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만강 첫 다리를 스치며


밥 짓는 연기 속에
된장 냄새 묻어오는
두만강 첫 다리
나지막한 강둑에 멍석 깔고 앉아
물소리에 귀 기울이는 그대와
두만강 발원지 찾아
적봉 기슭으로 석을수로
물 거슬러 거슬러 오르다
신무수 마른내 그 어디쯤에서
그대와 합수하여
한 줄기로 흐를 수 있다면
아무 풀뿌리에 스며들어
벼랑에 보랏빛 꽃봉아리 하나
슬며시 밀어 올릴 수 있다면
꽃잎 흩날린 뒤에도
나는 그대에게서 오고
그대는 내게서 오리.
잘 있거라. 오래오래
가슴을 흔드는 그대여.


(끝)

"벼랑에 보랏빛 꽃봉아리 하나 슬며시 밀어 올릴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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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묘한 기쁨

일상 2008. 5. 21. 01:47

건물 안에 오래 있으면 자꾸 현기증이 난다. 이른 오후 교문을 나서 오분 거리에 있는 북한산 등산로엘 갔다. 사람 한 명 없다. 십오분 정도 거닐었는데도 숲 속의 공기가 내 숨이다.  세 마리의 개가 숲 속에서 어슬렁 거리며 나온다. 낮잠 자다 방금 일어난 듯한 멍한 움직임들이다. 순간 파도같은 바람이 불어오고 개들을 산 아래로 몰아간다. 정말 아무도 없다. 벤치에 누워 델러웨이 부인을 읽는다. 나뭇잎들이 알알이 청포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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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잎 한 장이 바람결에 떨리는 광경을 보는 것은 절묘한 기쁨이다.
하늘 저 위에서는 제비들이 날아내리다 선회하며 안쪽으로 바깥쪽으로 빙글빙글 마구 날아다녔지만, 그러면서도 마치 고무줄로라도 붙들어 놓은 것처럼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파리들도 날아오르고 내리고 했다. 해는 그저 기분이 좋아서 그 부드러운 금빛으로 이번에는 이 잎사귀, 다음에는 저 잎사귀를 희롱하듯 비추었다. 이따금 종소리(자동차 경적 소리인지도 몰랐다)가 풀줄기 위에서 황홀하게 잘랑거렸다 - 이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차분하고 이성적이며 있는 그대로 평범한 사물들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진실 그 자체였다. 아름다움이란 이제 진실이었다. 아름다움은 어디에나 있었다.
(댈러웨이 부인, 버지니아 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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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거예요!

일상 2008. 5. 18. 01:09




한 어른이 무대 앞을 가로 질러 걸어 가며 학생에게 '하지마' 라고 했다. 학생은 '할거예요'라고 말했다. 정치적 주체로 인정해달라는 청소년들의 집회가 어떻게 보였길래 달려들며 막아서는 것도 아니라, 말하고 있는 사람 앞을 지나가며 꾸중하듯 한 마디 던지며 스윽 지나갈 수가 있을까.

어른들이 청소년에게 '공부하는 게 니 앞길을 위한거다 공부하는게 이 나라 살리는 거다' 라고 하는 말들 거북하다. 적어도 '행복하지 않다' 라고 고백하고 거리에 나온 아이들에게 그렇게 말하는 건 잘못됐다. 마주보고 이야기를 들어줄 알량한 친절함조차 없다면 입을 막진 말아야지.
 
정치적 주체로 인정해 달라는 아이들의 목소리엔 단지 '돈을 버는 것이 사회에 봉사하는 거야' 라고 말하는 어른들 이상으로 세상에 대한 책임감과 의무감이 있었다. 또 아무렴 휩쓸려 거리로 나왔다면 어떠랴. 자신이 서 있는 지점에 대한 '고민'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면 정말 값진 거지. 그 방향이 어떻게서든지간에 중요한 건 자신의 의지니까. (사실 고민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것도 없다, 나도, 세상도. 그래도 마음편한 순응보다 고통스러운 저항이 좋다 난. 그건 자신있게 말할 수 있으니까. 세상사는 법을 깨친 사람보다 지지리도 세상 사는 법을 몰라 헤매이는 게 난 좋다.)

너희 행복을 위해서야 라고 하지 말고 어른들부터 그 행복의 구성자체에 대해서 고민을 했으면 좋겠다. 그 사유가 끝난 후, 적어도 스스로 행복하지 않으면서도 그게 현실이라고 옆 사람에게 강요는 하지 말아야 할거다. 그런 강요가 진짜 나쁜 선동이지.
 

(여기저기서 십대 십대 대단하다고 떠드는데 이 모든 혼란이 끝난 후 청소년들이 다시 얌전히 학교에 앉아 공부하게 되진 않을까? 미국산 쇠고기 반대집회에 그저 이용만 했던 것이 아니라면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정부는 죽도록공부해도죽지않는 줄 알고 자꾸 더 가열찬 정책을 내놓고 있다는데, 집회에 나오는 청소년들의 행동을 분석하고 말 게 아니라 청소년들을 억압하는 체제를 같이 바꾸는데 노력을, 적어도 그렇게 아이들을 대하지 않는 것을 시작으로. 더불어 돈 버는 것이 국가에 봉사하지 않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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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아이러니한데 요즘 같은 사회풍경을 보면 오히려 아이를 낳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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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이런 내게 뭣하러 고생을 사서 하냐고 묻지요
어찌보면 여행은 다만 체험일 뿐입니다
기쁘거나 혹은 슬프거나 고작 체험하고 가는 길
나는 다만
극진하고 싶을 뿐입니다.

                                      여행생활자 유성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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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문화제에 주위를 어슬렁 거리면서 느낀 단상

1. 사람들이 촛불 문화제에 참가하지 않았다면 한국 농민들 당사자의 절실한 이야기를 접할
기회가 있었을까. 나, 내가족의 이익 때문에 나온 사람들에게 좀 더 깊은 고민을 던져 주었다면.
그건 긍정적인 일방성.

2. 한번씩 뜨금할 만한 폭력적인 발언. 님하 자제염.
   
3. 재수생이라며 나온 학생의 발언. 문제점을 정확하게 짚어내는 논리와 자신의 경험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줄 알며 적절히 비꼬는 유머까지 있다. 어쩜어쩜 논술 배우는 보람이 있는 걸까.

4. 집단적인 고독에 빠지지 않기 위해 뭣도 몰라도 일단 다섯 걸음에 한번씩은 멈추기.
그래도 무언가를 함께 한다는 건 뜨겁디 뜨겁다. 내 끌림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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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의없는세상

일상 2008. 5. 15. 01:02
                                                               
      중국
                                                            

시청 주위를 어슬렁거리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
라디오 뉴스에선 이번 중국의 지진은 산샤댐이 지반을 약화시킨 게
원인일 수 있다고 말한다.
중국의 산샤댐은 만리장성 이래 최대 토목공사다.

영화 스틸라이프에서 본 산샤의 풍경이 떠오른다
정지된 프레임 안에서 흐르던 먹먹한 장면들
부서지는 소리, 쫓겨나는 사람들, 그래도. 군더더기없는 욕망을 가진 가난한 사람들의 희망.

파괴를 통해 창조를 이룰거라 믿었던 개발이 참아왔던 비명을 내지르고 만 것인가.
이번 지진의 원인이 정말 산샤댐 건설의 영향이 있었다고 밝혀진다면
말라버린 목소리로 메인 가슴을 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담배, 차, 술, 사탕만 있으면 행복하다고 말하는 서민들을
죽게 내버려두고 죽게 하는 건 대체 무엇인가


       한국
                                                               
라디오 뉴스에선 중국 지진 소식을 전하는 끝에
이번 사태가 한국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소개했다
중국 물가가 올라 수출에 타격이 있으나 반면 어떤 분야에서는 수출의 효과가 있을거란다

오늘 현대시 강의 시간에 교수님은 말했다.
김광균의 추일서정은 흠이 있는 작품이라고.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라니,
가을에 대한 개인의 낭만적인 정서를 주제로 한 이 시는,
쓸모없단 의미로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를 낙엽에 빗대서 비유했다.
타국 사람들의 고통을 쉽게 비유의 대상으로 써서는 안된다고 진중히 말씀하셨다.
詩는 그런 것이라 했다.
그건 인간에 대한 예의의 문제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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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긴 물

일상 2008. 5. 13.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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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엔 물이 스며 있다
내 어릴 적 외할아버지댁에서 찍은 사진이지만 내게는 막내이모의 고향으로 더 기억되는 곳

갑자기 송아지 달려 들어 놀라 주저 앉아 한참이나 꺼이꺼이 울자 놀래 달려오던 이모
너른들에서 뽀빠이바지 입은 동생과 발레하듯 쭉쭉 다리찢으며 날아다니면 사진을 찍어주던 이모
겨울이면 사촌들과 혼이 빠질 때까지 눈싸움하고 있으면 밥먹으라고 썽을 내던 이모
막내 이모가 두레박으로 척척 물을 긷던 아주 작은 우물이 있던 곳
난 어릴 적 막내이모가 하던 버릇은 다 따라했다  이모는 할머니댁 초가집 마루에 앉아 나를 바라보며 얼 굴 도 닮 으 라 말했다 그 앞에서 난 발라당 누워 간혹 코숨을 쉬며 강정을 씹었다

막내 이모는 내가 슬플 때 항상 곁에 있었는데 난 내가 기쁠 때 이모와 나눌 생각은 못했다
세월이 조금 더 흘러 내가 축구하느라 정신 팔려 있던 시절 그 사이 사진 속 이 곳은 댐이 되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다른 곳에서 벽돌집을 지으셨다
막내이모는고향을잃었다

추억은 물에 잠겼다 그 곳에 깜빡하고 두고 온 막내이모의 일기장은 없을까 난 언제적 훔친 막내이모의 일기장을 하나 가지고 있다 난 그 속에 적힌 시들 옆에 간간이 그림을 그렸고 자취방에 홀로 누워 언니가 나를 보러 집에 오지 않는다고 속상해하던 일기에 재밌어 했다 훗날 난 이 얘기를 꺼냈고 이모는 코웃음을 치며 그런적 없다 수줍어 모른척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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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넬의 라이브 음악을 듣다가 잠이 들었다
이른 새벽, 의식이 열리는 순간 가뭇 들려 오는 라디오 소리.
난 한참동안이나 의식이 완전히 깨지 않은 경계 어디쯤에서 라디오를 들었고
무얼 들었는지 간간이 웃기도 했는데
왜 웃었는진 기억나지 않지만 함뿍함뿍 웃던 그 느낌만 남아 기분 좋음


2.
엄마야 이제 소고기 먹지마 라면도 끓여 먹지 말고 알았제
엄만 그냥 맨날 딸이랑 같이 수다 떨며 산책이나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소고기 먹지 말라니까 왜 딴소리하는데  쳇  엉엉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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깍-두기

일상 2008. 5. 12.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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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일상 2008. 5. 11. 19:00


가만히 두드리는 손가락 끝에서 동그란 파문이 인다
둥글고 둥근 파문이 끝도 없이 인다
아주 둥글고 커다란 파문이 끝도 없이 일다 이내 강물 속
나의 주머니 속에는 반질한 돌멩이들이 한 가득이다
내일은 햇살이 따뜻한 날일 것이고
둥둥 떠내려가며 보이는 풍경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무엇하나 빛이 스며들지 않은 것이 없겠지
깊이 침잠하고 다시 떠올라 끝도 없이 나는 흘러가며
나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
나를 보고 인사해 줄 사람은 있을까 내가 보이기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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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이 고귀하다는 건 무슨 뜻일까 왜 생은 고귀한 것일까 무엇이 나를 살게 하는 것일까
숱한 죽음으로써만 인식되는 생은 과연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내 욕망. 어느 순간 갑자기 나를 여기 이 곳에 가만히 발딛고 살지 못하게 하는 건 무엇일까. 손가락에 박힌 가시가 무언가에 예민하게 스쳐 소스라치게 놀라 동작이 멈추고 시간마저 정지할 때 그 작은 가시가 내 살을 찢어버리고 나오고 싶은 그 욕망을 파르르 참고 있다는 걸 느낀다. 나는 어쩌지 못한다. 나는 꿈속에서 소리친다. 대체 나보고 어쩌라는 건가. 이것은 숙명인가. 나는 아직 살아보지 못했다.

   

배를 깔고 그네를 타면 느끼는 세상에 대한 어지러움을 소녀는 어쩌지 못했다
고통스럽기도 하고 묘하기도 한 그 느낌이 잊혀질 때쯤이면 소녀는 다시 중독처럼 배를 깔고선 그네를 탔다 그건 살아 있는 것과 죽어 있는 것의 경계에 있던 느낌이 아니었을까 추처럼 이쪽과 저쪽을 이동하며 자칫하면 생에 감각을 놓아버릴 듯한 그 아뜩함과 낯설음을 기어코 참아내며 소녀는 외부없는 자신을 즐겼다 그때 소녀는 느꼈다 가장 아름다운 건 나로 인한 세계이겠구나 이렇게 그네를 타다 죽어버릴 수도 있겠구나 내일은 꼭 짐을 싸야지. 소 녀 의 엄 마 가 소 녀 를 부 른 다. 밤이 낮을 지워버리기 직전 창문으로 밥을 먹으라며 놀이터를 향해 소녀의 이름을 부른다  소녀는 갑자기 그 소리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듯하고 사라질까 두려워 그 포근함을 향해 뛰쳐 가곤 했다
 

Posted by 브로콜리너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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