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 역시 그들이 목소리를 냄으로써, 자기 민족 여자의 정조를 지키지 못했던 한국 남성의 ‘칠칠치 못함’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한, ‘남성성’을 가진 ‘국가’의 의도적인 은폐였다. 여기서 여성의 ‘정조’란 남성 재산의 하나로써, 그 재산권 침해에 대해 한일 양국의 가부장제 사이에서 이해가 계산되어 이야기되었을 뿐, 여성의 인격이나 존엄은 조금도 고려되지 않았다.
이는 현재도 여전히 유효하다. 성폭력 피해 여성들이 자신의 몸을 부끄럽게 여기도록 해 피해자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면서 고발을 막는 현상을 보면 알 수 있다. 여성 자신의 몸은 ‘나’이기는커녕 ‘나의 것’조차 되지 못한다. 여성의 몸은 남성의 재산이며, 국가의 재산이다.
위안부 여성들의 ‘개인 보상 청구권’, 여성 해방의 가능성
여성이 가부장제로부터, 국가로부터의 해방 가능성은 있는 것인가? 그 해방 가능성의 지점들이 바로 한국 여성이 일본 정부에게 사죄와 개인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들의 ‘개인 보상’청구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국가에 예속된 여성의 몸을 분리시키는 것. 즉, 섹슈얼리티의 자기 결정권을 회복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해석될 수 있다.
성적 피해의 자기 인지, 그것은 단적으로 말하면 섹슈얼리티의 자기 결정자로서 여성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자신의 섹슈얼리티-여기서는 단적으로 신체-에 대한 결정권이 자기 자신에게 속하며, 아버지 남편 등 가부장권에 속하지 않는다는 주체 의식을 수반한다.
위안부 소송을 지원해 왔던 그룹의 야마사키 히로미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지금 어떤 여성이 강간을 당해 그 범인으로부터 남편이나 부친하고 합의가 끝났기 때문에 이미 해결했다고 한다면 납득할 수 있겠습니다? 아닙니다.’ 여기서 남편이나 부친을 ‘국가’로 바꿔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위안부 여성의 개인 청구권 논리가, 국가가 개인을 대표할 수 없으며 여성이 국가의 귀속물이 아니란 것을 보여 준 것이다. 국가 간의 합의와 보상으로 마무리 지어졌던 일본군 위반부 문제가 개인 청구권으로 그 역사를 다시 쓰게 되었다. 바로 국민 국가를 초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민족주의 담론을 벗어나기 위하여
하지만 위안부 여성들의 문제는 결코 간단하지 않으며, 개인 보상권 청구소송 이후에 이를 해석하는 데서 다양한 패러다임이 발생했다. 저자는 문제의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전시하 위안부를 정당화하기 위한 측의 ‘매춘’ 패러다임, 그리고 ‘매춘’ 패러다임에 대항하기 위한 ‘군대 성 노예제’ 패러다임을 둘러싼 복잡한 문제도 함께 다룬다. 우에노 치즈코는 이 문제를 둘러싼 패러다임 속에서 경기를 끝내는 호루라기를 분다. 결국은 이 두 가지 이론을 지배하고 있는 것도 '국가주의'라고 말하기 위해서 말이다. 특히, 위안부 여성들을 지지하기 위한 ‘군대 성 노예’ 패러다임은 한국의 반일 내셔널리즘을 위해 동원되고 있다. 이러한 민족 담론적인 견해는 자민족 중심적으로 흐르면서, 타민족과 타지역 피해자와의 사이에 벽을 쌓게 하는 부정적인 측면으로 흐를 수 있다. 이는 반일 내셔널리즘적인 ‘군대 성 노예’ 패러다임이 결국은 ‘일본군 위안부 여성’이 아니라 ‘민족’ 이 일본이라는 강간범에 의해 유린된 것이라는 의식을 낳게 만든다.
저자의 우려처럼, 국가를 넘어서는 역사적 담론이 생산된 지점에서 발생한 운동들이, 다시 민족주의 담론을 재생산하면서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여성은 여전히 ‘주체’가 아니라 ‘민족 주체’일 뿐일 것이다.
새로운 기억 정치학을 꿈꾸며
이렇게 국가의 권력을 헤집어 보는 것. 즉 젠더 중립적이라고 믿었던 국가를 ‘젠더화’ 하고 그 방법론으로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 이것은 곧 우리들의 기억과 관련된 문제이다. 국민들의 기억을 어떻게 동원하고 이용하는지를. 새로운 역사를 쓰기 위해서는 새로운 기억의 정치학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린 모두 위안부 문제에 관해서 ‘사실’이라는 점에서는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은 위안부 여성들이 침묵을 깨고 목소리를 냄으로써 '변화‘ 했다. 그것은 바로 ’피해자의 치욕‘에서 ’가해자의 성 범죄‘로의 전환이다. 이것이 바로 젠더사가 역사를 새롭게 쓴 성과이다.
고민해야 한다. 기억 속에서 ‘침묵 당한 소리’를 어떻게 드러낼 수 있을까. 이 고민의 시작은 우리가 정사(正史)라고 있는 공공의 기억에 대한 해체일 것이다. 이 공공의 기억은 대체 누구를, 무엇을 위한 것인가. 이 공공의 기억을 형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정사가 역사 속의 수많은 주름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다양성과 대립을 어떻게 감추어 왔는지를 말이다. ‘보편성’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보편적인 것은 힘 있는 자들이 부여한 ‘특권’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