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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12.13 병원
  2. 2014.11.09 살핀다. 3
  3. 2014.11.09 열정과 고통과 꿈
  4. 2014.08.01 나는 좋아하는구나
  5. 2014.07.18 인간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한 걸음이라도
  6. 2014.06.15 사진, 기록 4
  7. 2014.06.10 제철 과일만 잘 챙겨 먹어도,
  8. 2014.06.07 세월
  9. 2014.06.07 다나하시
  10. 2014.06.07 이젠 거기에 없다

병원

일상 2014. 12. 13. 01:32

병원의 외래실. 비어 있는 두 진료실의 문이 활짝 열려 있다. 대기좌석엔 남녀가 붙어 앉아 휴대폰을 함께 보고 있다. 그 앞엔 데스크 주위를 반복해서 왔다갔다 하는 한 남자가 있다. 그는 남녀에게 말을 걸더니 답을 들은 건지 외면당한 건지 다시 데스크 앞을 계속해서 걸어 다닌다. 데스크에 여간호사가 들어오자마자 남자는 다가가 접수증을 내민다. 오후 한 시 이십 분 예약을 확인해 달라는 말에 그녀는 주치의가 누군지를 묻는다. 톤이 좀 올라간 목소리로 남자는, 그러니까 주치의를 확인해달라, 고 한다. 등록번호를 컴퓨터에 두드려넣은 간호사가 이름 하나를 일러 준다. 남자는 뭐라고? 라고 되묻고 간호사는 또박또박 다시 이름을 불러 준다. 남자는 갑자기 한 손을 오른쪽 머리 위에 갖다 대더니 잠시 얼굴을 찡그린 채로 있다. 남자는 털모자를 쓰고 있고 그 털모자에 반쯤 가려진 반창고가 보인다. 남자는 소리를 지른다. 왜 데스크에 간호사가 아무도 없었느냐고. 눈이 커진 간호사는 지금 오지 않았느냐고 답하고는, 억울한지 약간 메인 목소리로 지금은 점심시간이라 자리를 비워도 되는 거라고 말한다. 간호사에게 더 바짝 다가선 남자는 병원이라는 곳에서 환자가 기다리는데 이런 식으로 자리를 비워도 되는 거냐고 아까보다 더 크게 소리를 지르고 그런 그를 잠시 빤히 쳐다본 간호사는 한숨을 푹 쉰다. 저희도 밥을 먹어야 할 것 아니에요, 라고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말하고, 뭐 이딴 곳이 다 있어! 라고 소리친 남자는 여전히 그의 머리에서 손을 계속 떼지 못하고 있다. 다시 접수증을 뺏어 든 남자가 털모자를 반쯤 벗었다가 다시 눌러 쓰며 좌석으로 가 털썩 앉는다. (2011. 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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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핀다.

일상 2014. 11. 9. 02:41

 

꿈을 꾸었는데, 옛날 사람들이 보였다. 내가 옛날에 가까이 했던 사람들, 그때 그 시절 소중했던 사람들. 막 눈을 떴을 땐 내가 어떤 꿈을 꾸었는지조차 몰랐고, 그저 꿈에 눌려 배어나온 어떤 기운에 압도당한 채 부신 창문만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거리에 내팽겨친 듯한 짐들을, 각자 맡은 바가 있는 듯 신중하고 열심히 닦고 분류하며 상자에 담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앞에 한 사람, 고개를 돌리니 또 한 사람, 당장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여기 어딘가에 있을 사람들. 이 한 사람 한 사람이 너무나 반가워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마음을 표현하려 애썼다. 반가운 마음이 넘쳐흘러 벅찼다. 하지만 내 마음은 상대에게 전해지는 것 같지 않았공간만을 진동시키는 듯 했다. 이곳이 허물어질 것 같았다. 잘 지냈냐고 물어보고 잘 지내냐느냐고 물으며 얼굴 표정을 살폈다. 후회를 인정하면 내일 죽어야 한다고 말한 사람을 안다. 후회되는 게 너무 많다고 고쳐 말한 사람을 안다. 아름다운 꿈이었다. 일순간일지라도 오직 한가지 감정으로 꽉 채워진 기분은 오래도록 남아 황홀하다. 꿈일지라도. 소중한 걸 매번 허물어뜨리며 지나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폐허 속에서 기어코 기어나오는 것만을 수습해가며, 겨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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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과 고통과 꿈

인용 2014. 11. 9. 01:50



* 1976-1985! 그 시절 저는 좋은 예술가가 되고 싶었답니다. 그 시절에는 열정과 고통과 꿈이 있었답니다. 저에게는 오직 그 시절만이 아름답습니다!

 

시인 이성복, <책과 선택>, 열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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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좋아하는구나

여행 2014. 8. 1. 03:19

 

며칠째 이 높은 곳에 올라 지평선 아래로 해가 사라질 때까지 앉아 있었다.

해 질 녘이 되면 마을에서 음악이 들려온다. 이제 막 시계탑의 불이 켜졌다.

독수리의 한쪽 날개가 휘청거리는 순간을 몇 번이나 보았다. 

메헤르가르성은 정말 멋지다. 저렇게 크고 단단한 것을 나는 좋아하는구나.

 

1월의 중순,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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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요즘의 내가 새기고 또 새겨야 할 글.

 

 

 

논술고사

답안지를

넘겨보며

 

황현산

 

내가 재직하는 대학은 신입생을 선발하기 위해 예년과 마찬가지로 논술고사를 시행했고, 교수들은 신년 벽두부터 그 답안의 채점에 들어갔다. 문제의 형식도 몇 개의 문항을 준 다음, 거기서 공통된 주제와 다른 입장들을 찾아내어 설명하고 수험생 자신의 의견을 덧붙이게 하는 것이 예년과 비슷했다.

 

문제가 쉽지는 않았다. 학문적인 짧은 텍스트이기도 하고 법정의 논고이기도 한 그 제시문들은 모두 객관적인 사실의 규명과 주관적인 해석이 맺고 있거나 맺어야 할 관계를 문제삼고 있었다. 세상에는 누가 보아도 그렇다고 수긍할 수밖에 없는 객관적인 사실이 존재하는가, 아니면 우리가 완벽하게 진실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도 어느 개인이나 집단의 주관적 신념에 불과한 것인가? 시대와 환경을 초월하는 진리가 존재하는가, 아니면 진실은 국면에 따라 바뀌고, 그것을 대하는 사람의 변덕스런 관점만 헛되이 떠돌아다니는 것일까? 더 나아가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실증 가능한 객관적 사실을 밝혀내는 것일까, 자기 처지에 맞는 관점과 기준에 따라 그 사실을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일일까?

 

이 질문은 전문적인 연구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보고 들은 것을 정직하게 판단하여 자기를 위해서나 남을 위해서나 옳은 의견을 가지려는 사람들이 평생에 걸쳐 해결해야 할 질문이다. 학교가 이 문제를 수험생들에게 제시할 때도 완결된 해답을 내놓으라는 것이 아니라, 이 주제를 대하는 수험생 개인의 태도와 생각의 깊이를 보려는 것이었다. 수험생들의 의견은 당연히 여러 수준에 걸쳐 다양하다.

 

우선 사실이면 사실이고 아니면 아니지, 객관적 사실과 주관적 진실이 따로 존재할 수 없다고 굳게 믿는 학생들이 있다. 어느 답안은 우리가 천동설을 믿고 있을 떄도 지구는 엄연히 태양의 둘레를 돌고 있었다는 사실을 예로 들기도 했다. 그 반대편에는, 진리가 존재한다고 해도 우리 인간이 그것을 오롯이 파악되는 지점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는 의견이 있다. 모든 진리는 전체와 연결되어 있는데 우리는 그 전체의 일부분일 뿐이기 떄문이라고 했다. 이런 의견을 개진하는 수험생들이 과학적 체계의 보편성을 부정하고, 그 역시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학자들이 함께 지니고 있는 사고방식이자 그 체계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 두 가지 대비되는 관점 사이에 진리에 대한 수험생들의 태도가 있다. 진리는 다수결에 의해 결정된다는 의견이 의외로 많다. 많은 사람이 옳다고 믿는 것이 역시 옳은 것이라는 식이다. 권력과 이해관계가 진실을 결정하니 우리는 무엇보다도 규칙의 잣대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는 의견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 현실주의적 의견의 바로 곁에 진실은 인간의 환상에 불과하고 진리는 도달할 수 없는 낙원과 같다는 불가지론이 있다. 그것을 세속화한 형태가 진리상대론이다. 세상에는 완전히 맞는 의견도 없고 완전히 잘못된 의견도 없으며 서로 다른 관점, 다른 사고법에서 비롯한 다른 견해가 공존할 뿐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상대주의의 편에 선 수험생들은 불안하지 않을 수 없다. 사고의 지표와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대안으로 사고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적절한 선에서 타협할 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이 다양성을 주장하는 의견들은 대체로 목소리가 활달하고 문체가 자신감에 넘쳐 있어서, 모든 사안에 양비론이나 양시론으로 반응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인 것처럼 여겨지는 우리 사회의 정신적 풍토를 그대로 반영하고 상징하는 것만 같다. 출제자들이 필경 염두에 두었을 의견, 진실에 대한 추구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의견이 자신의 의견 속에 들어갈 자리를 마련하고, 그로써 자신의 생각을 다시 성찰하고 그 깊이와 폭을 넓혀, 한 주관성이 다른 주관성과 만날 수 있는 전망을 내다보고, 인간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한 걸음이라도 사실에 접근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견해가 오히려 수줍은 목소리다. (2004)

 

 

『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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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기록

여행 2014. 6. 15. 03:45

 

 


인도 사람들은 해가 뜨기 직전의 강물이 가장 따뜻하다고 믿는단다. 그건 해가 떠오르기 전이라, 그러니까 아직 강이 해를 품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물안개에 가려 드문드문 보이는 사람들이 심장이 시릴 정도로 차가울 이른 새벽의 강물 안에서 소처럼 느리게 몸을 적시고 있었다.  

 

 

 

아들이 어머니에 대한 사랑으로 지은 사원이라고 했다. 계속해서 기울어지는 중이란다.
바라나시에서 머무는 동안 갠지스강을 바라볼 때마다 들었던 생각은, 인간들이 내던지는 고통과 슬픔과 바치는 정성과 매달리는 구원의 바람이, 저 강에게 얼마나 짐이 될까. 희미한 가로등이 막 켜지기 전, 해질녘의 하늘은 무척이나 하얬고 아이들이 띄워올린 팽팽한 연들도 그제서야 힘을 풀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몸을 한번 뒤집을, 가장 평온해 보이던 강물.

 

 

어쨌거나 각자의 시선, 각자의 믿음.

해질녘의 그때, 아주 오래 화장터 앞에 있었던 날. 나는 내 느낌대로, 너는 보이는 모습과 다르다고 말했다. 서로가 많은 말을 나누진 않았다. (인도, 바라나시)

 

 

 

 

 

얼어 죽을 것 같았던 버스 안에서의 열 시간, 어차피 흔했던 성희롱, 신경을 날카롭게 만든 장사치들의 소란, 해가 뜨기 전 새벽의 추위, 유령처럼 배회하던 몇몇 사람들, 힘이 다할 때쯤 찾은 숙소. 배에 묶인 가방의 벨트를 푸는 탁하는 소리에 긴장이 풀려 화장실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시원하게 오줌을 누며 하루 사이에 벌겋게 튼 손을 바라보았다. 돌아가 침대에서의 길고 긴 잠, 아름답던 꿈. 원숭이들이 지붕을 뛰어다니는 소리에 잠을 깼다. 늦은 아침이었다. (쉼라, 인도)  

 

 

 

 

원숭이가 원숭이신(하누만)을 바라보고 있다. 원숭이가 유난히 많은 쉼라. 과자를 먹으며 길을 걷고 있었는데, 하필 그 거리에 나밖에 없었다, 갑자기 원숭이 두 마리가 숲 사이에서 펄쩍 뛰어 나와 난 기겁을 하며 과자를 급히 주머니에 넣고 씹던 입도 꽉 다물었다. 애써 아무렇지 않게 숨죽이며 가던 길을 걸었다. 내 뒤통수를 바라보고 있을 원숭이의 눈길을 느끼며. 어느 날엔 걷는 나를 한 인도 여자분이 뒤에서 안아 옆으로 비켜서게 했다. 알고 보니 원숭이가 내 뒤에서 카메라 가방을 노리고 있던 거였다. 짧은 순간 땡큐를 다섯 번 이상은 말했을 거다. 그러고 보면 특히 쉼라에서 사람들에 대한 좋은 기억이 많고, 그건 모두 인도 여자들 덕분이었다. 쉼라가 다른 지역에 비해 여러모로 여유로운 곳이라 그렇기도 하겠지만. (쉼라, 인도)

 

 

 

 

 

(쉼라, 인도)

 

 

 

오가는 길에 눈에 띈 이 전단지가 실종자를 찾는 내용일 거라고 짐작했다. (어쩜 수배 전단지였을까) 바라나시에서는 내가 묵던 숙소의 카운터에 실종된 외국인을 찾는 벽보가 붙어 있었다. 그 종이를 꽤 자주 봐서 거길 떠날 때쯤엔 실종자의 얼굴을 기억할 정도였는데,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그러진 않았다. (리쉬께쉬, 인도)

 

 

 

 

네팔 나가르코트로 가던 길. 능숙하게 승객을 태우고 내리고, 헷갈릴 것 같은 데도 사람 한 명 놓치지 않고 요금을 받던 소년. 운전 기사는 소년이 버스를 탕탕치는 소리에 맞춰 차를 멈추고 출발시켰다. 하나의 리듬처럼 느껴지던 순간의 풍경. 버스는 심하게 덜컹거리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매연은 어찌나 심하던지. 수건으로 막아도 코안은 매웠고, 그 와중에도 좋아하는 인도 과자를 신나게 까먹었다. 어느새 불어난 승객들이 발 디딜 틈도 없이 버스를 가득 메우고, 아기 엄마에게 자리를 피할 수도 없어 안고 있는 아기를 친구가 받아 안았다. 꽤 큰 아기였는데도 가볍다고 했다. 점점 지대가 높은 곳으로 이동하고 한 무리의 주민들이 내리고 조금 더 오르자 목적지인 종점에 도착했다. 기미도 없던 체기가 갑자기 오르고 숙소에 도착해선 과자를 토하고 저녁으로 조금 마신 핫초코도 다 토하고.

 

 

 

 

세상의 끝, 이라는 이름을 가진 나가르코트의 한 게스트 하우스. 산책을 간다는 우리에게 숙소의 주인이 친절히 그려준 주변 지도. 뇌가 두 개니까 알려준 대로 잘 다니겠지? 라고 그가 농담을 했고 우리 셋은 하하하 웃었다. 그런데도 우린 너무 쉽게 길을 헤맸다. 묻고, 또 묻고, 물어도 헤매고 묻지 않으면 더 헤맸고. (네팔, 나가르코트)

 

 

 

 

 

내내 비를 맞고 산속을 걸었다. 해가 거의 저물 무렵에야 몸이 피곤한 걸 느꼈고 찬바람에 땀이 빠르게 마르자 두려움이 찾아왔다. 오를 땐 눈에 잘 띄던 롯지도 보이지 않았다. 많이 절박해질 즈음에 발견한 허름한 롯지. 어떻게든 하룻밤 재우려는 주인은 발빠르게 우리를 안으로 들였다. 그가 저녁으로 만들어준 면요리는 외국인 입맛을 배려하지 않은 지나친 향신료 투입으로 거의 남겨지다시피 했다. 숙소의 벽은 얇은 나무판자로 만들어졌다. 이 헐거운 숙소가 산의 찬바람을 잘 막아줄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잘 잤다. 잠결에 친구가 챙겨주는 감기약을 먹었다. 우린 깨자마자 밖으로 뛰쳐나가 정신없이 아침 공기를 마셨다. 신선하고 단 공기가 발끝까지 전해지며 잠에 덜 깨 휘청거리던 몸을 바로 세워주던 그 순간의 느낌. (네팔, 히말라야 자락)

 

 

 

 

네팔에서 다시 인도로 넘어가기 전, 고락뿌르 역. 제시간에 도착하지 않는 기차를 얼마나 오래 기다렸던가. 그렇다고 시간이 지겹게 흐르던 건 아니었는데. (네팔, 고락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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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만든 다큐 <그가 없는 8월이>엔 이런 장면이 있다. 오래지 않아 죽을 것을 아는 주인공이 잘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좋아하는 감을 더듬거리며 깎아선 성글게 집어 먹으며 이런 말을 한다. “제철 과일만 잘 챙겨 먹어도 건강하게 살 수 있대.” 잊혀지지가 않는다. 가여워서일 수도 있고, 가여우니까 애틋해지기도 하고, 무엇보다 약한 자가 부리는 소박한 의욕이 내 몸과 마음을 덥힌다. 이 열기 때문에 뭐라도 하고 싶어지게 만든다. 붙잡고 싶은 조건들을 찾는다. 제철이나 과일 같은 것, 제철 과일 같은 것. 그냥 제철 과일. 실은 안간힘을 쓰고 있단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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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일상 2014. 6. 7. 03:00


제사상에 깔 창호지가 한 장도 남아있질 않다는 걸 깨달은 건 제사를 지내기 삼십 분 전, 이런 휴일에 열려 있는 문구점은 없을 거라 짐작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부리나케 밖을 나섰다. 춥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아주 추운 설날 아침이었다. 아파트 상가를 다 돌아다녀도 문 열린 데가 없어서 큰 길까지 나갔다. 편의점에라도 가 볼 참이었다. 그때 저 멀리 옅은 분홍색의, 아마도 낡고 헤져서 그리 된, 잠바가 보였다. 할머니였다. 아니 대체 언제 외출하신 거지. 아침 내내 할머니가 집에 안 계신 줄도 몰랐다. 새삼 알았다. 우리 할머니 몸집이 저리 작으시구나. 오른손에 지팡이를 쥔 채 구부정한 몸으로 걸어오고 계셨다. “할머니!” 난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걸음을 멈추시더니 한쪽 팔로 무릎을 짚으며 허리를 펴시는 게 보였다. 난 후다닥 달려가선 이렇게 추운 데 왜 나왔느냐고 했다. 별 대답을 않으셨다. 난 창호지를 빨리 구해야 했기에 내가 지금 뭘 사야 한다고 대충 말하곤 가던 길을 뛰어갔다. 예상대로 창호지를 구할 순 없었다. 에라이 모르겠다 하고 다시 집 쪽으로 방향을 틀어 걷는데 아까 그 자리에 할머니가 아직도 서 계신 게 보였다. “할머니!” 난 달려갔다. 아니 이렇게 추운데 왜 아직 안 들어 가셨냐고 채근하니 별말도 않으셨다. 할머니 코에서 콧물이 흐르는 게 보였다. 그러고 뒤늦게 “저리로 한바꾸를 돌았다.” 라고 하셨다. 아휴 빨리 들어가요, 하면서 난 할머니를 뒤에 두고 앞장서 걸었다. 그 순간에도 난 할머니와 같이 걷고 있다는 당장의 상황보다 혼자 제사상을 차리고 있을 엄마를 도와야 한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급했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몇 걸음을 빠르게 걸어 버렸다. 그러자 갑자기 빠르게 땅을 짚는 지팡이와 뒤이은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나는 놀라 잠시 걸음을 늦췄다가 뒤돌아 보았다. 할머니는 지팡이로 앞을 가리키며, 어여 가자, 고 했다. 예, 하며 난 다시 고개를 돌렸고 그 순간 난 할머니께 죄송스럽다기보다 순식간에 빨라진 지팡이와 발걸음 소리가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기심에 참지 못하고 또다시 빨리 걸어 보았다. 다시금 후다닥 지팡이 짚는 소리와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웃음이 났다. 앞서 걸으며 소리 없이 내내 웃었다. 귀여운 할머니. 할머니는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며 살까. 내가 가늠할 수 있는 그런 생각과 고민거리들을 안고 살까. 아니면 나와 아주 많이 다른 사람일까. 짧은 순간 많은 생각을 하며 걸음의 속도를 줄였다. (2012. 01. 26)


 

어버이날이라서 연락했어요. 아주 오랜만에 아버지에게 보낸 문자. 정작 내용은 없는 문자였다. 이 문자에 아버진 대답은 않고 “할머니한테 자주 연락하라”고 답장이 왔다. 나는 더 답하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도 오랫동안 할머니에게 연락하지 못했다. 이렇게 산다. 이렇게 산다고 말해버려도 될 만큼 행동도 말도 무심한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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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하시

일상 2014. 6. 7. 02:48

짙게 분칠한 하얀 얼굴, 까만 단발머리, 노란 저고리, 빨간 치마. 그리고 검은 옷고름. 그녀는 키가 작고 몸집도 작지만 한복 안엔 살집이 꽤 숨겨져 있다.

그녀는 바다를 배경으로 서 있다. 두 손을 모으고 있다. 잠시 정지. 파도가 철썩이는 소리. “와라오우!” 웃으라는 일본어가 들리고 그녀의 얼굴 클로즈업. 웃는다. 이를 드러내지 않고 입술을 한껏 올린다. 얼굴에 자글해지는 주름. 오십 대 후반의 여자. ‘김치-’ 라는 어색한 한국어가 들리고, 김치- 다나하시 에리코. 어디선가 부르는 그녀의 이름이 들린다. 찰칵. 

갑자기 한복을 입은 일본 중년의 여자들이 한꺼번에, 슬로우 모션으로, 그녀 주위로 몰려 들어와 살짝 분주하게, 이내 준비된 자세를 빠르게 취하고 동시에, 김치- 한다. 찰칵.  (2012. 01. 15)

 

 

 

지하철에서 실종자를 찾는 방송을 통해 알게 된 일본의 한 주부. 한국 연예인을 보러 이곳에 왔다가 실종됐다고 한다. 그 모습과 이름이 내내 맴도는 와중, 함께 떠올랐던 이미지들. 오랜만에 그녀의 이름이 다시 떠올랐다. 생사에 관한 소식은 여전히 알 수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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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거기에 없다

일상 2014. 6. 7. 02:33
 
여기는 내가 늘 오는 선술집이다. 밤에 골목을 배회하다 우연히 찾았는데 멀리서 보이던 따스한 주황빛이 참 좋았다. 불빛을 따라온 이곳은 간판도 없이 주택집들 사이에 아주 작은 공간 만을 차지하고 있었다. 올 때마다 너댓의 손님들이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 소리가 밖까지 배어나오진 않았다. 가게 앞엔 내가 앞다리를 높이 뻗은 것의 두 배는 될 법한 나무 상자들이 쌓여 있다. 난 항상 나무상자 꼭대기에 올라 술집 안을 구경한다. 나무상자는 꽤 널찍해서 내 큰 엉덩이가 앉기에 불편함이 없다. 사람이 가게로 들어가는 걸 본 적은 없다. 그리고 내가 이곳을 떠날 때까지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본 적도 없다. 이제는 익숙한 얼굴들이 늘 가게 안을 차지하고 있었다. 가끔 두건을 쓰고 앞치마를 두른 남자가 밖으로 나와선 내 옆에다 생선을 주곤 했는데 내가 먹을 것 때문에 이곳을 찾는 건 아니었지만, 물론 먹긴 했어도, 어쨌든 나를 홀리는 건 이 안의 사람들이다. 이들의 이야기를 엿듣는 것이 좋다. 나는 들을 수 있다. 내가 당신들의 이야기를 이 자리에서도 들을 수 있단 걸 알까. 즐거워하거나 슬퍼하는 내 표정을 인간들이 보지는 못 할테니 아마 한 번씩 창밖의 나를 보며 고양이다, 귀엽다, 배가 고픈 걸까, 정도의 대화 안줏거리로 삼겠지만 말이다. 나는 안다. 여기는 숨길 것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라는 걸. 그들은 모두 사랑하는 사이였다. 다양한 사연을 가진 연인들. 나는 이들의 이야기가 너무 재밌고 또 슬프다. 낮에 좀 먼 데까지 나가 돌아다니다가도 어디 누워 낮잠을 자다가도 나는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그들의 이야기는 늘 새로웠다. 밤마다 나는 홀린 듯 이 술집 앞을 찾는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안락한 이 나무 상자 위에 앉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슬픈 이야기를 매일매일 듣는다. (2012. 0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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