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해당되는 글 398건

  1. 2012.04.26 단순한 열정/아니 에르노
  2. 2012.04.20 다큐멘터리. 참고할 것.
  3. 2012.04.18 머리칼 손길
  4. 2012.04.18 철의 노동자.
  5. 2012.04.11 그랬구나
  6. 2012.04.09 고통받는 얼굴
  7. 2012.04.01 내가 타인들 속에서 생각하고 느끼는 것.
  8. 2012.03.29 평일아침 2
  9. 2012.03.15 오롯이
  10. 2012.03.11 고충

1.

내가 가지고 있는 열정의 근원을 정신분석학자들이 하듯이 오래된 과거나 최근의 경험을 더듬어 찾아낼 생각은 없다. 그리고 어린 시절부터 나에게 영향을 주었던 심리적인 모델을 근거로 해석하고 싶지도 않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나 페드라, 혹은 에디트 피아프의 샹송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만큼이나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나는 남의 눈에 이상하게 비칠 수도 있는 나의 열정을 변명하듯 일일이 설명하려는 게 아니라 다만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설명하려 든다는 건 결국 나의 열정을 애써 정당화시켜야만 하는 방탕함이나 큰 잘못으로 생각한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글을 쓰는 데 있어서 내게 미리 주어진 것이 있다면 그건 내가 열정적으로 살수 있게 해주는 자유와 시간일 것이다

 

2.

이런 이야기들을 숨김없이 털어놓는 것을 나는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이야기들을 기록하는 때와 그것을 나 혼자서 읽는 때, 그리고 사람들이 그것을 읽는 때는 이미 시간상으로 상당한 차이가 있을 터이고, 어쩌면 남들에게 이 글이 읽혀질 기회가 절대로 오지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남들이 읽게 되기 전에 내가 사고로 죽을 수도 있는 일이고, 전쟁이나 혁명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 시간상의 차이 때문에 나는 마음놓고 이 글을 쓸 수가 있다. 열여섯 살 때 일광욕을 한답시고 하루종일 몸을 태우고, 스무 살 때는 피임도 하지 않은 채 겁없이 섹스를 즐겼던 것처럼 나중 일을 미리 두려워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겪은 것을 글로 쓰는 사람을 노출증 환자쯤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노출증이란 은연중에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 싶어하는 병적인 욕망일 뿐이니까.)

   

3.

그런데도 그 사람을 향한 끊임없는 기다림과 갈망으로 가슴태웠던 지난 해 봄, 내가 그 사람을 떠날 수 없었던 것처럼 지금도 여전히 그 사람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글을 쓰면서 내가 바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글에는 사람들이 삶 속에 새겨놓고자 하는 것만이 남는 법이다. 또 글을 계속해서 쓴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읽혀질지도 모른다는 고통을 하루하루 연장시키고 있는 것과 같다. 하지만 글을 써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는 한, 그런 가능성은 개의치 않는다. 그러나 그 필요성의 극에 다다른 지금, 써놓은 글을 찬찬히 읽어보니, 놀랍기도 하고 부끄러운 생각도 든다. 이런 감정은 그 사람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살아갈 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들이다. 이것은 출판물이라는 관점에서 비평하는 세인들의 '정상적인'가치기준과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글은 자선전입니까?" 하는 장르의 문제에 대답해야 하고, 이것은 어떻고 저것은 어떻다는 식으로 억지로 정당화시켜야 하는 곤혹스런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런 종류의 질문은 전형적인 소설의 형식을 갖추지 않은 모든 글의 출간을 방해나는 게 아닐까?)  

지금, 내가 아니면 도저히 읽을 수도 없을 만큼 삭제와 교정으로 뒤덮인 원고를 앞에 놓고 있다. 나는 이것이 어떤 결론도 내리지 않는, 철저하게 개인적이고 유치하기 이를 데 없는 글이라는 생각이 든다. 노트 한 쪽에 낙서해놓은 외설스런 말이나 사랑의 고백처럼, 혹은 아무도 보지 않으리라 확신하면서 조용히 아무 탈 없이 쓸 수 있는 일기처럼, 그러나 이 원고를 타자치기 시작하고, 마침내 책으로 출간되고 나면 나의 순진한 생각도 끝장나고 말 것이다.

   

4.

정작 그 사람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그 모든 일들이 다른 여자가 겪은 일인 것처럼 생소하게 느껴지기 시작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사람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한계에까지, 어쩌면 그 선을 뛰어넘은 곳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나는 온몸으로 남들과는 다르게 시간을 헤아리며 살았다 

나는 한 사람의 열정이 어디까지 가능한지를 알게 되었다. 욕망은 극에 달하고, 자존심 따위는 없어지고, 다른 사람들이 그랬을 때는 무분별하다고 생각했던 행동을 신념에 차서 스스럼없이 했다.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세상과 더욱 굳게 맺어 주었다.

   

단순한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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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P2012 다큐멘터리 피칭' 프로젝트 선정위원 글 중에서.


다큐멘터리는 극영화와 달리 실재하는 현실을 재료로 만들어진다. 그 현실은 카메라로 담아내지 않아도 이미 존재하는 현실이다. 이미 존재하는 현실은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이미 무엇인가를 의미하고 있다. 다큐멘터리가 현실에 대한 일종의 폭력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감독의 작업이 그러한 현실을 작업의 의도에 따라 변형하는 과정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의 개입이 필요한 이유는, 감독의 개입 없이 그것은 무한한 현실의 익숙한 반복으로 가치 있는 이야기가 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번 다큐멘터리 심사의 지향점이라고 할 수 있는 ‘다양성’과 ‘대중성’은 선택한 소재를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이 얼마나 참신하게 대중들에게 앎의 욕구를 자극할 수 있는가로 설정했다. 이를 염두에 두고 대중적인 이야깃거리를 넘어선 감독의 독특한 시선이나 형식적인 시도에 초점을 맞춰서 이번 예심을 진행했다. 서류심사와 면접을 포함한 예심의 과정은 그래서 새로운 시도를 발견하는 흥분의 시간이기도 했지만 완성도 있는 작품을 떨어뜨려야 하는 아쉬움의 시간이기도 했다.

예심을 통과한 작품만큼이나 탈락한 작품도 다큐멘터리로서의 미덕과 발전가능성을 가지고 있지만 제출된 자료를 바탕으로 설정한 심사 기준에 적합한 작품을 골랐다는 것을 밝혀둔다.

예심에 접수된 총 26편의 작품들은 사회적 이슈, 일상, 역사, 휴먼 드라마까지 다큐멘터리가 다룰 수 있는 현실들을 다양하게 다루고 있다. 하지만, 풍부한 소재에 비해서 그것이 다뤄지는 방식에 있어서는 좀처럼 진부함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현실과 그것의 대중성에 대해서는 많은 고민을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정작 그것을 담아내는 다큐멘터리라는 영화형식에 대해서는 너무 관습적인 접근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을 담아내는 다큐멘터리의 형식이 결정되는 순간 그 현실을 바라보는 관객의 위치가 결정된다는 사실 때문에 다큐멘터리는 극영화에 비해 훨씬 자유로운 양식과 형식의 전통을 지녔다. 현실을 담아내려는 치열함이 기존의 양식과 형식의 견고함을 유연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 치열함은 카메라 앞의 대상에 대한 치열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무엇을 어떻게 관객에게 전달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물론 올해로 4년째를 맞고 있는 다큐멘터리 피칭의 장이 해를 거듭할수록 진일보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최종 피칭의 기회를 주기로 한 기획들은 모두 자신만의 독특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도 그것의 소통의 방식에 대한 고민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이었다. 과감하고 독창적인 결과를 기대해본다.

'JPP2012 다큐멘터리 피칭' 프로젝트 선정위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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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아이> 백연아 감독 제작 노트 중에서.

촬영대상과의 관계에 대해 고민할만 한 것들.


성열이와 군산촬영을 먼저 하고 나서 수범이 집을 찾아갔는데, 수범이는 정말 평범한 아이같다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성열이와는 달리 카메라를 굉장히 의식하고 수줍어하면서도 갑자기 학교까지 와서 카메라 들고 자기를 쫓아다니니까 내심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인터뷰할 때는 성열이 생각하고 어른들 인터뷰 하듯이 이것 저것 물어봤다가 완전히 낭패를 봤죠. 쉽게 지루해 하더니 나중에는 완전 삐쳐서 이야기를 안 하더라고요. 그게 평범한 아이들의 반응이라는 걸 나중에 알았습니다.

 (중략) 

성열이도 그렇지만, 수범이를 촬영하면서 상대방의 눈높이에서 생각하는 법이나 다큐 촬영을 할 때 가져야 할 자세 등에 대해 많이 배운 것 같아요. 성열이를 촬영할 때는 보다 근본적인 것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게 되고, 예를 들어 타인을 재현한다는 것이 가능한 건지, 그들의 입장에 서 생각한다는 것이 가능한 건지, 그리고 그런것들을 재현해야 하는 입장 자체에 대한 고민을 한다면 수범이의 경우는 보다 기술적인 문제에 대해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상대방에게서 효과적으로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을지에 대한 것과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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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달팽이의 별> 이승준 감독 인터뷰 중에서. 

시몬 엘 하브레 감독이 극장판을 편집할 때 가장 중요시한 건 뭐였나.
내가 편집한 버전을 보고 그가 이런 얘기를 했다. '너는 관객을 자꾸 끌고 가려고 한다'고 하더라. '여기 재미있는 일화 있으니까 이거 봐, 이거 봤어? 그럼 이런 일화도 있어.' 관객이 극중 주인공의 삶이 어떤지 상상하고, 생각하게 해야 한다고 하더라. 그게 호흡이었다. 지금 버전이 다소 느린 속도의 편집인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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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칼 손길

일상 2012. 4. 18. 23:36

아이는 얼굴을 찡그렸다. 엄마는 헝클어진 자신의 머리칼을 사정없이 빗고는 세게 당겨 묶는다. 아파서 얼굴 근육이 일그러지지만 아프다는 말은 안 한다. 나는 그 표정을 클로즈업으로 찍고 있었는데 어찌나 우스꽝스럽던지 카메라 댄 배를 출렁이며 겨우 웃음을 참았다. 뿌리까지 뽑을 듯 머리칼을 묶어 주는 엄마와 오만상 얼굴찌푸리고 눈을 흘기면서도 아프다 말 한마디 안 하는 여섯살 꼬마. 다음 날 유치원 촬영이 있었다. 뛰어 노는 아이를 붙잡아 머리를 묶어 주려 했다. 내 손목에 끈 하나를 빼선 아이 머리를 묶으려는데 불현듯 전 날의 그 장면이 떠올랐다. 왠지 마음이 짠해서 손가락으로 살며시 결을 다듬고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머리칼을 모아 묶었다. 나는 괜히, 아파? 라고 물어 보았고 반응 한번 안 해주던 고집 센 아이가 조금만 머리통을 좌우로 간결하게 저을 때, 그 때, 아이구나, 워낙 고집세고 힘든 티 안 내도 너는 그저 당연히, 아이구나, 하는 생각, 전해지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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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 노동자.

일상 2012. 4. 18. 22:20

잠을 자면 머리에 큰 산소방울이 둥글둥글 생기면서 여백을 만들어 내고 그 여백이 재밌는 생각들을 하게 하지. 잠이 부족해. 이십일 째 하루 두서너 시간씩 자다보니 뇌가 바짝바짝 말라 간다. 공기 희박한 내 머릿속을 떠다니는 인공위성은 여기저기를 텅텅 치며 내 골을 상하게 한다. 시간이 짧아지면 잠은 깊어질 줄 알았는데 되려 잠은 낯설어지고, 이젠 눈을 감아도 잠에 진입하지 못 하고 밤새 떴다 추락하다 떴다 또 금세 추락하는 로켓처럼, 아름답고 덧없다. 추락하는 모든 것은 아름답고 솟아오르는 노력은 덧없다. 솟아오르는 노력은 아름답고 추락하는 모든 것은 죽음보다 덧없고 삶만큼 치열하다. 모든 의미 없는 치열함에 죽음을, 죽음을 위한 노력을, 노래를. 골에 처박히는 인공위성이 불러주는 노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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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구나

일상 2012. 4. 11. 09:06

불행해.
오랜만이었다. 이 맑고 투명한 말을 입밖으로 내뱉은 건. 작년 여름. 파란 블라우스에 감색 바지를 입고 구두의 또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내리막길을 내려 가고 있었는데 이제 막 해가 지기 시작했다 하필. 멀리 보이는 자잘한 건물들 위로 붉은 빛이 감도는 걸 잠시 바라 보다 고개를 숙이고는 구두코를 보고 걸으며, 나도 모르게, 불행해 라고 말했다. 태어나 처음이었던 것 같다. 불행하다고 느낀 건. 어떻게 이런 느낌을 처음 가질 수가 있지 싶었다. 이 느낌을 잊지 않아야지 했다. 그 날은 별 일도 없었다. 그냥 하루 종일 아무와도 말을 하지 않았고 조용히 일했던 하루였는데 더구나 퇴근도 일찍 했는데.
나도 모르게 입밖으로 감정표현을 뱉어내는 일은 오랫동안 작은 결석들이 모이고 모여 굳은 돌멩이 하나를 뱉어내는 것과 같아서, 배도 아프고 목도 아프고 혀도 아프고 그렇다. 이 돌멩이가 몹시 맑고 투명할 수록 더욱 서럽고 서글프다.
오늘 새벽, 지하철 막차 안에서 나도 모르게 불행해 불행해 라는 말이 입밖으로 뽁 하고 튀어 나오는데 이유는 알고 싶지도 않아 서둘러 몰라줘서 미안해 미안해 하고 스스로 달래주고 말았다. 그러고 조금씩 비가 내리는 새벽길을 걷는데 갑자기 울음이 터졌다. 울음으로 이어지는 순간은, 사건은, 늘 당황스럽다. 그래도, 스스로에게 이유를 묻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묻지 않으려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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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받는 얼굴

일상 2012. 4. 9. 21:57
푸르스름한 텐트에 몇십명되는 사람이 빡빡하게 들어 가 있었는데 이들은 투쟁 중인 것으로 짐작됐다. 온다! 라고 누가 소리치자 텐트 속 사람들은 깍지를 끼고 일제히 몸을 뒤로 젖혔다. 피라미드 모양이 되었다. 그때 나는 한 남자에게 집중하게 되었는데 전경 한 명이 그에게 가까이 붙어 있었다. 몸을 쭈그리고 남자 옆에 앉은 전경은 곤봉으로 그의 왼뺨과 오른뺨을 번갈아 아주 세게 때렸다. 가장 바닥에 누운 채 팔을 양쪽으로 뻗고 얼굴이 하늘을 향해 있었기 때문에, 모두가 그런 자세였고, 그는 공격에 저항할 수 없었다. 곤봉으로 한 대 맞을 때마다 남자는 괴성을 질렀다. 이제 전경은 남자의 얼굴에 어떤 액체를 뿌렸고 그는 괴로워서 괴상한 소리를 계속해서 질렀다. 나는 그 광경에 너무 화가 나고 답답해서 가슴이 메이도록 엉엉 울었다. 꿈에 깨고도 고통받던 그 남자의 모습이 생생했는데 어느 순간 분노는 간데 없고 하루내내 눈에 보이는 그 얼굴이 이젠 너무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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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노 책들 읽는 중.

글쓰기에 관한 서신집인 <칼 같은 글쓰기>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 지, 무엇을 향해 가는 지를 아는 작가들. 그 내용이 내부 아닌 밖을 향해 열려 있고 사명과 책임이 담겨 있다면 나는 항상 감동하고 만다.

 

1.

프레데리크 이브 자네(F.-Y.J.) : 그렇게 작업하도록 당신을 이끄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해해야 한다는 필요성인가요? 과거를 해명하고 현재와 자신을 연결해야 한다는 필요성인가요? 글로 남기지 않은 것을 복원해야 한다는 필요성인가요? 현재 당신이 하고 있는 시도에는, 기억을 통해 시현되는 작업에 기초를 둔 다른 자전적 시도(샤토브리앙, 레리스, 프루스트의...)처럼 암흑에 덮여 있는 지대들을 조금씩 채워나감으로써 살아온 삶 전체를 '총망라'하겠다는 야심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닙니까? 앞으로 쓰게 될 텍스트들에서도 그렇게 작업에 임할 건가요?

아니 에르노(A.E.) : 내 삶의 암흑지대를 발견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내게 일어난 일들을 샅샅이 기억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요. 내 과거는 그 자체로서는 내게 특별한 흥밋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나 자신을 독특한, 그러니까 전적으로 유일무이하다는 의미에서의 독특한 존재로 생각한 적은 거의 없어요. 내가 생각하는 것은 사회적, 역사적, 성적 경험과 결정 그리고 다양한 어법의 총합으로서, 끊임없이 세상(과거의 세상이든 현재의 세상이든)과 소통하고, 독특한 주관성-그럼요, 물론이죠-을 형성하는 전체로서의 나 자신입니다. 하지만 좀더 보편적이고 집단적인 현상이나 메커니즘을 재발견하고 들춰내기 위해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개별적인 주관성을 사용합니다. 솔직히 이 표현방식이 만족스럽지는 않군요. 때때로 나는 이렇게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나는 세상 모든 사람들처럼 한 가지 독특한 방법으로 사물을 경험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보편적인 방법으로 그리고 싶다." 내가 이 생각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은 아마 <사건>의 결말인 것 같아요. 거기서 나는 내 삶 전체가 사람들의 삶과 생각 속에 완전히 용해되어 모두에게 이해 가능한 보편적인 무엇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브레히트의 문장이 생각나는 군요. "그는 타인들 속에서 생각하고, 타인들은 그 속에서 생각하곤 했다." 내게 많은 것을 의미하는 문장입니다. 깊이 생각해보면, 글쓰기의 최종 목적은, 다시 말해 내가 열망하는 이상적인 글쓰기는, 타인들-다른 작가들, 그러나 그들뿐만이 아닙니다-이 내 안에서 생각하고 느꼈듯, 내가 타인들 속에서 생각하고 느끼는 것입니다.

   

2.

진실을 저버리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자전적 이야기는 꽤 많습니다. 정말 견디기 힘든 일이죠. 반대로 소설이라 불리면서도 진실에 가 닿은 텍스트들도 많습니다.

   

3.

이러한 성찰 끝에 나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겉으로는 하찮아 보일지도 모르는 하나의 생애, 바로 내 아버지의 생애를 떠올리는 유일하게 정당한 방법, (내 아버지와, 나를 배출했고 여전히 존재하는 세상, 즉 지배받는 자들의 세상을) 배반하지 않는 하나뿐인 정당한 방법은, 정확한 사실을 통해, 내가 들은 말을 통해 그 생애의 리얼리티를 복원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4.

'위험한 어떤 것'을 쓰고 싶은 욕망의 다른 이유가 생각나는군요. 이것은 내가 내 출신 사회계층을 배반하고 있다는 감정에 깊이 연루되어 있습니다. 나는 사치스러운활동을 하고 있어요. 비록 역시 고통스러운 일일지라도, 자기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글쓰기에 바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사치가 어디 있겠어요? 그리고 그러한 삶을 속죄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어떤 안락한 모습도 보여주지 않는 글쓰기를 하는 것, 내가 손으로는 한 번도 노동해보지 않은 만큼 나 자신의 존재 전체로써 그 대가를 지불하는 것입니다. 속죄의 다른 방법은 글쓰기를 통해 세상에 대한 지배적인 관점들을 전복시키는 데 기여하는 것입니다.

   

5.

사물을 진실로 경험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다시 경험해야 할 필요를 느껴요.

  

6.

전쟁이 끝난 직후의 릴본. 나는 네 살 반쯤 됐다. 테어나서 처음으로 내 부모와 함께 무대 공연을 구경하고 있다. 야외 공연인데, 아마 미군 캠프 안인 듯싶다. 사람들이 무대 위로 커다란 상자를 가져온다. 그러고는 그 속에 한 여자를 꽁꽁 가두어버린다. 남자 몇 명이 여러 개의 긴 칼을 상자 여기저기에 찔러 관통시키기 시작한다. 그 작업은 한없이 계속된다. 어린시절 그 공포의 시간은 끝이 없다. 생각해보면 결국 그 여자는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고 무사히 상자에서 다시 나오는데도.

   

칼 같은 글쓰기(L'ecriture comme un coute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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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아침

일상 2012. 3. 29. 12:22

아침에 엄마를 배웅하러 터미널엘 갔다. 엄마는 집엘 바로 가지 않고 여기저기 돌아 다니다 들어갈 거라 했다나는 묻지도 걱정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하는 엄마가 좋다. 나도 어디든지 가고 싶었다. 날씨가 좋았다. 출근 시간을 약간 비껴간, 날씨 좋은 평일 아침이었다. 엄마 나 지방 내려가서 살래, 아니면 외국가서 살아도 돼? 그래 차라리 외국 나가서 살아라. 너는 이미 그럴 줄 안다고 했다. 그래도 아직 나에겐 감당해야 할 짐이 많다. 자유롭고 싶다. 책임으로부터가 아니라 내가 만족할 만큼 온전하게 스스로의 힘으로, 자유롭고 싶다. 나를 어디에 둘 것인가, 내 둘레를 어떻게 넓혀 나갈지가 중요하다. 그래서 또 힘이 들어 간다. 쉬운 게 없다. 몇 번은 더 몸부림쳐야 겨우 남들 같아지는 환경에 감사한다. 진심이다. 두통은 이제 완전히 나아졌다. 그날 새벽 내 두뇌는 지문 한뼘 만큼 이동한 지도 모르겠다. 탈 많은 스물 아홉이다. 예전보다 더 힘들어진 건 아니고 예전엔 없던 경험을 겪었다. 겪는다. 사랑의 고통도 그 중 하나다. 내가 사람들에게 잘못하는 게 너무 많다. 그래도 고집을 꺾을 수가 없다. 생겨 먹은대로 살아야 한다. 나는 내가 뭘 원하는지 안다. 그런데도 왜 이리 헤매는지 모르지만 헤매는 나를 이해해주면, 계속 살아갈 수 있다. 엄마가 팔을 크게 흔들고 돌아서는데 빵빵한 배낭이 보였다. 가끔 엄마가 크고 무거운 배낭을 메고 있는 것만 보면 내마음 귀퉁이가 툭툭 터지는 것 같다. 돌아서 봄 풍경에 멍하니 서 있는데, 왠지 평안하고도 불안해서 나는 그만 또 짜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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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롯이

일상 2012. 3. 15. 23:48
오롯이 자신만의 의지로 자기 모든 걸 거는 사람은 드물어. 그래서 끌리는 거야. 사랑하게 되는 거야. 운명으로 만들어 버리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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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충

일상 2012. 3. 11. 19:41


고흐 편지들에서 주워 모은 고충에 대한 글귀.
 

-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절대 안 된다'는 그녀의 입장 때문에 앞이 막혀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 때문에 '인생의 자잘한 고충'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런 고충을 책에서 접한다면 재미있을지도 모르지만, 직접 경험하고 보니 결코 유쾌하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체념하거나 용기를 잃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긴다. '어떤 일을 하지 않는 방법' 따위는 그럴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나 배우라지. 너도 이런 경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해도 되는 일, 해야만 하는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이 놀랄 만큼 어렵다는 건 알고 있겠지. 여하튼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빈둥대서는 안 되며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뭔가를 찾아야 한다.

-너도 이런 사랑에 빠져본 적이 있니? 그렇기를 바란다. 나를 믿으렴. 사랑이 불러일으키는 '작은 고충'도 가치가 있단다. 물론 절망적인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지옥에 떨어진 것처럼 괴로운 순간도 있고. 그러나 더 나은 어떤 게 있기 마련이다.

-크고 작은 고충은 수수께끼 같다. 힘들더라도 해답을 찾으려 노력할 만한 가치가 있다.  

<반 고흐, 영혼의 편지> 중에서
 

 왜 고충에다 따옴표를 해두었을까? 고흐의 편지에서 강조돼 있던 걸까 아니면 역자가 일부러 이리 편집한 걸까. 일단 끝까지 읽어 봐야겠다.
고충이라는 말이 마음에 든다. 가진 어려움이 좀 가벼워 보이긴 해도, 힘든 마음도 좀 가벼워지는 것만 같아서. 한 번도 내 어려움을 '고충'이라 부를 생각은 못 했다. 고민이나 고통보다는 훨씬 괜찮은 이름이다. 안으로 웅크려 자학하지 않고 '수수께끼'처럼 해결해 나가야겠다는 의지가 생기도록 한다. 좀 힘들더라도 말이다. 아무리 책이나 영화를 많이 접한다 해도, 경험만 못 하다. 성숙은, 경험으로써 완성된다. 세월이 흐른다. 나이, 먹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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