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포함한 다섯 사람이 걸어가고 있었다

푸르게 무성한 잔디를 가진 어느 공원이었다

다들 기쁘게 걸어가고 있다고 느꼈는데

갑자기 두 사람이 멈추더니 그중 남자가 손에서 무언가를 던졌다 빛이었다

두 사람은 재빠르게 뒤를 돌아 왔던 길로 뛰어갔다

빛을 본 우리는 경악하며 달리기 시작했다

작고 동그란 빛은 계속 우리를 따라왔다

우리는 사람이 많은 곳에 다다랐다

그 빛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고

도망을 쳤다 하지만 멀리 가진 못했다

막다른 길도 아니었는데

우린 고립되었다

교복을 입은 소녀가 그 빛을 손에 쥐었다

모두들 얼어붙었다

소녀는 달려 숲으로 사라졌다

모두들 울며 그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죽은 소녀가 숲을 나왔다

하지만 나 이외의 죽음을 막진 못했다고

빛을 쥐고 도망친 곳에서 또 사람을 보았다고

그들과 함께 죽을 수밖에 없었다고 눈물을 흘렸다

우리는 다같이 또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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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nediction

인용 2015. 3. 30. 02:34





최근 산 시집 <철과 오크>의 아무 페이지나 펼쳤다.

 

 

망원

 

우리에게 익숙한 이미지의 익사체로 남은 천사들이 한강으로 날아와

성산대교니 행성이니 하는 것들을 부수고 있었다

멋진 광경이었다

 

이미지가 지루해지면 집으로 왔다

 

 

-

시와 음악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깊이 읽고 듣지도 못했지만

이것들이 그것 아니라면 대신할 수 없는 유일한 기쁨을 준다는 것은 알겠다
대신할 수 없다는 것
있으면 좋을 기쁨이 아니라

없으면 완벽해질 수 없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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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0m

여행 2015. 3. 25. 03:53

   

 

고래빠니에서 푼힐까지 오르는 1시간 여의 시간이 가장 힘들었다. 컴컴한 새벽 산길, 길은 가파르고 얼었다. 말없이 묵묵히 오르는 사람들의 긴 행렬에, 길이 좁아 중간에 이탈해 쉬기가 쉽지 않았다. 해가 뜨기 전엔 도착해야 한다는 욕심도 있다. 푼힐에 들어서는 순간 전날 마주쳤던 어린 여학생이 꺾이듯 바닥에 주저 앉으며 그와 동시에 울음을 터뜨리던 모습이 생생히 기억난다. 만약 앉지 못했다면 울음만은 끝까지 참았을 동작이었다. (히말라야, 네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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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긋나 버렸다.

일상 2015. 3. 14. 21:45


엄마는 어제 점을 봤다며 신나는 목소리로 전화했다. 물론 나에 대한 것은 이번에도 특별하달 게 없어서 그런 거 믿지 않는다며 지속적으로 대꾸하면서도 늘 “또 뭐 물어봤어? 또 뭐? 이건 어떻대?” 하고 묻게 된다. 그러다 아빠 이야기가 나왔다. 점쟁이는 엄마와 아빠의 궁합이 좋다고 했단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난, 그 점쟁이 못 믿겠네, 라고 답했고, 엄마 역시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했다면서, 그런데 그거 빼곤 기막히게 다 맞혔다니까, 라고 했다. 그 얘기를 듣는데 갑자기 최근 본 클레르 드니의 영화 <돌이킬 수 없는>이 생각났다. 영화에서 “어긋나 버렸다.”는 말이 두 번 나온다. 어긋나 버려서 일이 그렇게 되었다고,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게 무너진 한 여자가 그 얘길하며 흐느껴 운다. 내용과 상관없이 그 말이 오래 남았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일에 대한 원인으로 이 말만큼 강력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게, 어긋나 버린 게 아닐까. 궁합으로도 어쩔 수 없는 한순간의 어긋남 때문에 어느 부부는 돌이킬 수 없이 하지만 헤어지지는 못한 채 서로를 무시하며 살아진 게 아닐까. 그 어긋남이라는 게 따지자면 구체적인 사건일 수 있지만 단순히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고 거기에 그 무언가들이 들러붙어 벌어진 일처럼 느껴진다. 운명이 될 만큼은 강력하지 못한 어떤 것들이 항시 노려보고 있다가 때를 노려 악착같이 발에 매달리는 느낌. 그래서 벌어진 일들, 형성된 삶들. 하지만 그것에 운명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싶지는 않다. 좋은 궁함-어긋남이라는 상관관계를 두고 생각하다 보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수도 있을’ 걸 자꾸 상상하게 되어서 오래 할 생각은 못 된다는 걸 금세 깨닫는다. 점쟁이 말로 아빠는 훌륭한 기술자고 능력도 있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내가 그의 노동을 굉장히 존중하고 있다는 건 가끔 느낀다.) 하지만 뭔가에 눌려서 그걸 제대로 펼치지 못한다고, 그래서 엄마가 자꾸 잘한다, 잘한다고 칭찬해줘야 한다고 했다. 그 말이 너무 슬펐는데, 남은 생에 그렇게 될 일은 없을 거란 예감과, 실은 내가 굳이 그러길 바라지 않는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었다.  



왜인지 요즘은 가족을 자주 이야기하고, 자주 생각하게 된다. 가족 개개인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관계나 관계 맺음 자체가 낯설어진다. 물리적으로 가족과 멀어진 지는 10년이 다 돼 가는데, 이제야 가족과의 거리두기가 가능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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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일상 2015. 3. 9. 02:38


꽤 넓은 공터였다. 그곳에 한복을 입은 이모들이 소리내어 울고 있었다. 사람이 서럽게 운다는 것의 느낌은 그때 형성된 것 같다. 공터의 끝엔 초가집이 있었고 그 주위로 꽤 많은 사람들이 북적였다. 집안의 아이들은 멀찍이 떨어져 놀고 있었다. 난 모래바닥에 이것저것 낙서를 하며 우는 소리를 들었다. 사촌동생이 저기 무얼한다고 해서 고개를 들었을 때, 형형색색의 화려하고 큰 무엇을 사람들이 하늘로 띄우고 있었다. 올라가는 그걸 보고 엄마와 이모들은 다시 크게 울었다. 엄마는 손으로 허벅지를 치면서 울었다. 사람이 죽어서 하늘로 간다는 말은 저걸 말하는 거구나 하고 생각했다. 내가 기억하는 작은 외삼촌의 장례식은 그랬다.

어쩌다 작은 외삼촌 이야기가 나오면 외할머니는 아직도 우신단다.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다 돼간다. 작은 외삼촌이 죽고 나서 외할머니 머리가 하얗게 세었다는 말은 어린 마음에 큰 충격으로 남았다. 외할아버지는 귀가 어두운 외할머니가 주방으로 가 있을 때만 작은 외삼촌 얘길 하신다. 니들 애미 죽으면 기원이 묘를 둘이 같이 있게 옮겨주고 싶다. 이번 설에는 그런 얘길 처음 하셨다. 외할아버지는 내가 상경하는 걸 반대하셨고, 막지 못한 걸 두고두고 후회하셨다. 그러지 않으신지는 몇 년 되지 않았다. 서울에 자취하는 니 외삼촌들을 보러 갔는데 기원이가 맨밥에 계란후라이 하나만 얹어 먹고 있더라. 그렇게 먹고 지낸 게 병이 된 것 같다고, 명절에 찾을 때마다 그 얘길 꺼내셨다. 그 얘길 꺼내지 않으신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귀여운 얼굴의 외할머니가 약간 굽은 허리로 종종 걸어와 앉는다. 그러면 외할아버지는 외할머니 손재주 좋다는 칭찬을 시작한다. 어디서 배우지도 않았는데 옷 한 벌을 뚝딱 만들었다고. 흰 비단 한복보다 하얀 외할머니의 머리칼. 그래서 난 온통 새하얀 머리칼만 보면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부모를 떠올리게 된다. 혼자 밥에 계란후라이를 얹어 먹고 있으면 괜히 죽은 외삼촌을 생각하게 된다. 그후로는 본 적 없는, 그때 서럽게 울던 엄마의 얼굴이 겹쳐진다. 가끔 내가 일찍 죽는 상상을 하는데, 엄마가 얼마나 슬플까를 생각하면 내 마음이 너무 아프다. 상상만으로도 그렇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산 자가 죽은 자 때문에 슬픈 것보다 산 자를 향한 죽은 자의 슬픔이 더 크지 않을까, 그런 짐작도 해보게 된다. 어쨌거나 작은 외삼촌이 외할머니의 곁에 있게 된다면 좋아하지 않을까, 괜히 그런 확신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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빔 벤더스와 훌리아노 리베이로 살가두가 공동 연출한 <제네시스>. 사진가 세바스치앙 살가두를 다룬 다큐멘터리다. 훌리아노 리베이로 살가두는 세바스치앙 살가두의 아들. 공동 연출이라 그런지 아마도 빔 벤더스가 모든 걸 장악하지 않았기에 가능했을, 힘을 뺀 연출이 좋았다. (특히 예술가 삼부작의 이전 작품인 <피나>와 비교해보면.) 그럼에도 아마 빔 벤더스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이 다큐멘터리의 기본 구성인, 자신의 사진을 두고 살가두가 이야기하는 장면은 영화가 끝나고서도 가장 오래 남는 이미지다. 연출자는 살가두의 사진을 보여주고 살가두의 목소리를 나레이션으로 흘리는데, 그사이 간간이 마치 수면에 얼굴이 비치듯 살가두의 얼굴을 사진에 통과시킨다. 그가 자신의 사진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고개를 앞으로 내밀 때 사진을 쑥 통과해 그의 얼굴이 눈앞에 등장하는 식이다. 이미지와 이미지를, 그것도 긴밀히 연결된 두 이미지를 이렇게 맞대는 방식이 흥미로웠다.  

살가두를 다룬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아니 이야기. 젊은 시절의 살가두는 ‘다른 아메리카’ 프로젝트를 위해 남미의 오지 마을에 들어가 있었다. 당시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고 수염도 깎지 않은 상태였다고 한다. 어느 날 마을의 한 주민과 같이 길을 걷고 있는데 그가 살가두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당신은 지구의 모습을 신에게 전하기 위해 내려온 ‘신의 사도’일 거라고. 살가두는 그가 자신을 정말 그런 존재라고 믿었던 것 같다고 했다.

 

생각보다 이 말은 무척 강렬했는데, 그건 나 역시 정말 그렇게 느끼고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지구를 알고 싶어하는 어떤 존재에게 이곳을 소개한다면 바로 이런 모습일 거라고, 이유로는 설명되지 않지만 그 말 자체로 느낌을 더 선명하게 만든다. 그가 진행한 프로젝트들이 지구라는 세상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주제라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의 사진은 슬프고도 아름다운 데서도 오는 것 같다. 현장 가장 깊은 곳에 들어가 몸으로 부딪치며 찍은 끔찍한 사진들에서 느껴지는 가느다란 아름다움은 어떤 거리를 느끼게 한다. 그리고 이 거리는 특별하다. 설명할 수 없지만 특별하다는 걸 느낀다. 그의 사진을 보고 있으면 아무래도 그가 신의 사도라는 걸 믿어보고 싶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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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가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의 중반에서 후반으로 넘어가는 즈음 나오는 장면이었을 것이다. 어느 밤 한 남자가 정신병원으로 ‘끌려’ 온다. 어둑한 복도에 서서 쇠창살 너머로 자신을 이곳에 데려온 사람에게 울먹이며 말한다. “왜 날 여기에 데려왔어.” “여기 있기 싫어.” “다시 날 데려가줘.”

정신병원에서 4개월간 촬영해서 만들어진 이 다큐멘터리는, 인물들이 이곳에 머문 기간과 이름만을 자막으로 보여줄 뿐, 왜 이곳에 들어오게 되었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나는 그저 카메라를 따라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넘어가며 그들의 행동, 말, 공간을 막연히 지켜본다. 원형 감옥과 비슷하게 생긴 그 정신병동이라는 공간을, 쇠창살에 갇힌 그들을, 그안에서의 비위생적이고 무기력한 생활을, 이상하고 멀쩡한 말과 행동을. 

그렇게 총 네 시간 분량의 반이 지나갈 즈음 위 장면을 만났고, 난 감정의 동요를 느꼈다. 정신병원으로 끌려 온 그가 가여웠고, 억울할 것 같았다. 그가 느낄 막막함을 나도 느꼈다. 호기심으로 골똘하게 지켜보던 마음이 점점 물러지면서 어느새 이 정신병원의 인물들에게 이입해가는 시점이었다. 이들은 피해자들이었다. 사회로부터, 정상성이라는 것으로부터, 무엇으로부터의 피해자라 콕 집을 수는 없지만 ‘자유롭지 못한’ 이들이 점점 불쌍해졌다. 그리고 이들이 가엾은 피해자라는 생각은, 다음 장면이 아니었다면 끝까지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다음 날, 어젯밤 갇힌 이 남자의 딸이 정신병원으로 찾아 온다. 쇠창살을 사이에 두고, “아빠 괜찮아?” “아빠는 아파서 여기서 당분간 지내야 한대.” “엄마는 안 왔어.” 불안하고 슬픈 모습이었다. 딸과 남자는 마주보고 조금 훌쩍인다. 

나는 쇠창살을 두고 아버지와 마주선 딸을 보았을 때에 ‘정신이 들었다.’ 왜 가족을 정신병원에 보냈을까, 맞아 이 사람들은 그저 피해자가 아니구나, 가령 가족에겐 가해자겠구나. 시달리는 폭력이고 함께 할 수 없는 존재였겠구나, 그렇다면 범죄를 저지르고 여기 끌려 온 사람도 있겠구나, 이런 생각에 미치니 난 더 이상 그들의 자유롭지 못함을, 갇힌 그들을 그저 안타깝다고 볼 수만은 없었다. 하지만 연민은 쉽게 걷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마음이 불편했다. 사실 여기까지, 한 사람이 피해자이기도 하고 가해자일 수 있다는 것은 단순한 진실이다. 이런 순간이 없었다면 이 당연한 진실도 잊고 살기 쉽지만 말이다. 

그러자 중요해지는 질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자유를 지지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병실 안에 들어오는 유일한 외부자가 있다. 어느 환자의 부인이다. 간간이 찾아와 남편에게 옷가지와 먹을 거리를 챙겨주는 모양이다. 찾아올 때마다 부인에게 내 짜증을 부리던 남자는 우물쭈물하다 “나를 데리고 나가 달라.”고 하지만 여자는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 나는 이 장면을 지켜보는 것을 넘어, 스스로에게 질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가길 원하는 저 남자의 바람에 끄덕일 수 있는가.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힐 지도 모를 그 자유를 지지할 수 있는가.  나는 물론 여전히, 그에 대한 연민까지 거둘 수는 없다. 계속해서 이런 고민을 하게 되는 건 어쨌거나 내가 인물과 상황에 책임감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보는 것만으로도 생기는 어떤 관계는 뭐라고 불러야 할까. 극영화보다는 다큐멘터리가, 그것도 이 왕빙이라는 감독이자 촬영자의 다큐멘터리가 나와 인물 사이에 만들어 내는 더욱 특별한 관계. 그리고 이런 관계는 아마 내 아버지라면, 내 남편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라는 구체적인 현실로, 절실한 질문으로 옮겨갈지도 모르겠다.

이런 일련의 질문을 던지면서도 계속해서 남는 찝찝함이 있다. 왕빙이라는 감독이 애초에 왜 정신병원에 들어왔는지를 알려주지 않은 건, 결국 그가 만들어낸 다큐가, 내가 던지는 것과 같은 질문들과 거리를 두기 위해서라는 짐작 때문이다. 그저 이들의 모습을 보라고. 인생이 아닌 생활을, 가족과 사회가 아닌 관계 자체를,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닌 영혼을, 생명을. 하지만 이것은 어떻게 보는 방식인가. 차라리 인물들의 ‘사연’을 알아서, 내가 지지할 수 있는 자유를 고르고 대책 없는 연민을 분배할 수 있으면 편하겠다 싶던 내 마음은 찝찝함을 더 증폭시킨다. (하지만 내 대책 없는 연민이, 자문하는 질문들에 대한 거칠은 하나의 해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든다.)

이 영화를 보며 새삼 느낀 건 내가 관객이라는 것이었다. 카메라 근육을 떠올렸다. 마치 근육처럼 움직이는 카메라였다. 그렇게 느낄수록, 내가 지금 움직이는 건 겨우 눈과 조금씩 뒤척이는 다리 정도라는 사실을 자각해야 했다. 정신병원 복도를 달리는 저 환자와, 따라 달리는 저 카메라와 내가 같은 근육을 쓰고 있진 않구나. 이 사실이 왜 그리 새삼스러웠을까.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영화를 통해 더 많은 세계를 알고 싶고 태도를 배우고 싶은 나는, 규정하지 않고, 평가하지 않고, 충분히 할 수 있는 생각을 답습하지 않고, 무엇보다 연민으로 귀결되지 않고 ‘볼 수 있을까’ 새삼 아니 처음일지도 모를 이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본다는 건 무엇인가. 내게 막연하고 대책 없는, 그래서 벅찬 질문들을 남긴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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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뿌리

일상 2015. 1. 26. 00:30


꿈에

푸르고 맑은 파도들을 보았다.

느리게 솟아 올랐다 보다 느리게 가라앉는 파도들의 행렬을.
그 푸르고 맑은 파도 하나에 내 친구가 묻혀 있었다.
눈을 감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아주 먼 곳에서부터 오랜 시간 그러고 온 것처럼.
높이 솟아 올랐다 천천히 내려오는 친구를 바라보는 사이

귀가 열리고 파도 소리가 들리고 바람이 불고 발가락들이 젖었다.  
나는 천천히 다가가 친구를 건져 바다 위로 날아 올랐다. 

손가락들이 젖었다.
발밑에서 물과 나비가 반짝거렸다.

울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장면을 보았다.

친구는 우리가 물뿌리라는 일본의 한 해변에서부터 날기 시작한 거라고 알려줬다. 
조금 더 바다의 중심으로, 계속해서 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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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 합의, 질문

일상 2015. 1. 25. 12:40


엄마가 내 삶을 존중해 준다면 난 훨씬 기쁘게 살아갈 텐데, 그렇다는 내 말을 엄마가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좋겠다. 전화를 건 엄마는 꽤 오랜만에 딸에 대한 푸념, 걱정, 비난을 섞어 풀어 놓았고(당신이 던지는 화살이 온전히 나를 향해 있지 않다는 걸 이젠 안다), 난 진지함 반 건성 반으로 반응하는데 갑자기 엄마가 벼락같이 따져 물었다.
“그래 너는 사는 게 재밌나.”

본능적으로 이건 고민할 문제가 아니란 걸 알았기에 바로 “응. 재밌다.”고 답했고,  

“그래 그러면 됐다. 재밌으면 됐다.”며 내 성의 없는 대답에, 엄마는 진심으로 답했다. 진심을 느꼈다.
엄마의 체념과 안심이 뒤섞인 그 말에 조금 미안했고, 조금 더 고마웠다. 합의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는 것에 나 역시 안심했다. 그래도 아직은 엄마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하고 싶지는 않다. 여전히 노력해보고 싶은 거다 어쨌든 내 방식으로. 
그리고 사는 게 재밌느냐는 질문이 꽤 많이 다른 당신과 나의 합의점일 수 있다는 것에 나는 평소보다 더 많이 생각해보게 될 것이다. 아무래도 이제는 사는 게 재밌다고 쉽게 답할 수 없고, 어떻게 고민해도 답을 내릴 수 없는 세상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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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 속 시간은 해가 완전히 사라진 뒤, 그렇다고 모든 것이 어둠에 잠기지는 않은 짙푸른 풍경의 시간이었다. 이건 해뜨기 전의 짙푸름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산으로 둘러싸인 길게 구부러진 도로 위로 헤드라이트를 켠 오토바이 한 대가 오른쪽 끝에서 등장하여 오른쪽 아래로 빠져나간다. 아마 30초가 안 되는 이 하나의 컷에서 나는 평소 전혀 떠올리지 못했던 어떤 감정과 맞닥뜨렸다. 몇 년 전 홀로 떠난 배낭여행 이후 나는 줄곧 이 여행을 그리워했고 다시 떠날 수 있기를 바랐다. 다시 낯선 곳으로 떨어져 그 익숙지 않은 공기를 질릴 때까지 마시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 <언더 더 스킨>의 초반에 만난 저 하나의 컷을 보는 동안, 해가 진 뒤 컴컴하고 설핏한 풍경 속에서 장소도 사물도 왔던 길도 잘 분간이 안 되던 그 시간 동안의 불안했고 외로웠고 막연히 슬펐던 마음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난 마냥 ‘행복’이라는 감정으로 내 지난 여행의 시간을 되돌아보곤 했었는데, 몸에 배어 있었지만 머리로는 떠올리지 못했던 그 행복하지 않았던 시간을 이제야 떠올렸던 것이다. 그 시간 동안만은 겪고 싶지 않았던 멀미 같은 것이었다. 아마 이랬던 시간이 훨씬 많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내 난, 이 느낌마저 통틀어 여행의 시간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눈앞에서 오토바이가 등장하고 사라지는 이 짧은 시간 동안, 순간 훅 올라온 새삼 낯선 이 감정을 붙잡고 저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 생각과 느낌이 <언더 더 스킨>이라는 영화 자체에 대한 감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영화가 끝난 뒤에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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