을 그렇게 허무하게 보내진 않았을텐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두 동강 난 상태에서도 전원은 꺼지지 않는 휴대폰을 보고, 
난 좀 무서웠다. 너의 끈질긴 생명력이. 
더구나 전화마저 되는 것이었다. 물론 스피커가 없으니 들리진 않지만 내 목소리는 전달됐다.
휴대폰 가게 아저씨의 

"이거 이어폰 꽂아 사용해도 되겠는걸요 허허허" 라는 말에,
'그냥 새 거 사지 말고 끝까지 써볼까' 하며 혹했으니.
하지만 난 널 더이상 웃음거리로 만들 수 없었다. 이젠 너를 보내야 할 때. 

그렇게 너는 갔다. 지난 3년 간의 전화번호와 볼 때마다 좋아서 
보호해놓은 문자들도.
오래남을 찰나의 순간을 찍어둔 사진들도. 

단 하나 뱉어내지 않고 모두 다 끌어 안고 너는 갔다.  
추억 덩거리 너는 갔다.

고생하였다. 안녕. 
안녕.


닳고 닳아 지워지고 까맣게 된 너의 *버튼, 0버튼, #버튼이 떠올라.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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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여행이니까

일상 2008. 10. 2. 01:26
 





무한반복재생. club 8 _ this is the morning

하루종일 우울함이 툭툭 쳐서 약이 바짝 오르고 피곤한 날.
햇살 잘 들어 오는 학교 건물 1층 화장실에 들어 서는데, 눈물날 것 같다, 라는 생각이 든 날.

건물 안 벤치에 앉아 있는데 살기어린 눈빛의 여학생이 창문 앞에 한참 서있더니만, 갑자기 전화기에 대고 악에 받친 목소리로. '죽어! 배찢어져서죽어 죽어 버려!'
뭐 이런 식으로 쌍욕을 하는 걸 보았다. 짝꿍과 나는

'정말 신선한 광경이로구나'
하며 감탄했다.

버스를 탔는데 너무나 예쁜 애기엄마를 보았다. 이 예쁘다는 것은 너무나 분위기가 좋았다는 건데 보얀 얼굴에 잔머리 송송난 옅은 갈색 머리를 빨간 머리끈으로 쫑쫑 매고선 통통한 아가를 안고 있었다. 그 애기엄마는 가뭇가뭇 웃는다. 건너 앉은 애기를 보고선 뭐가 좋은지 혼자 웃다가 자신의 아가도 한번 보고 웃는다. 근데 서툴다. 아가를 무릎에 세우는 것도 서툴고 징징대는 아가 달래는 것도 서툴다. 그래도 애기엄마 너무 예쁘다. 딱 보는 순간 이런 분위기 너무 좋다 그런 사람 처음. 연신 바라보며 아 좋아.

'낙산 공원가자아' 라는 물만두 말에 우린 대학로서 재회. 깻잎떡볶이와 김뿌린 오뎅국물로 적당히 배를 채우고 낙산 공원엘 올랐다. 대학로를 지나 낙산공원으로 가는 오르막길을 오르다 보면 소음이 딱 단절되는 순간이 있는데, 그걸 감지할 때의 짜릿함이란.
춤을 많이 춘 물만두는 연신 힘들어함. 길을 오르다 작고 예쁜 카페를 발견하여 우린 좋아서 두리번 두리번. 그 곳에서 흘러나오는 club 8 의 노래. 잠시 쉬며 물만두를 화장실로 보내고 공원 매점에서 흘러 나오는 허윤희의 꿈과 음악사이를 듣는다. 이 사람 목소리는 연신 건반 두드리는 것 같아. 그것도 도레미파. 딱 그 음들만. 마음이 편안해 진다. 공원 매점 앞엔 콩나무처럼 신나게 자라는 넝쿨이 있다. 무엇에 의존한 것이 아닌 마치 허공을 타고 오르는 듯 자세가 묘하다. 저거 타고 오르면 하늘문까지 가려나.
우리는 곧 낙산공원에 이르렀고 이내 성벽을 올랐다. 담 위에 두 마리의 고양이처럼 요염하게, 아니 소심하게 앉아선 이대로 망부석이 되고 싶다며 수다를 떨다가 곧 입을 다물곤 음악을 들었다. '밤은 저 빛이 얼마나 아플까' 라는 김혜순 시인의 시구를 읊조리다보니 저 멀리 징그러운 아파트보다 가까운 곳에 보이는 달랑 창 하나 소박한 집들이 더 정겨운.
우린 깔깔 웃으며 내려다보이는 서울 풍경을 연신 쓰다 듬는다. 그리고 물만두가 손짓을 하자,
'홍!' 하고 솟구쳐 오르는 사람들. 날아 올라라 날아 올라라 구름에 부딪치지 말고 천국까지 가자.
그리고 이상은의 노래 '삶은 여행'. 어느새 모여든 차가운 바람에 코를 찔름거리며 노래 가사에 마음이 울렁. 그래 우린 지금 좀 괴로와. '그래 이상은도 답을 내지 못했어, 자유로워지는 것에 대해 말이지.' '이상은은 훌륭한 음악가야. 정말 열심히 했다고' 그래서 그녀는 자유를 이야기할 수 있는 거야. 그래. 그래.
우린 낙산공원을 내려 왔고 아까 보았던 예쁜 카페를 다시 지나쳤다. 문은 닫혔는데 자세히 보니 가게 안에 양초같은 작은 불 하나를 켜두었더라. 삶이 내게 주는 배려 같아 찡함.
짜릿하게 다시 소음은 시작됐고, 우린 어디 오뎅이 덜 오염됐을까 농담하다가 결국 도로 옆 포장마차에서 오뎅을 사먹었다. 어쨌든 이 밤 짧은 시간 동안 우린 먹고 비우고 다시 먹고. 그래서 좋은 날.



우린 그림자가 똑같애
키봐봐. 옆에 삐져나온 잔머리즘봐봐.
누가 나고 누가 너냐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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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other sad song

일상 2008. 9. 22. 21:39


잠들기 직전에 유희열 라디오 천국에서 흘러 나온 노래.
까물하며 심연 속으로 가라앉으면서도 멀어져 가는 노랫소리를 들으며 리듬을 놓치지 않으려.

영화 '밴디트' ost 란다.

요즘 라디오를 켜놓고 자는 것이 습관이 됐다. 근데 그 이후로 내 꿈이 무척이나 풍부해졌다.
아침에 깨어 보면, 지난 꿈은 우스꽝 스럽고 때론 괴기스런 꼴라쥬와 같다. 그건 라디오를 들으며 자는 습관 때문이다. 새벽, 라디오에서 들리는 사연들이 제 멋대로 내 꿈속엘 끼어드는 것이다. (난 그렇게 믿고 있다) 가끔 잠에서 막 깨어 반무의식 상태서 본 문자가 잠에 드는 순간 바로 어떤 꿈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말이다.
인물도 사건도 배경도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제 멋대로 꿈. 근데 이게 중독성 있다. 꿈이란 것이 순전히 내 안 잠재돼 있던 이야기가 뒤섞여 영상화되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 현실의 개입을 통해 즉석에서 만들어 진다는 것이 재밌다. 난 꿈 꾸는 것이 너무 좋다. 잠이 꿈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꿈을 꾸기 위해 잠을 청한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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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퍼-할.

일상 2008. 9. 21. 01:15

세상의 사라져가는 것들엔 관심이 많지만 정작 내게서 떠나는 것들에겐 무감하다.
무감하다기보단 적어도 겪는 순간엔, 사실. 잘 모르겠다. 내 곁에서 사람들이 떠나가는 게 그리 슬픈 일인지.  나를 아껴주는 사람이 더 이상 날 생각하지 않을 땐 어떤 기분이 들어야 하는 건지.

하지만 난 그런 것들과의 재-마주침에서 무너지고 만다. 내게서 떠난 것들은 멍멍한 나를 뒤로 하고 괘씸해하며 시간을 앞질러 가 있다. 그리곤 땅만 보며 열심히 걸어가고 있는 나를 기어코 불러 세운다. 나는 이제 여기 없을 거라고, 흘러내릴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울음을 강요한다. 강요되는 울음만큼 나는 슬펐다.
아마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그래도 나. 멀어지는 것에 슬퍼 할, 사람입니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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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불안하려구.

일상 2008. 9. 19. 00:43

요즘 자꾸만 '불안'해서 나한테 실망이 늘었다. 그럼 언제는 불안하지 않았느냐 하겠지만, 이제 대학 4학년이 되니 정말 불안하다. 그것 때문에 나에게 실망하다니! 또 취업준비라는 게 따로 있나, 뭐. 라고 자기 위안도 했지만 내 이전의 '불안'과 지금 느끼는 '불안'이 같지 않다는 것과, 내 '욕망'이 자꾸 가벼워지고 있다는 것 때문일게다.

산다는 건 불안한 일이다. 적어도 난 그 불안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삶에서 오는 모험에 가까운 감정이길 바랐다. 하지만 요즘 생긴 불안함은 사회 기준에 맞춰지지 못할까 하는 걱정,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까 하는 인정욕망, 나 자신을 기준으로 삼지 않은 타인을 거울삼는 비교 욕망. 그런 것들이 아닌가 싶다. 나 하고 싶은 것들에 한해서는 열심히 했고(하기 싫은 것들이 너무 많이 배제됐지만) 좋아한 공부들은 늘 '문제와 질문 자체'를 질문하는 것이었기에 적어도 사회의 가치척도에 쉽게 휩쓸리지 않을 거라 믿었었는데, 자꾸만 휘청거리니 이내 못마땅한 거다.

아아, 난 뭔가 생각을 해야만 한다. 기껏과 용껏을 가로지르며 휩쓸리듯 그러나 만족하며 내린 결론은, 내 불안함을 끝까지 밀고 나가겠다는 것. 그리고 그 불안을 안정에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하는 불안으로 바꾸련다. 그러니까 '이질적인 욕망들이 언제 튀어나올지 몰라 불안한 존재' 가 되잖거다. 그래서 선언해보건대,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은 잉여로서의 욕망에 대한 추구다. 본원적 욕망이라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배치가 욕망을 낳고 욕망이 배치를 만든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이란 주체가 마음대로 무언가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체까지 생산해내는 사회구조의 효과이며 생산'이라 했다. 하지만 수렴되지 못하는 욕망 역시 반드시 생기게 마련이다. 즉 (아마 이미 코드화된) 욕망들이 만들어내는 의지로 난 살아가지만 쉽사리 의지화되지 못하는(못하게 하는 현실때문에) 잉여로서의 욕망말이다. 가령 여행에 대한 욕망. 여기보다 어딘가를 꿈꾸는 그 욕망은 일상으로 수렴되지 못하는, 제 아무리 락앤락 용기라도 감추지 못하고 삐져 흘러나오는 욕망.

어차피 욕망이라는 것이 어떤 배치에 있고 어떤 관계 속에 있느냐에 따라 변하는 것이라면, 난 이 잉여로서의 욕망을 일상의 중심으로 끌어오는 인생을 살겠다. 그것은 하나의 비-계급 되기.
한 개의 계급론이 있다. 그것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이분법을 넘어서고 '욕망'의 문제로 계급을 나누는 것이다. 지금 사회는 욕망의 중심에 자본이 있다는 점에서, 오로지 단일한 계급인 부르주아만이 있다. 그것은 자본의 담지자? 아니 자본의 노예.
그리고 계급이 아닌, 가치법칙 외부의 삶을 꿈꾸는 자인 비-계급이 있다. 그러므로 프롤레타리아는 계급이 아닌 비-계급으로서의 전망이 필요할지도!

중요한 건 내게 배치화되지 못하는 잉여로서의 욕망이 있다는 것. 그건 이렇게는 살고 싶지 않다는 것. 어쩔 수 없다라는 말로도 달래어지지 않는 욕망같은 것. 여가생활에 쉽게 포섭되지 않도록 잉여 욕망들을 자꾸 중심부로 끌어 와서 내 욕망의 배치를 재구성할 수 있을까. (가령 여행생활자 같은 것이 그 실현이 아닐까. 하지만 나는 잉여욕망마저 불분명하다는 것..)

어차피 진짜 욕망이란 건 없다. 그렇다면 난 차라리 곪다가 고름으로 흘러내리는 상처가 된 욕망들을 끊임없이 치료하며 살고 싶다. 일상이 혁명이 되는 그런 삶이 내겐 더 매력이므로. '현실은 어쩔 수 없고 그 현실 속에서 잉여 욕망을 위로할 수 있는 조건들을 만들어내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하기 싫은 거다. 좋아하는 것이 일이 되면 그게 싫어져요 이런 것도 싫은 거다. 그럼 좋아하는 것을 싫게 만드는 '노동'에 대해서는 왜 재사유하지 않는가. 이렇게 반문하고 싶다.
불안하길 바란다. 그 불안이 안정되게 살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제각각의 이질적인 욕망들을 어쩌지 못해 자꾸만 다른 존재가 되는 불안정성 말이다.



나는 과연 뭐가 될까. 여기에 대한 답은 아직까진 '뭐든 되겠지' 다. 뭐든 돼도 상관없는 게 아니니까 이건 좀 더 고민해 봐야 겠다. 그리고 난 아직 절체절명의 위기 순간들을 겪어 보지 못했다는 단점이 있다. 어쨌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 정도. 그러고 보니 난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것만 같다.

또 하나 바라는 것이, 신념을 갖되, 신념 위에 변화하는 정체성으로서의 나를 둘 것. '난 이렇게 배웠는데 난 이게 맞다고 믿었는데 이 기준에 맞는 생활을 하지 않으면 난 일종의 배신행위를 하는 것이 아닌가? ' 하는 생각에 얽매이진 않았으면 좋겠다. 나를 믿는다는 것과 신념을 믿는다는 것은 좀 다른 문제같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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